156화
영묘의 묘지기 (1)
테오가 트로이반과 성마교를 상대로 분전했던 지하 영묘의 현장.
등룡은 폐허가 된 그곳 한가운데에 작은 돌탑을 쌓고 있었다.
“못난 친구 같으니라고. 그리도 불만이 많았으면 나에게 귀띔이라도 해줄 것이지.”
이 돌탑 아래에는 오드가 누워있었다.
원래 라그나르의 규칙대로라면 배반자는 그 시체조차 온전히 남기지 못하고 훼손되어야 마땅했지만.
등룡은 테오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오드가 온전히 쉴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오드가 지은 죄는 크다고 하나, 대를 이어온 묘지기의 공은 아주 큰 것이니.
그 대가 완전히 끊어진 이상, 마지막 예우를 해줘야 한다는 것이 등룡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가슴 속에 불만 많은 삶을 살았으면서 마지막에는 왜 웃고 있었던 겐지. 자네는 참 그렇게 오랫동안 보고도 잘 모르겠어.”
한편으로 등룡은 오드와 오랜 친분이 있었다.
선대 묘지기, 오드의 조부와 막역한 친구 사이였으니.
친구의 손녀를 이 손으로 묻는 느낌이란.
그 눈을 감겨주던 손길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마지막 가는 길, 한은 푼 듯하니 다행이야. 잘 가시게.”
등룡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쥐었다.
걸음을 옮겼을 때 그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에 돌무덤 옆에는 작은 튤립 하나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 * *
마도여제의 빙의가 풀리고 난 뒤, 카산드라를 괴롭히던 신열도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하지만 카산드라는 여전히 며칠째 몸살을 앓으면서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빙의로 뇌문이 너무 오랫동안 강제로 열려서 그런 게다. 몸이 익숙해질 때까지 어쩔 수 없어.
빙의의 후유증이라는 뜻.
더구나 어린 몸으로 마도여제의 심상 영역까지 구축했으니 뇌문이 망가지지 않은 게 대단할 정도였다.
하지만 부단장은 곧 나을 거라고 단정했다.
그렇게 뛰어난 마법사가 과거의 자기 몸에다 아무런 안전 장치를 해놓지 않았을 리 없다고.
-오히려 이번 일을 계기로 이 아이의 이능은 물론, 마법적 재능도 아주 크게 개화될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천재 이상의 천재가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테오는 이 어린아이가 매일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고생하는 것이 보기 안타까웠다.
고통을 덜어주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곧 상점창에 생각이 미쳤다.
‘있다.’
+
[아주 많이 희석된 엘릭서]
만병통치약 엘릭서가 소량이나마 담겨 있다. 복용 시에 즉각적인 회복력을 보인다.
· 종류: 약품
· 효과: 체력 30% 즉각 회복
+
퀘스트를 깨면서 제법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만 몇 가지 처분해도 코인은 금세 쌓을 수 있었다.
덕분에 카산드라는 빠른 속도로 회복력을 보였다.
-호오. 그것도 선택자의 능력인가? 대장은 이런 걸 보인 적이 없었는데.
부단장은 테오의 곁에서 도통 떠나질 않았다.
사실 이 유령만이 아니었다.
-아, 그러게 그러니까 그때 내가 칼을 확 휘두르니까 망신의 팔이 촤아악 하면서!
-예끼, 이 사람아. 어디서 과장질인가. 나도 그때 있었는데.
-응? 자네는 그때 망신 놈의 가슴에다 바람 구멍을 뚫었었잖나? 그러니 기억 못하지.
-아 그랬었지? 흠흠! 그러고 보니 자네도 그랬던 것 같군.
-그럼. 사실 그때 시간만 좀 더 있었어도 아주 그놈을 묵사발을……!
여기저기서 들리는 신난 무용담들.
어디 시장 좌판대처럼 유령들이 저마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떠들어대고 있었다.
내용만 듣자면 하나하나가 전부 뛰어난 절대고수였다.
<이름 없는 군주>와의 전투가 그만큼 즐거웠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테오로서는 299명이나 되는 유령들이 요 며칠째 계속 따라다니다 보니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이젠 귀찮기도 하고.
‘아니, 그보다 지하 영묘에서 여기까지 거리도 한참인데 이렇게 떨어지는 게 가능한 건가?’
지박령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성불 안 하십니까?”
-뭐? 성불?
-이놈 보게! 이제 자기 볼장 다 봤으니까 어서 썩 거지라는군!
-누가 라그나르 아니랄까 봐, 아주 노인 공경이 대단하구만!
-아이고, 아이고, 평생을 다 바쳐 가문에다 충성을 바치면 뭐하누! 후손은 이렇게 뒷방 늙은이 취급인데!
-늙으면 죽어야지. 살아서 뭐하겠어…….
-그러게나 말일세. 나 때는 노인 공경이야말로 미덕이었거늘!
여러분들 모두 돌아가신 상태입니다만.
테오는 목 언저리까지 올라온 말을 겨우 삭였다.
“검보가 복구되면 별다른 미련도 없으니 떠나겠다고 하셨던 건 어르신들입니다만…….”
-아니, 아무래도 그렇지! 우리더러 썩 꺼지라니!
-단물만 쏙쏙 뺴먹겠다는 게 정말 라그나르야, 라그나르!
저놈의 라그나르 소리는 지겹지도 않나.
테오는 더 이상 말을 섞어봤자 자신만 머리 아파질 것 같다는 생각에 그냥 고개 돌려 외면했다.
-어어? 이것 보소! 이제는 우리와 대화도 섞기 싫다는구만!
물론, 이 철없는 노인들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짓이었지만.
‘진짜 왜 자꾸 남아계시는 걸까?’
이쯤 되니 테오는 유령들의 생각을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자신에게 어떤 용건이 있는 건 확실한 것 같은데.
그게 도저히 무엇인지 알 수가 없으니, 원.
「후후, 보아하니 이 철없는 늙은네들이 계속 우리 반려를 귀찮게 하나 보구나.」
그때, 테오의 옆으로 로드브로크가 인간 형체로 변모한 채 천천히 걸어왔다.
흐릿했던 그녀의 형상은 어느새 많이 또렷해져 있었다.
효율성이 좋지 않을 거라던 말과 다르게 <이름 없는 군주>의 눈은 꽤 괜찮은 영약이었던 것 같았다.
이제 조금씩 <격>이란 게 느껴지고 있었다.
-헙!
-……흠흠!
-크음!
유령들은 하나 같이 입술을 꾹 다물며 시선을 회피했다.
이들에게 천적이 있다면 딱 하나.
바로 로드브로크였다.
「늙으면 어린애 같아진다더니 딱 이들을 가리켜 하는 말이로고.」
로드브로크는 가볍게 실소를 흘리면서 그렇지 않냐며 테오에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심장이 많이 메워지신 것 같습니다.”
「뭐, 망신의 눈깔치고 그럭저럭 쓸만했다. 그런 비슷한 것들 서너 개만 더 있어도 어느 정도 자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더구나.」
로드브로크는 어느덧 크기가 확 줄어든 심장 구멍을 매만지다가 씩 웃어 보였다.
어서 이만한 영약들을 더 가져오라는 의미.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괜찮은 장소로 모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 꽤 괜찮은 곳을 발견했나 보지?」
테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도여제가 가르쳐준 역대 황제의 비밀 창고.
그곳에는 분명히 로드브로크에게 도움 될 영약도 많을 터였다.
「3년까지 기다릴 것도 없겠군. 아주 좋아. 덕분에 이렇게 대화를 나눌 시간도 많고 말이지.」
로드브로크는 테오의 옆에 바짝 다가와 그가 나무막대기로 땅바닥에다 끄적이던 것들을 살폈다.
「마도 수식이구나. 사방열을 기준으로 분석한 에테르 구조를 절대적인 것에서 상대적인 것으로 치환하여 중력으로 발생한 시공의 특수성을 입증하였구나. 재미난 이론이다.」
테오의 눈이 순간 빛났다.
“이게 무엇인지 알아보시겠습니까?”
「대충은. 원래 우리 용족의 마법과 인간의 마법에는 계 이론에 많은 차이점이 있어서 완전한 이해가 어렵지만…… 뭐, 나는 보통 용들과는 많이 다르니 말이다.」
고대룡의 마법 체계는 아주 단순하다.
의지가 곧 현상으로 빚어지는 개념의 영역이었다.
반면에 인간의 마법 체계는 고대룡의 마법 체계를 모방하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보다 연구와 이론에 근거를 둘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로드브로크는 라그나르의 수호룡으로서 오랫동안 인간 세계와 접촉했던 터라, 인간의 마법 체계에 높은 이해도를 갖고 있었다.
「이걸 따라가다 추론해보면…… 그렇군. 시공의 특수상대성에 대한 이론인가?」
“예. 맞습니다.”
테오는 크로노그래프를 만지면서 마도여제가 남긴 마법 체계를 어렴풋하게나마 ‘습득’할 수 있었다.
비록 지식 대부분이 다 날아갔지만, 그 요체만큼은 남길 수 있어 이렇게 복습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게 전부 단순한 지식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지식이란 이해를 거쳐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는 법인데, 테오는 아무리 이걸 봐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동안 공부한 기초 지식들도 여기에 빗대면 아주 사소한 부품에 불과했다.
‘이걸 완전히 이해해야만 <회귀의 비밀> 퀘스트도 끊나겠지.’
그런데,
멀리 갈 것 없이 바로 옆에 아주 뛰어난 스승이 있었다.
「도와주랴?」
로드브로크는 테오의 시선을 읽고 씩 웃었다.
테오는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배우고 싶습니다.”
「시공(時空)이란 자고로 시간과 공간의 합치이다. 그중에서도 시간이란 오로지 인간만이 감지하고 인지하여 내리는 정의(定義). 그것을 이해하기란 절대 쉽지 않을 텐데?」
“괜찮습니다. 저 역시 따지고 보면 회귀로 시간을 거슬러온 입장이 아닙니까? 그러니 시간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싶습니다.”
마도여제는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어린 자신에게 빙의했다.
그리고 종말뿐인 미래를 제 손으로 바꾸었다.
시간을 다룬다는 것은 그만큼 모순적이기도 하지만, 더 큰 영역으로 나아가는 데에 중요하다.
테오는 이것이 <원>의 형태를 띤 시간의 굴레를 이해하고 보다 더 높이 성장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발판이라고 여겼다.
「참 보면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지.」
“무슨 말씀이신지……?”
「원래 라그나르의 종자들은 시구르드 때부터 머릿속까지 전부 근육으로 꽉 차 있던 무투파였다. 머리 쓰는 걸 아주 극혐했었지. 그런데 어쩌다 너 같은 녀석이 나왔을꼬?」
여기서 무슨 말을 하든지 선조들을 욕하는 것밖에 되지 않아 볼을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반려가 그만큼 성장 욕구가 넘친다는데 내가 방해할 이유는 없지. 단, 조건이 있다.」
“예. 말씀만 해주십시오.”
테오는 바짝 긴장했다.
로드브로크의 분위기는 다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이 세계에 유일하게 남은 고대룡이자 용왕인 존재가 바라는 소망이니만큼 얼마나 이루기 어려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런데,
「민트초코 아이스크림, 하나.」
“……?”
「시구르드가 숨을 쉬고 있던 시절, 함께 인간 세계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은 적이 있느니라. 어느 도시였던가, 거기서 시구르드가 추천해서 아이스크림이라는 것을 먹어본 적이 있는데…… 내 일찍이 그만큼 황홀과 감동을 주었던 음식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느니라.」
“…….”
「단순히 달달한 것 같으면서도 혀끝을 톡톡 쏘는 독특한 식감에 코를 희롱하는 듯한 향까지. 아주 대단하였었지.」
이쯤 되니 테오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내가 그 자리에서 열댓 개를 한꺼번에 먹어 치우니 시구르드도 적잖게 놀랐더라지. 감동한 듯보였다. 그 뒤로도 몇 번이고 그 맛을 잊을 수 없어 계속 복기하였었으니, 내겐 추억이 담긴 음식이니라.」
그 시절을 회상하는지 로드브로크의 눈가가 다른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시조님이 놀라신 건 감동 때문이 아니라…….’
로드브로크를 놀리려다가 실패해서 오히려 당황한 것 같은데요?
테오는 억지로 그 말을 삭였다.
-크흐으음! 민트초코라니.
-엥? 설마 그 사탄의 음…… 읍읍!
-맛이 아주, 아주아주 많이 독특하긴 하지……. 한번 먹어보면 절대 잊을 수 없고. 험험!
유령들도 테오처럼 시선을 회피하는 동안.
회상에서 돌아온 로드브로크가 잔잔한 눈빛으로 다시 테오를 바라봤다.
「왜? 어렵겠느냐? 아니면 이 시간대에는 더 이상 민트초코를 파는 곳이 없는 건가?」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럼?」
“……아닙니다, 아무것도. 다행히 이 근처에 대도시가 하나 있는데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호오! 좋다. 그럼 이것으로 계약 체결이니라.」
테오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로드브로크가 건넨 손을 맞잡았다.
삿된 길(?)로 홀딱 빠진 반려를 어떡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왱왱 울리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테오 군, 잠깐 시간 되는가?”
로드브로크의 영체가 홀연히 사라지고, 그 뒤로 등룡이 뒷짐을 쥔 채 천천히 이곳으로 다가왔다.
“예. 괜찮습니다.”
“잠깐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네만. 같이 산보라도 걷지 않겠나?”
* * *
산책길이 나 있는 화원은 온통 튤립 향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테오는 등룡이 갑자기 건넨 제안에 그 향을 즐길 새가 없었다.
“예? 제가 말씀이십니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얼굴.
그리고 그건 몰래 쫄래쫄래 따라왔던 유령들도 마찬가지였다.
-엥?
-이렇게 갑자기?
하지만 등룡은 다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러네. 자네가 바로 여기 튤립 화예조합의 차기 조합장을…… 즉, 영묘의 묘지기를 맡아주지 않겠나?”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