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마도여제 (5)
칸트는 테오를 본 순간 손이 떨렸다.
두려워서?
아니었다.
-즐거워서.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결코 내 아래가 아니구나!’
테오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개화식을 역대 최고 점수로 졸업한 기재.
최단기간 실전검사 발탁.
그리고 부유군도 자치령의 석권까지.
하나하나가 전부 그로서도 달성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업적들.
그래서 테오와 부딪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라그나르가 자랑하는 기재의 수준을 알 수 있으니 앞으로 방랑기사 연합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 건지 예측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앞으로 북방에서 라그나르와 트로이반의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들 같은 작은 조직은 어떻게든 살아남을 방법을 모색해야 했으니까.
그런데 실제로 이렇게 테오를 이렇게 만나고 나니 그런 생각은 모두 싹 사라지고 말았다.
가슴 속엔 그저 짙은 호승심만 남았을 뿐.
검사로서의 감각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미 칸트는 카산드라를 회수해야겠다는 생각을 잊어버린 상태였다.
채애애앵!
그리고 그런 감각은 처음 검격을 나눈 순간, 더욱더 확실해졌다.
“제법이오! 빠른 성장을 이룬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기본기가 아주 탄탄하시군. 혹시 이블린 네레빌에게서 사사하였소?”
“이블린 선배를 아나?”
“알다마다.”
칸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젊은 시절 방황하던 이블린의 검을 바로 잡아준 것이 본인일진대.”
“……!”
“하하. 소소하게 보면 본인과 그대는 사손 관계라고도 할 수 있겠소.”
테오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반면에 칸트는 아주 즐거워 보였다.
“군주도, 정처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이 방랑자의 검이 라그나르의 계승권자에 닿다니! 영광이오!”
채채채챙!
테오와 칸트의 검이 순식간에 여러 합을 부딪쳤다.
두 사람의 검술은 분명히 다른 듯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검을 드는 자세하며 발을 움직이는 방향, 보폭의 거리까지.
테오는 확실히 칸트에게서 이블린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왕 살해자가 이블린의 검술 스승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방랑기사 연합은 전생에서도 트로이반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곳이었다.
라그나르에 큰 피해를 입혔고, 진압되는 와중에도 꽤 많은 검사가 목숨을 내놔야만 했다.
특히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로 악귀같이 검을 휘두르던 칸트의 모습은 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기억할 정도였으니.
‘하지만.’
테오는 드레이크의 날붙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내가 이긴다.’
그것은 오만이 아니었다.
확신이었다.
쩌어어엉!
이너 오러가 강화되면서 검면을 따라 돋아난 용의 비늘이 일제히 노란빛을 뗬다.
파지지지직-
동시에 튀어 오르는 뇌기.
검격이 칸트를 뒤로 한껏 튕겨냈다.
칸트의 두 눈이 한껏 커지고,
“카산드라!”
테오의 외침에 중앙 영묘에서 유령들과 같이 숨어 있던 카산드라의 웃음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불러주시길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동굴을 타고 흐르던 마나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바인딩>
촤르르륵!
마법의 사슬이 지면을 뚫고 튀어나와 칸트의 손발을 묶었다.
칸트는 재빨리 오러를 터뜨려 사슬을 튕겨냈지만,
카산드라를 수색하려던 방랑기사 연합의 기사와 아직도 환각에 시달리는 일검회의 검사들, 은신 중이던 흑영검단의 암살자들은 미처 그러지 못했다.
“이, 이런!”
“마법이 갑자기 여기서 왜!”
“젠장! 마력이 빨리고 있어!”
<에너지 드레인>
마법의 사슬이 끔찍했던 건 그들의 마력을 빠른 속도로 갈취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최소한 6위계 이상의 고위 마법사가 아니면 절대 불가능한 마법들.
“설마 일행 중에 마법사가 있었소? 대체 언제……?”
그런 언질을 미처 듣지 못했던 칸트로서는 안색이 딱딱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
카산드라가 설마 먼 미래에서 마도여제라는 희대 마법사의 의식을 가져왔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반응.
테오도 굳이 대답할 이유가 없었기에 마력을 한껏 쥐어짜면서 그 전에 배운 검술을 복기했다.
‘흑염옥태양.’
원래는 트로이반 가주의 비전이 되었던 옛 라그나르의 비전.
쿵쿵쿵쿵쿵!
용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면서 단전과 공명을 일으켰다.
[올 버프가 시작됩니다.]
[제한 시간: 6분.]
착용하고 있던 모든 태고룡의 유물이 일제히 반응하면서 드레이크의 날붙이에 잔뜩 힘을 실어주었다.
테오의 마력이 단숨에 불어났다.
검신을 뒤덮던 뇌기가 거칠게 일어나 허공에서 구체 형태로 뒤엉켰다.
그렇게 탄생한 뇌구(雷球)는 순식간에 몸집을 부풀리면서 동굴 천장을 뒤덮었다.
-저, 저것은……!
-태양……! 태양이 떴다!
-대장이 사용하던 흑염을 뇌기로 대신한 건가?
-아아!
-대장의 비전이 이어졌으니 이젠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겠군…….
유령들은 어느새 동굴을 환하게 밝히는 뇌구를 보면서 감탄을 터뜨리거나, 감동에 찬 눈물을 흘렸다.
이제는 잘 떠오르지도 않는 과거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저 태양이 뜰 때면 그들은 항상 마음을 놓곤 했다.
저것이야말로 가문의 승리를 가져다주는 깃발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이러다가 진짜 큰일 나겠는데.’
한편, 테오는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빠른 속도로 고갈되는 마력을 느끼면서 이를 악물었다.
뇌구가 회전을 시작하면서 마나를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빨아들이고, 그럴수록 회전 속도도 가팔라지면서 또 더 많은 마나를 빨아들였다.
그가 지닌 속성이 불꽃이 아닌 우레라서 대신해본 거였는데, 아무래도 전자기력 때문에 효과가 더 대단한 것 같았다.
‘까닥했다간 폭발해버리겠어. 그러니 그 전에-’
테오는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놓치지 않고서 드레이크의 날붙이를 힘겹게 위로 내그었다.
‘-벤다.’
“이런!”
칸트가 테오의 의도를 짐작하고 다시 지면을 박찼다.
그는 저 뇌구가 품고 있는 위력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미 뇌구가 풍기는 열기 때문에 동굴 안 공기가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겁게 달아올랐고,
스파크가 아무렇게나 튈 때마다 기파가 회오리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전에 니벨룬의 발톱과 함께 치솟은 섬광이 사선 방향으로 뇌구를 갈라버렸으니.
스걱-
반으로 동강난 뇌구가 좌우로 미끄러졌다.
<1초식 - 일식>
동시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동굴이 어둡게 암전되고,
갈라진 뇌구가 폭발하면서 사방으로 파편을 흩날렸다.
파편은 하나하나가 전부 낙뢰가 되어 지면에 거세게 내리꽂혔다.
“안……!”
“으, 으아……!”
콰르르릉!
바인딩으로 잠시 묶여 있던 검사들이 지른 비명은 우레에 완전히 묻혀 사라졌다.
그들의 몸뚱어리도 마찬가지.
낙뢰가 그들을 가른 순간 몸뚱이는 새카맣게 타버려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일식이 끝난 자리.
후덥지근하게 달아오른 동굴은 검은 재만이 풀풀 날릴 뿐이었다.
“이…… 게…… 무슨……?”
유일하게 살아남은 칸트만이 충격에 젖은 얼굴로 서 있을 뿐.
하지만 그 역시 상태가 그리 좋지는 못했다.
오른팔은 온데간데없이 뜯겨 사라졌고, 검은 새카맣게 탄 채로 바닥에 꽂혀 있었다.
조금 전의 일격으로 그가 평생 함께하자고 맹세했던 수하들이 모두 증발했다.
목숨이나 다름없는 팔까지도.
“이, 검은, 대체, 무엇이…… 오?”
그러다 칸트는 침착한 마음을 다잡고 억지로 입을 뗐다.
여기서 그는 죽음을 예견했다.
하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 자신을 죽인 검이 무엇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여의주태양.”
“여의…… 주? 여의주라.”
칸트는 그 이름을 곱씹었다.
“동방에 산다는 용이 입에 물고 있다는 구슬을 가리켜 그리 부른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소. 그 안에 벼락과 우레, 돌풍과 폭우를 부리는 힘이 있어 동방의 사람들은 용을 신으로 모신다지?”
칸트는 엷게 웃었다.
“확실히…… 그…… 보다…… 잘 어울릴 이름은 없을…… 것 같……!”
파스스-
그 말을 끝으로 칸트는 고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일식을 정면에서 맞섰기 때문에 지금까지 버틴 것만 해도 오히려 대단한 거였다.
-여의주태양이라.
-비전이 이제 더 이상 실전될 일은 없겠어.
-하지만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아. 에너지 소실률이 너무 높지 않아?
-맞아. 그 부분은 좀 다듬을 필요가 있겠는데.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까?
감동은 잠시.
유령들은 금세 테오의 <여의주태양>을 보완할 만한 방법들을 빠르게 모색했다.
그들의 머릿속에 공통으로 떠오른 생각은 딱 한 가지였다.
-저 비전을 테오에게 맞게끔 완성시켜 라그나르의 최대 역작으로 남긴다!
길이 보인 것만으로도 그들은 이미 산 사람에 못지않은 의욕을 내비치고 있었다.
테오는 그런 유령들을 보면서 슬쩍 웃다가,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이곳으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 * *
“덥군.”
청악대장은 수하들을 이끈 채로 영묘 입구에 들어섰다.
열기뿐만 아니라 탄내도 코끝을 찔렀다.
엄청난 천둥소리와 함께 동굴이 무너질 것처럼 굴어서 들어와 본 거였는데…….
“아무래도 만만치 않은 격전이 있었던 모양이야? 끽해야 실전검사 서넛 정도가 다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니면 그새 선택자 놈이 검보를 얻었나?”
쯧!
청악대장은 귀찮게 되었다는 투로 혀를 찼다.
검보를 얻고자 선지의 이능을 지닌 황족을 어렵게 물색하고, ‘알파’라 불리는 세작까지 영묘에서 꾀어낸 거였는데.
이래서야 어렵게 다 만든 밥상을 통째로 엄한 놈에게 가져다 바친 꼴이 아닌가.
아크트가 알게 되면 노발대발할 게 훤히 보였다.
“봉공께서 오시기 전에 물건부터 회수해야겠다.”
“존명!”
“존명!”
“그리고…… 칼리 주교께서도 나서주셔야겠습니다.”
“후후. 그 말씀만 하시길 기다리었소. 그렇지 않아도 성역이 더 파괴되는 걸 보기 힘들었던 상태라.”
칼리가 슬쩍 웃으면서 나타나 웃었다.
“그럼 이따 뵙겠소.”
스르륵!
청악대장은 허깨비처럼 사라지는 주교를 보면서 혀를 찼다.
그로서는 검보를 놈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이 탐탁지 않았다.
‘이제 남은 건 포위망을 다 물리쳤다고 생각해 잠시 안심하고 있을 놈들의 뒤통수를 치는 것뿐인가?’
청악대장은 이제 놈들의 심장 한복판에 심어둔 비수가 날카롭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 *
“테오! 몸 괜찮아?”
레이는 다급하게 테오에게 다가갔다.
테오에게는 여전히 증기가 풀풀 날리는 중이었다.
피부가 빨갛게 달아오른 상태.
저대로 두면 몸에 무리가 갈 게 분명했기 때문에 자신의 서리 속성으로 열기를 가라앉혀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레이, 잠깐 기다려.”
“응……?”
레이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을 끔뻑였다.
그녀는 테오가 왜 오드를 노려보고 있는지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들을 트로이반의 포위망에서 구해준 고마운 분이 아닌가.
비록 전투가 벌어졌을 때는 별다른 활약상을 보이지 못하고, 칸트와 바로사가 나타났을 때는 어디로 숨었었는지 코빼기도 안 비치기도 했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영묘를 관리해오고, 등룡과 친분도 있을 정도로 라그나르에 오랫동안 충신이었던……!
“언제부터셨습니까? 라그나르에서 마음이 뜨신 것이.”
레이는 물론, 아린의 상태를 확인 중이던 셀퍼드의 시선도 황급히 오드 쪽으로 돌아갔다.
오드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
“이제 그만 시치미 떼십시오. 이 영묘는 누군가가 정보를 흘리지 않으면 절대 저들이 알 수 없는 장소였습니다. 오드 님이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었고, 또한.”
테오는 잠시 말을 멈추고 유령들을 돌아봤다.
유령들은 어느새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의 짐작이 옳다는 듯.
그 덕분에 테오는 더욱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오드 님이 잠깐 보여주셨던 검술…… 이곳에 계시지 않은 결사대장의 검보와 많이 비슷하던데. 아닙니까?”
“…….”
순간, 오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