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16세 (5)
‘죽음이 덮은 세상? 시계의 수레바퀴? 망자?’
테오의 머릿속이 바빠졌다.
하나 같이 알아듣기 힘든 말들이었지만, 그중 한 가지만큼은 유독 귀에 들어왔다.
시계의 수레바퀴.
‘퀘스트 보상으로 나왔던 <시간의 비밀>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퀘스트는 항상 이런 식으로 앞으로 벌어질 일들과 단서를 연결할 때가 많았으므로.
‘아직 퀘스트가 끝나지 않은 것도 있고.’
더구나 ‘수레바퀴’라고 하니 당장 떠오르는 것도 있었다.
-전생에서 보았던 타로 카드.
그중 첫 번째였던 ‘죽음의 수레바퀴’가 갑자기 왜 떠오르는 걸까?
카산드라의 신병을 확보하고도 퀘스트가 끝나지 않았다는 건, 분명히 테오가 놓치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
혹시 몸에 이상이라도 있나 싶었지만, 다행히 적백용병단이 카산드라에게 별다른 위해를 끼친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이가 상상력이 대단한 것 같기는 한데. 아니면 정말 뭔가가 있거나……. 뭐, 위에서 알아서 하겠지.」
어차피 일행이 전달받은 명령은 카산드라의 호송.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기만 하면 나머지는 전부 상부에서 알아서 처리할 일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꼬마랑 계속 같이 있으면서 뭐 알아낸 거 있으면 따로 공유해줘.」
「예. 알겠습니다.」
셀퍼드는 카산드라를 테오에게 전적으로 일임하고, 아린과 레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이놈들, 원래 두 시간 전에 접선이 있을 예정이었다고 하거든?”
“그런데도 아직 코빼기도 안 비쳤다는 건 뭔가 중간에 착오가 생겼거나, 낌새를 눈치챘다는 거겠네.”
아린의 대답에 셀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러니 차라리 지원군 데리고 오기 전에 빨리 사라지는 게 낫겠네.”
“좋아. 어차피 여기 계속 있기도 찝찝했어.”
이곳은 엄연히 트로이반의 영역.
일행은 놈들에게 발목이 붙잡히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화아악!
곧 세 마리의 비룡이 힘차게 하늘 위로 날갯짓했다.
레이는 아린과, 카산드라는 테오와 같이 비룡에 올라탄 채였다.
비교적 몸이 가벼운 셀퍼드가 주변 경계에 집중하기로 역할을 분담했다.
목적지는 <튤립 화예조합>.
트로이반에서 라그나르 영역으로 넘어가는 장소에 있는 단체로, 현재는 라그나르의 부대 중 하나가 주둔 중이었다.
“역시. 우리가 안심하는 틈을 노려서 뒷치기를 하실 생각이었구만.”
셀퍼드는 지상이 점이 되어 멀어질 때쯤에 뒤늦게 나타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트로이반의 검사들을 보면서 콧방귀를 꼈다.
속이 다 후련했다.
한편.
‘열감이 아직 몸에서 떨어지질 않았어.’
테오는 수시로 카산드라의 몸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이제야 겨우 열 살이 되었을까 말까 할 만큼 체구가 작은 맹인 소녀.
머지않은 미래에 황제가 될 사람이라지만, 어쩐지 계속 마음이 쓰였다.
케에엑!
움브라가 무슨 걱정이 있냐는 투로 물었다.
“아냐. 아무것도.”
테오는 쓰게 웃으면서 움브라의 목덜미를 쓰다듬어주었다.
우선 목적지에 가서 마저 고민해보자.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려는데, 갑자기 카산드라가 몸을 뒤척였다.
“엄마…….”
꿈이라도 꾸는 걸까?
“나…… 구름 위…… 날아…….”
테오는 자기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정말 바로 옆으로 구름이 스치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마도여제의 예언은 보통 꿈을 매개로 한다는 말이 있지 않았나? 그럼?’
예지몽을?
그렇게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으음……!”
“정신이 드니?”
테오는 카산드라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긴……?”
카산드라는 다시 바짝 겁에 질린 얼굴이 되었다.
조금 전 테오에게 구출 받았을 때와 다르게, 지금은 또 다시 낯선 사람들에게 이끌려 어디론가 가고 있단 현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테오는 어떻게든 그녀의 걱정을 덜어주고 싶었다.
“하늘 위야.”
“하늘…… 이요?”
카산드라의 얼굴 묘하게 변했다.
마차나 열차도 아니고 하늘?
그러고 보니 머리를 흔드는 바람이며, 공기 냄새가 어딘지 모르게 평상시에 맡던 것과 많이 달랐다.
‘꿈.’
언젠가 이상한 괴물의 등에 타서 하늘을 날고 있던 꿈을 꿨던 게 떠올랐다.
“응. 옆에 구름도 지나가고 있어. 한번 만져 볼래?”
테오는 카산드라가 잠꼬대했던 ‘구름’을 떠올리고 그쪽으로 슬쩍 분위기를 유도했다.
다행히 카산드라는 아홉 살 아이답게 그쪽으로 신경이 쏠린 것 같았다.
구름을 만질 수 있다고?
어떻게?
그녀도 구름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푸른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솜사탕 같은 거잖아?
어른들이 아무리 높이 뛰어도 절대 닿을 수 없을 만큼 높은 곳에 있는 건데?
옆집 할버트 아저씨가 말했다면 자기를 놀리냐고 따졌을 텐데.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 어쩐지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용기 내어 옆으로 손을 뻗었다.
무언가 손에 걸렸다.
촉촉하고 간지러운 어떤 것.
“어때? 조금 전에 만졌어.”
“제가…… 요?”
‘꿈’에서 봤을 때는 부드러울 줄 알았는데.
막상 만져 보니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테오가 거짓말을 하거나 장난을 쳤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럴 사람도 아닌 것 같았으니까.
“한 번 더 만져 볼래?”
카산드라는 고개를 끄덕였고, 테오가 하라는 방향대로 손을 뻗었다.
역시나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다만, 손끝에서 뭔가가 확 하고 부서지는 듯한 느낌은 있었다.
카산드라는 한참 동안 그 느낌을 곱씹었다.
-‘꿈’에 너무 시달릴 필요는 없단다.
‘꿈’을 꾸고 나면 항상 열병에 시달리던 자신을 품에 안고서 자신을 보듬었던 어머니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네가 본 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이 세상은 네가 본 것보다 훨씬 넓고 생생하니까. 언젠가 너를 그런 세상으로 데리고 갈 친구가 생길 거란다.
꿈으로 엿보던 것과 전혀 다른 세계가 이곳에 있었다.
‘엄마…….’
하지만 이제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어머니의 품이 그리워서,
카산드라는 눈물을 뚝뚝 흘릴 수밖에 없었다.
테오는 그런 카산드라를 달래려다 말고, 갑자기 그녀를 중심으로 파란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파아아-
‘이건?’
퀘스트를 안내할 때면 자동적으로 나타나던 그 빛.
순간, 반전되는 시야 때문에 몸이 비틀거렸다.
[‘스킬: 해츨링 싱크로’가 강제 발동되어 예언자 카산드라가 본 미래 예지를 일부 엿봅니다.]
화아악!
‘이건?’
드넓은 평원.
화원이 있었는지 바닥에는 진흙과 먼지로 더럽혀진 꽃잎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그 위로 검은 아지랑이가 풀풀 날리고 있었다.
츠츠츠-
동시에 아지랑이를 쫓아 땅에 파묻혀 있던 죽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실에 대롱대롱 매달린 망석중이 인형처럼.
그 불길하기 짝이 없는 광경의 중심에는 한 검은 인영이 서 있었으니.
그림자가 져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아보기 힘들 인영이 앞을 보다 말고 천천히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테오와 눈이 마주쳤다 싶던 그때.
번쩍!
인영의 두 눈이 밝은 빛을 터뜨리고, 사념도 동시에 깨졌다.
‘대체 누구지?’
푸른빛을 띠었다는 것은 테오와 관련이 되어 있다는 뜻일 텐데 당장은 짚이는 바가 없었다.
죽은 망자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네크로맨서나 부두술사 계통의 사람일 것 같은데, 전생의 기억을 뒤져봐도 그와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퀘스트가 아직 끝나지 않는 것과도 관계가 있을 텐데.’
이 힌트를 대체 어떻게 풀어야 할까.
문제는.
‘어딘가 낯이 익었어.’
눈이 마주쳤던 존재가 분명히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기질이 아주 익숙하다는 점이었다.
결국 풀리지 않는 고민을 거듭하고 있던 그때였다.
“내 꿈을…… 봤어…… 요?”
카산드라가 멍한 얼굴로 말했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테오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
“이걸 같이 본 사람은 처음이에요! 와아! 신기해!”
카산드라는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그동안 혼자서 속으로 끙끙 앓고 있던 비밀을 공유할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이 기뻤던 거겠지.
이걸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테오는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 * *
테오 일행이 떠난 자리.
반파되다시피 한 오두막집에 나무탈을 쓴 사내가 오른팔을 뒷짐 쥔 채로 들어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텅 빈 왼팔이 깃발처럼 펄럭였다.
그의 이름은 ‘아크트’.
고대어로 숫자 ‘8’을 의미하는 자.
트로이반이 자랑한다는 아홉 봉공 중 한 명이었다.
「멍청하게 목표물을 눈앞에서 놓쳤다고?」
“그, 그것이……! 놈들이 갑자기 기습을 해온 까닭에……! 저, 저희로서는 중과부적이었……!”
적백용병단의 단장, 오탄은 사색이 된 채로 어떻게든 변명거리를 주워 담았다.
저벅-
“저, 저희는 하, 한낱 요, 용병단일 뿌, 뿐입니다아! 라, 라그나르의 저, 저, 정예를 당해낼 힘은 애당초 어, 없지 아, 않습니까……!”
저벅-
“그러니 부디 선처를……!”
저벅-
뭐라고 변명하더라도 아크트의 발걸음은 도무지 멈추지 않았다.
그럴수록 오탄의 사색은 더 짙어졌다. 목소리도 잘게 떨렸다.
이대로는 정말 죽는다.
그런 생각에 마지막으로 악다구니를 질렀다.
“게, 게다가! 저, 저, 정해진 시간까지 오시기로 해, 했던 ‘청악대’가 오지 않은 것도……!”
척!
아크트가 어느새 오탄의 앞에 서 있었다.
가면 너머로 비치는 안광이 너무 날카로워서 오탄의 머릿속은 이제 백지장처럼 변해버린 뒤였다.
「그래서 우리 탓이다?」
“그, 그런 거, 것은 아니나, 어, 어느 정도 차, 참작을 해주시면!”
「등룡, 그 작자가 귀찮게 계속 따라붙는 것을 떨쳐내느라 조금 늦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딴 소리인가?」
등룡.
라그나르에서도 손꼽히는 원로로 통한다는 그가 북방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랐던지.
그의 왼팔이 텅 비어버린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청악대도 절반 이상이 죽은 상태.
“그, 그건!”
「늦어봤자 고작 두세 시간이었을 뿐이다. 이곳이 라그나르의 영역도 아니고, 동부 지역에 해당하는 본가의 앞마당인데도 그딴 변명을 늘여놔?」
“사, 살려……!”
「더구나 내가 가장 화가 나는 부부분은.」
아크트가 뒷짐을 풀며 손날을 세웠다.
“제발!”
「하필 그 아이를 빼앗겨도 다른 곳도 아닌 라그나르에게 멍청하게 빼앗겼다는 거다. 마음 놓고 도박 따위를 하다가.」
스걱!
푸우우-
오탄의 머리통이 창백해진 표정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퍼걱!
아크트는 그마저도 발로 짓밟아 터뜨렸다.
「오늘부로 적백용병단이라는 이름이 내 귀에 들릴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존명.”
대기하고 있던 수하가 홀연히 사라졌다.
이로써 주인을 갈아타면서까지 영광을 꿈꾸던 적백용병단의 마지막 운명이 결정된 셈이었다.
「우리는 어떻게든 승리로 가는 <시간선>을 봐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아이가 필요하고.」
아크트는 다시 뒷짐을 쥐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니 반드시 데려오도록.」
청악대.
‘푸른 악마’라는 이름처럼 전장의 사신으로 군림하고 있던 이들이 고개를 숙이며 일제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아크탄은 수하들이 사라진 방향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푸른 하늘을 따라 흐르는 천기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일이 꼬여도 하필.」
까득!
어금니 갈리는 소리만이 그의 흉흉한 마음을 대변해줄 뿐이었다.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