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16세 (4)
오랜만에 만난 퀘스트.
하지만 테오는 반가움보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확실히 회귀한 나와 예언자는 어울릴 수 없어.’
예언자는 보통 고정된 미래를 내다보는 데 반해, 회귀자는 알고 있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 노력하기 마련이니.
절대 양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트로이반과 대립하고 있는 지금.
만약 녀석들이 예언자를 확보한다면 어떻게 시간선이 흔들릴지는 테오도 예상하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시간의 비밀>이라는 것도 대체 뭔지 짐작이 안 가고.’
테오는 어쩐지 여러 선택자 중에서도 자신에게만 보이는 이 퀘스트와 메시지에 대한 비밀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퀘스트를 완수해야만 했다.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 * *
“아이 씨! 야! 거기서 그딴 걸 뽑으면 어떡해!”
“다이.”
“다이.”
“젠장!”
“와하하! 그럼 이번에도 아주 야무지게 자아알 먹겠습니다아아!”
프리아모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야트막한 산자락.
사냥꾼들이 휴식을 위해 머무는 오두막집에 열댓 명의 용병들이 술잔을 나누며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뭉게뭉게 퍼지는 담배 연기 아래에는 카드와 판돈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쿵! 쿵! 쿵!
이긴 사람은 즐거워서 행복하게 웃고, 진 사람들은 애꿎은 벽을 걷어차면서 신경질을 부렸다.
떠드는 소리가 커질 때마다 한쪽 구석에 있던 처박혀 있던 소녀는 오들오들 떨기만 했다.
무서워, 엄마.
제발 나 좀 구해줘…….
“네드, 한 판 더? 콜?”
“씨부럴! 나 지금 빈털터리 된 거 안 보이냐! 복귀하면 월급도 가불 받아야 할 판에!”
“그래서 안 하게?”
“돈이 없다고 돈이!”
네드라고 불린 용병은 욕지기를 내뱉으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여전히 구석에서 떨고 있는 소녀를 발견하고 위쪽 벽을 세게 후려쳤다.
쾅!
소녀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초점이 맞지 않은 두 눈이 네드를 향했다.
소녀는 맹인이었다.
“대체 이 꼬마는 언제 데려간다는 거야! 분명히 이 시간에 온다고 하지 않았어?”
“야, 야, 괜히 엄한 데다가 화풀이하지 마라. 눈도 안 보이는 불쌍한 아이한테. 그렇지, 애기야? 우쭈쭈.”
소녀는 다시 허벅지에다 고개를 파묻었다.
저들은 악마였다.
마을을 불태운 악마.
마을 사람들과 사이가 좋은 건 아니었다.
그들은 항상 어머니를 더러운 년이니 뭐니 하면서 늘 차별을 일삼았으니까.
그래도 그렇게 죽을 사람들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럴 때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자신의 장애가 너무나 억울했다.
차라리 이따금 찾아와서 자신을 괴롭히던 ‘잔상’이라도 찾아온다면 좋으련만.
또 그것은 너무 조용하기만 했다.
“씨부럴! 빨리 데려가야 다시 판돈이라도 올릴 거 아냐. 어우!”
“하여간 중요한 상품이야. 손댈 생각은 말아.”
“내가 등신이냐! 그딴 분간도 못 할까 봐?”
“그럼 됐고.”
네드는 팔짱을 끼면서 콧방귀를 꼈다.
초조하게 시계를 보는 것이 어지간히 돈이 급한 모양이었다.
“얼씨구. 내가 좀 빌려줘?”
“또 이자 처받으려고 그러지?”
“이번에는 아주 저렴하게 무려! 하루 450% 금리! 로 모시겠습니다.”
“날강도 같은 새끼.”
“싫으면 말고.”
“흥! 누가 안 한다던?”
“으흐흐. 내가 이래서 너 좋아한다니까?”
네드는 결국 동료가 건네준 판돈을 끌어안으면서 다시 바닥에 놓인 카드를 집었다.
“그런데 말이야.”
“뭐?”
“그 말이 진짜야? 저 꼬마가 미래를 보느……!”
탁!
바닥에 새롭게 깔린 카드 소리가 네드의 말허리를 끊었다.
“의뢰인의 주문에 대해서는 깊게 캐보지 않는다. 우리 용병단 규칙, 벌써 잊은 건 아니지?”
“야, 야, 무섭게 왜 그렇게 노려보면서 말해?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거잖아.”
“그러다가 한순간에 골로 가는 친구들 한두 명 본 게 아니란다, 이 친구야.”
딜러 역을 맡은 용병이 다시 카드 한 장을 더 넣어주면서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미래를 본다고 해서, 네가 호구라는 사실까지 변할 줄 아냐?”
“이 새끼가. 이번엔 진짜 내가 제대로 보여준다. 빤스까지 아주 홀딱 벗겨주마.”
“해봐라. 재주껏. 푸흐흐!”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커지면서 다시 카드가 한창 돌아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몸을 웅크리고 있던 소녀가 벌떡 고개를 위로 들었다.
갑작스러운 이상 행동.
용병들의 시선이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세상이 노래져.”
소녀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멍해 보였다.
“너희들 전부. 거기에 파묻힐 거야. 흔적도 못 남기고.”
“저 꼬마가 대체 뭐라는 거야?”
“괴물이 득실거릴 거야. 그 위로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또. 또…….”
“에이씨! 대체 무슨 헛소리를!”
네드가 참지 못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였다.
콰아아앙!
갑자기 오두막집의 벽이 폭발했다.
그리고 쏟아지는 검기.
슈슈슈슉!
“아아악!”
“젠장!”
“적습이다!”
“씨이이바알! 내 판! 처음으로 크게 따먹으려던 건데! 그걸 뒤집냐아!”
“이 미친 새끼야! 지금 그딴 게 눈에 들어오냐!”
용병들은 탁상을 뒤집어서 엄폐물로 삼아 추가로 쏟아질 공격에 대비했다.
몇몇은 침착하게 소녀의 신병을 보호하기 위해 움직였다.
네드가 땍땍거리는 것만 빼면 일사불란한 모습.
그들 모두 오합지졸이 아닌 정규 훈련을 받은 베테랑들이란 뜻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거기군.”
습격자들은 그들보다 더 우위에 있는 베테랑이라는 것.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동시에 커다란 아가리가 불쑥 튀어나오면서 소녀를 붙잡으려던 용병들의 다리를 와그작 씹어버렸다.
“크아아악!”
“이, 이게 뭐야! 갑자기 어디서 이딴 게 튀어 나왔……!”
상식을 초월한 움브라의 등장은 놈들을 혼비백산하게 했다.
“아, 안 돼! 내 돈줄!”
“이 미친 새끼야! 어디 가!”
네드는 검을 쥐고 다급히 소녀 쪽으로 뛰었다.
그에게 정해진 임무는 비상 상황이 발생했을 시에 2조가 소녀를 데리고 다른 장소로 이동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었지만.
빈털터리가 된 데다가 이번 판까지 말아먹어 막대한 빚까지 진 그로서는 도저히 임무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소녀를 데리고 튀자!
그리고 혼자서 의뢰비를 먹어버리자. 그런다면 괜찮을……!
콰르르릉!
하지만 네드의 사고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별안간 천둥소리와 함께 눈앞에 튀어 오른 샛노란 빛무리 때문이었다.
-세상이 노래져.
언뜻 조금 전에 소녀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너희들 전부. 거기에 파묻힐 거야. 흔적도 못 남기고.
헛소리로만 생각했던 것들이 진짜였다.
‘미래를 본다던 말이 진짜였……!’
시야가 노랗게 물들었다.
그의 사고도 거기서 끝났다.
<썬더 콜링>
지붕을 뚫고 나타난 낙뢰는 네드를 순식간에 절반으로 쪼개어 태워버릴 뿐만 아니라, 타격 지점에서부터 부채꼴 모양으로 열풍과 뇌기 파편을 잔뜩 쏟아내기까지 했다.
<플레임 댄싱>
소녀를 제외한 전 구역이 열풍으로 뒤덮이면서 용병 중 절반 이상을 날려버리고,
부서진 벽에서는 테오 일행이 난입을 시도하면서 엄폐물을 단번에 부쉈다.
양면에 동시에 전해진 충격은 용병들의 진영을 단숨에 파훼하면서, 그들을 한꺼번에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이젠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
테오가 소녀를 구한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탄탄한 가슴.
그보다 훨씬 따뜻한 체온과 목소리.
소녀는 테오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처음으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 * *
소녀는 꿈을 꿨다.
-너는 아주 소중하고 특별한 아이란다, 카산드라. 그걸 언제나 잊지 말고 살아가렴.
어머니는 카산드라를 품에 안고 항상 그런 말씀을 하시곤 했다.
당시엔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머니도. 친구들도. 마을 사람들도 있는 마을에서 살아가는 삶은 너무 행복했으니까.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그것도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그나마 조금 불편한 게 있다면.
이따금 한 번씩 꾸곤 하는 ‘꿈’ 정도?
-또 꿈을 꾸었니?
-응!
-이번엔 뭘 봤어?
-되게 잘생긴 오빠가 나왔어.
-오빠?
-응. 어어어엄청 잘생긴 오빠가 막막 이상하게 생긴 거에 나 태우고 하늘을 슝! 하고 날고 있었어!
하지만 이따금 그런 ‘꿈’이 싫지 않을 때도 종종 있었다.
‘꿈’을 꿀 때만큼은 그래도 유일하게 앞을 ‘볼’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그것이 싫은 건 아마 대부분 악몽이어서가 아닐까?
가령,
오늘 새벽에 꿨던 ‘꿈’과 같은.
-엄마…… 자?
-이런. 우리 딸, 또 이상한 ‘꿈’을 꿨구나?
-응……. 그런데 거기서 엄마랑 사람들이, 막……! 막!
아무리 개꿈이라고 해도,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이 모두 다치는 ‘꿈’이었다고 섣불리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질까 봐.
-이런 무서웠구나.
-응. 안아줘.
-에구, 어떻게 아직 이렇게 아기 같은지. 하지만 카산드라, 걱정하지 말렴. ‘꿈’에 너무 시달릴 필요는 없단다.
악몽을 꾸고 나면 항상 어머니는 걱정하지 말라며 카산드라를 품에 꼭 끌어안고 말해주었다.
-네가 본 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이 세상은 네가 본 것보다 훨씬 넓고 생생하니까. 언젠가 너를 그런 세상으로 데리고 갈 친구가 생길 거란다.
그 품이 너무 따뜻해서, 카산드라는 다시 편하게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 ‘꿈’이 사실 실제로 벌어질 일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꿈’에서 자주 보던 어떤 남자가 나타났다.
-이젠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
자신을 항상 이상한 괴물의 등에 태우고 하늘을 슝슝 날아다니곤 하던 남자.
그가 바로 앞에 있었다.
“괜찮니?”
그리고 조심스레 의식을 되찾았을 때.
그때 들었던 목소리와 똑같은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 * *
“그, 그, 그건! 그건 괴, 괴물이라고!”
“할 줄 아는 말은 그것밖엔 없냐?”
“정말이라고오오오! 그러니까 날 좀 풀어 줄……!”
셀퍼드는 오들오들 떨면서 악다구니를 지르는 용병의 목을 단번에 쳤다.
푸화악-
털썩!
“죽음을 봤니, 저주를 부르니, 그딴 게 대체 무슨 말이야?”
셀퍼드는 짜증 섞인 얼굴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뭔가 알아낼 게 있을까 싶어서 심문을 하긴 했는데, 영 찝찝한 기분만 들었다.
덜컥-
셀퍼드가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목표물’을 허벅지에 눕힌 테오의 모습이 보였다.
“얼씨구? 언제 그렇게 가까워졌냐?”
맹인도 잘생긴 사람은 따로 알아볼 수 있나?
쓸데없이 그런 의문까지 들었다.
“조금 전에 막 잠들었습니다. 많이 피곤했었나 봅니다.”
“그럴 만하지. 에휴.”
“뭐 알아낸 거 좀 있어?”
아린의 질문에 셀퍼드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들, 적백용병단이었어.”
“교룡회구나.”
“어.”
적백용병단.
원래 라그나르의 봉신 집단이었으나, 북부 전쟁의 발발과 함께 트로이반에게 넘어간 곳.
“원래 성향이 지독한 편이어서 윈터러에서도 매번 제재 논의가 있었다지만…… 이번에는 선을 넘어도 너무 세게 넘었어.”
“동감이야. 인두겁을 쓰고 어떻게 그딴 짓을 저지를 수 있는 건지.”
테오는 곤히 잠든 카산드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곳으로 쫓아오는 내내.
그들은 못 볼 참상을 너무 많이 봤다.
약탈뿐만 아니라 학살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시체 집단 매장지도 발견할 정도였으니.
이들 때문에 하루아침에 가족과 친구를 모두 잃은 고아가 되어버린 카산드라가 겪었을 마음 고생이 어땠을지.
테오는 한순간 식솔들을 잃어버렸던 전생의 마지막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착잡했다.
“전향한 새끼들이 유독 더 지독하더니. 언제 한번 싹 정리해야지 원.”
셀퍼드는 이를 박박 갈다가, 카산드라 쪽을 보았다.
“그런데…… 저 아이, 흠.”
“왜 그러십니까?”
“혹시 다른 특이한 건 없었지?”
테오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어쩐지 셀퍼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것 같았다.
「그게, 하! 이놈들이 하나 같이 좀 이상한 말을 하더라고. 이 꼬마가 저주받았다나 어쨌다나? 그래서 자신들이 전부 뒈진 거라고.」
‘미래 예지다!’
셀퍼드는 혹시 카산드라의 귀에 들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지 전음으로 말을 이었다.
다만, 카산드라의 정체에 대해서 잘 모르는 그로서는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테오는 짐짓 모른 척하면서 물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답니까?」
「이 꼬마가 자신들이 죽는 걸 봤었대. 이게 영 무슨 소린지 모르겠단 말이지.」
「흠! 그것 말고도 혹시 뭔가 본 게 있습니까?」
「어. 하나 더 있는데 그게 좀 황당해서.」
셀퍼드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말을 이었다.
「죽음이 뒤덮은 세상 위로 왕이 나타나서 시계의 수레바퀴를 되감으면 죽은 망자들이 몽땅 일어나서 걷게 될 거라고 했다나?」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