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16세 (1)
하이 테오도어(High Theodor).
누가 보더라도 아들 테오의 이름을 따온 게 분명한 세실리아의 오트쿠튀르 샵의 이름이었다.
하이 테오도어는 이미 오픈 전부터 사교계에서 큰 유명세를 치렀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어디서 들어봤자?
-얘는! 테오 공자가 입고 있던 옷이 여기 거였잖아.
-아, 맞다 그랬지! 게다가 세실리아 부인이 입고 있던 드레스도 되게 아름다웠었는데.
-요 앞 시내에 크게 가게 열었다더라. 시간 나면 한번 가볼래?
-좋아!
테오가 레이의 생일 연회에서 보인 활약상과 함께 입고 있던 패션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시작하고,
세실리아도 아름답게 치장한 드레스를 입고 사교계 곳곳에 얼굴을 비치니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또 어디 그뿐인가.
-으음? 바스크 공방에서 패션 사업도 하는 거요?
-아, 고객님. 저곳은 저희와 연계된 협력사랍니다.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한번 방문해보시겠어요? 사모님께서 마음에 드실 만한 예쁜 장신구들도 아주 많답니다.
-음, 가격이…….
-당연히! 오픈 기념 할인 행사도 하고 있답니다.
-오, 그럼 못 참지!
게다가 협력사로 바스크 공방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패션에 별 관심이 없던 남자들도 흥미를 보였다.
무기를 구매하러 공방에 왔던 이들이 한쪽에 마련된 광고를 보고 아내나 연인에게 선물할 물건들을 구매한 덕분이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어! 이 사람이! 그거 하나 못 들어줘!
-죄송합니다, 고객님. 새치기는 안 되십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굴 거면 앞으로 윈터러에서 장사 접……!
-라그나르의 가주님이 사장님의 남편이신데 가능하시겠어요?
-히이이익!
때로는 자신의 신분이나 직업을 내세워 청탁하거나 갑질을 시도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곧 라그나르의 이름을 듣고 꼬리를 말기도 했다.
하루하루가 너무 바빴지만.
세실리아의 얼굴에는 피로가 쌓이는 것과 반대로 웃음꽃이 폈다.
언제나 장미궁에 처박혀 카일의 애정이 다른 사람에게로 떠날까 봐 전전긍긍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짜아악!
따귀 올리는 소리와 함께 재단사의 얼굴이 옆으로 홱 하고 돌아갔다.
“감히 천한 것이 어디서 자꾸 따박따박 말대답이야!”
고풍스러운 드레스로 치장하고 있던 중년 여인은 재단사를 표독스럽게 노려봤다.
옷을 고르고 있던 많은 사람의 시선이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뭘 봐! 구경났어?”
그러다 중년 여인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지자, 사람들은 다급히 샵을 빠져나갔다.
평소라면 라그나르의 보호를 받는 샵에서 주제도 모르고 날뛴다며 비웃으면서 구경이라도 하겠지만.
지금은 상대의 신분이 신분인지라 다들 피하는 분위기였다.
비비안리 나르시오 멀리건.
나르시오 가문의 안주인으로, 남부에서는 라그나르에 못지않은 명성을 자랑하는 대가문 멀리건 출신이어서 그런지 평소 안하무인인 성격으로 유명했다.
남편인 가주마저도 그녀가 성을 낼 때면 자리를 피한다던가.
“개인 호출은 받지 않는다고 해서 얼마나 재주가 좋나 싶어서 몸소 찾아왔는데. 무슨 일을 이따위로 하는 거야! 너희 사장 어디 있어? 당장 데려오지 못해!”
몇몇 하수인들이 재빨리 뒤쪽으로 이동했다.
곧 세실리아가 나타났다.
“사장님, 전……!”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우선 들어가서 쉬고 있으렴.”
세실리아는 뺨에 손을 얹은 채로 눈물을 흘리는 재단사를 휴게실로 보내고는 비비안리 앞에 섰다.
“찾으셨다고요, 부인?”
“흐응, 그래. 당신이 여기 사장이야?”
비비안리는 공작 깃털을 꿰어 만든 부채로 입가를 가리면서 세실리아를 위아래로 노골적으로 훑었다.
“예.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로 불쾌함을 느끼셨는지 말씀해주신다면, 그에 상응하는 조처를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깟 년이? 무슨 수로 조처를 한다는 거지?”
노골적인 무시에도 세실리아는 눈썹 하나 까딱거리지 않았다.
“불편한 점을 말씀해주시지 않으면 저희도 아무런 도움을 드리지 못합니다.”
“좋아. 그렇게까지 말하니 말해주지.”
“예. 무엇일까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비비안리의 언성이 높아졌다.
“VVIP가 왔는데도 그냥 대기하라고 말만 하면서 싸구려 다과를 내놓질 않나, 교육도 제대로 되지 않은 년을 데려와서는 재단사랍시고 이래라저래라 감히 시키질 않나, 그러면서 옷이 맞춰지는데 최소 1주일은 걸린다고? 곱게 만들어서 제발 내게 입어달라며 가져다 바쳐도 모자랄 판국에!”
뒤에서 듣고 있던 재단사며 하수인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하나 같이 말도 안 되는 생트집이었기 때문이었다.
싸구려 다과를 내놓아?
손님들의 입맛을 더럽힐 수 없다면서 세실리아가 직접 발품을 팔아가며 공수해 온 서부 고원지대의 차와 과자였다.
하나하나가 일반 귀족이나 거상들도 구매하기 힘든 것들이니 입맛에 맞지 않을지언정 토집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교육도 되지 않은 재단사라고?
애당초 샵에 있는 재단사들은 모두 자기 브랜드를 낼 수 있을 만큼 유명인들이었지만, 세실리아만 믿고 합류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비비안리에게 붙은 재단사는 한때 황실에서도 재직한 전적이 있던 사람.
실력이 모자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양해를 구하는 재단사에게 말도 안 되는 모욕을 하면서 인신공격을 했던 건 비비안리였다.
대기도 마찬가지.
지금은 주문이 너무 많은 까닭에 일반인들은 최소 반년을 웨이팅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당분간은 맞춤 주문은 받지 않겠다고 안내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옷을 받아야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어쩔 수 없이 1주일 정도는 기다려 달라고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나르시오의 소가주가 테오의 친구이기도 하니, 그의 어머니에게 예우를 해주자는 뜻에서.
그런데…….
이런 안내를 하자마자 바로 따귀부터 올린 것이다.
자신을 기다리게 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건……!”
결국 참다못한 하수인 한 명이 뭐라고 항의하려 했지만, 세실리아가 오른손을 들어 말문을 막았다.
대신에 옆에 대기 중이던 집사를 돌아보며 몇 가지를 지시했다.
“그거 있지? 가져와.”
“예!”
곧 집사는 손때가 많이 묻은 수첩을 가져와 세실리아의 손에 쥐여주었다.
비비안리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세실리아가 뭘 하려는 건지 좀처럼 짐작 가는 게 없었다.
하지만 세실리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수첩을 이리저리 넘기다가 한 곳에 멈추며 말했다.
“비비안리 님, 보름 전에도 저희 샵을 방문하신 적이 있으시군요.”
“그런데?”
“그때도 잠시 기다려달라고 안내하던 저희 직원의 정강이를 걷어차셨구요.”
“뭐?”
비비안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 달 전에는 저희 가게와 연계된 보석상에서 외상이 안 된다면서 점원의 얼굴에다 찬물을 끼얹으셨고.”
“너……!”
“석 달 전에는 다른 샵에서 5년 전에 구매한 드레스가 상했다며 100% 환불에 피해 보상까지 요구하셨네요.”
“이이!”
“이와 비슷한 환불 요청 건이 총 12건, 미용사나 재단사의 폭행 사례가 21건, 외상을 다시고 갚지 않은 사례가 34건…….”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비비안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저딴 걸 대체 어디서 알아 왔는지 몰라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줄 줄이야!
그러다 그녀의 눈에 그제야 세실리아가 든 수첩의 이름이 보였다.
-진상들 명단.
저, 저거 지금 나, 나더러 지, 지, 진상이라고 한 거 맞지, 지금?
“아무래도 저희 <하이 테오도어>는 비비안리 님의 옷을 맞춰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며, 나가시는 문은 바로 뒤편에 마련되어 있으니 그리로 나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세실리아는 우아한 인사와 함께 허리를 살짝 숙이고는 스텝들을 돌아봤다.
“다들 뭐해! 진상도 갔으니 마저 하던 일 하지 않고!”
“……!”
스텝들이 모두 피식 웃으면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비비안리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살면서 이런 수모를 겪어본 적이나 있을까.
그녀를 따라왔던 호위기사들도 인상을 굳히면서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나르시오의 안주인이자 멀리건의 영애인 분의 이름을 더럽히는 자는 응징하는 것이 그들이 할 일이었다.
하지만,
촤아아악!
“이런. 손이 미끄러운데.”
“꺄아악!”
갑자기 비비안리의 머리 위로 화병이 불쑥 나타나더니 안에 담겨 있던 물이 쏟아졌다.
난데없는 날벼락.
비비안리가 비명을 지르면서 뒤쪽을 노려봤고, 호위기사들의 시선도 황급히 그쪽으로 향하다가 몸이 바짝 굳고 말았다.
매화궁주가 미안하다는 얼굴로 서 있었다.
“꽃이 예뻐서 가까이 보려다 그만 실수를. 이를 어떡하면 좋을까요?”
그러나 말투와 다르게 눈빛만큼은 전혀 그러지 못했다.
무감정한 모습.
“듣자 하니 나르시오에서는 이런 실수를 저지를 때 손을 자른다던데, 내 손을 내놓아야 하려나?”
매화궁주가 슬그머니 손을 앞으로 내놓자, 호위기사들은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비비안리는 축 젖은 몰골로 분노에 몸을 떨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기서 라그나르의 1부인이자 9룡인 사람과 싸워서야 무슨 꼴이 될지 불에 보듯 뻔했으니.
“……가, 자!”
결국 비비안리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홱 하고 샵을 벗어났고.
와아아아!
곧 샵 내부 곳곳에서 함성이 터졌다.
매화궁주가 화사하게 웃으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세실리아를 돌아봤다.
“이곳이 재단을 그렇게 잘한다고 해서 소문을 듣고 왔는데, 혹시 상담할 수 있을까요?”
세실리아는 한참 동안 말없이 매화궁주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돌아섰다.
“……안으로 들어오시죠.”
* * *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그동안 테오는 정식으로 ‘크림힐트 기사단’이라고 이름 붙은 신전 기사단에게 <니벨룬>을 훈련시켰고,
혼란이 서서히 잦아들 때쯤 다시 무역을 위해 떠나는 비토리오의 손에 소개장을 쥐여주었다.
반쯤 무너지던 바커스 가문을 살리기 위해 세레스 상단 대신에 해운연맹과 손을 잡는 것이 어떠하겠냐는 내용이 담긴 편지와 함께.
회신은 금방 돌아왔다.
아주 짤막한 내용과 함께.
-대체 거긴 언제 간 거냐?
나반으로서는 기도 차지 않을 일이었다.
테오가 부유군도에 있다는 내용쯤은 신문 기사를 통해 들어 알고 있었지만, 설마 해운연맹을 통째로 북방으로 끌어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까.
물론, 거절할 이유 따윈 없었다.
가뜩이나 가주와 원로들이 죄다 윈터러에 끌려간 탓에 바커스의 가세가 빠르게 기울고 있던 차에 숨통이 트일 만한 구석이 생긴 셈이니.
덕분에 나반은 비토리오와 빠르게 합작회사를 만들 준비에 들어갔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소.”
“저희야말로. 북부에 이렇다 할 상단이 없을 때 빠르게 해치웁시다.”
“독점 시장이야말로 모든 상인이 바라마지 않는 최고의 시장이지. 후후!”
바커스는 해운연맹이 안전하게 무역에 집중할 수 있도록 운송과 보호를 담당하고, 해운연맹은 각지의 물건을 빠르게 조달하는 역할이었다.
비율은 4:4:2.
해운연맹과 바커스가 각각 40%를, 그리고 테오의 명의로 지분 20%를 할당해주었다.
기회를 준 테오에 대한 감사 인사와 덧붙여 분쟁 시에 테오를 중립지대로 쓰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테오는 합작회사 내에서 발언권을 획득하고, 여기다 하이 테오도르나 바스크 공방까지 연결하면서 규모를 빠르게 부풀릴 수 있었다.
앞으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상당한 양의 돈이 필요할 터.
이 합작회사가 앞으로 큰 힘이 되어줄 게 분명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일들을 정리하다 보니 빠르게 시간이 훌쩍 흐르고,
어느덧 새해가 찾아왔다.
“테오, 이제 16살이지?”
“예. 그러네요.”
“크으! 그래도 햇병아리네. 부럽다, 부러워.”
“셀퍼드는 그럼 올해로 나이가 아홉 수……!”
“야! 야! 조용히 안 할래?”
북방은 오래전부터 생일이 아니라 신년을 기준으로 나이를 헤아리는 전통이 있었다.
그렇기에 이제 테오도 새로운 나이를 곱씹어 볼 수 있었다.
여전히 스물이 되려면 멀었지만, 그래도 회귀를 하고 나서 시간이 흐르긴 흐르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감회를 즐길 시간 따윈 없었다.
-임무 지시서.
북방에서 시작된 전화(戰火)가 본격적으로 빠르게 몸집을 부풀리고 있었으니까.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