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레비아탄 (2)
로드브로크의 환영은 계단 끄트머리에 올랐을 때쯤 홀연히 사라졌다.
어서 이리로 오라는 듯이.
테오는 알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쪽에 있던 군중에 인사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용사 님!
-악룡을 무찔러주십시오!
-용사의 기적을 보여주세요! 부탁드립니다!
테오는 군중의 응원을 뒤로한 채, 셀퍼드 일행의 눈인사를 받으면서 천천히 로드브로크가 올랐던 길을 올랐다.
중앙 신전은 멀리서 보던 것보다 훨씬 컸다.
다만, 크기에 비해 투박한 느낌이 강했다.
마치 꾸밀 줄 모르던 크림힐트의 모습처럼.
“어서 오십시오, 새로운 크림힐트이시여. 이곳의 관리를 맡고 있는 마르티라고 합니다.”
“당신.”
“낮에 뵌 적이 있었지요. 다시 인사드립니다. 그때 만약 제가 결례를 끼친 부분이 있었다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얀 신관복을 입은 단발머리 여인이 공손하게 테오를 맞았다.
테오는 헛웃음을 흘렸다.
스피놀라 대저택에서 만났던 블랙 스컬의 멤버였기 때문이었다.
상급검사의 위용을 가지고 있어 가장 눈에 띄기도 했던 자.
낮에는 그토록 차가운 눈빛을 하고 있더니, 지금은 또 반대로 부드러운 기품이 묻어나고 있었다.
“용서는 무슨. 이해하오. 앞으로 더 좋은 관계를 맺으면 되는 것 아니겠소?”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말.
마르티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역시 크림힐트 님의 후계자다우신 아량이시군요. 그럼 절 따라오시겠습니까?”
마르티는 그런 걸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안쪽으로 테오를 안내했다.
복도에는 다른 신관들이 좌우 벽에 일렬로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모두가 잘 단련된 무도가인 것 같소만.”
“잘 보셨습니다. 크림힐트 님을 기리는 신전이다 보니, 평상시에는 그분의 업을 좇아 주민들을 대상으로 무도관으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무도관이라고 하기에 신관들의 기백은 모두 대단했다.
군율이며 절도 있는 태도까지.
마치 잘 단련된 기사단을 보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라그나르에 비할 바는 아니더라도, 확실히 뛰어난 곳이었다.
‘전생에 이들이 라그나르와의 전쟁에 참전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었는데. 부유군도의 숨겨진 전력 같은 건가?’
어쩌면 부유군도를 좌지우지하는 트로이반에 반발하여 신전에서 나오지 않을 것일 수도.
테오는 뜻하지 않은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꼭두새벽부터 잠에서 깨어나 이렇게 모이기가 쉽지는 않으셨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저희 모두가 오히려 수백 년 만에 드디어 신비가 풀렸단 사실에 기뻐하고 있으니까요. 부유군도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저희에게 얼마나 소중하신지 모르실 겁니다.”
“그렇소?”
“네. 게다가…….”
마르티는 말꼬리를 흐리면서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오오!
-보이십니까? 저 빛이?
-석상이 아니라 실제로 발뭉을 보는 것도 처음이지만, 저렇게 아름다운 빛을 뿌리는 것도 처음 보는군.
-문양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가까운 곳에서 관찰할 수는 없겠지요? 당대에 유행했던 마법 체계며 지식에 대해 알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사료가 될 것 같은데.
-이번 일이 끝나고 난 뒤에 따로 부탁드립시다. 크림힐트 님의 후계자이시라면 깐깐한 분이 아니실 거요.
-그나저나 저 빛은 정말 황홀하군요. 신관이 되길 너무 잘했어요.
신관들의 시선은 정확하게 테오가 쥐고 있는 용살검에 향해 있었다.
봉인이 풀리면서 용살검은 전설 속 성검(聖劍)의 위용을 마음껏 드러내는 중이었다.
“그렇게 완전히 깨어난 발뭉을 마주할 수 있단 사실만으로도, 저흰 이미 기다림에 대한 구원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랍니다.”
양손을 끌어모아 기도하는 마르티의 모습은 경건하기까지 했으니.
이렇다 할 종교를 믿지 않는 테오로서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무런 기적이나 은총도 내리지 못하는 존재를 이렇게 신실하게 믿을 수 있다는 것부터 대단해.’
사실 크림힐트는 신적인 존재에 가까웠을지언정 진짜 신이 되어 만신전(Pantheon)에 오른 건 아니었다.
그러니 이 땅에 보일 힘에도 한계가 있을 텐데도, 부유군도의 주민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크림힐트를 신봉했다.
대륙과 동떨어진 이 지역만의 고유한 문화인 셈.
‘덕분에 내 위업에도 그만큼 힘이 실리는 거겠지만.’
신전의 중심부에 다다랐을 때, 돌연 마르티의 걸음이 멈췄다.
99개의 계단 위.
청동으로 만든 제단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 백금을 깎아 만든 듯한 투구가 놓여 아름답게 반짝였다.
아주 소중한 보물인지 주변엔 마법 결계가 몇 겹이나 새겨진 유리관이 둘러쳐져 있었다.
‘애기르.’
테오는 그게 무엇인지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악룡을 처단하기 위해 길을 나서려던 용사 크림힐트를 위해 땅요정 99인이 별빛과 달빛을 끌어모아 999일을 꼬박 밤새워 두들겨 탄생시켰다는 백금갑주(白金甲冑).
우웅! 우우웅!
손에 든 발뭉이 거칠게 떨리고 있었으므로.
마치 오래전에 떨어진 친구를 만난 듯 격하게 반기고 있었다.
마르티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애기르를 착용하십시오. 그런다면 자연스럽게 해왕에게로 가는 게이트가 열릴 겁니다.”
애기르는 테오가 용살검과 크림힐트의 신비에 이어 얻기를 바랐던 무구였다.
그것이 있어야 심해의 엄청난 수압을 견딜 수 있으므로.
“해왕의 봉인 지역으로 가는 게이트는 의회의 가결이 없으면 절대 열리지 않는다고 들었소만.”
“부유군도의 운명이 달린 문제입니다. 크림힐트 님의 후손으로서 어떻게 그것을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마르티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이 사람이 중간에 힘을 쓴 거였어.’
테오가 군중을 이끌고 중앙 신전으로 가면서 해운 3가와 자치령 의회에 압박을 넣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빨리 애기르의 선택권과 게이트 개통이 허락된 것은 중간에 누군가가 손을 쓰지 않는다면 불가능했다.
어쩌면 크림힐트의 신비가 깨어나면서 발언권이 더 세진 것일 수도.
‘볼수록 더 탐나는데.’
테오는 앞으로 그리고자 하는 판도에 이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 더 완벽한 그림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때마침 저들이 혹할 만한 것도 갖고 있었다.
-니벨룬.
크림힐트의 모든 의념이 총망라된 비전.
그것이라면 크림힐트를 좇는다는 저들도 눈이 돌아가지 않을까?
실제로 몇몇은 테오가 실전된 비전을 보였단 사실에 흥미를 보이고 있기도 했고.
물론, 그런 것도 전부 해왕을 잠재우고 난 뒤에 생각할 일.
테오는 마저 99개의 계단 위에 올라 애기르 앞에 섰다.
번쩍!
순간, 애기르가 거칠게 떨리면서 마법 결계가 해제되고, 유리관이 잘게 부서지면서 아래로 무너졌다.
-오오오!
-애기르가 처음으로 기적을 보이고 있어……!
-역시 전설대로 백금의 모습을 하고 있구나. 너무나 아름다워.
테오는 애기르를 양손으로 들어 머리에 썼다.
마치 맞춤 갑옷처럼 딱 들어맞는 크기.
동시에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쿵쿵쿵쿵쿵!
‘이건?’
애기르가 테오의 마력과 공명했다.
테오가 부활을 위해 장착했던 크림힐트의 유골과 반응하면서 애기르가 변화를 일으켰다.
백금색 빛무리가 전신을 타고 번지면서 그 위로 새로운 갑주가 더해졌다.
촤르륵! 촤르륵!
목덜미를 지나 상갑을 완성하고, 그러다 하갑 부분까지 연장되면서 완전 무장을 이뤘으니.
거기다 한 손에 용살검까지 쥐고 있으니, 마치 전설 속 크림힐트가 현신한 것으로만 보였다.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크림힐트의 거상이 바로 저런 모습이지 않던가!
-아아아!
-진짜 크림힐트 님의 후계자이시다.
-형제들이여, 기도를 올립시다. 우리의 부름을 받아 이 땅에 다시 내려오신 그분의 의지를 좇아서!
신관들이 모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기도를 올렸다.
마르티도 경건한 자세로 크림힐트의 기적을 곱씹었다.
테오를 휘감은 백금색 빛무리는 점점 번지면서 신전을 감싸고, 끝내 바깥 건물까지도 아름답게 반짝였으니.
마치 그 모습이 백색 태양이 떠오른 듯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신전 앞에 모인 수많은 주민이 땅바닥에 주저앉거나 신관처럼 기도를 올렸다.
-아아!
‘애기르의 기능이 전부 다 깨어났어. 방어구로서 기능만 제대로 작동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크림힐트의 유골 덕분인가?’
테오는 양손을 내려다보면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
[애기르]
· 종류: 마갑(魔鉀)
· 방어력: 350
· 효과
- 대(對) 마법 방어력 +150%
- 원소 저항 특화
- 파손 부위 자동 복구
- 체력 25% 이하 시, 일정 확률로 물리적 타격 무효화
- ‘용살검: 발뭉’ 사용 시, 참격 위력 +130%
+
땅요정의 보물은 지정된 주인이 아니면 제 기능이 어렵다고 알고 있건만.
아무래도 애기르는 테오를 크림힐트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테오는 시작부터 마음에 드는 것들 뿐이라, 만족에 찬 미소를 지으면서 바닥을 내려보았다.
빛무리가 녹아든 제단이 해체되면서 아래에 숨겨져 있던 원형 철문을 드러냈다.
온갖 기하학적 도형이 그려진 철문.
끼릭, 끼리릭-
그러다 녹슨 소리를 억지로 내면서 도형을 따라 철문이 재조립되고 해체되길 반복하더니, 끝내 천천히 좌우로 활짝 열렸다.
파아아!
그 너머.
빛이 거의 묻지 않는 어둠 속 파도 세계가 나타났다.
「왔는가? 준비를 마쳐서 온다는 게 이런 뜻이었군. 아버님의 유일한 벗이었으나, 해하기도 하였던 이의 후계자로서 올 줄이야.」
폰투스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왱왱 울렸다.
‘그래서 날 막으려고?’
「그럴 리가. 아버님의 자식으로서 원망이 없을 수는 없겠으나, 아버님은 단 한 번도 벗을 원망하신 적이 없다. 그러니 해치지 않을 것이다.」
‘다행이군.’
테오는 슬쩍 마르티와 신관들 쪽을 보면서 말했다.
“그럼 다녀오겠소.”
“조심해서 다녀오시길.”
테오는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게이트 속으로 몸을 던졌다.
첨벙!
차가운 물살이 얼굴을 때렸다.
엄청난 수압이 몸을 짓눌렀다.
지이이잉-
하지만 애기르에 각인된 [원소 저항 특화] 효과가 발동되면서 그런 압박감이 사라졌다.
동시에 수중 호흡도 가능해졌다.
이제 바닷속에서도 자유로운 운신이 가능했다.
내친김에 테오는 두 눈에 마력을 심으면서 [영성]도 부여했다.
그러자 시야가 확 하고 밝아지면서 어둠 속에 묻혀 있던 폰투스가 나타났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날 따라오라.」
테오는 폰투스를 쫓아 더 깊은 심해로 한참 동안 내려갔다.
가파른 협곡을 통과하고, 뜨거운 해수구를 지나 넓은 심해평원에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는 해왕을 만날 수 있었다.
‘커. 너무.’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크림힐트의 사념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큰 크기.
봉인된 수백 년의 세월 동안에도 계속 커졌던 걸까.
심지어 막강한 마력풍마저 일어나고 있어서 이 이상 가까이 접근하는 것도 힘들었다.
‘크림힐트는 저런 걸 대체 어떻게 이긴 거지?’
자연재해.
그런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당장 테오가 니벨룬과 애기르를 얻었어도, 어떻게 하기 힘든 상대인 게 분명했다.
「이 이상은 우리도 접근하기 힘들다. 아버님을 다시 잠재울 수 있겠느냐?」
‘그건.’
테오가 무슨 말을 하려던 그때였다.
키에에엑!
엎드려 있던 해왕이 갑자기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쿵!
동시에 벌어지는 엄청난 격진.
해류가 어지럽게 흔들리고, 온갖 해저 화산들이 당장 폭발할 것처럼 뜨거운 증기를 뿜어댔다.
폰투스를 따라왔던 해수종들도 혼비백산했다.
「이런! 벌써 발작이 시작됐나! 그래도 평소 이 시간에는 괜찮으셨었는데……!」
‘발작?’
「광증 때문에 아버님께선 주기적으로 광란을 부리신다. 그럼 꼭 주변이 사달이 나고.」
현재 부유군도를 괴롭히고 있는 이상 현상의 원인이 바로 저것이란 뜻이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일단 여기서 피신하자.」
‘잠깐만.’
하지만 테오는 폰투스를 말려 세웠다.
해왕이 광란을 피울 때마다 풀풀 날리는 칠흑빛 아지랑이가 어딘지 모르게 낯익었다.
‘영마독? 해왕이 왜 저기에 중독된 거지?’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