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부유군도 (4)
신비.
비행선이 하늘을 날고, 열차가 증기를 뿜으며 지상을 달리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미지 현상(未知現像).
누군가는 이곳에서 막대한 마력을 얻는 기연을 얻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젊어지는 기적을 얻기도 한다.
가문이 갑자기 번성한다던가, 반대로 주변인들이 모두 죽는 저주를 겪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비를 우러러보면서도 두려워하여 가까이하지 않으려 하니.
오늘날 신비를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태고룡의 유물>을 활용하는 라그나르가 그중 대표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대외적으로는 <크림힐트의 거상>이라 불리는 부유군도의 신비가 가장 유명했다.
크림힐트의 거상.
그것은 부유군도의 꼭대기이자 중심인 베노타 섬에 위치하여 망망대해 위에 우뚝 서 있을지니.
평상시에는 해가 저문 새벽에 부유군도를 찾는 선박들을 안내하는 등대 역할을 하지만,
부유군도에 어떤 이변이 생길 때 ‘축복받은 자’에게 거상에 내재한 영웅 크림힐트의 축복을 내린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 축복을 얻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련을 거쳐야 하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부유군도에서는 절대 이 시련을 개방하지 않았다.
아니, 크림힐트의 거상에 일정 거리 이상으로 접근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런데 테오가 바로 여기에 가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당연히 안토니우로서는 과한 요구라고 여겨져 인상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지만,
“해왕의 광분을 잠재우려면 그 신비가 꼭 필요한데도?”
이어지는 테오의 말에 표정을 굳혀야만 했다.
“……자세히 설명해보시오.”
“크림힐트의 거상에는 전설이 있지. 고대의 영웅 크림힐트가 바다의 악룡을 봉인했다는 전설. 실제로 거상의 모티브도 그때를 재현하는 것이지 않나?”
“그 허무맹랑한 전설과 해왕의 광분을 잠재우는 게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거요?”
“연관이 없을 리가 없지. 당신들이 말하는 해왕이 바로 그 악룡이니까. 아닌가?”
테오는 안토니우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맞았군.’
사실 테오도 크림힐트의 전설을 떠올린 건 폰투스의 사념을 읽고 난 직후였다.
용의 모습을 한 해왕의 모습에서 얼핏 전생에 크림힐트의 거상을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이 손에 들린 용살검 역시 해왕에게서 풍기는 기질이 느껴졌으니.
그래서 자연스레 정보들이 연결된 것이다.
크림힐트가 악룡을 처단할 때 사용된 검이 바로 발뭉이 아닐까 하고.
“해왕을 다시 잠재우기 위해서는 잠재된 발뭉의 기능을 깨울 필요가 있지. 그러기 위해서는 거상의 신비가 필요한 거고.”
“당신이 해왕을 잠재우겠다, 이 말이오?”
“조금 전에 당신도 보지 않았나? 시 서펜트를 물러나게 하는 거. 내겐 해왕을 상대할 만한 능력이 있다. 다만, 힘이 모자라서 신비가 필요한 거고.”
“…….”
“그런 다음에는 약속대로 발뭉도 돌려주지. 당신들에게는 나쁠 것 없지 않나? 부유군도도 지키고, 발뭉도 돌려받고.”
“당신은 기연을 얻고?”
“상부상조하자는 거지.”
물론, 테오는 용살검을 돌려줄 생각 따윈 하지 않고 있었지만.
굳이 그런 속내를 드러낼 이유는 없는 것이다.
안토니우는 고심에 잠겼다.
“고민할 게 있나? 신비도 중요하지만, 나라면 도민들의 안전과 생명이 우선일 텐데.”
“우리가 당신에게서 발뭉을 되찾아 크림힐트의 기연을 얻는다는 선택지도 있을 텐데.”
“거상의 신비를 깨울 수 있다면 진즉에 깨웠겠지.”
“…….”
“하지만 난 방법이 있고. 어떤가? 혹하지 않나?”
안토니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것은 나 혼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크림힐트의 거상은 총회 측의 관할이라……!”
“결정권이 없다는 운운을 할 거라면 그냥 여기서 자리를 끝내지. 본가에서 정식으로 해운연맹에 제안을 해도 받아들이기는 할 것 같으니.”
테오는 아무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블랙 스컬에 접촉하고자 한 것은 발뭉에 대한 비밀을 잘 알고, 크림힐트의 거상에 접근하기가 훨씬 수월하지 않을까 싶어서였을 뿐.
‘가문의 이목을 사기는 싫었는데…… 시간이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찾다가 안 되면 최후의 수단으로 써야겠지.’
“잠깐만 기다리시오!”
안토니우는 다급하게 테오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테오의 무심한 시선이 그리로 향하자, 안토니우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았다.
‘그래. 신비를 저쪽이 가져간다고 하더라도, 발뭉만 되찾을 수 있다면……!’
발뭉은 부유군도와 해운연맹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징표이기도 하다.
손에 넣는다면 블랙 스컬이 정권을 차지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테지.
그리고 그 정점에 자신이 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더라도, 스피놀라 가문 내의 입지는 확실하게 다질 수 있을 터였다.
위로 있는 두 명의 형을 제칠 수만 있다면야.
안토니우는 모든 정치적 계산을 끝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소. 대신에 당신도 내 부탁을 들어주시오.”
“뭐지?”
“원래 하려던 부탁은 곧 있게 될 해운 3가의 총회에 본인의 호위검사로 같이 참석해달라는 것이었지만.”
후우!
안토니우는 길게 숨을 고르면서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해왕을 다시 잠재우는 데 성공한다면, 막대한 명성과 지지를 얻게 될 터. 그때 본인과 블랙 스컬에 힘을 실어주시오. 통령(Doge)이 될 수 있도록.”
* * *
모든 거래가 끝난 뒤.
“이야기 좀 해.”
테오는 안토니우의 집무실을 나오다 말고, 손목을 낚아채는 아린에 끌려 다른 곳으로 가야만 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린은 인상이 딱딱했다. 셀퍼드도 착잡한 얼굴이었다.
“너 똑바로 설명해.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야?”
“이번 작전에 있어서 제 의견에 충실히 따라주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야 지금 네가 손잡으려는 놈들이 블랙 스컬이라는 걸 몰랐을 때 이야기지!”
쾅!
아린은 신경질적으로 벽을 거세게 후려쳤다.
“야! 야! 소란 피우지 마! 이러다 배 부서져!”
셀퍼드가 호들갑을 떨었지만, 아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두 눈을 부라렸다.
“그놈들이 선배들에게 무슨 짓 했는지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적의 적은 아군이니까요.”
“너!”
“당장 트로이반을 물리치는데 고양이의 손이라도 빌려야 한다면 빌려야죠.”
아린에게서 살기가 피어나려는 순간, 테오가 뒷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는 블랙 스컬에게 유리하게 판을 짤 거라고 이야기한 적 없습니다.”
“……무슨 말이야? 자세히 설명해 봐.”
“저 역시 감히 백갑용기대에 피해를 준 블랙 스컬을 그냥 놔둘 생각은 없다는 겁니다.”
“…….”
“토사구팽. 사냥개는 사냥이 끝난 뒤에 솥에 삶아버리면 그만일 텐데요.”
테오의 시선은 무심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아린은 마음이 흔들렸다.
평상시와 같았기에.
“그 말, 믿어도 되는 거겠지?”
“아린. 제가 처음 입대했을 때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아린도 당시에 들었던 말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백갑용기대장이 되려고 합니다. 5년 안에.
“대장이 되겠다고 했던 거?”
“예.”
“그냥 하는 말 아녔어?”
“저는 비효율적인 걸 제일 싫어합니다만.”
테오가 살짝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신임 받는 대장이 되기 위해서는 대원들의 지지가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요?”
아린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테오가 말한 ‘대원’에는 자신과 셀퍼드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신들의 환심부터 살 것이다.
그리고 백갑용기대를 차지하기 위한 오른팔, 왼팔로 삼을 것이다.
그리 말하고 있었다.
‘요 맹랑한 것이.’
아린은 이 발칙하면서도 깜찍한 후배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같은 모습을 계속 보인다면 정말 자신이 그가 대장이 되는 데 가장 크게 힘을 실어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좋아.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아린은 그제야 테오를 압박하던 손길을 풀어주면서 물었다.
테오는 옷깃을 정리하면서 말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우선 블랙 스컬을 저희 편으로 끌어들이고, 이번 일을 해결하면서 해운연맹에까지 빚을 씌우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 과정에서 트로이반의 그림자도 모두 치워야겠죠.”
“그 과정에서 블랙 스컬도 알아서 사라질 테고?”
테오는 슬쩍 짓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린은 기분 좋게 웃었다.
“알았어. 기대하고 계속 협조할게.”
“감사합니다.”
옆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셀퍼드도 같이 미소를 지었다.
* * *
“저자를 믿으십니까?”
“믿지 않으면? 우리에게 다른 방법이 있나?”
그레이는 안토니우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했지만, 돌아오는 안토니우의 대답에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그의 말마따나 당장 그들에게 방법은 없었으니까.
“차라리 잘 되었어. 위기가 곧 기회라고, 정말 저 친구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에겐 판을 뒤집을 호기가 될 테니까. 설사 실패했다고 해도 우리로선 손해 볼 건 없지 않나? 아무것도 몰랐다고 그냥 잡아떼면 그만이니까. 그리고.”
안토니우의 입술 끝이 비틀렸다.
“빼앗긴 신비야 다 이용한 다음에 도로 회수하면 그만이지.”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좋아 보이는 겉모습과 다르게 안토니우는 절대 외부인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지 못했으니까.
부유군도의 것은 부유군도에게.
폐쇄 정책을 지향하는 것이 평소 안토니우의 지향점이었다.
“본부와 가문, 두 곳에 모두 미리 연락을 넣도록. 곧 도착할 것이니 준비하고 있으라고.”
“예. 알겠습니다.”
그레이가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떴다.
홀로 남은 자리.
안토니우가 시가를 입에 물었다.
말없이 뭉게뭉게 피어오른 담배 연기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 * *
해류에서 시작된 상승기류가 테오 일행이 탄 배를 허공으로 띄우기 시작했다.
“오오, 뜬다, 떠! 배가 하늘을 난다고!”
“시끄러워 죽겠네. 하는 일이 하늘 나는 거면서 뭐가 신기하다는 거야?”
“그럼 안 신기하냐? 하늘을 가르는 거랑은 완전히 다른 느낌인데.”
“에휴, 모르겠다.”
호들갑 떠는 셀퍼드를 보면서 아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동안,
배는 어느새 거친 해무를 가르고 어느새 베노타 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섬의 끄트머리, 수십 미터도 넘는 크기를 자랑하는 거상이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칼로 찌른 악룡의 머리를 발로 밟고 있는 여전사의 모습.
‘저것이 <크림힐트의 거상>.’
테오는 순간 인벤토리 안쪽이 떨리는 것을 감지했다.
용살검이 반응하고 있었다.
-어어?
-왜 그래?
-너 못 봤어? 조금 전에 거상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는데?
-무슨 헛소리야? 저게 왜 움직여? 잠 덜 깼냐?
-아닌데……. 분명히 움직였는데…….
-헛소리는. 배가 흔들려서 그런가 보지.
주변에서 이런저런 대화가 오고 가는 가운데, 배가 어느새 선착장에 도착했다.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이번에도 안토니우는 가장 먼저 배를 빠져나갔다.
바깥에는 스피놀라를 상징하는 8륜 마차가 이미 대기 중이었다.
‘그 녀석도 잘 살고 있으려나.’
테오가 전생의 친구를 떠올리는 동안, 8륜 마차는 편하게 테오 일행을 스피놀라의 저택으로 안내했다.
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화려한 외양을 자랑하는 대저택.
마당에 들어서자, 마침 밀짚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가지치기를 하고 있던 정원사가 반갑게 그들을 맞았다.
“오, 우리 아들 왔느냐?”
“예, 아버지. 무사히 잘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이쪽은 편지로 말씀드렸던 란트 님과 일행분들이십니다.”
“오호! 안토니우가 칭찬하는 경우가 아주 드문 데, 그만큼 뛰어난 고수들이시라지요? 반갑소. 스피놀라의 가주, 움베르토라고 하오.”
사람 좋은 말투와 다르게 움베르토는 탄탄한 체구에 날카로운 눈매를 갖고 있었다.
죽음과 피가 난무하는 뒷세계의 제왕다운 모습.
최소한 상급검사, 못해도 용문검사는 될 것 같은 수준이었다.
셀퍼드와 아린도 바짝 긴장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이미 나에 대한 언질은 따로 아버지에게 해뒀다고 했었지.’
지금부터 하려는 일에 힘을 실어달라는 뜻이었을 거다. 그게 아니더라도 방해만은 하지 말라는 언질.
테오는 그가 내미는 손을 맞잡았다.
“란트라고 합니다.”
“란트! 좋은 이름이시구려. 혹여 성도 여쭐 수 있겠소?”
“현재 비밀리에 검사 수행 중이라 말씀드리지 못하는 점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하긴. 검사 수행 중에는 자신의 실력 양성을 위해 정체를 숨긴 채로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경우가 더러 있다지요? 고생이 많으시겠소. 허허.”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테오와 움베르토는 자연스럽게 나란히 정원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안토니우와 셀퍼드, 아린이 따랐다.
“우리 스피놀라가 란트 님에게 거는 기대가 아주 크다오.”
“그렇습니까? 기대에 부응하는 활약상을 보여야 할 텐데 걱정이군요.”
“겸손한 말투와 다르게 얼굴은 아주 자신만만하시건만. 후후. 본인은 그런 당찬 사람을 아주 좋아하지.”
곡선을 그리고 있는 움베르토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절대 만만하게 볼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안토니우에게 처음 연락받았을 때는 이 늙은이도 믿지 못했다오. 지금 군도를 덮치고 있는 위기를 구해줄 영웅이라니…… 등장 시기가 너무 공교로운 게 아니겠소?”
“그렇게 느껴지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소. 숨기고 있는 게 뭐가 됐든 간에 칼만 잘 들면 장땡이 아니냐는.”
‘말한 것처럼 못해낸다면 국물도 없을 줄 알라는 협박을 잘도 돌려서 하는군.’
테오는 웃음이 나왔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이런. 잔소리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말이오. 허허허. 그럼 이곳에 머무는 동안 내 집이다 하고 편하게 있다가 가시오. 안토니우, 안내 잘 해드리고 오너라.”
“예. 아버지.”
움베르토는 저택 앞에서 테오 일행을 전송하고 다시 정원으로 돌아갔다.
안토니우는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테오 일행에게 손짓했다.
“따라오십시오. 동료들이 안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