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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108화 (108/224)

108화

추운 겨울 (3)

다그다다그닥-

어느 마차 하나가 황폐해진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한바탕 전란이 쓸고 지나갔는지 농작물도 모두 엉망이었고, 건물도 성한 곳 하나 없었다.

끼이익!

그러다 마차가 중간에 멈추고, 천천히 문이 열리면서 에드 트로이반이 내렸다.

“하아…….”

가볍게 날숨을 내쉬고 있을 무렵,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맡아본 기분이 어떠하더냐?”

에드는 그쪽으로 몸을 돌리며 고개를 숙였다.

동방에서 유행한다는 비단옷을 입고, 신선처럼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두 명의 건장한 호위를 대동한 채 다가오고 있었다.

“아버지.”

“너의 소감이 궁금하구나.”

“엉망…… 이더군요.”

“그리고?”

“곧 뭔가 크게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혀 다른 세계로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에드는 북방을 떠나 동부 지역으로 들어서는 동안 봤던 마을들을 떠올렸다.

대부분 하나 같이 이 유령 마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농작물이 망가지고, 피골이 상접한 유민들이 떠돌아다니는 세계.

“이 정도였습니까?”

“그래.”

노인, 그라나다 트로이반은 뒷짐을 쥔 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갑자기 세계 곳곳에서 발생한 자연재해는 모든 걸 망가뜨리고 있다. 해수면이 올라가면서 저지대 지역이 온통 물에 잠기거나, 만년설이 그대로 녹아 토사로 산골 지역이 파묻힌 적도 있지. 남부 평야에서는 갑자기 냉해가 갑자기 닥치는가 하면, 동부에서는 메뚜기 떼가 범람해서 봄철에 파종한 농작물이 온통 엉망이 되었다.”

에드는 언젠가 정보기관을 통해 전해 들었던 제국의 현황을 하나둘씩 떠올렸다.

“해류가 갑자기 변하면서 활발하던 물류 유통이 방해받기도 하고…… 전염병이 도져서 수십만 명이 살던 도시 하나가 작살나기도 했지. 그런데도 제국은.”

그라나다의 말투는 덤덤했다.

하지만 에드는 그 아래에 짙게 깔린 분노를 놓치지 않았다.

“저 황제란 것은 간신과 환관들만 끼고 살면서 행정 체계를 온통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고 있지. 덕분에 곳곳에 민란이 발생할 조짐까지 보이는 중이다. 야망이 있는 놈들은 아예 대놓고 독립을 생각하고.”

“최근에 성마교의 교세가 급속도로 퍼진 이유가 있었군요.”

“혼란스러운 시대에 종교만큼 백성들이 의지할 곳도 없으니까.”

그라나다와 에드는 필요에 의해 성마교와 손을 잡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그들을 경멸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대전란(大戰亂)이 찾아올 것이다.”

대전란.

그 한마디가 에드의 심장을 강하게 눌렀다.

“그리고 그 뒤에는 더 큰……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파도가 올 테지. 저 북쪽에서부터.”

“…….”

“우리는 그것을 바로 잡아야만 하는 의무가 있다. 책무가 있다. 시대에 뒤처진 라그나르가 사라져야만 하고, 트로이반이 바로 서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니라.”

그라나다의 두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그것을 위한 열쇠가 바로 태고룡의 유물이다. 저 어리석은 라그나르는 제대로 풀지 못하고 있는 고대의 신비. 가져왔느냐?”

“여기 있습니다.”

에드가 손짓을 하자 대기 중이던 수하가 재빨리 궤짝을 바닥에 내려놓으면서 뚜껑을 활짝 열었다.

그 안에는 길쭉한 브로드 소드 하나가 쇠사슬에 칭칭 감긴 채 담겨 있었다.

그라나다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용활의 귀검입니다.”

“이게 그것이로군.”

“그동안 여러 유물을 만져보았습니다만, 단언컨대 이것이 가지는 가치에 비할 바는 아닐 것입니다.”

“그래도 여태 모은 유물들을 모두 멍청하게 도둑맞은 것도 사실이지.”

“…….”

“이것과 함께 반드시 확보해야 했을 장미궁의 유물도 놓쳤고. 에밀을 잃은 것치고는 그리 남는 장사라 하긴 힘든 것 같은데.”

“……면목 없습니다.”

에드는 고개를 깊게 숙였다.

“되었다. 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해봤자 뭐가 달라질까.”

그라나다가 허공에다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타다다당!

그러자 쇠사슬이 일제히 부서지면서 검이 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동시에 그라나다는 넓은 소맷자락 안쪽에서 푸른 열쇠를 하나 꺼냈다.

순간, 에드의 눈이 빛났다.

‘저것이 유물의 봉인을 푼다는 만능열쇠……! 그분에게서 받았다던 그것이로구나!’

두근두근두근!

그동안 자신은 단 한 번도 열지 못했던 유물의 신비를 엿볼 수 있을 것인가?

“용살의 마검…… 정말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이겠지?”

에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이름을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아이가 분명히 당대의 <선택자>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그분께서 아주 좋아하시겠군.”

그라나다의 입가에 처음으로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그럼 시작하지.”

그라나다가 푸른 열쇠를 검 쪽으로 가져갔다.

* * *

카일의 9룡 소집령 이후.

율리우스는 아주 피곤한 얼굴이었다.

처리해야 할 업무가 워낙에 많았기 때문이었다.

트로이반과의 전쟁 준비, 백갑용기대의 전력 분산 및 계획, 원로원과의 분쟁 뒤처리 등등.

그나마 기분 좋은 부분이 있다면 원로원이 어제 공표한 내용이었다.

-원로원은 향후 1년간 모든 기능을 폐쇄하고, 원로들도 모두 자리에서 내려와 수련검사와 같은 위치에서 오로지 트로이반과의 전쟁에 백의종군하겠다.

사실상 항복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원로원이 앞으로도 존경받는 곳으로 남으려면 무엇이든 해야 했겠지.

“……그래서 이제 좀 기분 좋게 업무 만지나 했는데.”

율리우스는 손에 잡힌 서류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표지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단독 작전 계획서.

“네가 나에게 또 일더미를 한가득 던져주는구나?”

그가 노려본 곳.

테오가 열중쉬어 자세로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한 게 맞기나 한가? 입가가 웃고 있는데?”

“이런. 실수했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이블린 밑에 넣는 게 아니었어. 그렇게 성실하던 애가 몇 달 사이에 변했어.”

율리우스는 서류를 아래로 내리면서 질문을 던졌다.

“활자 더 읽기 싫으니까 간단하게 설명해보게. 진행하고 싶다는 단독 작전이 무엇인가?”

“‘베노타’를 아십니까?”

“서북부 부유군도(浮遊群島) 자치령에 위치한 해운연맹을 말하나?”

“정확하게는 해운연맹의 꼭대기에 선 스피놀라, 그리말, 로멜린의 3대 상인 가문이 운영하는 자유도시를 말합니다.”

“뭐, 하여간 그렇다 치고. 그곳엔 왜?”

율리우스가 관심을 두는 곳은 백갑용기대가 담당하는 북방에 한할 뿐.

나머지 지역은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대부분의 북방인들이 가지는 자세이기도 했다.

제국 안에서도 별도의 문명과 왕국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북방인 특유의 기질은 다른 제국민들과 궤를 달리했으니까.

“블랙 스컬에게 흘러 들어간 자금 흐름이 그곳에서 시작되었다는 흑설의 정보 공유가 있었습니다.”

“뭐?”

율리우스도 그제야 반응을 보였다.

블랙 스컬. 5번조의 대원들을 상당수 목숨 잃게 했던 테러리스트.

“해서 직접 수사를 해볼까 합니다.”

“……조사는 어디까지나 흑설의 영역이다.”

“정보부장 님께도 이미 재가는 받았습니다.”

‘이 영감탱이가 진짜.’

율리우스는 이를 박박 갈았다.

또 자신도 모르게 흑룡이 몰래 테오를 만났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래도 당장 알고 있는 정보는 그게 전부이지 않나? 위험해. 필요할 때 우리 쪽에서 원조를 해주기도 너무 힘든 위치고. 흑설에서 조금 더 정보를 모아오기까지 기다리게.”

“백갑용기대의 5번조의 주요 역할은 원래 특수임무 수행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전검사부터는 단독 작전도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건 대장이 충분히 작전을 수행할 만하다고 판단되어 재가했을 때 이야기지.”

“대장님.”

“안 돼. 위험해. 돌아가.”

율리우스는 서류를 도로 앞으로 내밀었다.

“부유군도 자치령은 애당초 우리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일세. 세계의 돈이란 돈은 모두 끌어모은다고 할 정도로 부유하지만, 수많은 도망 노예와 망명자들이 살아가는 무법지대이기도 하지. 공공연하게 해군이랍시고 해적까지 부려 먹을 정도로 미친놈투성이 아닌가?”

“…….”

“그런데다가 블랙 스컬은 아직 정체도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한 자들이고. 그 전력이 현재 감지한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할 텐데 거길 혼자 가서 뭘 하겠다고?”

율리우스의 두 눈은 당장 불길이라도 쏟아낼 것 같았다.

“그래. 자네라면 뭐라도 해낼 수 있겠지. 분명히 내게 말 안 한 어떤 생각도 있을 테고. 그래도 위험한 건 위험한 거야.”

테오는 율리우스의 호통 속에 담긴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염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을 제자로, 자식으로, 수하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니까 더욱더 해야 해.’

블랙 스컬의 자금 흐름원이 베노타에 있단 사실을 알게 된 직후.

테오는 전생의 기억 속에서 해운연맹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성마교의 자금원.

-각지에서 벌어진 민란 봉기의 중심.

-대전란의 배후.

‘테러리스트인 블랙 스컬이 과연 베노타와 연관이 있는 게 우연일까?’

그러면서도 한 가지 생각이 더 들었다.

-블랙 스컬이 만약 베노타가 숨겨둔 칼 중 하나라면, 블랑키 요새전 이전부터 서로 원수 관계인 트로이반과 블랙 스컬은 어째서 대전란에서 함께 하게 되었는가?

뭔가 자신이 모르는 음모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걸 알아낸다면 보다 유리한 고점을 차지할 수 있을 거야.’

테오가 지난 며칠간 밤새워서 단독 작전 계획서를 정리한 이유이기도 했다.

‘용살검에 대한 비밀도 풀 수 있을 테고.’

블랙 스컬.

그들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제게 필요한 일입니다, 대장님.”

“…….”

테오의 눈빛에 율리우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확실하게 말씀드리지는 못하지만, 이 일은 트로이반과도 분명히 관계가 있습니다. 제가 움직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율리우스의 꽉 다문 입술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 일은 제 기반을 닦기 위한 첫술이기도 합니다.”

“……!”

그제야 율리우스의 입이 열렸다.

저절로 흘러나오는 짙은 한숨.

“……좋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어쩔 수 없지. 이번 작전에 한해서 재가해주마. 단, 이 사안은 아직 정보가 아주 부족하니 흑설과 공조해야만 한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쩝!

율리우스는 내심 이것이 제 손으로 직접 테오를 흑룡의 아가리 속으로 밀어 넣는 꼴이 아닌가 싶었지만.

그래도 어쩌겠나. 제자가 반드시 꼭 필요한 일이라고 사정하는데 들어줘야지.

테오를 차기 가주에 앉히는 것이 라그나르를 위한 일이라는 신념은 이미 율리우스의 머릿속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결국,

율리우스는 서류 위에다 자신의 직인을 크게 찍고 말았다.

쾅!

-재가.

“그리고 사수로 지원군도 붙여주마.”

“감사합니다.”

“많이는 못 줘. 이번 작전 때문에 총동원령이 떨어졌거든.”

“마음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럼.”

테오는 서류를 챙기며 고개를 숙이곤 집무실을 떠났다.

끼릭-

율리우스는 의자를 반대로 돌려 창가를 바라봤다.

하늘에서부터 눈송이가 풀풀 떨어지고 있었다.

“이번에 가면 해가 넘을 테니, 열여섯이 되어 돌아오겠군.”

새로운 나이가 된 테오의 모습은 어떨까.

벌써 기대된다는 생각에,

율리우스는 자기도 모르게 작은 미소를 짓고 말았다.

* * *

테오의 준비는 빨랐다.

‘만약 블랙 스컬의 배후가 진짜 베노타라면, 베노타가 트로이반에 붙은 데에는 그만한 음모가 있었을 거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원역사보다 훨씬 일찍 트로이반이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베노타에 대한 음모도 이미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커. 그것을 끊어내고, 가능하다면 베노타를 내 쪽으로 돌리자.’

나비 효과가 어떻게 미쳤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 점이 걱정이라면 걱정이었지만.

그래도 테오는 임기응변으로 어떻게든 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벌써 가시나요, 아드님? 샵 오픈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쉽군요. 새해도 얼마 남지 않았구요.”

세실리아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테오를 바라봤다.

테오는 쓰게 웃고 말았다.

지난번 수선궁 연회에서 있었던 일로, 테오가 당시 입고 있었던 예복에 대한 주문이 물밀 듯이 들어오고 있었다.

세실리아와 이블린이 입었던 드레스도 마찬가지.

덕분에 세실리아는 예정 기일을 훨씬 앞당겨 샵을 오픈하려 하고 있었다.

문제는 테오의 작전이 그보다 훨씬 더 일찍 시작되었다는 것.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그래요. 제게 저의 일이 있듯이, 아드님에게도 아드님의 일이 있겠지요. 미안해요. 괜히 먼 길 가는 아드님의 심려만 끼친 것 같아서.”

세실리아는 테오의 머리를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그래도 명심하세요. 아드님의 집은 바로 이곳이라는 것을. 힘들 때면 언제든 개의치 않고 돌아오세요.”

“예. 알겠습니다.”

테오는 뒷머리를 나긋나긋하게 쓰다듬는 세실리아의 손길을 한참 동안 만끽했다.

따뜻했다.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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