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6번째 후보 (3)
“야, 이게 누구야! 나반! 나반 맞지?”
갑작스러운 호들갑.
테오와 나반은 대화를 마친 뒤 연회장으로 돌아가려다 말고 들리는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한 남자가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사자 갈기처럼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흩뜨렸지만, 눈매만큼은 고고하게 빛나는 미남자.
‘토르켈 라그나르……!’
테오는 전혀 생각지 못한 권좌 경쟁자의 만남에 주먹을 꽉 쥐었다.
나반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토르켈을 맞았다.
“어, 그래. 음, 오랜만이다.”
“이게 얼마 만이야? 개화식 이후로 얼굴 한번 보자고 그렇게 사정사정해도 밖으로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서운했다고?”
“집안 사정도 있고, 뭐, 몸도 좀 안 좋고. 뭐 그랬, 어.”
“그래도 한 번씩 동기 모임에는 나올 수 있었잖냐. 너를 흑색철기대로 내가 얼마나 데리고 가고 싶어했는지 알면서.”
“그랬…… 나?
“그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이런 데서 만나니까 더 반가운데.”
사람을 대할 때 언제나 시니컬하게 대하던 나반이었지만.
유달리 토르켈을 대할 때는 쩔쩔매는 느낌이었다.
기가 빨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야 하나?
토르켈이 워낙에 사교성이 좋기로 유명하니 그의 성격이 먹히지 않는 느낌이었다.
‘슈퍼 인싸를 대하는 염세주의자? 뭐, 그런 거 같은데? 좀 재미있는데?’
그동안 나반에게서 볼 수 없었던 면모라, 테오도 신기하게 보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래서 아이얀, 그 녀석은 요즘 우리 흑색철기대에 있게 됐어. 웃기지?”
“어, 음, 어. 그런 거 같다.”
“아, 그동안 네가 어떻게 살았는지 물으려다가 너무 내 이야기만 해버렸네. 미안하다, 야.”
“아…… 냐. 아무것도.”
“그보다 옆에 있는 친구는? 아주 유명인을 친구로 삼은 것 같은데?”
토르켈의 부드러운 시선이 테오에게 향했다.
‘역시 날 알고 왔군.’
테오는 애당초 토르켈이 찾던 사람이 나반이 아닌 자신이었다는 추측에 확신을 뒀다.
새로운 6대 후보니, 검의 구슬을 받았니 하는 소문은 그동안 엉덩이 무겁던 5대 후보들의 엉덩이를 들썩이기에 충분했을 테니.
테오는 공손하게 예를 갖추면서 인사했다.
“테오 라그나르입니다. 고명하신 흑색철기대장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토르켈의 미소가 번졌다.
그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토르켈이다. 소문으로만 듣던 친구를 이제야 만나보는군? 백갑용기대로 갔다는 말은 들었다. 아쉽단 말이지. 우리 쪽으로 데려오고 싶었는데, 쩝!”
“좋은 제안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마룡 님께 받은 은혜가 워낙에 커서요.”
“그래. 인연이 아니었던 거지. 그래도 좋은 관계는 계속 유지할 수 있지 않겠어? 우리 흑색철기대와 백갑용기대는 연합 작전을 펼칠 때가 아주 많다고?”
“저 역시 토르켈 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영광이지요.”
“하하하. 말도 잘하는 친구였네?”
토르켈은 테오의 예의 바르면서도 당당한 태도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그렇기에 얼굴에서 아쉬운 마음이 더 떠나질 않았다.
“이거 계속 욕심이 드는데. 마음 같아서는 더 좋은 제안을 다시 주고 싶은데…….”
토르켈은 슬쩍 연회장 쪽을 봤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랬다간 날 당장 요리하려 드는 양반들이 너무 많아서 안 되겠네…….”
“……?”
테오는 토르켈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곧 다른 뭔가가 있겠지 하는 생각에 악수를 풀려 했다.
그런데,
파르르-
손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토르켈이 그런 자신을 짓궂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날 시험하고 싶은 모양인데?’
자신의 반응 과정을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겠지.
라그나르는 전통적인 북방의 무가.
대화의 근간은 결국 힘이었다.
고오오오-
테오의 마력이 빠르게 유동하면서 토르켈의 손길을 밀어냈다.
“오.”
토르켈의 눈가에 이채가 어렸다.
웬만한 실전검사들도 해제하기 힘든 압박이었을 텐데, 그걸 가볍게 풀어낼 줄이야.
하지만 더 놀란 점은,
‘마력의 본질을 읽기도 전에 구속을 풀었어.’
사실 그의 목적은 테오의 마력을 가늠하면서 특성이나 성질을 차분히 관찰하려던 것인데.
그러기도 전에 끝나버리니 알아낼 수 있는 점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외에 숨긴 것도 많아 보이고. 검의 구슬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걸 벌써 소화했을 리는 없고……. 우리 아버지, 아주 신나셨겠네.’
아쉽지만, 아쉬운 대로 얻은 소정의 대가는 있었다.
‘재미있잖아?’
그동안에는 손위 형제인 다른 후보들만 신경 쓰면 되었으니 쫓는 처지기만 했지만,
이제는 쫓기는 처지가 되기도 했으니 그 감각이 무척 신기했다.
물론, 싫지는 않았다.
투쟁이야말로 라그나르의 본질일지니.
그것을 거부하고 귀찮아하는 순간 도태되기 마련이었다.
“토르켈 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형제 사이에 토르켈 님이 뭐냐, 토르켈 님이? 앞으로 사석에서는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
“예. 알겠습니다. 형님.”
“편하게 부르라니까, 형님은.”
테오는 토르켈이 자신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토르켈이 테오와 나반을 번갈아 보면서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두 사람, 어떻게 알게 된 사이야? 어디 접점이 있을 만한 조합이 아닌데.”
“세레스 상단을 수사하던 중에 뵙게 되었습니다.”
“엥? 그때? 나반, 네가 왜 거기에 있었어? 아, 연루 혐의 자리에 있었던 거야?”
토르켈은 아무래도 자세한 전반 사정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반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때, 이 녀석을 주군으로 모시게 되었고.”
“……으잉?”
토르켈이 순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고, 테오의 시선도 황급히 그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나반은 폭탄선언을 하고도 덤덤한 모습 그대로였다.
역시나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었다.
“들은 그대로야. 더 이상 나눌 이야기는 없으니까 이만 간다.”
나반이 대답하기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치면서 자리를 떴다.
토르켈이 깜짝 놀라 그의 어깨를 붙잡으려 하던 그때였다.
“야! 말은 좀 제대로 하고……!”
콰아아앙!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연회장 쪽에서 폭발 소리가 들렸다.
테오와 토르켈, 자리를 뜨던 나반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으로 향하고.
그 순간, 보게 되었다.
고오오오!
연회장은 물론, 그 위의 하늘이며 수선궁까지 뒤흔드는 격진의 파동을.
-꺄아아악!
-무슨 일이야!
-마, 마룡과 우, 워, 원룡께서 부딪쳤다!
-9룡의 싸움이다! 9룡의 싸움!
세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빠르게 그쪽으로 뛰었다.
* * *
파직! 파지직!
고오오-
거친 두 개의 기세가 거듭 충돌을 반복했다.
이미 두 사람의 주변에 있던 탁상이며 집기들은 박살 난 지 오래였고, 사람들은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 두려운 눈길로 그들을 쳐다봤다.
자연재해가 눈앞에 있었다.
기세를 일으킨 것만으로도 이 정도라니, 저들이 정말 같은 사람이 맞는 걸까?
그런 의심을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정작 이 사달을 일으킨 울프강과 율리우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뭐…… 라고 했나, 백갑용기대장? 허허허허. 이 노인네가 나이를 많이 먹어서 그런가, 환청이라도 들은 모양일세.”
“이런. 그러게 그 나이가 되셨으면 뒷방에 앉아서 벽에다 똥칠이나 하고 계시지, 뭘 하러 여기까지 나왔소?”
“……지금, 그걸 말이라 하는가?”
“제대로 못 들었다고 하니 다시 말씀드리지.”
율리우스의 한쪽 입꼬리가 크게 비틀렸다.
“뒈지게 처맞고 싶냐고 물었소.”
“감히!”
고오오오오-
울프강을 중심으로 일어난 돌풍이 사방을 휩쓸었다.
주름이 가득한 그의 눈동자 위로 불똥이라도 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쿠쿠쿵!
울프강이 일으킨 막강한 기세가 갑자기 상공에서 내려온 거대한 압박에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용 한 마리가 장벽 너머에서 이쪽을 노려보는 것 같았다.
“……!”
울프강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여태껏 마신 술기운이 한꺼번에 달아나는 기분.
‘이런!’
그 순간, 울프강은 떠올리고 말았다.
지난날.
저 시건방진 백갑용기대의 상급검사가 한쪽 팔을 잃었을 무렵, 홀로 원로원에 들이닥쳤던 율리우스의 모습을.
당시 라그나르를 대표한다는 원로 중 절반 이상이 팔다리가 반대로 꺾이고 말았으니.
개중에는 바로 자신도 있었다!
“내가 분명히 말했었지?”
율리우스는 더 이상 존대도 하지 않았다.
낮은 목소리는 울프강이 겨우 묻어뒀던 그날의 기억을 새록새록 떠올리게 했다.
-혹여 이 일을 빌미로 그 아이를 해코지하려 들거나, 몰래 개수작이라도 부린다면. 아니! 그 아이의 눈에 두 번 다시 눈물이 흐르는 날에는. 그땐.
“당시엔 당신들의 체면이 있어 그 정도로 끝나지만, 두 번은 봐주지 않을 거라고.”
-당신들의 팔도 똑같이 그 어깨에서 뽑아주지.
종말을 불러일으킨다는 용답게 서슬 퍼런 경고를 날리던 그때의 율리우스와 지금의 율리우스가 겹쳐 보이는 건 왜일까?
“잠……!”
울프강은 불안감에 뭐라고 소리쳤지만,
콰드드득-
율리우스는 그 전에 이미 붙잡고 있던 울프강의 오른쪽 손목을 반대편으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콰콰콰콰!
팽팽한 기세의 충돌.
두 월계검사가 내뿜는 기세 충돌이 단번에 궁을 무너뜨리는 게 아닐까 싶어질 정도로 격렬하게 벌어졌다.
울프강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승부는 얼마 가지 않아 끝나고 말았으니.
으드득-
뼈가 빠지고 으스러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촤아아악!
오른팔이 송두리째 뽑혀 나왔다.
푸우우우-
“아아아아악!”
졸지에 한쪽 팔을 잃은 울프강이 괴성을 질렀다.
사방으로 튀는 피분수 사이로 율리우스의 두 눈이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 원로원장 님!
-원로원장 님을 보호하라!
-백갑용기대장이 원로원장 님을 해코지했다!
주변 일대가 어수선해졌다.
처처처척!
순간, 하늘에서부터 여러 검사들이 내려와 일제히 율리우스에게 검을 겨누었다.
-율법검사다!
-율법청이 나타났어……!
“백갑용기대장 님, 원로원장 님께 상해를 입힌 현행범으로 체포하겠습니다. 저희와 함께 가주시지요.”
말을 꺼낸 율법검사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얼굴에서는 바짝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율리우스가 그들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답조차 없었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서둘러 격리해야 할 텐데……!’
율법검사는 곧 불어 닥칠 폭풍을 짐작하고 이를 꽉 깨물었다.
「대장!」
「걱정하지 마라. 이번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이블린은 율리우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대원들을 아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 보인 모습은 정치적인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는 자충수였다.
겉보기에 이블린이 입은 피해는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그녀가 아는 율리우스는 엉뚱하고 노는 걸 좋아하는 한량이긴 해도, 심계 만큼은 에드에 못지않게 깊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감정적이다.
마치 자신의 일이기도 한 것처럼.
‘…….’
율리우스의 넓은 등판을 보는 이블린의 눈동자가 떨리는 가운데,
“크윽……! 한낱 여자 때문에 날 이 꼴로 만들어? 백갑용기대장! 네놈이 미치지 않고서야!”
율법검사들에게 보호받던 울프강이 허리를 세우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른팔은 검사의 자존심이자 생명.
오늘 그는 자존심과 생명을 같이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 어깨 위에 있는 걸 뽑아버리지 않은 걸 천만다행이라 여겨야 하지 않소?”
“이 미친놈이 기어코!”
너무나 오만한 발언에 울프강의 두 눈이 부릅떠진 순간,
“백갑용기대장! 지금 이 일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야 할 것이오-!”
파라라락!
하늘에서 막강한 기세를 뿌려대며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율법검사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기어코 우려하던 상황이 터진 것이다.
원로원의 고수들 개개인이 뿌려대는 기세는 율리우스에는 부족할지라도, 같이 뭉쳐놓으니 연회장을 가볍게 뒤덮을 정도였다.
아무리 울프강이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엄연히 원로원을 책임지는 장(長).
그에 대한 수모는 원로원에 대한 도전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침 잘 되었군. 당신, 당신, 당신, 당신.”
하지만 율리우스는 여전히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익숙한 면면을 손으로 하나씩 점찍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원로들의 얼굴이 구겨지는데,
“그때 원로원에 있던 얼굴들이지? 그럼 내가 했던 말도 기억하고 있겠지?”
눈치 빠른 원로들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었다.
“귀찮으니까 다들 팔 하나씩 내밀어. 아주 예쁘게 잘라줄 테니까.”
“……!”
“……!”
“……!”
“네 녀석의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파아아아-
차차창!
원로들의 기세가 이제 날카롭게 뒤섞였다.
더 이상 봐주지 못하겠다는 듯 검까지 뽑았다.
율리우스도 바라던 바였다면서 차갑게 검을 뽑던 그때였다.
“내 딸의 생일잔치에서, 감히, 이게 무슨 짓이지-?”
와장창!
연회장을 가득 물들이던 살기가 유리장처럼 단번에 깨졌다.
율리우스와 원로들, 그리고 군중들의 시선이 모두 수선궁 지붕 위로 쏠렸다.
그곳에.
달을 등진 채로 수선궁주 빙룡 니엘이 차가운 얼굴로 연회장을 굽어보고 있었다.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