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찾았다, 드디어 (4)
윈터러에 한 가지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테오 라그나르가 역대 최단 시간으로 승급 신기록을 세웠다. 실전검사가 되었다.
가뜩이나 테오가 개화식에서 세운 기록으로 여전히 윈터러가 끓고 있는 이때.
다시 새롭게 던져진 떡밥(?)은 불길에다 기름을 끼얹은 꼴이었으니.
-실전검사? 그게 말이나 돼?
-거짓말 아니지?
-아냐. 정식으로 발표됐어.
-미친……! 아니, 그보다 그동안 발표된 승급 시험도 따로 없었잖아? 대체 언제 된 거야?
-그게 비밀 임무에서 세운 공적으로 내린 결론이래.
-임무 몇 번 받았다고 승급이 될 것 같았으면 난 진즉에 상급검사가 됐겠구만. 이거 한번 주목받기 시작하니까 상부에서 억지로 밀어주는 건 아니지?
물론, 개중에는 형평성 문제를 두고 의문을 드러내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의심은 금세 꼬리를 말고 말았으니.
-혈사제를 잡았다던데?
-응?
-혈사제를 잡았다고.
-……!
-게다가 둘이나 되는 혈사제의 협공을 밀어내기도 하고…… 하여간 목격자가 많았나 봐. 백갑용기대 뿐만 아니라, 흑설이랑 매화궁까지 합격 발표에 동참했어. 진짜란 거지.
-아무리 라그나르의 직계라지만 이 말도 안 되는 재능은 대체…….
백갑용기대가 주장했다면 제 식구 감싸기라고 의심이라도 했겠지만, 다른 부대들까지 동참했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거기다 흑룡이 다스리는 흑설은 어느 파벌에도 줄을 서지 않는 중립 기관.
그들의 인정이 가지는 무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의문을 가지는 것부터가 카일의 권위에 도전하는 꼴이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감탄을 터뜨리면서도, 새로운 이야기를 하나둘씩 꺼내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재능.
열다섯이라는 나이에 실전검사가 된 그 재능에 주목한 것이다.
그것은 이제 기억하는 이들도 그리 많지 않은 옛 과거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었으니.
-카일.
60여 년 전, 카일이 처음 검을 잡았을 때 이런 광풍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는 무서운 속도로 성장해서 끝끝내 광룡제를 권좌에서 끄집어 내리는데 성공했으니.
그러다 보니 이것은 자연스레 새로운 화제에 닿고 말았다.
-십 년 넘게 5대 후보로 구축되었던 계승권 다툼에 지각 변동이 벌어지는 게 아닐까?
그동안 토르켈을 비롯한 5대 후보들은 따로 테오와 접선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이렇다 할 뉘앙스도 풍기지 않았다.
마치 그라는 존재에 대해서 전혀 모르기라도 한 것처럼.
간간이 토르켈만이 테오에 대한 호의적인 메시지를 던질 뿐, 그 역시 직접 테오와 만나기 위해 움직이지는 않았으니.
세간에서는 이를 두고 5대 후보가 테오의 행보를 관망 중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실제로 나반 바커스처럼 개화식에서나 이름을 떨칠 뿐, 그 뒤에는 별다른 빛을 보지 못하고 묻힌 인재들도 수두룩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테오의 실력이 실전에서도 먹힌다는 것이 입증된 이상.
그리고 그의 재능이 카일에 비견될 만하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는 이상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토르켈의 흑색철기대가 움직이고, 다른 후보들도 간부들을 비밀리에 소집했다는 소문이 조금씩 퍼지기 시작했다.
윈터러가 본격적으로 꿈틀거리려던 바로 그때.
소문의 주인공이 가문으로 복귀했다.
* * *
“섬야차.”
“……?”
테오는 윈터러로 복귀하자마자 곧바로 백갑용기대 본부를 찾았다.
이번 일은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먼 길을 단숨에 주파했더니 그의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다.
그런데 율리우스가 다짜고짜 알 수 없는 말을 던졌다.
이게 무슨 뜻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율리우스가 씩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번에 네게 붙은 별호다. 어때? 맘에 드나?”
“……제겐 별호가 있지 않았습니까?”
“있었지. 섬호인지 뭔지 하는. 하지만 그건 아는 사람만 알지, 그렇게 유명한 건 아니기도 했지. 개화식에서만 퍼졌던 거니.”
율리우스의 웃음이 더 커졌다.
“하지만 이번엔 달라. 홀로 혈사제를 잡았다지? 게다가 아직은 엠바고가 걸리긴 했지만, 기무국장의 금고도 털어버렸고. 단시간에 실전검사가 되기도 했지. 당연히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이거겠지.”
테오는 계면쩍은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난감했던 것이다.
그가 회귀 뒤에 익숙지 않은 게 있다면, 바로 이러한 주접…… 아니, ‘환호’였다.
“칼을 휘두를 때마다 노란 뇌전이 튀고, 하얀 증기를 풀풀 날리고, 붉은 불길이 치솟는다며? 그런 뒤에는 적의 피를 흠뻑 뒤집어써서 지옥의 야차가 따로 없고.”
‘그…… 렇게까지 소문이 났다고?’
테오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율리우스는 그런 테오의 반응이 재미있었던지 쾌활하게 웃었다.
“뭘 그리 부끄러워하나? 처음 입대했을 때는 최연소 대장이 될 거라고 호기롭게 외치더니, 그 호기는 다 어디로 가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하여간 우리 백갑용기대가 아주 기가 막힌 보물을 얻었어. 기가 막힌 보물을.”
“그게…….”
“혹시 활동하면서 필요하다 싶은 건 없나? 있으면 내가 사비를 털어서라도 바로 지원해주겠네. 대련 상대가 필요하면 도움도 주고.”
“음, 어…….”
“내가 자랑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이래 봬도 명색이 마룡 아닌가, 마룡. 다 말만 해. 우리 예쁜 새끼를 위해서 뭘 못 해주려고.”
이러다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분위기라, 테오는 슬쩍 도와달라는 뜻으로 이블린을 돌아봤다.
하지만 이블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나이에 안 어울리게 원래 푼수 같은 면이 많은 분이시니까…… 좀 깨더라도 그냥 참고 넘어가. 어쩔 수가 없어.」
그동안 알지 못했던 율리우스의 새로운 면모에 테오가 뒷걸음질을 슬쩍 할 무렵이었다.
“이번 유명세에는 우리 흑설의 뛰어난 첩보력이 뒷받침되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만.”
휘리릭!
갑자기 천장에서 흑룡이 팔짱을 낀 채로 떨어졌다.
순간, 헤픈 웃음을 짓던 율리우스의 얼굴이 도끼눈으로 돌변했다.
이 양반이, 여기가 어디라고!
그렇게 외치는 것 같았지만.
흑룡은 전혀 개의치 않고 테오에게 자기 할 말만 할 뿐이었다.
“테오, 네가 앞으로 크게 활약하는 데 있어 우리 흑설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은데. 너와 우리의 합은 세계 제일이다. 구미가 당기면 언제든 나를 찾아오너라.”
휙-
테오는 흑룡이 던지는 걸 얼결에 받았다.
검은 용이 새겨진 목패였다.
“이게 무엇입니까?”
“무설의 증명패다.”
“……!”
테오의 두 눈이 확 커지고,
「이 양반이 진짜!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율리우스는 다급하게 전음을 쏘아붙였다.
테오가 있어 체면 차리느라 꾹 참고 있을 뿐, 그게 아니라면 당장 흑룡의 멱살이라도 붙잡았을 태세였다.
「아우야, 이래서 네가 아직 아마추어라는 거다. 잘 보아라. 마음에 드는 인재가 있을 때는 원래 이렇게 꼬드기는 거란다.」
「……!?」
「뇌물만큼 확실한 것도 없지.」
테오가 말했다.
“전……!”
“아, 백갑용기대를 그만둘 생각이 없다는 네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 걱정 마라.”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절 도와주시는 겁니까? 청명단을 주시고, 열결의 식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만으로도 제겐 과분한 도움이었습니다.”
테오는 흑룡의 이런 모습이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와 자신은 사실 이렇다 하게 감정적 교류를 나눈 적이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흑룡은 카일과 마찬가지로 회귀자를 증오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잘 대해주는 걸까?
「뭐야? 도둑고양이처럼 언제 뒤로 그런 짓까지 했어?」
흑룡은 이번에도 율리우스의 항의를 귓등으로 흘리면서 대답했다.
“그냥.”
“……?!”
“그동안 네가 하는 짓이 당차고 예뻐 보여서. 그래서 좀 더 믿고 봐도 되겠다 싶었을 뿐이다.”
“그렇…… 습니까?”
테오는 여전히 흑룡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그동안 보인 모습들 중에서 어떤 면모가 그의 마음을 조금씩 돌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뭐, 너무 받기가 부담스럽다면. 그래. 그냥 삼촌이 조카에게 주는 선물 정도로 해두면 어떨까 싶은데?”
“……!”
테오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가 카일의 친동생인 건 사실이니, 생물학적으로 자신과 숙질 관계인 건 맞았다.
하지만 흑룡이 사적인 잣대를 들이댄 적이 있었다는 말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흑룡은 자신의 말만 이어나갈 뿐이었다.
“그 증명패만 있으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흑설의 안가(安家) 이용은 물론, 지부의 적극적인 지원까지 받을 수 있을 거다. 더 자세한 사용 설명은 나중에 클레베를 통해 알려주도록 하마.”
사실상 무설에 버금가는 권한을 그냥 손에 쥐어주겠다는 의미.
테오는 여전히 흑룡의 뜻을 알 수 없었지만, 가면 너머에 비치는 흑룡의 눈매는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율리우스로서는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
「이렇게 내가 보고 있는데 대놓고 뇌물을 쓴다고? 내가 아주 호구로 보인다, 이거지?」
「후후후. 앞으로도 정신 똑바로 차리는 게 좋을 게다. 나처럼 눈 뜨고도 코 베어가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닐 테니까.」
「진짜 나랑 싸우기라도 하자는 거야 뭐야?」
「이길 자신은 있고?」
「와, 씨……!」
「억울하면 너도 하던가.」
「두고 보쇼. 형님도 그렇고 오사도 그렇고, 내 새끼한테 자꾸 군침 바르려는 사람들 아주 주둥이를 다물게 해주려니까. 나라고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줄 아나?」
「그러니까, 해보라니까?」
「아오……!」
「후후! 하여간 나는 바빠서 이만 가보마.」
흑룡은 율리우스의 화병을 더욱 부채질하면서 나타났을 때처럼 떠날 때도 홀연히 사라졌다.
마치 허깨비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한 기분.
테오는 멍하니 흑룡이 있던 자리를 바라봤고, 율리우스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지로 삭이면서 억지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한쪽 입꼬리가 들썩거렸다.
‘우리 대장님, 오늘따라 고생 많이 하시네.’
이블린만이 율리우스의 속내를 정확하게 읽고 소리 죽여 웃었다.
“너의 활약상이 마음에 들어 정보부장께서 큰마음 먹고 선물을 주신 것 같은데, 앞으로 요긴하게 잘 쓰려무나. 사용하기에 따라서 네겐 그 어떤 보검보다 더 날카로운 보검이 될 테니.”
율리우스로서는 전혀 마음에도 없는 말이었지만.
테오는 무겁게 알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 다시는 엮일 일이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래. 이렇게 된 이상 받아들이자. 율리우스의 말마따나 거부할 필요는 없어.’
테오는 그동안 모른 척하던 사실을 인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의 기질은 흑설과 아주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비록 전생의 좋지 않은 기억들이 남아있어 의도적으로 흑설과 거리를 두려 했지만,
여전히 그에게는 그때의 버릇이 아주 깊게 남아있었다.
세상을 보는 시야,
사고하는 방식,
계획을 짜는 방향 등등.
그러니 이 증명패도 확실하게 잘 사용할 자신이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회귀자를 그토록 증오한다던 흑룡이 내게 계속 호의를 보이는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율리우스는 증명패를 가만히 쓰다듬는 테오를 보면서 가볍게 헛기침하면서 말했다.
“험험! 허어엄!”
“……?”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다 알아듣습니다.」
보다 못한 이블린의 핀잔이 들렸지만, 율리우스는 전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아무튼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고, 항룡의 이적 행위에 대한 증거도 확실하게 붙잡았으니 뒷정리도 마저 해야겠지.”
뒷정리.
순간, 테오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가 가장 기다렸던 말이었다.
“이제 중앙기무국장을 축출하는 겁니까?”
율리우스도 더 이상 장난치지 않고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미 그와 관련된 준비는 모두 마친 상태다. 가주전의 승인도 받았고.”
가주전의 승인.
사실상 카일이 허락했다는 의미였다.
“현재 중앙기무국장은 흑설에서 부탁한 일로 외부에 출타 중인 상태고…… 곧 정보부장께서 무설을 이끌고서 체포를 시도하실 거다.”
‘흑룡이 바로 떠난 이유가 그것 때문이구나.’
“나는 이대로 병력을 이끌고 매화궁의 협조를 받아서 중앙기무국을 점거할 예정이고.”
“수장이 없는 때를 노리시는 거군요.”
“중앙기무국의 국장에 대한 충성심은 아주 유명하니까. 그전에 제압해둬야지. 그를 일부러 외부로 분리한 것도 그 때문이고.”
테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율리우스와 흑룡의 일처리는 확실했다.
앞으로 그가 배워야 할 점이었다.
“그리고 네가 할 일은 장미궁 진압이다.”
테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드디어……!’
율리우스가 그의 어깨를 두들기면서 말했다.
“이번 작전은 모두 너의 활약상이 없었다면 순조롭게 풀리기 힘들었을 것들이었다. 그러니 마무리도 직접 네 손으로 해야지.”
테오는 이것이 율리우스가 자신을 위해 마련한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제대로 된 입지와 명망을 갖출 수 있게 무대를 만들어주시려는 거야.’
장미궁에는 3부인 에밀 트로이반이 산다.
정실부인이라는 뜻.
그런데 일개 서자인 테오가 그런 에밀을 반란죄로 체포한다?
가뜩이나 개화식과 실전검사 승급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테오의 이름값이 사람들의 뇌리에 확실하게 박힐 수밖에 없는 대사건이었다.
거기다 에드와 트로이반까지 엮인 일이니, 이슈는 계속 눈덩이처럼 커질 수밖에 없었다.
트로이반과의 전쟁까지 이어진다면.
그 태풍의 중심 속에는 항상 테오가 자리 잡게 되겠지.
계속 그의 이름을 윈터러에 각인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율리우스는 테오 모자와 악시온 모자간에 있었던 악연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그 마무리를 테오의 손에 맡겨주는 것만으로도, 테오로서는 어떻게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받게 되는 셈이었다.
그뿐인가?
흑룡이 이제 본격적으로 마음을 열어주기까지 했다.
테오를 ‘회귀자’가 아닌 ‘조카’로서 보기 시작했다는 뜻.
‘율리우스, 매화궁주, 흑룡……. 모두 내게 힘을 실어주고 계셔. 내겐 너무나 과분할 만큼, 그런 힘을.’
그러니,
‘제대로 끝내야지.’
실망하게 만들 수 없었다.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