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꼬리잡기 (3)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약혼식은 반드시 성공해야만 한다. 그것만이 네놈의 쓸모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 테니까.”
“…….”
나반 바커스는 가만히 가문에서 붙여준, 아니 정확하게는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붙은 수호기사를 바라봤다.
퀭하게 가라앉은 눈.
동공에는 광기마저 어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약에 시달리고 있는 비정상적인 상태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큭! 바커스도 갈 때가 다되었군요. 아무리 내놓은 사생아 취급이라지만, 그래도 자식을 팔아 돈을 구걸하는 신세라니.”
“죽고 싶은 것이냐?”
수호기사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여차하면 검을 뽑겠다며 손잡이 쪽으로 손을 가져갔지만.
“죽일 테면 죽여 보시던가.”
나반은 도리어 코웃음만 칠뿐이었다.
“세레스 상단주께서 모가지만 댕강 남은 사위를 무척 좋아하시겠군요. 아, 정말 좋아하시려나? 딱히 뭘 먹이거나 재울 필요도 없으니 돈은 덜 들 테니까? 상단주가 그렇게 돈 쓰는 데 인색하시다는 말은 들었는데 말입니다.”
“이놈이……!”
“눈깔에서 힘 푸십시오. 눈알 빠질라. 제 주제는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아니까 걱정 마십시오. 충성을 다 바쳐서 세레스 상단의 돈이란 돈은 죄다 싹싹 긁어 와서 가문에 가져다 바치죠. 큭큭!”
“…….”
수호기사는 손잡이에 얹은 손을 풀었다.
더 이야기를 나눠봤자 신경만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바커스 가문과 세레스 상단의 혼사.
두 곳 전부 라그나르와 봉신 관계라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두 세력은 비교할 거리가 되지 못했다.
한때 6설가의 선두를 달리던 전통과 역사를 가진 바커스 가문과,
탄생한 지 100년도 되지 못한 일개 장사치 집단에 불과한 세레스 상단.
두 곳의 결합은 애당초 바커스 가문에게 ‘격’이 맞지 않았다.
하물며 세레스 상단에서 내놓은 여식은 장녀도 아닌 일개 4녀. 유산에 대한 지분조차 없었고, 심지어 몇 달 전에는 테오에게 오른팔이 잘리는 수모까지 겪었다.
그런데도 혼사가 추진되기 시작한 것은 그만큼 바커스 가문의 사정이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이번 위기만…… 이번 위기만 해결할 수 있다면 가문은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수모는 이번 한 번만 참으면 되는 것이야.’
세레스 상단의 4녀는 꽤 많은 지참금을 가지고 오기로 이야기가 된 상태.
현재 빚더미에 눌려 가문이 파산하기 일보 직전인 바커스 가문으로서는 충분히 숨통이 트일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어차피 가문에서도 내놓은 사생아이기도 하고. 남은 수명도 5년조차 안 된다고 하였으니 뒤탈도 없다.’
대외적으로 나반은 1부인 소생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사실은 가주가 전쟁터에서 우연히 품은 창녀의 자식이었다.
바커스 가문 특유의 회색 머리칼이 아니었다면 애당초 자식으로 인정하지도 않았으리라.
그러니 세레스 상단으로 보내는 것도 망설임 없이 추진할 수 있었다.
약을 먹지 않으면 닷새 이상을 살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약점도 있었고.
그러니 골칫거리는 골칫거리대로 치우고, 돈은 돈대로 챙겨서 가문을 다시 부흥시키리라.
수호기사는 그런 꿈에 부풀어 있었다.
‘멍청하긴. 그게 정말 될 거라고 생각하나? 저 계산 빠른 쿼드락과 에드가 그런 우리 속내도 모르고 있으려고?’
반면에 나반은 검만 휘두를 줄 알지, 세상 물정은 전혀 모르는 가문 사람들의 멍청함에 코웃음만 나왔다.
모르긴 몰라도, 이번 혼사는 미끼에 불과할 것이다.
바커스 가문을 통째로 집어삼키기 위해 교묘하게 만들어진 미끼.
덥석 물고 나면?
뒤늦게 정신 차렸을 때는 이미 쿼드락의, 아니, 에드 트로이반의 뱃속에 들어있을 터였다.
실제로 가문에게 이번 혼사를 추천한 것도 에드 트로이반이었으니.
겉으로는 그들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나반은 에드가 가진 야망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가문의 자산 중 대부분이 에드 트로이반이 만든 위장 집단에 이리저리 저당 잡힌 상태.
가솔도 상당수가 저쪽으로 회유되었다는 것을 가문의 직계만 모르고 있었다.
나반은 진즉에 그걸 눈치채고도 입을 꾹 닫고 있었고.
‘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잖아?’
5년도 남지 않은 인생.
그 안에 가문이 활활 불타는 모습이라도 구경이라도 해야 재미있을 테니.
‘애당초 열다섯밖에 되지 않은 햇병아리에게 장가가라고 등 떠미는 것부터가 제정신으로 할 짓은 아니었지만.’
큭!
나반이 기괴한 웃음을 터뜨리던 그때였다.
“안으로 모시라는 상단주 님의 전언이십니다. 절 따라오시지요.”
총관이 어느새 나타나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반과 수호기사가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 * *
“세레스 상단의 4녀와 바커스 가문의 2남 사이에 혼사 동맹이 추진되는 중이라는군.”
흑설에서 가져다준 기밀을 말하는 클레베의 입가에 냉소가 맺혔다.
“그리고 그걸 기념하는 연회에 북방의 꽤 많은 상단이 축하 인사차 사절들을 보내면서 도시가 꽤 시끄러운 상태이고.”
“세레스 상단이 바커스 가문을 삼키고, 나아가 ‘북부상인조합’의 결속력까지 완전히 갖추려는 속셈이로군요.”
테오의 평가에 클레베는 웃음을 터뜨렸다.
단순 정보만 듣고 의도를 파악하는 솜씨는 정말 기가 막혔다.
어디서 다른 정보를 듣는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이렇게 기가 막힌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거지?
“맞다. 무력과 재화. 모든 걸 갖추게 되는 셈이지. 에드 트로이반에게 아주 그럴 듯한 새로운 칼 한 자루가 생기는 셈이다.”
“우리는 그걸 부러 뜨려야 하는 것일 테고요.”
“그런 셈이지.”
“어렵겠군요.”
“말과 다르게 재미있어하는 것처럼 보인다만?”
테오는 대답 없이 웃었다.
클레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네도 이제는 능구렁이처럼 보인단 말이지.”
테오는 검지로 볼을 긁적이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세레스가 바커스를 삼키기 시작할 때가 슬슬 이 무렵부터였나?’
이 일의 전후 사정은 테오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검가(劍家)’로 거듭난 세레스는 에드와 악시온의 반란에서 가장 큰 활약상을 펼친 곳 중 하나였으므로.
바커스 가문을 삼키고, 북부상인조합의 자금을 같이 등에 업은 세레스는 그만큼 강했다.
‘그걸 사전에 끊어낼 수 있다면 에드 트로이반도 왼팔 하나가 잘리게 되는 셈이다.’
테오는 우연히 주어진 이 기회가 아주 잘 되었다 싶었다.
‘어쩌면 ‘단명유검’, 그 친구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단명유검(短命幽劍).
말 그대로 ‘목숨이 짧은 유령의 검’이라는 뜻으로, 세레스의 사위로서 큰 활약상을 펼쳤던 나반 바커스가 받게 될 별호였다.
나반 바커스는 테오의 기억에도 선명하게 남아있을 만큼 대단한 업적을 이뤄냈다.
그로 인해 질풍검단의 단장이 전사하고, 꽤 많은 부대가 피해당했으니.
하지만 그는 타고난 질환 때문에 얼마 가지 않아 급사하고 말았다.
오죽하면 세레스의 가주, 쿼드락이 죽기 전에 ‘사위가 반년만 더 오래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한탄 어린 유언을 남겼을까.
‘어쩌면 이 기회에 내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지도.’
테오의 두 눈이 예리하게 빛났을 때쯤.
저 멀리 세레스 상단의 본단이 위치한 도시가 보이기 시작했다.
클레베가 말해준 것처럼 상단의 본단 앞은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하나 같이 여러 대의 마차나 수레 따위를 이끌고, 일꾼들의 어깨에는 큰 봇짐이 들려 있었다.
머리 위로 나부끼는 깃발의 수가 몇 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북부상인조합.
세레스 상단을 중심으로 북방의 상단과 상회들이 모인 조합이었다.
원래는 정보 교환을 나누기 위한 단순 사교 모임이었으나, 언제부턴가 이익 집단화가 되어 있었다.
라그나르도 신경 쓸 정도로.
“위세를 자랑하려고 아주 작정했군요.”
그런 놈들을 내려다 보는 헤이젤의 시선에 영 못마땅한 기색이 어렸다.
클레베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만한 위치에 앉을 수 있는 것도, 위세를 누릴 수 있는 것도, 전부 라그나르의 힘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을 왜 모르는 건지.”
“원래 사람은 잘 되면 그것을 운이라고 여기기보다 자신의 실력이라고 착각하기 쉽죠.”
테오도 똑같이 냉소를 흘리면서 대답했다.
클레베가 맞는 말이라며 실웃음을 흘리고는 크게 외쳤다.
“그럼 전원 하강한다!”
클레베의 명령에 따라, 테오와 이블린, 헤이젤이 모두 지상으로 몸을 던졌다.
-어, 어어……?
-저게 뭐야?
-하늘에서 뭔가가 떨어진다!
-사, 사람인가? 그런데 왜 이쪽으로 오는 거야!
-피, 피해!
본단 앞에서 줄을 서고 있던 북부상인조합의 사람들은 고개를 위로 들었다가, 하나 같이 혼비백산하면서 뿔뿔이 흩어졌다.
쾅! 쾅! 쾅! 쾅!
그런 사람들 사이로 테오 일행이 굉음을 터뜨리면서 착지하고,
채채채챙!
“너희들은 누구냐!”
“목적을 밝혀라!”
본단 주변을 지키고 있던 병사와 용병들이 일제히 그들에게 검을 겨누었다.
“테오.”
“예!”
테오는 클레베의 명령에 따라 미리 받아 챙겼던 단봉을 품에서 꺼내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단봉의 잠금장치가 해제되면서 봉이 순식간에 그의 키보다 훨씬 커지고,
안쪽에 돌돌 말려 있던 천이 바람에 나부끼면서 휘장이 힘차게 드러났다.
퍼얼- 럭!
아홉 개의 머리를 지닌 용이 검을 물고 있는 표식.
라그나르의 휘장이었다.
-저, 저건……!
-라, 라, 라그나르가 갑자기 왜!
라그나르!
북방을 대표하는 얼굴이지만, 그만큼 북부인들에게는 저승사자나 다름없는 곳의 등장.
상인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고 말았다.
꽈악.
깃대를 쥐고 있는 테오의 손에 힘이 바짝 실렸다.
깃발은 곧 대가문의 권위.
대가문의 얼굴이기도 했다.
그런 것을 테오에게 직접 맡겼다는 것은 그만큼 클레베와 일행들이 그를 믿는다는 뜻이었다.
깃발 아래에서,
클레베가 사자후를 터뜨렸다.
“지금부터 라그나르의 행사를 시작하겠다! 이를 방해하려는 자, 저지하려는 자, 훼방을 놓으려는 자는 모두 라그나르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판단하여 즉결 처형하겠다-!”
처형하겠다…… 처형하겠다…… 처형하겠다…….
그녀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사방에 메아리치면서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 위세에 눌린 상인들은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고,
정문에서 손님을 맞고 있던 세레스 상단의 총관은 사색이 되어 부리나케 튀어나와 허리를 숙였다.
“대, 대가문에서 대체 어쩐 일로 이런 누, 누추하신 고, 곳까지 해, 행차를 하, 하신……!”
클레베가 싸늘한 얼굴로 총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그대가 세레스 상단주인가?”
“아, 아닙니다! 저, 저는 이곳의 총관인……!”
“감히 상단주도 아닌 일개 가솔 따위가 감히 가주 님의 지엄한 명령을 수행하고자 온 집행관을 상대하려 드는가-! 세레스가 언제부터 이따위로 오만했었지?”
“……!”
총관의 얼굴은 이제 사색이 되다 못해 이제 숨이 넘어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안색이 파리해졌다.
-북부의 용이 움직이면 주변은 온통 불바다가 된다.
북방에서 살아가는 북부인이라면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격언이었다.
라그나르의 화를 사지 말라는 뜻의 격언.
하물며 ‘가주의 명’을 달고 있는 집행관의 행사임에야!
“세레스가 대가문을 어떻게 여기는지 잘 알겠다. 내 직접 상단주의 얼굴을 봐야겠으니 당장 길을 비켜라.”
“자, 잠시……!”
클레베가 걸음을 옮기려 하자, 총관이 다급히 기다려달라고 말하려 했지만,
스걱-
푸화악!
그보다 먼저 옆에 서 있던 헤이젤이 튀어 나가면서 날카롭게 그 목을 날려버렸다.
피분수가 뿌려졌다.
“라그나르의 행사를 방해하려는 자는 즉결 처형하겠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
“……!”
“……!”
이렇게 가차 없이 칼을 휘두를 줄 몰랐던 좌중은 이제 감히 그들의 옆에 다가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세레스의 가병과 용병도 마찬가지.
클레베가 명령했다.
“문을 열어라.”
“존명!”
“존명!”
“존명!”
이블린과 헤이젤이 앞으로 튀어 나가 정문을 담벼락과 함께 통째로 날려버렸다.
콰아앙-
그 위로 테오가 든 깃발이 힘차게 나부꼈다.
라그나르의 입성이었다.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