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힐다 라그나르 (4)
키르손은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온 불청객들 때문에 또 관자놀이를 쥐어뜯고 있었다.
“그러니까.”
“예.”
“테오…… 그 빌어먹…… 아니, 우리 어…… 여쁜 손자…… 님께서…… 보내셨…… 다고?”
“그렇…… 습니다.”
“그것도 ‘무료’…… 로…… 해주겠다…… 고 했다……?”
“네에…….”
부들부들!
곰방대를 쥔 키르손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백갑용기대의 5번조에서 큰 부상을 입은 사상자가 있다는 말은 얼핏 들었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 부상자들을 이렇게 자신의 앞에다 던져두고 갈 줄이야.
그것도 무료란다, 무료!
‘이놈이 정말, 날 아주 호구로 보고!’
문제는 자신이 어떻게 테오에게 항의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테오의 주가는 지금도 나날이 고공 행진 중이니.
그녀의 사업도 하나 같이 ‘테오 신드롬’에 올라타 같이 상승 중이기 때문이었다.
녀석도 그걸 알고 떠넘기고 간 것일 테지.
반면에,
이런 사실을 모르는 트라이너와 부상자들은 조금 불안한 얼굴로 서로 눈치를 봤다.
‘이거 정말 괜찮은 거겠지?’
‘일단 버텨보자고.’
‘그래! 이블린과 테오도 괜찮을 거라고 말했으니까.’
블랑키 요새 점령전이 끝난 뒤, 복귀하는 와중에 뒷일을 걱정하는 그들에게 테오가 했던 말이 있었다.
-……자네들의 말은 고맙네만, 정말 바스크 공방이 도와줄까? 안 될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우리에겐 돈이 없거든. 그만한 물건이면 비쌀 텐데, 마장이 손을 댄다면…… 뭐, 우리 같은 박봉 월급쟁이들은 어떻게 감당할 수준이 아닐 것 같네만?
-아, 그런 게 우려되신 거였군요.
-우리로서는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문제일…….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냥 가서 말씀만 하시면 됩니다.
-응?
-제가 무료로 해준다고 약속했다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
-무슨 말인지는 가서 말씀해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그때는 테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이해가 되었다.
‘세실리아 부인께서 저 마장 키르손의 양녀였을 줄이야.’
‘그럼 테오도 마장의 손자가 되는 거잖아?’
‘이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어!’
트라이너와 부상자들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거리는 가운데,
“……후우! 어쩔 수 없지. 우.리. 손.자.님.의. 직장 동료라는데 돈이야 받을 수 없지. 안 그렇겠나? 아하하. 아하하하.”
키르손은 결국 억지웃음을 띠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보고 부상자들은 생각했다.
‘돈과 황금을 무척 좋아한다고 알려진 마장인데…… 손자에 대한 애정은 그보다 훨씬 각별(?)한가 보구나.’
오해 아닌 오해가 퍼지는 가운데,
키르손은 이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지 잔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 * *
「……?」
「갑자기 왜 그러지?」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귀가 간지러워서.」
「한번 설명해준 개념은 두 번 반복하지 않는다. 제대로 숙지하도록.」
「예.」
쐐애애액-
테오와 일행은 목적지로 빠르게 이동 중이었다.
그 과정에서 테오는 클레베에게서 강론을 듣고 있었다.
‘누가 내 이야기라도 하나?’
테오는 잠시든 의문을 잊고, 클레베에게 집중했다.
라그나르에서도 몇 안 되는 ‘사범’ 자격을 지닌 검사는 몇 명 없었으므로.
물론, 이블린도 그중 한 명이었지만 분야가 달랐다.
‘이건 흑룡이 내게 주는 선물이기도 해. 그러니 놓칠 수 없지.’
「그대는 ‘우레’를 뭐라고 생각하나?」
근본적인 질문.
「일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격렬한 자연현상, 혹은 자연재해가 아닐까요?」
「더 구체적으로 물어보지. 그럼 우레는 뭐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나?」
「음……. 천둥과 번개?」
「틀렸다. 바로 빛과 열이다.」
테오의 눈이 순간 빛났다.
「빛은 빠르다. 광속(光速)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지. 그 속도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파괴력도 비례해서 증가한다. 무게가 더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빛…….」
「열은 다르다. 빛이 직선으로 달리는 것과 다르게 주변으로 확산되지. 그리고 고온이 될수록 미치는 범위도 훨씬 더 넓어진다.」
클레베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빛은 단련밖에는 답이 없다. 검술과 직결되니까. 하지만 열은 마력과 연결되지. 마력의 순도가 뛰어날수록, 효율이 높을수록 발산할 수 있는 열의 온도도 높아지지. ‘열결(熱缺)’은 바로 이를 의미한다.」
「즉, 마력의 효율성을 증가시켜준다는 의미로군요.」
「그래. 마력의 순도를 높이는 특징을 지닌 청명단을 같이 준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청명단과 열결의 식.
이 두 가지는 뇌룡 속호법의 열기를 강화시켜 줄 게 분명했다.
열기는 곧 파괴력으로 연결될 테고.
‘얼마나 또 더 강해질 수 있을까?’
벌써 기대가 되는 건 왜일까?
「그럼 지금부터 청명단을 삼키도록.」
테오는 클레베의 지시대로 목함을 열어 청명단을 한입에 넣었다.
청명단은 혀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아 식도를 통과했다.
「지금은 이동 중이니 영약을 효율적으로 흡수하는 게 어려울 거다. 그러니 내가 마력 도인으로 도와줄…… 응?」
마력 운용로를 제대로 기억할 수 있도록 타인이 직접 길을 안내해주거나, 비슷한 방식으로 효율적인 흡수를 도와주는 것을 가리켜 <마력 도인>이라고 한다.
클레베도 그럴 생각으로 테오의 등에 손을 얹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러홀에서 테오의 마력이 꿈틀거린다 싶더니 청명단의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감쪽같이.
그새 흡수가 됐나 싶어 테오의 마력을 살폈는데 이전과 별 차이가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니다. 아무것도. 아무래도 내가 준 청명단이 불량품이었던 것 같구나. 이걸 먹어라.」
청명단 같은 양산품은 간혹 제조 중에 재료 배합이 잘못되어 불량품이 나오는 경우가 있었다.
이것도 그런 건가 싶어 추가 여분으로 가져온 청명단을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테오는 다시 청명단을 삼켰다.
꿀꺽.
「그럼 이번엔…… 엥?」
「혹시 문제가 있습니까?」
「으음, 아무래도 내가 가져온 물건들이 죄다 영 시원찮았던 모양이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저야말로 도와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인성도 라그나르답지 않게 아주 바르구나. 이건 괜찮을 거다.」
클레베는 또 똑같은 현상이 벌어지자 물건을 챙겨준 부사수를 속으로 욕하면서 다른 청명단을 내주었다.
정확하게는 <청광단>이라는 것으로, 청명단보다 상급 영약이었다.
‘원래는 모든 임무가 성공하고 난 뒤에 생색내면서 주려고 했던 것이지만. 뭐, 어쩔 수 없지.’
지금은 열결의 식이 제대로 몸에 자리 잡게 만드는 게 중요했으니.
하지만.
청광단의 결과도 청명단과 똑같았다.
체내에 들어가자마자 싹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게 무슨……!’
영약이 별 효과도 없이 흩어져 사라진다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일.
클레베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확실히 영약은 영약인가 봅니다. 머리가 개운해진 것 같습니다.」
‘이건 원래 그런 효과가 없는데……?’
클레베는 테오의 감탄에 순간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걸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싶었다.
테오는 그런 클레베의 생각을 읽고 속으로 웃고 말았다.
‘세 개다 진짜였던 것 같은데. 그냥 모른 척 해야겠다.’
사실 이번 기현상은 테오도 전혀 생각지 못한 결과였다.
[오러 하트가 외부의 기운을 모두 흡수하였습니다.]
[상당량의 불순물이 제거되어 마력의 순도가 맑아지기 시작합니다. 유동성이 원활해집니다.]
[효율성이 증가합니다.]
[마력 밀도에 대한 힌트를 얻었습니다.]
[마력량이 소폭 증가하였습니다.]
.
[근섬유조직이 강화되었습니다.]
청명단이 체내에 흡수되자마자 용의 심장에서 마력이 튀어나와 날름 먹어치울 줄 누가 알았을까?
덕분에 클레베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로 애꿎은 영약만 더 내놓은 셈이 되었다.
‘마력량 증가나 근섬유조직 강화도 원래는 청명단에 없는 효과로 알고 있었는데. 횡재했어.’
아무래도 용의 심장과 청명단이 상승 작용을 하면서 얻은 부가 효과인 것 같았다.
이런 것을 모두 설명하기란 쉽지 않겠지.
결국 테오는 시치미를 떼기로 마음먹었다.
「운용법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한 번 해보겠습니다.」
「으, 으응? 그, 그래.」
클레베는 얼떨떨하면서도 일단 설명을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그녀의 머릿속을 뱅글뱅글 맴도는 중이었다.
* * *
‘열 발산. 이거 풍뢰신에 섞으면 인위적인 열풍도 만들 수 있겠는데?’
테오가 호흡법을 모두 배우고 자신의 기존 기술과 어떻게 접목시킬지를 고민하는 동안,
‘천재다……! 어떻게 이런 이해도를 가질 수가 있는 거지?’
클레베는 테오의 말도 안 되는 재능에 경악하는 중이었다.
테오가 벌써 체외로 열기를 발산하고 있었으니까.
몸 위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바로 그 증거였다.
‘심지어 열결의 식을 해체해서 일부 구결로 응용식까지 만들어냈어.’
꿀꺽!
클레베는 마른침을 삼켰다.
판단력이면 판단력, 재능이면 재능.
흑룡이 테오를 언급할 때 왜 그렇게 안달이 났는지 이제 완전히 이해가 되었다.
이런 녀석이 자신의 부사수로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우리 대장님, 또 바빠지시겠어. 흑설도 이제 완전히 눈독 들일 테니.’
한편,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블린은 머리를 쥐어뜯을 율리우스를 떠올리면서 웃었고,
‘……정말 승급 시험을 통과할지도 모르겠는데.’
헤이젤은 말로만 듣던 테오의 재능을 파악하고 혀를 찼다.
‘그래도 아직은 몰라. 임무가 끝날 때까지 좀 더 지켜보자.’
그렇게 시험관들이 모두 감탄을 터뜨리는 가운데, 드디어 일행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북동 지방 도시, 칼헬름.
꼭두새벽부터 성문 앞은 여러 상인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인식 방해 마법이 새겨진 아티팩트이다. 모두 착용하도록.”
테오와 일행은 클레베가 건넨 로브를 몸에 둘렀다.
그러자 내장된 마법이 발동하면서 서로를 분간하기가 어려워졌다.
“우리가 칼헬름을 방문했다는 사실은 기록에 남지 않아야 하므로 몰래 성곽을 넘을 거다. 그런 뒤, 곧바로 목적지인 ‘숨 쉬는 언덕’ 여관을 급습하여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전원 사살한다.”
테오와 이블린, 헤이젤이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베가 후드를 머리 위로 덮었다.
「그럼, 시작한다.」
전음과 함께 이동이 개시되었다.
파아앗!
* * *
성벽을 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칼헬름 같은 변방 도시를 공격할 세력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평상시엔 무척 평화로운 편이었다.
게다가 인식 방해 마법까지 몸에 두르고 은밀하게 움직이니 아무도 그들의 접근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렇게 도착한 어느 여관.
당장 쓰러질 것처럼 허름해서 손님도 없을 것 같았다.
쾅!
클레베가 가장 먼저 문을 거세게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무, 뭐야?”
“이것들은 뭔……!”
카운터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점원이 화들짝 놀라 일어나는 순간, 섬광이 번뜩였다.
촤아악!
“아, 안탄! 이 새끼들이!”
옆에 있던 동료가 뒤늦게 침입자의 사실을 깨닫고 무기를 꺼내려 했지만, 이번엔 이블린이 나타나 머리를 날려버렸다.
쐐애애액-
그 뒤로 테오와 헤이젤이 쏜살같이 달리면서 각각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테오는 지하, 헤이젤은 윗층.
이미 사전에 입 맞춘 움직임이었다.
생존자를 한 명도 남기지 않기 위한.
“위! 위다! 막……!”
스걱, 스걱-
테오는 계단을 타고 올라오려는 놈들을 무참하게 베어 넘겼다.
칼날이 번뜩일 때마다 열풍이 불어 닥치면서 벽과 바닥에 시커먼 그을음이 남았다.
열결의 식을 뇌룡 속호법에 접목시키면서 열기를 벌써 외부로 방출하기 시작했다는 증거.
마력 효율이 개선되어서 그런지 공격 속도는 물론, 위력도 더 강해진 것 같았다.
‘폭발력도 생겼고.’
“크악!”
“컥……!”
“이런 어린놈에게…… 큭!”
테오와 맞닥뜨린 녀석들은 추풍낙엽으로 나가떨어졌다.
암살자들이 두려운 건 어디까지나 어떻게 숨을지 모르는 은신술 때문일 뿐.
직접 이렇게 마주한다면 테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하물며 속도와 힘, 범위를 모두 갖춘 츠바이핸더 앞이라면!
콰르르릉!
결국 열폭풍과 함께 지하 복도의 문이 폭발하면서 그 주변에 있던 놈들이 깡그리 쓸려나갔다.
“마, 말도 안 돼……!”
덜덜덜…….
암살자들은 차마 테오에게 접근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떨어야 했다.
시커멓게 타버린 바닥 위.
열기를 한껏 휘감은 채 희뿌연 수증기와 샛노란 뇌전을 풀풀 날리고 있는 모습은,
마치 불지옥에서 올라온 야차를 보는 것 같았다.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