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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76화 (76/224)

76화

공동 전인 (1)

은거한 원로들이 주로 머문다는 겨울산맥의 어느 협곡.

“아주 발걸음이 좋아 죽는구만?”

등룡은 귓가를 파고드는 음성에 씩 웃으면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젊은 여인이 담벼락에 앉아 뚱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자를 키운다는 게 이렇게 즐거운 줄 알았다면 진즉에 해볼 걸 그랬습니다. 괜히 애꿎은 등룡관의 건물만 주인 없이 황량하게 버려진 꼴이었지 뭡니까.”

“얼씨구? 누가 보면 천고의 기재라도 얻은 줄 알겠다?”

“천고의 기재인 건 분명하지요.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깨달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등룡은 뒷짐을 쥐면서 허허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심판관을 맡으면서 제자로 삼은 웰링턴 나르시오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재능을 보이고 있었다.

개화식에서 어렴풋이 보여줬던 수류 속호법의 응용식을 벌써 익히고 있으니.

앞으로 1, 2년만 지나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일 게 분명했다.

“테오를 못 데려와서 입맛을 다실 때는 언제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것이지요. 테오와 웰, 둘을 모두 데려오는 게 최상이었을 텐데. 아쉬울 따름입니다. 쩝.”

등룡은 정말 아쉬운 지 입맛을 다셨다.

여인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랬다간 등 뒤에서 칼침이라도 맞지 않았을까?”

“해볼 테면 해보라지요. 들키지만 않으면 무엇이든 용납되는 곳이 라그나르가 아닙니까?”

여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누가 라그나르 아니랄까 봐 참 오만하다 싶었다.

“그리고 사실 제가 테오를 데려오지 못한 게 가장 아쉬운 건 힐다 님이 아니십니까?”

“글쎄?”

등룡의 질문에 여인, 라그나르의 전전대 가주 힐다 라그나르는 묘한 미소를 흘렸다.

‘여전히 속을 전혀 보여주지 않으시는군.’

등룡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카일을 피해 30년 넘게 은거를 택했던 그가 겨울산맥을 내려온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힐다의 부름.

-‘굴레’가 오랜만에 굴러가기 시작했거든? 같이 좀 내려가자.

등룡은 정확하게 <굴레>가 무엇인지 몰랐다.

단순히 마법사나 주술사들이 ‘천기’라고 부르는 일종의 자연법칙이라고만 알고 있을 뿐.

하지만 힐다의 마지막 남은 신하임을 자처하는 그로서는 군주가 소환하는데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에는 오랜만에 바깥나들이나 즐기다 오자는 생각이었는데.

덕분에 제자를 만나고, 뛰어난 인재들도 여럿 만날 수 있었으니 후회는 없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인연은 따로 있었다.

테오 라그나르.

라그나르의 천년 역사를 송두리째 바꿀지도 모르는 아이.

힐다가 유일하게 주시하는 아이이기도 했다.

“그럼 테오를 이리로 부르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40여 년 만에 그 굴레인지 뭔지 하는 것에 선택받은 아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한데 왜…….”

“아직 안 부르냐고?”

등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임명식 때 힐다가 테오와 전음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때는 금방 부를 것처럼 말씀하시더니 왜 여태 만남을 미루시는 걸까?

“조금만 더 지켜보고. 아직 확인할 게 남아있거든.”

“……?”

등룡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힐다의 더욱 짙어진 미소를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별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라그나르가 라그나르하지 않길 바랄 뿐이지.’

바람이 뜻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 * *

[실패 시: 사망]

테오는 마지막 메시지를 보고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혹시나 하긴 했었지만, 정말일 줄은 몰랐는데.’

사실 테오도 그동안 블라인드 처리되어 있던 ‘■■’의 내용이 ‘사망’이 아닐까 예상했었다.

이만한 커다란 페널티 없이 여러 퀘스트와 보상을 주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래도 짐작과 실제가 주는 압박감은 전혀 달랐다.

‘분명히 금방 만날 것처럼 말씀하셔놓고 아직 감감무소식이었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회귀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는 걸 봐서는 단순한 변심은 아닐 것이다.

‘차라리 내 쪽에서 먼저 찾아가는 게 나을지도.’

페널티가 언제 적용이 될 거라는 내용은 없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문제는 힐다가 머무는 지역을 특정하기가 어렵다는 건데…….’

테오가 전생의 지식으로 알고 있는 힐다와 관련된 정보는 하나뿐이었다.

“조장님, 혹시 ‘유령성’으로 가는 방법 아십니까?”

유령성?

이블린은 포로들에 대한 이야기에서 갑자기 화제가 바뀌자 의아한 기분이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유령성이라면 구(舊) 성터를 말하는 거지?”

“예. 맞습니다.”

현 라그나르의 터는 300년 전에 벌어진 반란으로 옮겨진 곳.

유령성은 그전에 사용되던 터로, 현재는 안전과 보안을 이유로 금역(禁域)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여러 마법진과 결계로 둘러싸여 특정 방법이 아니면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니.

테오가 알기로, 힐다는 바로 그런 유령성을 거처로 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비룡을 타고 겨울산맥 주변을 날다 보면 발견하기가 쉬우니까, 위치는 알고 있지. 하지만 접근 방법은 몰라.”

“그럼 위치라도 말씀해주세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알겠어.”

이블린은 자세한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군주를 신뢰하고 그가 하려는 일을 묵묵히 옆에서 지켜볼 줄 아는 것 또한 첫 번째 검이 가져야 할 덕목이었으니까.

당장은 조장과 대원의 관계라지만.

이블린은 절대 그런 덕목을 잊지 않았다.

* * *

매화궁에 도착했을 때, 정문에는 이미 테오가 오기를 기다리던 사람이 있었다.

테오도 낯익은 얼굴이었다.

“오랜…… 만이라고 해야 하나? 한 달도 안 지났는데 엄청 오래 지난 느낌이야.”

“이렇게 나와 계실 줄 몰랐습니다.”

“뭐, 이런 걸 가지고.”

나타샤.

개화식에서 테오를 도와주고, 매화궁주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펠릭스의 잘못을 밝혀냈던 사람이었다.

“그동안 아주 좋은 것들 많이 먹고 다녔나 봐? 얼굴에 혈색이 아주 좋은데?”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애늙은이 같은 반응하고는. 재미없게.”

나타샤가 툴툴거릴 때, 옆에 있던 노인이 말했다.

“나타샤, 이 늙은이에게도 소개를 시켜주지 않겠나?”

“이쪽은 매화궁의 수석집사이신 랑 프렌체 님이시고, 이쪽은 이번에 백갑용기대에 들어갔다는 테오 라그나르입니다.”

“1부인을 보좌하는 수석집사 랑 프렌체라고 합니다.”

짧은 백발에, 한쪽 눈에 외눈 안경을 쓴 노인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테오가 조금 놀란 얼굴이 되어 똑같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창귀’ 님을 뵙게 될 줄 몰랐습니다. 테오 라그나르라고 합니다.”

순간, 외눈 안경 너머 랑의 눈이 살짝 빛났다.

“이런…… 계승권자께서 저를 알고 계실 줄이야. 쑥스럽습니다.”

“창귀 님의 위명을 모른다면 그게 더 문제가 아닐까요?”

창귀는 라그나르에서 검이 아니라 창을 주무기로 선택한 몇 안 되는 고수였다.

‘그것도 원래는 월계검사의 직위에도 추천받았던 초고수……. 하지만 나이를 이유로 은퇴한 걸로 알고 있었는데, 원로원이 아니라 매화궁에 있었나? 그것도 집사로?’

월계관은 예로부터 고결함과 신비로움을 상징하던 관(冠).

당연히 이를 트레이드마크로 삼은 월계검사는 9룡을 포함해 라그나르를 상징하는 이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 영예로운 자리를 마다하고 매화궁주의 옆에 남았다 보니 관심이 갔다.

“이거 오랜만에 제 얼굴에 금칠을 해주는 분이 계시니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1부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테오는 나타샤와 랑의 뒤를 따라 매화궁을 가로질렀다.

전생에서도 들어가 본 적이 없던 매화궁 내부는 곳곳이 매화나무로 가득했다.

“꼭 숲속을 걷는 것 같습니다.”

“허허. 1부인께서 매화나무를 너무 사랑하셔서 말입니다. 그래서 1년에 얼마 피지 않는 매화꽃을 보실 때면 항상 아쉬워하시는 게 안타까울 정도랍니다.”

“매화꽃은 원래 봄에 피는 꽃이거든. 알다시피 윈터러는 봄이 무척 짧으니까.”

“아, 그렇습니까?”

테오는 두 사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곳곳에서 쏟아지는 시선에 쓴웃음을 지었다.

‘굴러들어 온 돌 취급이 장난 아니네.’

하나 같이 경계가 어려 있었다.

지명식에서 매화궁주가 테오를 제자로 삼겠다고 선언한 것을 저들도 알고 있겠지.

펠릭스의 일도 있으니 좋지 않은 소리도 잔뜩 들었을 테고.

몇몇은 아예 살기를 슬쩍 흘려 테오를 가늠해보려 하기도 했다.

하지만,

‘굳이 내가 굽힐 필요는 없지.’

화아악!

[‘스킬: 레서 드레이크 피어’를 발동하여 모든 살기를 맞받아칩니다.]

“……!”

“……!”

“……!”

테오가 스킬을 발동하자마자, 살기를 흘렸던 이들이 놀란 얼굴이 되어 뒤로 물러섰다.

몇몇은 아예 안색이 창백해지거나, 더 노골적으로 적의를 띠기도 했다.

피식!

랑은 그런 테오의 반응이 재미있었던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나타샤도 여전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그 외에 두 사람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라그나르라면 라그나르답게 실력으로 자신을 증명하면 된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이곳입니다. 1부인께서는 안쪽에 계시니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러다 랑은 연무장 앞에서 안내를 멈췄다.

테오는 감사하다며 고개를 슬쩍 숙이고 연무장에 들어섰다.

매화궁주는 바로 그곳에 있었다.

아주 높다랗게 선 매화나무의 나뭇잎을 손끝으로 매만지면서.

“여태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무슨 이야기를 나눌 게 그리 많은 건지, 백갑용기대장이 조금 밉기도 하고 말이다.”

매화궁주가 뒷짐을 쥐면서 테오를 돌아봤다.

“선물은. 마음에 들었고?”

일지매를 말하는 것이다.

테오는 검례를 취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궁주님 덕분에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나 보구나.”

“검으로 그려낼 수 있는 것이 꽃만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 말에 매화궁주의 입가에 화사한 미소가 걸렸다.

“역시. 확실하게 깨달았구나. 네 말이 맞다. 사람들은 오로지 하루라도 빨리 ‘꽃’을 완성하기만을 바라지, 그 과정은 너무나 소홀하게 여긴단다. 오히려 그 부분이 훨씬 중요한데도.”

매화궁주가 손을 앞으로 뻗자, 지면에 박혀 있던 검이 그대로 딸려와 그녀의 손에 잡혔다.

탁!

“나는 그렇게 네가 지나칠 수 있는 ‘기(技)’와 ‘술(術)’에 대해 계속 가르치고자 한단다. 이 두 가지야말로 검의 근간이니.”

테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때, 매화궁주가 물었다.

“그러니 다시 물으마.”

“예.”

“내 제자가, 되어주겠느냐?”

두근!

테오의 심장이 다시 뛰었다.

일지매의 사념을 모두 보았기 때문에 그는 매화궁주가 얼마나 위대한 검사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 무론을 온전히 전수 받을 수 있다면…… 분명히 새로운 길이 개척될 것이다.

나아가 서자로서 부족했던 입지도 완벽하게 다질 수 있겠지.

하지만 그 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었다.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왜 이렇게까지 절 아껴주시는지요?”

테오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전 궁주님께 해드린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궁주님의 명예를 위태롭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한데도.”

“카일을 닮아서.”

“……!”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

테오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그런 이유면 대답이 되겠느냐?”

매화궁주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짙어졌다.

“넌 모르겠지만, 너는 젊은 시절의 카일을 무척이나 닮았단다. 원래대로라면 권좌와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고난과 역경을 어떻게든 부딪치고 깨뜨리려 노력하지. 그러면서도 선을 지키고자 하는 모습이 모두 카일을 닮았어.”

‘아버지를…… 닮았다.’

그 말이 머릿속을 왱왱 울렸다.

매화궁주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너는 나를 닮기도 했단다. 검을 쥐었을 때의 네 모습이 어떠한지 아느냐?”

“모르…… 겠습니다.”

“항상 웃고 있단다.”

“…….”

“내가 딱 그러했지. 검을 쥐는 게 너무 즐거워서, 검을 휘두르는 게 너무 행복했었다. 너 또한 그러하고.”

전생에서 못다 이룬 꿈을 다시 꿀 수 있었기에. 테오는 항상 하루하루가 소중했다.

그래서 더 절실하게 검을 쥐었고, 더 행복하게 검을 휘둘렀던 것인데.

그런 마음이 매화궁주에게 전달된 모양이었다.

“남편과 나를 닮은 아이에게 마음이 쏠리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 아닐까?”

테오는 매화궁주의 웃음이 어딘지 모르게 율리우스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두 사람도 결국 사람이었어.’

율리우스는 카일에게 받은 것을 당연히 가문에 돌려줄 뿐이라고 했다.

매화궁주는 카일과 자신을 닮은 테오가 자식 같아서 더 정감이 간다고 말한다.

이보다 더 ‘사람다운’ 대답이 또 어디 있을까?

하지만,

시답지 않은 이상이나 희한한 정의를 내세우는 것보다야, 이런 마음들이 더욱더 테오에게 잘 와 닿았다.

-제자가 되어주겠느냐?

그 말부터가 제안이지, 강요는 아니니까.

이들에게 배운 검이라면 분명히 권좌에도 닿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질문은?”

“없습니다.”

“그럼 대답은 들을 수 있겠니?”

테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무언가를 말했고,

그걸 들은 매화궁주의 미소는 더 짙어졌다.

-마치 봄철에 핀 매화꽃처럼.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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