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75화 (75/224)

75화

일지매(一枝梅) (5)

꿀꺽-

테오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마룡의 검…….’

테오가 목표로 삼은 것은 분명히 아버지 카일의 검이었다.

하지만 그가 진정한 검의 길로 들어서겠다고 마음먹게 해준 사람은 율리우스였다.

그가 그려내는 궤적을 좇아 <용의 발톱>의 초안을 짤 수 있었으니까.

그랬던 그가,

마룡 율리우스가 가르침을 주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드는 긴장감을 어떻게든 누르려 했지만,

두근두근두근!

이놈의 심장은 좀처럼 진정되질 않았다.

그만큼 테오가 바랐던 순간이란 뜻이기도 했다.

후우-

테오는 길게 숨을 고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동안 율리우스의 검을 떠올릴 때면 마음속에 떠오르던 생각.

“마룡의 검은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호오?

율리우스는 전혀 생각지 못한 답변이었는지 혹한 얼굴이 되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거지?”

“그것이 바로 ‘마(魔)’의 본질이니까요.”

짤막한 대답.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깊은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피식!

율리우스는 쓰게 웃고 말았다.

“……매화궁주께서 왜 그대를 두고 그런 제안을 했는지 알 것 같군. 자네의 안목은 정말이지 남달라.”

바로 그때였다.

테오와 율리우스를 둘러싼 세계가 바뀐 것은.

화아아악!

유리 공간.

율리우스의 시그니처가 열렸다.

테오는 모든 것이 새카맣게 타버리고 부서진 폐허의 세계 위에 서 있었다.

어찌 보면 죽음의 냄새가 풀풀 날리던 흑룡의 세계와도 엇비슷한 듯 보였지만.

‘아니. 달라.’

테오의 눈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애당초 본질이 달랐다.

흑룡이 보이던 세계도 결국 자연법칙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마(魔).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린 세계였으니.

존재할 수가 없는 세상이었다.

“자네의 말이 맞아. ‘마’의 본질이란 본디 그러해. 폭력, 파괴, 멸망, 종말……. 인간을 공포와 불안에 잠기게 만드는 어둠, 그 자체이지.”

그때, 율리우스가 어느새 나타나 손에 검을 쥐었다.

쉬쉬쉭-

그가 허공에다 가볍게 검을 내리그었다.

아주 단순하기 짝이 없는 경로.

“자네가 보았던 매화궁주의 검은 어떠했지?”

“화려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맞네. 매화궁주의 검은 ‘생(生)’의 본질을 담고 있지. 씨앗에서부터 발아하여 무럭무럭 자라 화려한 꽃이 되는 과정은 삶, 그 자체를 표현해. 부드럽고, 빠르지. 검초가 주로 곡선과 원으로 구성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야.”

율리우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검의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하지만 내 검은 반대이지. 오로지 직선과 사선으로만 구성되어 있어. 돌아가는 법이 없지. 피하거나 흘리는 법도 없고. 부딪치면 오로지 하나뿐이라네. 부수거나, 부러지거나.”

빨라지는 검초 속에 묵직한 내력이 담겼다.

조금씩 살갗이 따가워졌다.

“그래서 내 검은 더 강하고 압도적인 힘을 바란다네. 단숨에 모든 걸 쏟아내. 절대 물러섬이 없어.”

테오는 언뜻 백갑용기대가 내세우는 표어를 떠올렸다.

불굴. 무퇴.

굴복하지 않고, 물러섬이 없다.

그 가르침은 이미 그의 검술에 녹아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마룡의 검이라네.”

쐐애액! 쐐애액! 쐐애액!

율리우스의 검이 빛살에 잠기며 분화하기 시작했다.

분광(分光).

마치 빛을 수십 개의 조각으로 잘게 쪼갠 것처럼 보였다.

번쩍! 번쩍! 번쩍!

콰르릉- 콰르릉- 콰르르릉-

빛살이 번뜩일 때마다 지반이 울릴 정도로 엄청난 천둥소리와 함께 압도적인 파괴가 뒤따랐다.

지반이 크게 깎이면서 협곡이 드러나고, 언덕이 쪼개지면서 구덩이만이 남았다.

마치 종말의 재해가 세상에 드리우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으니.

율리우스는 어느새 칠흑으로 뒤덮인 용에 둘러싸인 채 엄청난 살기를 풀풀 날리고 있었다.

“……!”

테오도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동안 사람 좋은 모습만 보이던 율리우스는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폭력과 파괴만을 일삼는 흉신(凶神)만이 서 있을 뿐.

우르르르……!

어느새 마룡이 풍기는 칠흑빛 살기는 붉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숨이 막혀 질식사하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파아아아!

갑자기 체내에 남은 영마독 중 일부가 꿈틀대면서 머릿속이 개운해졌다.

그리고 새롭게 보이는 광경.

‘……저건?’

율리우스가 뿌려대는 검초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는데, 어딘지 모르게 낯익었다.

기세도 파괴력도 다르지만, 이번 임무 때에 숱하게 보았던 백갑용기대의 공통 비전.

“<검격 다발>……!”

테오의 혼잣말과 함께 마룡의 광란도 정지했다.

파아아아-

먼지구름이 한 차례 테오가 있던 곳을 휩쓸고 지나가고,

율리우스는 검을 도로 검집으로 거두면서 웃었다.

“마의 본질을 본 만큼 역시 이것도 본 모양이로군? <마룡육예(魔龍戮藝)>라고 한다네.”

“검격 다발이 아니었습니까?”

“그것도 맞지.”

아리송한 말.

하지만 곧 의미를 깨달은 테오의 눈이 달라졌다.

“검격 다발이 마룡육예의 기초였던 거군요.”

율리우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반댈세. 마룡육예가 검격 다발의 기초이지.”

“……!”

율리우스는 테오의 반응이 귀여웠던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마력이 섞이지 않은 마룡육예의 모습은 이러하다네.”

쉬쉬쉬쉭-

율리우스가 다시 검을 여러 차례 그어 보였다.

오로지 직선과 사선만이 가득한 검초.

단순한 기본 검술로 보였다.

“마룡육예는 일종의 껍데기일세. 여기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 모양이 달라지는 거야. 백갑용기대의 녀석들은 여기다 자신의 검술을 담기에 검격 다발이 되는 것이고.”

“…….”

테오는 마른침을 삼켰다.

율리우스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이 평생을 들여 탄생시킨 비전을 그냥 부대에 내놓았다고?’

일반적인 무가에서는 절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내 검을 아무 대가 없이 그냥 내놓은 게 신기한가 보지?”

“예……. 아무래도 그런 전례가 없다 보니…….”

“전례가 없다고 해서 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율리우스의 짓궂은 미소가 커졌다.

“이런 건 사실 나뿐만이 아니야. 백갑용기대, 전체가 그렇게 하고 있지.”

“……!”

“가문이나 사문의 유지 때문에 지켜야 할 비밀이 아니라면, 대원들은 모두 대개 이런 식으로 자신의 비전과 깨달음을 공유하는데 거리낌이 없어. 오히려 자신이 막혔던 바를 같이 논의하고 새로운 해결책을 마련하지. 혹은 생각지 못한 외부 자극을 받아 또 다른 길을 모색하기도 하고.”

“…….”

“비전은 단순히 숨기기만 해서는 안 되네. 공유하고, 논의하고, 논파하고. 또 분석하고, 문제점을 찾고, 해결책을 찾아 보완해야만 한다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해서 더 깊이 알게 되기도 하고.”

“아……!”

“마룡육예는 그러한 기반을 만들기 위해 탄생시킨 비전일세. 대원들 각자가 그것에 서로 다른 깨달음을 녹여내지. 그리고 같이 공유하고. 그래서 마룡육예는 계속 발전하고 있고, 검격 다발은 늘 승승장구하게 돼. 백갑용기대가 늘 무적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야.”

테오는 둔탁한 무언가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비전을 공유한다.

그런 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자고로 비전이란 검사의 인생과도 같은 것. 부모 자식과도 쉽게 공유하지 않는다…… 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오히려 그런 인생을 서로 공유하기 때문에 이만큼 끈끈한 동료애를 만들 수 있는 거겠지.’

이를테면, 백갑용기대는 전부 율리우스의 자식이자 제자인 셈이었다.

테오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배반은 걱정하지 않으십니까?”

“왜? 밖으로 새어 나가서 우리를 꺾을 파훼법이 만들어질 수도 있으니까?”

“예. 그럴 수도 있잖습니까.”

“일단 아직은 배반자가 생기지는 않았네만……. 뭐, 그럴 거면 그러라고 하게. 그때쯤이면 마룡육예와 검격 다발 모두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 될 테니. 오히려 파훼법 덕분에 더 달라질 수 있으니 환영이야. 그리고.”

율리우스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숨겨진 비법을 안다고 해서 곧바로 SSS급 요리사가 되는 것도 아니잖나?”

밑천이 다 털려도 절대 지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

아니, 오만함이 보였다.

율리우스가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결국 라그나르를 대표하는 검사이긴 한 모양이었다.

“지난날에 매화궁주의 제안을 거절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지.”

매화궁주의 제안?

이건 또 무슨 말일까?

“매화궁주가 말했었다네. 자네를 두고 자신과 나의 공동 전인으로 삼지 않겠냐고.”

“……!”

전인(傳人). 제자를 의미한다.

즉, 매화궁주가 율리우스에게 테오를 공통 제자로 삼자고 제안한 것이다.

“이미 자네가 내 품에 들어와 내 제자이자 가족이나 다름없게 되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뭐 있나? 오히려 부대의 기강만 흔들릴 뿐이지. 그래서 대신에 매화궁주께는 정 제자로 삼고 싶으시거든 따로 삼으시라고 말하였어.”

“그럼 일지매가 제게 온 이유는…….”

“이미 매화만발을 받았다면서? <24수 매화검>으로 가는 길목에서 내가 원래 전해주려던 바를 섞었을 뿐이야. 물론,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댄 만큼 깊이는 남달라졌겠지만. 그거야 자네의 복이고.”

쿵쿵쿵……!

테오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율리우스는 아니라고 하지만, 일지매를 넘겨준 건 결국 테오를 매화궁주와의 공동 전인으로 삼겠다는 의미나 다름없었으니!

율리우스가 다시 검을 고쳐 쥐었다.

“오늘부터 한 시간씩 마룡육예를 지도해주지. 단, 조심하게. ‘마’의 본질에 손을 댄다는 것은 아주 지난한 일이 될 테니까.”

테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드레이크의 날붙이를 들었다.

이것 또한 기연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율리우스의 검을 손에 넣고 싶었다.

“‘마’라는 것은 너무 포악해서 때때로 주인을 잡아먹기도 하거든.”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파아아아……!

율리우스를 중심으로 칠흑빛의 기세가 풀풀 날리기 시작했다.

쿵쿵쿵쿵쿵!

테오는 마력 공명을 일으키면서 드레이크의 날붙이를 꽉 쥐었다.

사사하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 * *

한 시간 뒤.

테오는 녹초가 된 채로 율리우스의 집무실을 나왔다.

“괜찮나?”

이블린의 질문에 테오는 힘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죽을 맛이네요…….”

“대장님의 지도가 혹독한 면이 있긴 하지. 오히려 그 순간을 즐길 때도 많으니 앞으로 더 조심하는 게 좋아.”

확실히 율리우스는 테오가 괴로워할 때면 아주 즐거워했다.

첫 지도 시간이 이런데 앞으로는 더 힘들겠지?

테오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마룡육예의 기본기는 모두 다 익혔어. 이해되지 않던 부분도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고.’

힘이 들어도 기분은 너무 좋았다.

무엇보다,

검술 지도 중에 율리우스가 했던 말이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이렇게 하는 이유라……. 글쎄. 그렇게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네만. 난 그저 가주님에게 배운 것을 그대로 똑같이 따라 할 뿐이거든.

자신의 비전을 공유하게 된 계기가 있냐는 질문했을 때, 율리우스가 하던 대답.

‘거기서 아버지가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지.’

-나의 모든 것은 가주님에게서 비롯되었지. 그러니 그것을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려줄 뿐이야.

율리우스의 푸근한 목소리에는 카일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충성심이 보였었다.

-너무 탐이 난다.

테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먼 미래에. 권좌에 앉는 과정에서 율리우스와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만한 신뢰와 충성을 받을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내가 더 열심히 노력해야겠지.’

다행히 그만한 사람은 만난 것 같았다.

바로 옆에 그만의 ‘첫 번째 검’이 있지 않은가?

“그보다 테오, 부탁한 대로 포로들은 별다른 심문 없이 모두 지하 감옥에 가둬두긴 했다만. 계속 이대로 둬도 괜찮을까?”

이블린이 화제를 돌렸다.

블랑키 요새에서 사로잡은 중앙기무국 요원들을 말하는 것이다.

아직 백갑용기대에서는 그들에 대한 정확한 정체를 알아내지 못한 상태.

애당초 시드라와 요원들의 신분은 철저하게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따로 심문이라도 해야 했지만.

테오가 반대했다.

“일단 놔두고 지켜만 보고 계십시오. 곧 재미난 상황을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역시. 너는 범인이 누군지 아는 거지?”

테오는 대답 없이 미소만 지어 보였다.

이블린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푹 내쉬면서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그래도 일단 지시한 대로 지켜보고 있을게. 하지만 오래는 못 기다려. 대원들이 이해 못 할 테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길어야 사흘을 못 넘기고 미끼를 물 테니까요.”

테오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항룡의 성격에 자신의 약점이 될 만한 부분을 그냥 놔두지는 않을 테니까.’

에드가 어떻게든 뒷수습을 위해 움직일 거라는 게 테오의 판단이었다.

그럼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발발할 것이다.

테오와 에드. 둘의 정쟁(政爭)이.

‘그러니 본격적인 정쟁이 시작되기 전에 매화궁주도 확실하게 내 편으로 만들어 놔야겠지.’

-내 검술 지도가 끝나면 바로 매화궁으로 찾아가게. 매화궁주, 아마 지금쯤 아주 애가 타고 계실걸?

지난번 매화궁주가 보여주었던 <하늘 꽃비>의 풍경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매화궁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띠링!

갑자기 여러 메시지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튜토리얼 퀘스트 #18이 아직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조속히 이행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퀘스트가 완료되지 못할 경우, 실패로 간주하여 패널티가 적용됩니다.]

[실패 시: ■■]

[플레이어의 권한이 상승하여 블라인드 처리되었던 정보를 재출력합니다.]

[실패 시: 사망]

“……!”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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