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백갑용기대 (2)
세실리아는 아침이 되자마자 바스크 공방을 찾았다.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더냐?”
최근 들어 갑자기 교류가 잦아지긴 했다지만.
세실리아와 키르손은 지난 십여 년 동안 안부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않았을 만큼 단절되었던 관계.
그렇다 보니 이런 갑작스러운 방문이 뜻밖이었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어머니?”
“이야기……?”
키르손은 순간 자기도 모르게 흠칫거렸다.
‘이, 이것들이 또 뭘 하려고?’
그동안 세실리아 모자에게 하도 지독하게 시달리다(?) 보니 당연히 보일 수밖에 없는 반응.
세실리아는 키르손의 속마음을 알아채고 코웃음을 쳤다.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바빠서 안 되시겠다면 나중에 시간 되실 때 따로 찾아오겠어요.”
“아, 아니다. 다들 잠시 자리 비워다오.”
키르손은 연구원들을 모두 밖으로 쫓아낸 다음,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후우-
키르손은 그제야 양녀가 뭔가를 굳게 각오하고서 왔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래. 무슨 일이냐?”
세실리아는 담배 연기를 손으로 치우면서 말했다.
“돈 좀 빌려주세요.”
“돈……?”
마치 맡긴 물건을 되찾으러 온 듯한 당당한 태도.
키르손은 어이가 없었지만 조금 더 들어보자는 생각에 물었다.
“어디다 쓰려고?”
“사업을 할까 해서요.”
“사업? 네가?”
“예.”
“십 년 넘게 카일의 첩으로 호의호식만 누렸으면서. 무슨 재주로?”
키르손은 아직 세실리아에게 미안한 마음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깐깐하게 굴었다.
당장 그녀의 눈에는 세실리아가 아들의 비상으로 괜한 헛바람이 든 것으로 보였으니.
옆에 웬 사기꾼이 꼬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비꼬지 마세요. 비록 그동안 아드님을 양육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감각은 잃지 않으려 항상 애써왔으니까요.”
세실리아는 당당하게 대답하면서 가져온 가방을 열어 종이 뭉치를 꺼내 키르손에게 내밀었다.
“사업계획서예요.”
“……!”
“한 번 살펴보시고 돈 빌려주실지 말지 검토해주세요.”
“…….”
키르손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꼼꼼하게 계획서를 넘기기 시작했다.
세실리아의 사업 아이템은 아주 간단했다.
부티크 샵.
값비싼 옷과 장신구 같은 패션 아이템을 제공하는 가게.
“어머니도 제 안목을 잘 아실 거라 생각해요. 그런 제가 직접 각지를 돌 생각이에요.”
세실리아의 안목이야 녹슬지 않았다는 건 테오에게 입히는 옷만 봐도 딱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뒷말이 키르손에게는 놀라웠다.
“직…… 접?”
“예. 제국 곳곳에 실력은 뛰어나지만 알려지지 않은 동량들이 많죠. 그들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지원해줄 수 있는 인재는 지원해줄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모은 드레스를 손님들이 움직일 동선에 따라 가게에 배치할 예정이고…….”
세실리아는 차분한 어투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수십 수백 번을 연습한 것처럼 막힘없는 설명.
“게다가 비단 제가 계획하고 있는 아이템은 단순히 화려한 드레스만 있는 게 아니에요. 마지막 장을 살펴보시겠어요?”
“…….”
“오트쿠튀르도 직접 할 생각이에요. 이미 저와 함께하겠다는 디자이너와 쿠튀리에(고급 재단사)도 물색해 뒀구요.”
오트쿠튀르.
귀족과 상류층을 대상으로 하는 맞춤옷을 뜻한다.
역시나 뛰어난 패션 센스와 안목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특히 재단사와 디자이너의 실력이 가장 중요했는데, 실제로 계획서에 적힌 20인의 명단은 키르손도 한 번쯤 들어봤을 만큼 명망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중 몇몇은 키르손이 직접 데려오려고 했으나 실패했던 이들.
‘대체 무슨 재주로……?’
“이거 거짓은 없는 거냐?”
“직접 사람 보내서 확인해보시면 되지 않나요?”
“…….”
“의심이 심하시니, 힌트만 드리죠. 거기 적힌 사람들, 원래 제 스텝 멤버들이었어요.”
“뭐?”
“비록 저는 은퇴했었지만, 인연까지 놓았던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조언이나 도움이 필요할 때면 조금씩 주곤 했는데…… 다행히 재능 있던 친구들이라 그런지 잘 자라더군요. 감사하게도 저와 같이하겠다는 의사도 보여주었고 말이죠.”
말이야 쉬울지 모르지만, 이미 이들은 저마다 각자의 자리를 공고히 잡은 이들이었다.
그런 기반을 버리고 찾아오겠다는 건, 그만큼 세실리아의 인망이 여전하다는 증거였다.
“이 사업은 어머니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번에 인수하신 보석상과 연계해서 같이 이름을 알릴 수도 있을 테구요. 마장이 보유하고 있는 네임벨류와도 좋은 상성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무엇보다…… 어머니께서도 오래전부터 하이엔드 패션에 관심이 있지 않으셨었나요?”
키르손은 곰방대를 꾹 물었다.
먼 과거에 흘러가듯이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해주고 있었구나…….
“……이름을 알리기 위한 모델로는 테오를 쓰겠군.”
“맞아요. 단순히 제 아드님이라 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 아드님만큼 화제인 사람도 없잖아요?”
키르손은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
‘실제로 테오가 임명식에서 착용했던 브로치는 하루 만에 동나버렸으니.’
테오 모자가 키르손의 골머리를 아프게 만들긴 해도, 영향력만은 확실한 셈이었다.
얼굴이면 얼굴, 옷태면 옷태, 화제성이면 화제성.
모든 것을 고루 갖췄으니.
“뭐, 저 역시도 사교계에서 입고 가는 옷마다 항상 화제 되기 바빴구요.”
‘……따, 딸이지만 재수 없어.’
“제가 만들게 될 부티크 샵이 앞으로 유행을 선도할 수 있단 뜻이죠. 이러면 충분히 사업 가능성이 있지 않나요?”
키르손은 이 순간 세실리아가 너무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젊은 시절, 극장에서 프리마돈나로 나서던 세실리아를 처음 발견하고 받았던 감동이 떠올랐다.
‘그래. 이토록 아름답게 반짝이던 아이였지.’
그때 세실리아가 입고 있던 옷이며 부르던 노래는 아직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떠올랐다.
‘손을 대면 바스러질까 봐 조심스럽던, 그래서 항상 아끼고 또 아끼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반짝일 보석 같던, 그랬던 아이였는데…… 카일, 네가 망친 거였다.’
키르손은 곰방대의 주둥이를 잘근잘근 씹었다.
‘하지만 이제 다시 반짝이려 하는구나. 아니, 더 아름답게 반짝이려 하고 있어.’
키르손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생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가슴 안에든 무언가가 울컥하고 올라올 것 같아서.
“……어머, 니?”
그런 사실을 모르는 세실리아는 조심스럽게 키르손을 불렀다.
뭔가 사업 설명에 뭔가가 잘못된 게 있나 싶어서.
이윽고 키르손이 천천히 눈을 뜨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를 각오한 듯.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라.”
키르손은 세실리아의 대답도 듣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방 한쪽 구석에서 커다란 궤짝 두 개를 끌고 왔다.
쿵!
“이게 뭔가요?”
“열어보려무나.”
“……?”
세실리아는 갑자기 이게 뭔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첫 번째 궤짝을 열었다가 놀라고 말았다.
“이, 이건……!”
“네가 집을 떠날 때 두고 갔던 물건들이다.”
궤짝 안에는 세실리아가 연기하던 시절에 썼던 보석 장신구나 고급 드레스가 잔뜩 담겨 있었다.
이걸 그동안 처분하지 않고 계속 갖고 있었던 것이다.
“네가 쓰던 것 중에 비싸지 않은 게 없었으니 그것만 팔아도 꽤 괜찮은 목돈을 마련할 수 있겠지. 내친김에 두 번째 궤짝도 열어봐.”
세실리아는 마른침을 삼키면서 뚜껑을 열었다.
끼이이-
금화가 잔뜩 담겨 있었다.
“그건 원래 네게 주려던 유산.”
“……!”
“그동안 따로 모아뒀었는데 이렇게 쓰이는군. 지금 일부를 미리 줄 테니 써라. 이 마장 키르손의 딸이 어디서 돈을 빌리고 다닌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
“…….”
“그걸로도 부족하면 말해. 얼마든지 투자해줄 테니.”
세실리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오래전에 입 안으로 삭였던 감정이 다시 깨어나는 것 같았다.
-엄마.
-엄마!
-엄마…….
의절한 뒤로 단 한 번도 입에 담지 못했던 단어.
언제나 화사하게 웃으면서 불렀던 그 말이 갑자기 왜 입가에 맴도는 걸까.
“……왜 이렇게까지.”
“그냥 돈을 빌리러 온 건데, 왜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거냐고?”
세실리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붉어진 눈시울.
키르손은 그것을 못 본 척 고개를 슬쩍 돌리면서 곰방대를 물었다.
“망아지 같아도 하나뿐인 딸년이 도와달라는데 도와주지 않을 어미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단 말이냐?”
“……!”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그 말에,
세실리아는 뭔가 울컥한 나머지 고개를 더 아래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후우-
키르손은 곰방대를 아래로 내리면서 훌쩍 자리를 떠났다.
“일 시작하려면 바쁠 텐데 어여 가 봐.”
그렇게 홀로 남은 방에서, 세실리아의 어깨가 몇 번씩 들썩거렸다.
* * *
백갑, 백검, 백룡.
설원처럼 새하얀 순백색의 갑주와 검, 그리고 철갑으로 무장한 비룡은 백갑용기대를 상징한다.
북방의 백성들에게는 희망을,
적에게는 공포를 가져다주는 그 이름이 무더기로 하늘을 날고 있었다.
33인으로 구성된 별동대.
「지금부터 우리가 맡을 임무의 개요에 관해 설명하겠다.」
그때, 5번조원들의 귓가로 이블린의 전음이 들렸다.
셀퍼드나 아린 같이 이블린을 기억하는 대원들은 모두 놀란 얼굴이 되었다.
‘검을 꺾었다고 하시더니 약해지기는커녕 더 강해지셨잖아……!’
‘마력 수발이 너무 자연스러우셔. 어떻게 이렇게 이동 중에 전음을 깔끔하게 보내실 수 있는 거지?’
‘역시 대장님의 옛 오른팔!’
옛 기량을 되찾으며 풍존의 비전까지 익히기 시작한 이블린의 역량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 중이었다.
「지난 7일, 전대 5번조장 트라이너 이스벤이 별동대원 14인과 함께 세레스 상단 인질들의 구출 작전을 시도하던 중에 전사하는 사건이 있었다.」
상황을 이미 알고 있던 대원들은 입술을 꾹 다물고, 알지 못했던 대원들은 충격에 빠진 얼굴이 되었다.
에리카와 홀커스도 마찬가지.
그만큼 라그나르가 자랑하는 최정예들이 전원 사망했다는 소식은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역시 인질극 사건이 변질된 거였어.’
반면에 테오는 예상이 들어맞자 생각이 깊어졌다.
‘발뭉을 어떻게 회수하지?’
한창 작전을 수행하는 와중에 단독 행동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다른 수를 마련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명령 하달은 계속 이어졌다.
「따라서 우리가 반드시 수행해야 할 임무는 오로지 하나이다.」
조원들의 시선이 모두 이블린 쪽으로 향했다.
「말살.」
“……!”
“……!”
“……!”
「생존자 따윈 두지 않는다. 적과의 협상 따위도 하지 않는다. 이번 일과 관련된 모든 자들을 척살하고 말살하는 것만이 이번 임무의 최대 과제임을 명심하라.」
잔잔한 이블린의 말투 저변에는 분노가 짙게 깔려 있었다.
감히 동료들을 해친 적들에 대한 분노.
조원들도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므로 인질 구출은 그다음 과제이다. 만약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질 구출과 적군 척살이 충돌한다면, 후자에 더 집중하도록.」
그때, 대원들 눈앞으로 마도구로 띄운 지도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언덕 위에 높이 선 요새 하나.
몇몇 지점에 붉은색 포인트가 맺혔다.
「적들은 현재 옛 블랑키 요새를 점거한 채 농성 중이다. 표시된 포인트는 흑설에서 파악한 적들의 주요 배치 지점으로, 우리는 이곳들을 일거에 강습하여 적의 숨통을 단번에 끊어버릴 예정이다.」
‘이런 기밀을 첩보만으로 알아낸다……. 역시 흑설은 흑설이군.’
테오는 가볍게 속으로 혀를 찼다.
그때, 내성 한쪽 구석에 푸른색 포인트가 추가로 맺히는 게 보였다.
「추가로 이곳은 현재 인질들이 억류된 장소이다. 적의 혼란을 틈타 인질들을 구출한다. 이 임무는 셀퍼드, 아린! 너희 두 사람이 세 신입들을 데리고 수행하도록.」
셀퍼드와 아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했듯이 이번 임무는 적의 말살이 최우선 과제임을 명심하라. 적에게 똑똑히 보여주어라.」
바로 그때, 저 멀리서 언덕 위에 외롭게 선 낡은 성채가 보였다.
블랑키 요새.
지금은 버려진 옛 고성.
「우리가 누구인지를.」
「존명!」
「존명!」
「존명!」
순간, 깊게 눌러쓴 투구 아래에서 이블린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강하!」
33인의 백갑용기대가 일제히 강습을 시도했다.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