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옛 선택자 (4)
“일단 오늘 있었던 일은 당분간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자.”
풍존의 비급.
테오의 벌모세수.
충성 맹세와 서약.
모두 당장 외부에 알려져서 좋지 않을 것들 투성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부대의 사기도 좋지 않을 테니까요.”
“응. 그러니까 부대에 있는 동안에는 이블린도 날 편하게 대해줘. 말도 놓고.”
“예? 하지만 제가 어떻게……!”
“거기선 이블린이 상관이잖아? 나는 수하인 거고. 그럼 그게 당연한 거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 어떻게든 금세 따라잡을 테니까.”
어떻게든 직위 상승을 이뤄낼 거란 의미였다.
“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웃네. 왜? 못할 것 같아서?”
“쉽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도 해야지. 말했잖아? 5년 안에 백갑용기대장이 되겠다고.”
“…….”
“그거, 절대 허투루 한 말 아냐.”
“예.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테오는 이블린의 눈을 직시하면서 말했다.
“우선 나한테…… 아니, 저한테 말씀부터 놓아주십시오, 선배님.”
* * *
테오와 이블린은 주변을 모두 정리하고 본부로 복귀했다.
이미 시간은 뉘엿뉘엿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으하하! 테오, 네가 제일 늦었다고! 신입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지, 부대에 들어오자마자 이렇게 느리게 움직이면 어떡해?”
홀커스는 처음으로 테오를 이긴 분야가 있단 사실에 잔뜩 기세등등해졌다.
그와 에리카는 진즉에 적성 테스트를 통과해서 복귀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걸로 테오도 나의 진면목(?)을 알게 되겠지!
홀커스가 그런 생각에 때마침 지상에 착륙한 테오에게 다가가는데,
“어, 어……?”
그는 자기도 모르게 멈칫거리고 말았다.
‘크…… 잖아?’
테오가 데려온 와이번의 덩치가 그의 새로운 파트너보다 훨씬 컸다.
자신의 파트너도 분명히 괴룡종이라서 와이번 중에서 체구가 큰 편에 속했는데, 그걸 작아 보이게 만들다니.
곰만 한 덩치가 살짝 시무룩해졌다.
크르르?
그때, 홀커스의 파트너 ‘스파티움’이 움브라에게 잔뜩 이를 드러냈다.
“얘, 얘가 갑자기 왜 이래!”
그동안 얌전하게 굴던 파트너가 말을 듣지 않자 홀커스가 당황하는 동안,
-무, 뭐야?
-저거 설마…… 움브라, 아냐?
-뭐? 움브라를 파트너로 삼았다고? 그 말 안 듣는 꼴통을?
-말도 안 돼!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야?
움브라를 뒤늦게 발견한 백갑용기대 대원들 쪽이 시끄러워졌다.
움브라의 가슴 아픈 사연은 백갑용기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도 파트너를 정하지 않는 녀석의 성격 때문에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설마 신입이 움브라를 길들일 줄이야!
-천년 제일의 기재는 다르다 이거냐. 우와, 여기도 재능 따지냐. 현타 세게 오네…….
대원들은 멍하니 테오와 움브라를 바라봤다.
복귀가 너무 늦어져서 테스트 통과를 재논의해야 하는 거 아닐까 하고 나돌던 말이 쏙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
테오와 이블린이 율리우스에게 다가갔다.
“상급검사 이블린 네레빌, 수련검사 테오 라그나르의 적성 테스트를 마치고 복귀하였습니다. 테오 라그나르는 적합 판정을 받았으며, 제3 둥지 움브라의 파트너로 배정되었음을 신고합니다.”
“그래. 고생했어. 드디어 우리 부대의 골칫거리에 임자가 생긴 모양이로군.”
율리우스의 말에 이블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테…… 오와 움브라의 합이 아주 잘 맞는 것 같았습니다.”
“오, 그 정도란 말이지?”
율리우스는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면서 눈을 빛냈다.
개화식의 최고 기록자와 백룡 둥지의 사고뭉치.
이 둘의 조합은 아주 백갑용기대의 큰 전력이 될 게 분명했다.
그만큼 구사할 수 있을 전술의 범위도 넓어진다는 의미였다.
“부대 배치는 좀 더 원활하게 할 수 있겠는데.”
율리우스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던지 이블린을 보면서 씩 웃었다.
흠칫!
이블린은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쭈뼛 세웠다.
‘대체 또 뭘 하시려고……?’
율리우스가 항상 저렇게 웃을 때면 사고가 벌어진다는 것을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재빨리 제지하려 했지만,
“자, 늦었으니까 오늘 소집은 여기까지 하고! 다들 해산하도록. 부대 배치와 관련된 자세한 사항은 내일 전달토록 하겠다. 이상!”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 그리고 술 적당히 마시도록. 또 누가 숙취로 고생했다는 말 들리면…… 알지?”
“명심하겠습니다!”
“다시는 그런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겠습니다!”
“하여간, 다들 주둥이는. 아무튼 해산!”
“내일 뵙겠습니다!”
“좋은 밤 보내십시오, 대장님!”
그렇게,
지명식과 적성 테스트가 함께 있었던 시끄러운 하루가 모두 끝났다.
* * *
부대 배치가 끝난 뒤, 다음 수순은 당연히 신입 환영회였다.
“후배님, 후배님! 이제 말 놔도 되지?”
아직 환경이 낯설어서 멀뚱히 서 있는 테오의 옆에 셀퍼드가 맥주잔을 든 채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테오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적성 테스트 시작하기 전에도 은근슬쩍 말 놓지 않았었나?’
물론, 에리카와 홀커스도 같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만.
셀퍼드의 시선은 대부분 테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곳에 있는 동안에는 계승권자라는 신분보다 백갑용기대 대원이라는 신분이 앞서니까요.”
“그렇지? 푸하하! 시원시원해서 좋네. 아린, 거봐! 이제 말 놔도 된다고 하잖아!”
셀퍼드의 외침에 다른 동료들과 같이 있던 아린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데 움브라는 어떻게 파트너로 삼게 된 거야? 그거 때문에 다들 궁금해서 난리라고.”
“그건…….”
테오는 풍존과 관련된 일은 숨기고 적당히 각색해서 움브라와 있었던 일들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후기가 궁금했던 다른 대원들도 하나둘씩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언제부턴가 다들 테오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다 같이 감탄을 터뜨리기 바빴다.
-오오!
-그런 일이……!
-그렇단 말이지?
-흑흑!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야.
몇몇은 잔뜩 취한 채로 눈물을 펑펑 터뜨리기도 했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테오는 백갑용기대 내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다른 부대에 비해 좀 더 자유롭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다들 감정 표현에 충실하구나.’
라그나르는 강자존의 법칙 때문에 능력만능주의가 팽배한 만큼 서열 관계에 대해서는 아주 보수적인 편이었다.
그런데 백갑용기대에는 상하관계는 있을지언정 최소한 인격 모독은 보이지 않았다.
‘다들 형제처럼 지내기를 바란다는 율리우스의 지론 때문이겠지.’
덕분에 테오와 에리카, 홀커스에게도 이렇다 할 텃세가 없었으니.
적성 테스트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테오는 어느새 그들의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다.
모든 환영회가 끝난 뒤.
내일 보자는 대원들의 인사를 뒤로 하고, 테오는 동백궁으로 이동했다.
새벽이 깊어져 달은 어느덧 그의 머리 위에 떠 있었다.
‘부대…… 라.’
테오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달을 바라봤다.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 힘들 감정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전생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충족감.
이번 생은 정말 전생과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뭘 그렇게 청승맞게 서 있는 거야? 술은 입도 안 댔던 놈이.”
그때, 테오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홀커스와 에리카가 살짝 불콰해진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너희들, 숙소로 돌아간 것 아니었나?”
에리카가 씩 웃으면서 손에 든 맥주캔을 흔들었다.
“이런 날에 1차로 끝내기에는 너무 아쉽잖아?”
테오도 따라서 가볍게 웃고 말았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이들 남매는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무척 정감이 갔다.
제4 연무장의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마침 내가 잘 아는 곳이 있는데. 거기 갈까?”
“오! 우리 도련님의 단골 맛집이라면 언제나 대환영이지.”
“좋아. 대신에 이건 압수.”
테오는 에리카의 손에서 맥주캔을 단숨에 빼앗았다.
에리카가 발끈했다.
“뭐? 그건 왜!”
“잊었나 본데, 우린 미성년자야.”
“젠장! 꼰대 새끼! 개화식 뒤에는 원래 괜찮은 거 모르냐!”
“정확하게 개화식 뒤에는 술 마시는 걸 눈감아줄 뿐이지, 술을 마셔도 된다는 의미는 아닐 텐데?”
에리카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싫으면 빠지고.”
“아, 그냥 가면 되잖아! 그냥 가면! 어딘데?”
에리카가 툴툴대면서 테오의 뒤를 따랐다.
홀커스는 매번 테오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누나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테오가 도착한 곳은 당연히 제4 연무장의 아지트 펍이었다.
“오, 드디어 오셨다!”
“얘들아, 다들 모여라! 도련님이 돌아오셨다아아!”
“뭐? 어디어디?”
“파하하!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다들 무용담 듣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려 죽는 줄 알았다구요!”
에리카와 홀커스는 한순간 쏟아지는 인파에 어안이 벙벙했다.
뭐가 이렇게 사람이 많아?
하지만 테오는 능숙하게 그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두 남매에게 어서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쭈뼛대면서 들어간 곳.
거기에는 이미 웰링턴과 레이가 앉아있었다.
“오셨소? 많이 늦으셨군.”
“예. 적성 테스트까지 치르느라. 레이도 있었구나.”
“으, 응…….”
레이는 어쩐지 이렇게 사람이 많은 자리가 부끄러웠던지 콧잔등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평소 감정 표현이 거의 드물다는 설빙검의 소문과 전혀 딴판이었다.
웰링턴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주변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얼쩡거리고 계시는 걸 보고 내가 들어가자고 등 떠밀어 같이 들어온 거요.”
“내, 내가 언제 그랬다고!”
“아니면 그냥 내가 권유해서 들어온 걸로 합시다.”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레이가 도끼눈으로 째려보자, 웰링턴은 껄껄 웃기만 했다.
그때, 테오 뒤로 에리카와 홀커스가 다가왔다.
덩치 큰 두 사람이 나타나니 펍이 꽉 차는 느낌이었다.
“이게 다 뭐 어떻게 된 거야? 샌님에 얼음땡까지 왜 죄다 여기 모여 있어?”
“왜 있긴. 다들 개화식 뒷풀이 하려고 모인 거지. 그보다 한잔하시겠소? 여기 위스키가 맛있는데.”
웰링턴이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유리잔을 내밀자, 에리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오, 너 그냥 샌님인 줄 알았는데 센스가 좀 있는 샌님이었구나?”
“그놈의 샌님 타령은 그만 좀 하면 안 되오?”
“그럼 양아치 샌님?”
“……그냥 샌님이라는 단어를 버릴 생각 자체가 없으신 거군.”
“후후후. 한 번 지어준 별명이 쉽게 바뀌면 재미없잖아?”
에리카가 위스키 담긴 유리잔을 받으려는데, 갑자기 위를 틀어막는 손이 있었다.
테오였다.
“으응?”
“미성년자는 음주 금지.”
“이건 그냥 마시자. 네 친구가 준 거잖아?”
“그래도 안 돼. 싫으면 나가던가.”
“으아아아! 진짜 이 꼰대보다 더한 새끼가!”
“풉! 별명 쉽게 바뀌면 재미없다더니. 테오 공자는 바뀌었군.”
“웰, 당신도 마찬가집니다.”
“으응?”
“압수하겠습니다.”
“아, 아니, 테오 공자! 오늘 같은 날은 융통성을 좀 발휘해도……!”
웰링턴은 에리카를 비웃다 말고 잘 마시던 위스키까지 통째로 빼앗기자 절규했다.
물론, 두 사람의 저항은 테오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냥 맘 편하게 오렌지 주스나 마시면 될 걸, 저렇게 맛없는 걸 왜 먹는지 몰라.”
쯔왑쯔왑.
바로 옆자리에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어린이 오렌지 음료를 빨대로 쪽쪽 빨아 마시던 홀커스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니까 도련님!”
“무용담 좀!”
“아니, 이렇게 상위권 사람이 전부 다 모였으니까 뒷이야기 좀 해주십시오!”
멤버들도 어느새 그들 다섯 사람의 주변으로 모여 눈을 반짝였다.
레이는 그런 그들이 부담스러워 몸을 쭈뼛대면서도,
‘……재미있어.’
자리를 떠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외롭게만 지내던 레이에게 이곳은 신세계처럼 보였으니까.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언제나 병을 안고 혼자서 살았던 레이에게는 누군가와 어울린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테오를 만나고, 그 주변 사람들을 하나둘씩 만나게 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울리고 싶다.
친구가,
되고 싶었다.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