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옛 선택자 (3)
벌모세수.
인위적으로 육체 속의 노폐물을 배출시켜 마력을 쌓기 유용한 체질로 바꾸는 고대 비전의 일종이었다.
원래는 유명한 명문 무가에서 직계의 재능을 높이기 위해 시도하는 고대 비전으로,
마력이 풍부한 노고수들 여럿이 달라붙어 꼬박 며칠을 고생해야만 가능하므로 웬만한 장소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작업이었다.
설사 시도한다고 한들, 그 대상은 보통 5살 이하의 어린아이일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작업이 테오에게 발생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것은 우연에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기연이었다.
테오가 노인에게 물렸을 당시에 체내에 침투된 것은 단순히 시독만 있는 게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용의 심장으로 강화된 테오의 면역 체계가 자연스럽게 작동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번 독성은 면역 체계가 단숨에 무너질 정도로 아주 지독했다.
살아생전에 북방에서 비교할 만한 고수가 몇 안 될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였던 노인이 축적해둔 마력의 일부는 물론,
수십 년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귀령초만 먹어서 쌓인 마정(魔精)까지.
수많은 이질적 기운들이 잡다하게 뒤섞여 있으니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영마독.
전생에서 영사룡을 탄생케 한 극독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영마독이 테오를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을 때쯤에 움브라가 나섰다.
움브라는 평상시에도 별미로 귀령초를 섭취하면서 중독으로 갈증이 생길 때면 수정을 먹어 해독하는 과정을 몇 번씩 반복했던 상태.
그렇다 보니 귀령초의 독기를 몰아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양의 수정이 필요한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으니.
덕분에 테오는 영마독과 해독제의 미묘한 균형을 이룰 수 있었고,
바로 그 순간, 면역 체계에 힘이 실리면서 정지되어 가던 용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쿵쿵쿵쿵!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파아아아-
단전이 거칠게 떨렸다.
두 개의 마력이 뒤섞이면서 테오의 전신을 마구잡이로 누비고 다녔다.
영마독과 해독제를 뒤쫓기 위해서.
면역 체계 입장에서 둘은 구분하기가 어려운 상태.
그러니 여기서 결정해야만 했다.
영마독과 해독제를 흡수할지, 아니면 방출할지.
여기서 테오의 면역 체계가 선택한 것은 아주 간단했다.
-삼키기.
탐욕과 욕심으로 똘똘 뭉친 용의 피에 새겨진 본능은 이 많은 양의 기운을 놓치려 하지 않았다.
덕분에 마력은 단숨에 불어나 그동안 테오가 개통하지 못했던 혈도와 세맥을 일제히 관통했으니.
용의 심장과 단전을 잇는 마력회로가 단숨에 몇 배로 증가했다.
뇌기가 튀어 오르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그만한 양의 마력을 통째로 삼키려면 속성 마력이 강화되어 이를 통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지지지직!
테오의 몸뚱이 위로 뇌기가 튀어 오르면서 노폐물을 태우고, 근질을 더욱더 단단하게 만들어 나갔다.
그러다 뇌기가 어느새 동굴 전체를 뒤덮는다 싶을 정도로 강렬하게 빛났을 때쯤,
스스스-
어느 순간부터 뇌기의 색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노란색에서 검은색으로.
탁한 검은색이 아니었다.
마치 밤하늘의 어둠을 옮겨 담은 것 같이 칠흑색으로 빛나는 뇌기.
흑뢰(黑雷)였다.
“이건……?”
속성 마력의 색깔이 변한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이블린도 놀란 얼굴이 되었지만, 딱히 제지하려 들지는 않았다.
뭘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테오는 지금 이 순간 아주 중요한 기로에 서 있었으므로.
파아아아……!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흑뢰의 열기가 서서히 가라앉는다 싶더니, 곧 모든 기운이 테오의 신체 안쪽으로 갈무리되었다.
테오가 눈을 뜬 것도 바로 그때였다.
번- 쩍!
강렬한 안광이 사위를 갈랐다.
“괜찮…… 으십니까, 도련님?”
테오는 살짝 웃으면서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끼쳐서 미안.”
이블린은 그제야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평상시 테오의 모습 그대로였다.
* * *
[‘테오 라그나르’를 관찰합니다.]
+
테오 라그나르 (15세/남)
· 칭호: 섬호(閃虎), 천년 제일의 기재.
· 재능: 라그나르, 플레이어, 관찰, 인벤토리, 상점 이용, 수호룡의 반려자, 벌모세수, 영사룡, [열람 불가], [열람 불가].
· 상태: 뜻하지 않은 기연으로 기분이 얼떨떨한 상태이다. 1회차의 영사룡을 탄생시킨 영마독을 대신 얻게 되었으니 기연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를 잘 관리하지 않으면 제2의 영사룡이 될 수 있으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
영사룡.
그 단어가 테오의 눈에 확 들어왔다.
영사룡의 힘이라니.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테오는 뒷면도 빠르게 살폈다.
+
· 레벨: 21
· 능력치(▼)
근력: 112 민첩: 62
체력: 38 마력: 238
지능: 36 운: 21
· 스킬(▼)
- 레서 드레이크 피어
- 해츨링 싱크로
- 와이번 테이밍
· [열람 불가]
․ 현재 보유한 코인 수: 1
+
‘영사룡의 재능이 생기면서 추가된 능력치 총 계수만 85……. 미친 수준이야.’
여섯 개의 능력치들이 전부 10 이상씩 올랐으니 대단한 결과였다.
단순 계산으로 17레벨을 올려야만 가능한 수치였으므로.
물론, 영사룡의 재능만 두고 본다면 오히려 수치 상승이 생각보다 낮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테오가 주목한 것은 단순한 그런 숫자 계산만이 아니었다.
체질의 변화도 있었다.
‘라그나르의 육체는 이미 그 자체로 완성형이다. 그런데 이걸 가지고 벌모세수를 이룰 뿐 아니라, 강화까지 시켰으니까. 앞으로의 성장은 더욱더 빨라지겠지.’
테오는 지금의 상황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아직 체내에 조금씩 남은 영마독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면 제2의 영사룡이 될 거라는 경고가 있다지만,
그거야 애당초 권좌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자기 관리가 최우선이니 그에게 경고도 되지 못했다.
‘그보다 대체 이 노인의 정체가 뭐냐가 관건인데.’
테오는 노인의 시체와 주변부를 관찰하던 이블린에게 물었다.
“뭐 발견한 거 있어?”
“여기를 한 번 보십시오.”
이블린은 쇠사슬이 연결된 벽면 아래를 가리켰다.
테오는 그곳으로 가까이 다가가면서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일지로군.”
“예. 아무래도 이따금 한 번씩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벽면에는 노인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일지가 간략하게 새겨져 있었다.
단단한 동굴 벽에다 세밀한 글자를 남길 수 있을 정도로 고절한 실력을 지녔었다는 증거.
그중 하나는 내용이 이러했다.
카일과 로베르에게 패해 숨게 된 이곳은 훗날을 대비하기에 알맞은 장소인 것 같다. 하지만 과연 복수가 가능할지 의문이기도 하다. 나는 이미 몸이 폐인이 되었으므로…….
카일이라는 이름이 눈에 밟혔다.
“도련님.”
“응. 아무래도 과거에 아버지에게 패했던 사람인 것 같아. 계승권자였을까?”
-카일! 카일, 카이이일! 로베르! 로베르으으! 너희들을……! 너희들을 증오한다아아아!
노인이 죽기 전에 내뱉던 말이 언뜻 떠올랐다.
당시에는 상대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신경 쓰지 못했었는데.
아무래도 이걸 두고 했던 말인 것 같았다.
‘로베르? 여기서 흑룡의 이름은 왜 나오는 거지?’
테오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남은 일기를 빠르게 살폈다.
몸이 빠른 속도로 피폐해지고 있다. 로베르에게 단전을 다쳤기 때문일까? 회복을 시도하지만 쉽지 않다. 살기 위해 먹는 귀령초가 오히려 날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
정신을 잃기 시작했다. 단순한 몽유병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 대체 내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이제야 내 몸에 벌어진 변화 이유를 알 것 같다. 마성(魔性)이다. 주화입마에 빠진 것이다.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아직 복수는 시작도 하지 못했는데! 대체 왜!
정신을 잃는 동안에 내가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 이곳을 빠져나가기로 했다간 모든 게 어그러진다. 어쩔 수 없이 나의 애검…… 녹사검을 마력으로 녹여 쇠사슬로 만들었다. 날 강제한다. 날 속박한다. 나는 나 스스로를 구속하였다.
하지만 이 구속은 내가 한 것이되,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찢어 죽일 카일과 로베르가 준 것이다. 이 구속을 푸는 그 날이 그 둘을 죽일 날이리라.
내게 이런 시련을 준 하늘을 저주한다…….
정신을 잃었다가 되찾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는 듯하다. 아마 이러다가 두 번 다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겠지.
기회. 기회가 조금이라도 남아있었더라면.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온다.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할 때였다. 그리고 인정해야만 했다. 내게는 더 이상 가망이 없었다.
누군가가 이곳을 발견해주기를. 그리고 그가 내 염원을 이뤄주기를. 복수를 성공시켜주기를. 내 후인이 그들을 뛰어넘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내 업을 이곳에 남긴다…….
한이 잔뜩 남아있는 듯한 일기 아래에는 비뚤비뚤한 글씨체로 상당한 양의 구결이 남아있었다.
단순히 훑어보기만 해도 최상급 비전에 못지않은 비전들.
“<비검행>, <풍뢰신>……? 서, 설마 푸, 풍존!”
확 커진 이블린의 두 눈이 황급히 죽은 노인의 시체로 향했다.
테오도 골이 울리는 느낌이었다.
“풍존이라면 40여 년 전에 최후까지 아버지와 권좌 경쟁을 벌였던 분이시잖아?”
“네, 그런 것 같습니다.”
“분명히 죽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여기에 계셨었다고?”
먼 과거, 권좌를 틀어쥐려는 카일에게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사람이 있었다.
풍존, 헥토르 라그나르.
그 위업과 위명만큼은 카일을 압도할 정도로 뛰어났으나, 끝끝내 꺾이고 말았던 비운의 영웅.
바람을 자유자재로 부리고 다녔다고 알려진 그는 적을 상대할 때는 폭풍처럼 사납고, 몸을 움직일 때면 돌풍처럼 날랬으며, 아군을 대할 때는 훈풍처럼 따스했다고 한다.
이제는 전설로만 남은 그가 이런 초라한 몰골로 남았을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마지막까지 복수에 대한 갈망을 잊지 못했던 건지.
언젠가 자신의 유산을 수습해줄 후인이 부디 카일을 꺾어주기를 바란다는 유언까지 남겼을 정도였다.
그때, 이블린이 갑자기 테오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더니 머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마치 단두대에 오른 죄수를 떠올리게 하는 자세.
테오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라그나르의 가신이 계승권자를 해치는 것은 이유를 불문하고 즉결 처형이 가능한 중죄입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소리 마.”
테오는 이블린의 말허리를 가차 없이 잘랐다.
“네가 해친 건 라그나르가 아냐. 정신 못 차리던 미치광이였지.”
“하지만……!”
“그리고 날 살리기 위해서 그런 거였는데 거기서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
“…….”
“그래도 계속 신경 쓰인다면, 저 두 가지 비전은 이블린이 가져가.”
순간, 이블린이 고개를 위로 번쩍 들었다.
“풍존의 비전은 9룡의 비전과도 비견할 만하다는 절대비전입니다. 그런데 그걸 어째서 제게……!”
“날 살려준 대가.”
“……!”
“풍존의 후인이 되면 돼. 그리고 그 유업을 이어받아. 그럼 풍존도 죽어서 편하게 눈 감을 수 있겠지. 제자가 되었으니 죄도 더 이상 물을 수 없을 거고.”
이블린은 테오의 말속에 숨겨진 진의를 알 수 있었다.
풍존의 유업.
그것은 카일을 꺾어달라는 것이었다.
권좌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과정.
즉,
“내 검이 되어주지 않겠어, 이블린?”
테오의 강렬한 시선이 이블린의 동공을 꿰뚫었다.
아니, 동공만이 아니었다.
그 속에 담긴 정신. 혹은 영혼을 관통했다.
“……!!”
이블린은 잘게 몸을 떨었다.
테오는 그녀에게 다시 검을 쥐게 해주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잃어버린 팔을 되찾아주었다.
영영 접어둬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옛꿈이 다시 그녀의 발아래 펼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데,
이제 그 위를 날 수 있도록 날개까지 달아준다고 한다.
이블린은 꿇었던 무릎 중 하나를 펴서 부복 자세로 바꾸며 고개를 숙였다.
신하가 주군에게 바치는 예의.
기사가 군주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검례였다.
“나, 대장벽의 수호자이자 겨울산맥의 군주인 라그나르의 상급검사 이블린 네레빌은 테오 라그나르 님을 주군으로 모시는 봉신이 되고자 충성을 맹세할지니…….”
이블린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렸다.
“위대하고 지엄하신 군주께서는 이 가녀린 봉신의 맹세를 가납해주시기를 간청하나이다.”
“나, 테오 라그나르는.”
테오는 드레이크의 날붙이를 높이 들어 차례로 이블린의 정수리와 양어깨를 짚었다.
“이블린 네레빌의 맹세를 받아 심장과 영혼에 새기고, 기나긴 여정을 함께 할 첫 번째 검으로 삼을 것을 서약한다.”
지금 바로 이곳에,
위대한 전설을 새롭게 써 내려갈 첫 번째 맹세 서약이 탄생했다.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