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옛 선택자 (1)
‘지금쯤 서로 만났으려나?’
율리우스는 뜨거운 커피로 데워진 컵을 양손으로 포개면서 미소를 지었다.
테오가 지명식에서 백갑용기대에 들어오겠다고 의사를 밝혔을 때.
율리우스는 사실 이것도 ‘운명’이라고 받아들였다.
바로 그 전날, 이블린이 멀쩡해진 모습으로 나타났었으니까.
-이블린, 너 팔이……!
-예, 뭐, 어쩌다 보니 선물을 받게 되었습니다.
선물.
이블린은 새로운 왼팔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모를 것이다.
그것은 율리우스에게도 선물이었다는 사실을.
이블린 네레빌을 되찾았다는 것만으로도 율리우스는 마음이 꽉 찬 기분이었다.
지난 몇 년간 그녀를 챙겨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내려둘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러한 선물을 준 사람이 이블린을 따라서 백갑용기대에 들어오게 되었다.
율리우스가 이블린에 대해 테오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선물을 준 만큼 그에게도 깜짝 놀랄 만한 선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테오와 이블린.
그들은 머지않아 백갑용기대의 기둥과 기반이 될 사람들이니까.
“행복해 보이시는군요.”
율리우스는 상념에 젖어 있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깼다.
그러고는 상대가 누군지 알아보고 미소를 지었다.
“뜻하지 않게 제겐 너무 과분한 용이 품 안으로 뛰어 들어온 꼴이 되었으니까요. 즐겁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그 용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 것 같아서 따로 뵙자고 이렇게 찾아온 것이랍니다.”
맞은편에 매화궁주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떤 용건인지 정확하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백갑용기대장께서는 테오, 그 아이를 장차 백갑용기대의 중축으로 삼으려 하시는 걸로 보이는데 맞을까요?”
율리우스는 아무 대답 없이 웃었다.
그 어떤 것도 대답해줄 수 없다는 듯.
“역시 말을 조심하는 것이 백갑용기대장다우시군요.”
“입은 모든 화의 근원이지 않습니까?”
율리우스는 백갑용기대를 항상 형제이며 가족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가족은 아니기에, 아무리 단단한 동료애로 묶여있다고 해도 언제 어떤 방식으로 갈라질지 모른다.
그리고 보통 그러한 갈등과 분열의 원인은 수장의 입이었다.
그러니 누군가를 편애한다, 누군가를 총애한다, 이런 식의 소문이 돌아서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게 율리우스의 지론이었다.
지명식에서 테오에게 아무것도 약속해주지 못한다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재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나 계획까지 없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매화궁주는 그걸 읽었다.
“……아니군요. 단순한 중축이 아니라, 오히려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그림을 계시는 거였어요.”
“역시나 이번에도 묵비권을 행사하겠습니다.”
“괜찮아요. 애당초 제 의사만 전달하려고 찾아온 거였으니. 오히려 지금 백갑용기대장의 얼굴을 보고 나니 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답니다.”
“무엇입니까?”
율리우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말하는 잠룡은 이미 백갑용기대의 품에 들어왔다.
더 이상 매화궁으로 넘어갈 수 없다는 뜻.
그런데 이 상황에서 매화궁주가 무엇을 제안할 수 있을지 짐작이 가질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공동 전인.”
“……?”
“어떠신가요?”
“……!”
전혀 예기지 못한 말에 율리우스의 두 눈이 커졌다.
* * *
이블린은 죽은 황소 두 마리를 챙기고 돌아오자마자 헛웃음을 흘려야만 했다.
“……대체 어떻게 하신 거지?”
움브라가 그 커다란 머리를 테오에게 비비적대고 있었다.
살가운 애정의 표시.
평상시 녀석의 마음이 얼마나 굳게 닫혀 있는지 잘 알던 그녀로서는 뭘 잘못 봤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백룡의 둥지에서 알비노 특징을 가지고 있는 건 한 마리밖에 없었으니 헛것을 본 건 아니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려나.’
이블린은 절대 하나로 엮일 일이 없을 것 같던 제4 연무장의 멤버들을 묶었던 테오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볼을 긁적였다.
저런 친화력이야말로 그의 가장 무서운 장기가 아닐까.
으적으적-
움브라가 황소 두 마리를 앞발로 가져와 씹어 먹기 시작했다.
배가 많이 고팠던지 허겁지겁 먹는 모습이 가슴 아플 정도였다.
“안 뺏어 먹으니까 천천히 먹어. 그러다 목 막힐라.”
테오가 움브라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면서 말하자, 잠시 움브라의 식사가 멈췄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빤히 테오를 바라봤다.
“……?”
이 녀석이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스윽-
갑자기 움브라가 가장 살점이 많은 고기 부위를 테오 앞으로 밀었다.
“하하하! 이걸 나더러 먹으라고?”
끄덕끄덕!
“됐어. 너 많이 먹어. 난 이미 밥 먹고 왔어.”
…….
“진짜야. 네가 주는 게 싫어서 거절하는 게 아니라, 나는 배부르다니까?”
움브라는 그제야 안도했던지 다시 고기에다 머리를 처박았다.
우걱우걱!
테오는 그런 움브라가 너무 귀여워 목덜미를 계속 쓰다듬었다.
움브라가 식사를 끝낸 건 그로부터 30분이 지난 뒤였다.
꺼억.
제법 힘이 났던지 가볍게 트림하면서 몸집을 일으켰다.
날개까지 활짝 펼치니 덩치가 확실히 엄청났다.
얼씨구.
테오는 움브라의 행동을 재미나게 구경하다가, 갑자기 녀석이 자신 앞으로 몸을 살짝 낮추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더러 타라고?”
움브라가 몸을 들썩였다.
어서 올라타지 않고 뭐하냐는 것 같았다.
“와이번이 자신의 등과 목덜미를 보여준다는 건 그만큼 상대를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도련님을 파트너로 인정했다는 건데…… 잠시만 기다리세요. 고삐와 안장부터 챙겨 와야……!”
“아냐. 괜찮아. 이대로 그냥 올라탈게. 이 녀석도 기다리기 힘들어하는 것 같고.”
“안 됩니다. 위험해요!”
이블린은 테오가 움브라의 어깨 위에 올라타자 만류하려 했다.
아무리 파트너로 인정받았다고 해도, 테오는 아직 제대로 된 비행 훈련을 받지 못한 초짜였다.
그런데 안장과 고삐 같은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이 비행을 시도하겠다니.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괜찮아. 방법이 있거든.”
하지만 테오는 이미 완전히 움브라의 등에 올라선 뒤였다.
이블린의 눈에 보이지는 않겠지만.
테오와 움브라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고삐가 연결되어 있었다.
염동력이 둘 사이를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스킬: 해츨링 싱크로’의 염동력으로 시전자와 비퍼 와이번의 사념 연동이 이뤄집니다.]
[지금부터 비퍼 와이번의 의사를 읽을 수 있게 됩니다.]
[‘스킬: 와이번 테이밍’을 발동하여 부족한 라이딩 기술이 보정됩니다.]
[기수로서의 능력을 각성합니다.]
스킬이 자동으로 적용되면서 실수할 우려도 없어졌다.
‘너무 편한데.’
테오는 보이지 않는 고삐를 꽉 쥐면서 외쳤다.
“그럼 한 번 가볼까, 움브라?”
카아아아!
움브라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길게 포효했다.
바위산 지대가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강렬한 메아리와 폭풍.
그리고,
푸드득!
거친 날갯짓과 함께 거대한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블린이 말릴 새가 없었다.
“도련님!”
이블린이 달려왔을 때는 이미 테오와 움브라는 하늘 높이 비상한 뒤였다.
덕분에 먼지바람이 풀풀 날렸다.
이블린은 흔들리는 머리를 정리하면서 그 모습을 황망하게 바라봤다.
원래 저렇게 막무가내인 분이 아니셨는데……!
아무래도 움브라와의 만남이 테오에게 어떤 변화를 준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저 위험한 짓을 마음 놓고 볼 수만은 없는 일.
이블린은 랑구스에 재빨리 올라타 테오의 뒤를 쫓았다.
두 마리의 와이번이 파란 하늘을 가로질렀다.
* * *
와이번과 한 몸이 되어 푸른 하늘을 마음껏 누린다는 건, 단순히 뒷자리에 올라타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시원하다.
그리고 상쾌하다.
테오는 가장 먼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
지상에서는 전혀 겪어보지 못했던 자유를 되찾은 기분이었다.
키에에엑!
그런 테오의 생각을 읽었던지, 움브라가 길게 울음을 토했다.
“좋냐고?”
키엑!
“응. 좋아, 아주.”
키엑! 키엑! 키에엑!
“고마워. 덕분에 이런 호사도 다 누리네.”
케에에엑-
테오와 움브라는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스킬 보정도 있었지만, 그만큼 서로의 감정에 깊게 공감하고 있던 덕분이었다.
테오가 즐거워하니 자연스럽게 움브라도 즐거워진 것이다.
아마 움브라는 바로 이 광경을 테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하늘에서 세상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기분.
아무것도 없는 하늘을 맘껏 유영하는 동안에는 지상에 있었던 모든 근심과 걱정을 벗어던질 수가 있다.
자신이 그러했듯, 테오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던 거겠지.
‘기특한 녀석.’
테오는 그런 움브라의 어여쁜 생각이 더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속 깊고 따뜻한 아이가 어쩌다 영사룡 같은 마물로 변해버렸던 걸까?
‘그만한 마물이 되었다는 건 무슨 기연이라도 있었다는 걸 텐데.’
테오는 잠깐 고민에 잠겼지만 곧 고개를 털었다.
더 깊게 생각지 말자.
그게 뭐가 되었든 간에 다시는 그런 비극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되는 것이니.
그렇게 다짐했다.
“그보다 움브라,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테오는 움브라가 가고 싶은 대로 갈 수 있도록 딱히 조종은 하지 않고 있었다.
케에엑-
움브라가 말하는 바는 아주 간단했다.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다.
“뭘 보여주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좋아. 가보자. 좀 더 속도 낼 수 있지?”
키에에엑!
움브라가 자신을 뭘로 보냐며 가볍게 콧방귀를 끼고는 더 빠르게 날갯짓을 했다.
‘이 자식, 허세가 좀 있는데?’
속룡종 수십 마리가 달라붙어도 자신을 붙잡지 못한다나?
조금 전에 다른 와이번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건 생각지도 않는 건지.
그래도 움브라는 자신 있게 말했던 것만큼 아주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하였으니.
백룡의 둥지 영역을 한참 벗어나 마해에 가까운 겨울산맥의 어느 골짜기에 들어선 것이다.
만년설이 수북하게 쌓인 골짜기.
침엽수가 울창하게 자라 숲을 이루고, 곳곳에 고드름이 맺혀 있었다.
엷게 얼어붙은 강물은 도도하게 흐르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러 확 하고 쏟아졌으니.
엄청난 크기의 폭포수가 테오와 움브라를 맞이했다.
절경이었다.
키이이?
움브라가 어떠냐며 자신만만하게 물어왔다.
“대단한데?”
이곳은 테오도 난생처음 보는 장소였다.
겨울산맥이 아무리 크고 넓다지만 그래도 웬만한 지역은 다 돌아다녔다고 생각했었는데.
심지어 이 주변을 찾는 사람도 아무도 없는 건지 인기척이나 이렇다 할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케에엑!
움브라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듯, 이번에는 날개를 살짝 접어 활강을 시도했다.
목표는 폭포수.
“잠……!”
테오가 깜짝 놀라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움브라는 크게 곡선을 그리면서 폭포수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드러난 동굴 입구.
외부에서는 절대 발견할 수 없을 만큼 교묘하게 위치한 장소였다.
탁!
“와아…….”
테오는 한숨을 토해내면서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터뜨리고 말았다.
바깥 절경도 아름다웠지만, 동굴 안은 다른 의미로 아름다웠다.
천장과 벽면 곳곳에 박힌 수정들이 반짝거리고, 바닥에 엷게 깔린 빙판이 사람 얼굴도 고스란히 비출 만큼 투명했다.
키엑! 키에엑!
움브라는 앞가슴에 힘을 바짝 주면서 으스댔다.
새로운 파트너에게 자신의 비밀 아지트를 자랑하고 싶던 모양이었다.
테오는 정말 대단하다며 움브라의 목덜미를 쓰다듬어주면서 동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딱 녀석이 좋아할 만한 장소이긴 해.’
바닥이며 천장까지 죄다 반짝이는 걸로 가득하니 끌렸던 거겠지.
다만, 안쪽에서부터 자꾸 차가운 냉기가 불어오는 것이 어디론가 연결된 것 같았다.
그런데 거기에 조금씩 섞인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마기(魔氣).
마해의 기운이었다.
‘혹시 움브라가 마물로 변질되었던 이유가……?’
테오는 더 자세히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에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갔고,
거기서 만날 수 있었다.
동굴의 가장 깊은 곳.
양팔이 쇠사슬에 결박된 채로 죽어 있는 어느 백발노인의 시체를.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