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지명식 (5)
걸음을 하나씩 내디딜 때마다 발밑으로 데스비트가 자연스럽게 깔렸다.
염동력과 신체의 움직임이 어느새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이다.
덕분에 테오는 그야말로 하늘 위를 ‘질주’ 할 수 있었다.
파아아앗-
“저건……!”
그 때문에 가장 놀란 건 바로 이블린이었다.
테오가 개화식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염동력에 눈을 떴다는 사실은 율리우스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타고난 재능만으로 발현할 수 있다는 초능력(超能力).
하지만 그 수준이 초보적일 거라고만 여겼지, 저렇게 자연스러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
“어서 가자, 테오 도련님을 놓치면 쪽팔리잖아?”
하지만 놀라움도 잠시.
이블린은 랑구스의 엉덩이를 두들기면서 빠르게 쫓을 것을 재촉했다.
카아아아!
랑구스는 이블린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길게 포효하면서 거칠게 날갯짓했다.
* * *
움브라와의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무렵.
테오는 거세게 데스비트를 밟아 높이 도약하면서 다른 데스비트들을 움직였다.
‘가라.’
팟! 팟! 팟! 팟!
총 네 자루의 단검이 화살처럼 쏘아진다 싶더니 뜨거운 대기 마찰열과 함께 뇌전을 터뜨렸다.
쿠르르릉-
동시에 나타나는 네 마리의 뇌룡(雷龍).
키아아?
캬악!
움브라를 괴롭히던 와이번들도 그제야 데스비트의 기척을 느꼈던 건지 황급히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네 마리의 뇌룡이 거칠게 용틀임하면서 아래로 거칠게 발톱을 내리그었다.
촤아아악!
<뇌룡 속호법 – 용문(龍紋)>
키에에엑!
와이번들에게 커다란 상처가 나면서 사방에 피가 튀었다.
대부분 독룡종과 속룡종에 속하는 놈들이다 보니 힘이 약해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하지만 개중에는 괴룡종도 한 마리 섞여 있었다.
괴룡종은 테오가 문제인 것을 알고 이쪽을 향해 이빨을 들이댔다.
하지만,
이미 그때 테오는 손에 드레이크의 날붙이를 든 채로 하강을 시도하고 있었다.
<용의 세 발톱 – 난도(亂刀)>
쉬쉬쉬쉭-
마력이 잔뜩 실린 츠바이핸더의 위력은 괴룡종도 쉽사리 접근하기 힘들 정도로 강했으니.
푸우우-
결국 칼날이 목덜미 부근을 거칠게 스치고 지나가자, 괴룡종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거칠게 날갯짓하며 상공으로 도주를 시도했다.
야생의 와이번이라면 끝까지 테오를 노리고 들었겠지만, 어느 정도 훈련이 되어 있는 녀석이다 보니 테오를 백갑용기대의 대원으로 착각한 것이다.
절대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결국 다른 녀석들도 부리나케 줄행랑을 선택하고,
움브라는 그제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괜찮니?”
테오는 어느새 다시 단검 형태로 돌아온 데스비트를 딛고 움브라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크르르……!
녀석은 난데없이 등장한 테오에게 잔뜩 경계심을 드러냈다.
갑자기 자신을 도와줬다고 해도 테오의 뜻을 알 수 없었으므로.
어떡하지?
테오가 잠깐 멈칫거리는 사이, 움브라가 재빨리 몸을 반대 방향으로 돌려 달아났다.
“아……!”
테오가 다시 그 뒤를 쫓으려 했지만, 이블린이 재빨리 다가와 그를 다시 랑구스 위에 태웠다.
테오가 이제 하늘 위에 떠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던 것이다.
“지금은 잔뜩 날이 서 있어서 접근이 어려울 겁니다. 다가가시려거든 천천히 다가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걱정되어 건넨 조언이었지만, 테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러니까 오히려 지금 더 옆에 있어 줘야 해.”
“하지만……!”
움브라는 그동안 전문 훈련사인 백갑용기대에게도 마음을 열어준 적이 없었다.
그러니 처음 만난 테오에게 더욱더 마음을 열 리 만무하다, 이블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테오는 움브라와 같은 외톨이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움브라에게 필요한 것은 ‘따스함’이었다.
-날카롭던 눈빛 속에 담긴 외로움을 어떻게 모를까?
‘계속 무리에서 배척받았으면서도 백룡의 둥지 주변을 맴도는 이유…… 녀석은 외로운 거야. 괴로운 거고. 육체적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견디기 어려운 법이니까.’
단지 서자라는 이유로 형제들에게 배척받고, 가문에서도 내쫓기다시피 했던 지난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부탁할게. 쫓아가 줘. 지친 상태라 얼마 가지 못했을 거야.”
이블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랑구스를 움직였다.
테오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 * *
테오의 말대로 움브라를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위 지대에 내려앉아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으니까.
크르르……!
하지만 녀석은 테오와 이블린이 다가오려는 것을 계속 경계했다.
상당히 먼 곳에 내려앉아 천천히 접근하려 해도, 절대 빈틈을 내어주지 않았다.
먹이로 유인해야 하나?
이블린이 답답한 마음에 도와달라며 랑구스를 바라봤지만, 그녀의 파트너는 딱히 관심 없다는 듯이 뒷발로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여기서 기다려. 내가 해볼게. 어차피 내 적성 테스트이기도 하니까.”
테오는 이블린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천천히 움브라에게 다가갔다.
카아아!
움브라가 더 다가오면 물어뜯겠다는 듯이 송곳니를 잔뜩 드러냈다.
괴룡종의 피가 섞여 있다더니, 10미터에 가까운 덩치가 풍기는 살의가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와이번 피어(Wyvern Fear)였다.
‘목덜미 부근이 심하게 물어뜯겼어.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위험해.’
다행히 테오는 치료를 위한 수단을 금방 마련할 수 있었다.
‘상점창.’
[상점창을 열람합니다.]
치료제도 금방 발견했다.
+
[테이머 치료제]
· 종류: 치료약, 포션
· 사용 조건: 5레벨
· 효과
- 악화된 상처의 빠른 치료
- 체력 일부 회복
+
[2코인을 지급하여 ‘테이머 치료제 ×2’를 구매하였습니다.]
‘문제는 이걸 저 녀석에게 어떻게 발라주느냐는 건데…….’
움브라와의 거리는 고작 20여 미터.
하지만 경계심이 사그라지지 않아 더 접근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이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우선 상처부터 치료하고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스킬: 레서 드레이크의 피어’를 발동하여 와이번 피어를 밀어냅니다!]
화아아악!
테오에게서 발산된 용살기가 단숨에 와이번 피어를 지워버리자, 움브라가 깜짝 놀라 움찔거렸다.
그러면서도 지지 않겠다는 듯 눈가에 독기가 가득한 것이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테오는 그사이에 단숨에 거리를 좁혔고, 다시 도망치려는 녀석의 앞다리를 억지로 붙잡아 당겼다.
[괴력]이 적용된 근력은 움브라도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키아아……!
움브라가 어서 놓으라며 발버둥을 쳤다.
“가만히 있어 봐, 이것아. 상처만 더 벌어지잖아.”
물론, 테오가 놓아줄 리 만무한 일.
오히려 더 강한 힘으로 누르면서 상처 위에 포션을 뿌렸다.
치이익!
피가 멎고, 상처가 조금씩 아물기 시작했다.
움브라도 그제야 뭔가를 느꼈던지 저항을 멈추고 눈동자만 데구르르 굴렸다.
“갑자기 아픈 게 사라지니까 좋지?”
테오는 그런 움브라의 태도가 귀여워 피식 웃으면서 남은 포션도 열어 다른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끼이이…….
상처 회복이 빨라질 때마다 일어나는 자극에 움브라의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그래도 더 이상 반항은 없었다.
“…….”
-…….
아주 잠깐 동안, 둘 사이에 평온한 적막이 흐르고.
두근! 두근! 두근!
쿵……! 쿵……! 쿵……!
경계심으로 가쁘게 뛰던 움브라의 심장 박동이 조금씩 느려지면서 테오의 심장 박동 박자와 맞춰졌다.
테오는 녀석의 그런 변화를 감지하고 미소를 지었다.
심장만큼이나 느려지는 숨소리.
그걸 듣는 내내, 테오는 움브라가 그동안 느꼈던 여러 감정들을 느낄 수 있었다.
외로움, 슬픔, 괴로움, 분노, 애절함, 한탄, 후회, 미련…….
자신을 내쫓은 무리에 대한 짜증과 슬픔, 그리고 오랫동안 혼자서 생활하면서 생긴 긴장감과 외로움.
갑자기 나타나 따스함을 건네주는 테오에게 의문을 가지면서도,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아이러니한 심정도 읽을 수 있었다.
테오는 상처를 매만지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건 백번 말로 하기보다, 심장으로 직접 느끼게 하는 게 진심을 전달하는데 훨씬 더 좋았다.
“……어떻게 하신 겁니까?”
이블린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신기했던지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옆에 다가와 물었다.
움브라가 이렇게 얌전하게 있는 모습은 그녀도 처음 보는 거였으니까.
사실 그동안 백갑용기대의 많은 기수들이 움브라를 파트너로 삼기 위해 노력하곤 했다.
아무리 따돌림을 받고 있다고 해도, 괴룡종의 덩치와 힘, 그리고 비퍼의 특성을 지닌 녀석을 탐내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움브라는 그런 모든 구애를 거부했다.
안장을 채우고, 고삐를 채우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것이다.
그런데 테오에게 만큼은 조용했으니 신기할 수밖에.
“글쎄.”
테오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로드브로크와 계약이 있어서 좀 더 쉽게 마음을 열어준 것일 수도.’
용은 본능적으로 다른 용을 알아보기 마련이니까.
물론, 그런 추측을 말해줄 수는 없었기에 바로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이블린, 이 녀석이 먹을 먹이 좀 구해다 줄 수 있을까? 아무래도 며칠 동안 뭘 제대로 먹지 못한 것 같아서.”
테오는 앙상한 갈비뼈가 드러난 움브라의 복부를 가리켰다.
이블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이블린이 다시 랑구스를 몰아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일단 급한 불은 전부 끈 것 같은데, 남은 흉까지는 안 지워지려나?”
테오는 움브라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손으로 쓰다듬어주다가, 문득 녀석의 시선이 자신의 앞가슴에 고정되어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정확하게는 거기에 걸려 있던 브로치였다.
키르손이 수료 선물이라며 줬던.
‘이것 봐라?’
테오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브로치를 풀어 높이 들었다.
움브라의 커다란 눈동자가 위로 데구르르 굴러갔다.
이번엔 브로치를 든 팔을 오른쪽으로 휘둘렀다.
움브라의 눈동자가 그쪽으로 다시 굴러갔다.
이번엔 왼쪽.
데구르르-
역시나 왼쪽으로 향했다.
위, 아래, 위, 아래, 대각선…….
브로치 위치를 요리조리 옮길 때마다 움브라의 눈동자도 정신없이 굴러갔다.
“파하핫! 뭐야? 얌전히 있던 게 로드브로크의 향기 때문이 아니라 이거 때문이었어?”
물론, 꼭 그런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용은 보물을 좋아한다던 속설이 또 들어맞아서 재미있었다.
브로치는 예쁜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그 위에 무수히 박힌 보석들로 계속 반짝거렸으니까.
“갖고 싶니?”
끼이이-
움브라는 테오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렸다.
마치 브로치에 무관심하다는 듯.
그러면서 힐끔힐끔 브로치 쪽을 곁눈질하는 게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퍽이나 귀여웠다.
테오는 피식 웃으면서 상점창에서 5미터짜리 철제 체인을 구매하여 그 끝에다가 브로치를 연결했다.
그러고 움브라의 목에다 칭칭 감아 목걸이처럼 만들어줬다.
채앵-
브로치를 손에서 놓자, 녀석의 비늘과 가볍게 부딪치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끼유우……?
움브라는 브로치가 마음에 든 듯 앞발로 소중하게 만지다가, 조심스럽게 테오를 바라봤다.
왜 이걸 주냐는 듯이.
“선물.”
끼이이?
“나 따라오면 앞으로 이런 거 더 많이 가질 수 있는데…… 어때?”
테오는 순간 움브라의 동공이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것만 있는 게 아니야. 혹시 손바닥 크기만 한 루비 본 적 있어? 색깔도 영롱한 게 아주 예쁘지. 아마 깎아서 네 발톱에 붙여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거기다 어머니가 갖고 계시는 머리띠는……!”
테오가 썰을 하나씩 들려줄 때마다 움브라의 동공이 점점 확장되었다.
“네가 싫어하는 고삐랑 안장 같은 것도 전부 그렇게 채울 수 있고.”
끼이이!
움브라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늘을 보면서 길게 울음을 토하는 모습이 당장 그것들을 보러 가자고 강하게 주장하는 것 같았다.
띠링!
[비퍼 와이번으로부터 주인으로 인정받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새로운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
[와이번 테이밍]
· 등급: C-
· 숙련도: 1%
· 효과: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테이밍에 성공한 용종의 더 높은 신뢰를 산다. 탑승 시에 전력이 10% 동반 상승하게 된다.
+
테오는 자기도 모르게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로써 움브라의 환심을 완전히 사는 데 성공했으니까.
특히 이번 스킬은 앞으로 용기사로 활약하는 데 있어 아주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10% 전력 상승.
이건 절대 만만히 볼 게 아니었다.
능력치는 물론, 스킬까지 전부 그만큼 상승한다는 의미였으니.
‘게다가 단순히 와이번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용종’이라는 넓은 범위에 적용된다는 건…… 때에 따라서 와이번만이 아니라 다른 용종에도 통용된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다면 와이번 뿐만 아니라, 사막의 데스웜이나 지상의 드레이크, 바다의 시-서펜트 같은 녀석들도 테이밍할 수 있다는 뜻이니 큰 전력이 될 게 분명했다.
물론, 테이밍을 위해서는 항상 어떤 특정 조건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런 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당장 움브라에게 들어갈 보물도 만만치 않겠지만, 다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그거야 뭐, 키르손 님이 다 알아서 하시겠지.’
테오는 이미 짬처리(?)를 자본주의 노예 엘프에게 떠넘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때문일까?
바로 그 시각.
부르르!
키르손이 금화를 헤아리다 말고 갑작스러운 오한에 몸을 떨고 있었다.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