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지명식 (2)
그 선택을 말하려는 순간,
갑자기 귓가로 누군가의 전음이 은밀하게 파고들었다.
「너, 회귀자지?」
“……!”
그 순간, 테오의 전신이 빳빳하게 굳는 기분이 들었다.
회귀자.
무덤까지 품고 가려고 했던 비밀.
테오의 시선이 다급하게 한쪽으로 향했다.
간부들이 모여 있는 간부석 한쪽.
한 여자가 실실 웃으면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비록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 있지만, 마치 그녀만이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힐다 라그나르.
라그나르의 전전대 가주가 자신을 직시하고 있었다!
두근두근두근-
바로 그때였다.
띠링!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
[튜토리얼 퀘스트 #18]
가문의 숨겨진 비밀을 알아내어 당신이 품고 있는 모든 의문을 해결하고, 튜토리얼을 종료하십시오.
· 난이도: S
· 보상: 1코인
· 실패시: ■■
*해당 퀘스트는 마지막 튜토리얼 퀘스트입니다.
+
쿵쿵쿵쿵!
그 순간, 확 하고 떠오른 퀘스트는 테오의 심장을 더욱더 가쁘게 만들었다.
마지막 튜토리얼 퀘스트.
그것만 보고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힐다와의 대면이 그동안 의문을 품고 있던 회귀와 메시지에 대한 마지막 비밀을 풀 열쇠라는 것을.
‘진정하자, 진정해.’
테오는 길게 호흡을 고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 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테오는 뺨 위로 흐르는 식은땀을 어떻게든 숨기고 싶었다.
「호오. 이런 와중에도 사실을 숨기겠다는 거군? 이전 회차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몰라도, 연기가 아주 수준급이구나. 수준급이야.」
「…….」
‘회차? 그게 무슨 뜻이지? 회귀나 전생에도 정해진 횟수 같은 게 있나?’
머릿속만 계속 복잡해졌다.
그래도 한 가지만큼은 알 것 같았다.
힐다가 자신의 전생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는 것.
「그냥 순순히 말하는 게 어때? 끝까지 숨겨봤자 서로 이야기 진도도 안 나갈 텐데.」
힐다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럴수록 테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테오 라그나르? 왜 그러나?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그때, 심판관이 걱정스럽게 테오의 어깨를 짚었다.
지명을 말하려다 말고 갑자기 중단하니 무슨 일이 있나 싶었던 것이다.
“잠시만…… 잠시만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게나. 확실히 자네는 생각이 복잡할 수밖에 없겠니. 하지만 말했듯이 뒤 순번도 있으니 너무 오래 끌지는 말게.”
“감사합니다.”
테오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다시 힐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결국 테오는 사실을 숨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힐다 같은 존재라면 자신이 어떤 변명을 둘러댄다고 한들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면 돌파를 하는 게 옳았다.
그런데,
「그야 나도 똑같은 회귀자니까.」
돌아오는 대답이 더 가관이었다.
「……!」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는 않잖아?」
「…….」
「뭐, 비록 내게 허락된 회차는 모두 끝났지만.」
힐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회차…… 또 같은 말이다.’
테오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쿵쿵쿵쿵!
반면에 심장 박동은 훨씬 더 거칠어졌다.
「회귀에도 횟수가 있단 말씀이십니까?」
「그야 모르지.」
「……?」
「음?」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싶어 하는데.
갑자기 이번에는 힐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너 설마 카일에게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거야?」
「아버…… 지는 왜 여기서 언급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허! 이런 식으로 나온다고? 갑자기? 회귀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그 인간이?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
힐다는 뚱한 표정으로 가만히 팔짱을 꼈다.
「아니면…… 그런 건가? 하! 이 녀석 봐라? 그런 식으로 잔머리를 쓴다는 거지?」
그녀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다가, 다시 테오를 바라봤다.
「뭐, 일단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회귀라는 권능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게 너무 많아. 발동 원리도, 특정 조건도, 사용 원인도. 태고룡의 유물이나 라그나르의 이 빌어먹을 몸뚱이와 연관이 있다는 것만 알려져 있을 뿐.」
단어 하나가 귀에 내려앉았다.
태고룡의 유물.
‘역시 예상대로 나도 모르게 가졌다던 첫 번째 유물의 효과가 회귀였던 거야. 그런데 그게 육체와 연관이 있다고? 이건 또 무슨 말이지? 퀘스트에서 말한 가문의 비밀이라는 것과도 관련이 있나?’
힐다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궁금한 게 아주 많은 눈치로구나?」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모르는 게 너무 많으니까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힐다의 미소가 짙어졌다.
웅성웅성-
힐다와의 대화가 길어지니 좌중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뭐, 일단 여기서 나눌 이야기는 아닌 것 같고. 나중에 마저 나누자꾸나.」
힐다는 언제 만나자는 건지 구체적인 언급도 없이 홀연히 사라졌다.
“…….”
테오는 한순간 백일몽이라도 길게 꾼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곧 이 비밀들을 모두 알아낼 수 있다. 메시지는 물론, 아버지와 로드브로크에 대한 것까지도.’
그러니 힐다가 찾아올 때까지 일단 여기 일에 집중하자.
테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정신을 차렸고,
“저는.”
드디어 자신의 선택을 말할 수 있었다.
* * *
“저는 등룡관을 지명하겠습니다.”
테오의 결정이 좌중은 물론, 간부진과 여러 9룡들에까지 엄청난 파란을 일으키기 무섭게,
그 다음 순번으로 단상에 올라온 웰링턴이 던진 지명 또한 새로운 파란을 일으켰다.
-등룡관? 뭐지? 윈터러에 그런 곳이 있었나?
-무슨 소리 하는가, 자네! 등룡관이라면 거기잖아, 거기!
-거기? 그러니까 거기가 어딘데?
-등룡…… 께서 운영하시는 학관!
-아!
-그걸 잊으면 어쩌나, 이 사람아!
약 십여 년 전, 카일이 등룡의 은거를 깨기 위해서 직접 설치해준 기구가 있었다.
등룡관.
말년에 홀로 지내려면 적적할 테니 제자라도 기르라며 허락한 ‘학관’이었다.
하지만 등룡이 이를 무시하고 지내면서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었는데.
그것이 지금 다시 부활한 것이다.
-뭐, 그럼 사실상 등룡 님의 제자가 된 셈이 아닌가?
-사실상 유일한 제자일 텐데…… 그 자리를 나르시오의 소가주가?
-그럼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등룡의 비전이 나르시오로 넘어가는 거 아냐?
-그거 그렇게 해도 되나?
-대가문의 비전이 봉신 가문에 넘어가게 되는 건데 될 리가 없잖나. 아, 아닌가? 등룡께서는 원래 라그나르가 아니셨으니까?
여러 추측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웰링턴은 심판관을 바라봤고, 심판관은 흡족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확실해졌다.
-등룡께서 드디어 은거를 깨셨다!
이 역시 새로운 파란이었다.
“그다음, 에리카 랑케!”
다음 차례 호명에 웰링턴은 에리카와 교대를 하다가,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테오와 눈이 마주쳤다.
“축하드립니다.”
“등…… 스승님께서 절 좋게 봐주신 덕분일 뿐이라오. 고맙소.”
웰링턴은 아직 ‘스승님’이라는 단어가 입에 익지 않았던지 어색해 보였다.
“그런데 묻지 않는 것이오? 왜 테오 공자를 따라가지 않았는지.”
짓궂게 웃으며 던지는 질문.
테오도 따라서 피식 웃었다.
“이유를 알 것 같으니까요.”
“무엇인 것 같소?”
“2차 판별식 때와 같은 이유 아닙니까?”
웰링턴도 웃었다.
역시 자신을 이해해줄 줄 알았다는 듯.
“맞소. 나는 내 방식대로 테오 공자를 뛰어넘을 거란 생각은 여전히 그대로요.”
“등룡관에서 그 길을 보신 겁니까?”
“그렇소.”
웰링턴의 눈이 반짝였다.
테오는 그의 눈동자에 담긴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었다.
라그나르와 나르시오만이 아닌 새로운 세계.
과연 등룡이 그에게 보여준 세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건승을 빌겠습니다.”
“나 역시. 테오 공자의 무운을 빌겠소.”
테오와 등룡은 서로의 행운을 빌면서 지나쳤다.
‘또 역사가 틀어졌구나.’
사실 웰링턴이 등룡의 제자가 되는 것은 전생에 없었던 일이었다.
그는 개화식이 끝나자마자 나르시오 가문으로 돌아가 착실하게 가주가 될 준비를 하였고, 가주가 된 뒤에는 곧바로 라그나르에 반란을 일으켰으니까.
하지만 여기서는 달랐다.
테오와 긴밀해졌고, 라그나르와 더 깊게 엮였다.
그 끝이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래도 테오는 한 가지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이 일으킨 파문이 서서히 큰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어떻게 겉잡을 수 없다는 것.
모든 게 원하는 대로 풀리면 좋을 것이나, 사람들은 절대 무대 위의 인형이 아니었다.
각자가 품고 있는 그릇이 다르고 꿈이 다르다.
그 꿈을 위해 새로운 길을 찾아 움직이는 것이다.
‘나처럼.’
테오는 어쩐지 거대한 운명의 파도가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아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쿵쿵쿵쿵!
기대감에 심장도 거칠게 뛰었다.
* * *
모든 지명식이 끝났다.
웰링턴은 등룡관으로, 레이는 원래 있던 곳인 수선궁으로 돌아갔다.
특히 레이는 테오와 헤어지는 것을 매우 아쉬워했지만,
“심심하면 언제든 동백궁으로 놀러와.”
“그래도…… 돼?”
“그럼. 우린 형제잖아. 또한, 친구이고.”
“친…… 구. 맞아. 우린 친구야.”
테오의 말을 듣고 난 뒤에야 웃음꽃을 피우면서 떠났다.
그리고,
테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들도 더러 찾아오기도 했다.
“후회하게 될 것이다.”
첫 번째는 에드.
“악시온도 그렇게 말했습니다만.”
“…….”
“제가 항룡 님과 함께 하게 될 날은 영영 없을 것 겁니다.”
“……다음에 보지.”
에드는 사나운 눈빛으로 테오를 노려보다가 떠났다.
그 다음에는 매화궁주였다.
“함께 하지 못해 아쉽구나, 아쉬워.”
“저 역시 좋지 않은 대답을 드리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그’에게서 너의 꿈을 본 것일 테지?”
“예. 그렇습니다.”
테오의 단호한 대답을 듣고 난 뒤에야, 매화궁주의 시선에서도 아쉬움이 사라졌다.
대신에 미소가 싱긋 맺혔다.
“그래. 너의 의견이 그러하다면 그런 것이겠지. 나와 매화궁에 따로 미움만 남아있는 게 아니라면 된단다. 인연이란 다시 만들어 가면 되는 것이니.”
“……?”
“그럼 다음에 또 보자꾸나.”
매화궁의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은 어쩐지 에드와는 다르게 좀 더 구체적인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매화궁주는 아리송한 웃음만 지어 보이면서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여러 차례가 흐른 뒤.
“이번 입대자들은 백색 깃발로 모이도록-!”
테오는 소집 명령에 백색 깃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깃발에는 검을 문 채로 포효하는 백색 용의 인장이 그려져 있었다.
‘저것이…… 내가 앞으로 왼쪽 가슴에 달게 될 인장.’
두근두근!
어쩐지 어린 시절의 꿈이 다시 생각나는 것 같은 기분.
“흠흠! 흠흠흠!”
바로 그때, 테오 옆으로 홀커스가 헛기침을 하면서 다가왔다.
“흠흠흠! 어. 깜.짝.이.야……! 이.게…… 무.슨 일.이.야……? 테.오…… 너.도 여.기.에…… 있.었.냐아? 하. 하. 하. 이.런. 우.연.도. 다. 있.구.나아. 하. 하. 하.”
“……?”
뻣뻣하게 손을 내밀며 인사를 건네는 홀커스의 모습이 영 어색했다.
마치 국어책 읽기라도 하는 것 같은 모습.
“그게 무슨 말이지? 지명식에서 같이 있었잖아?”
“하. 하. 하. 그, 그으.래앴.나?”
“……??”
테오의 얼굴에 물음표가 더 많이 맺혔다.
하아! 에리카가 옆에서 손으로 얼굴을 덮으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 멍청이가, 진짜……. 테오, 그냥 무시해. 그냥 이 녀석은 반가워서 그런 거니까.”
테오는 언제나 자신만만하던 홀커스가 갑자기 왜 저러나 싶었지만, 이유가 있겠거니 여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들 남매는 전생에서 가문으로 돌아갔었다.
하지만 이번엔 라그나르의 부대를 지명했으니.
웰링턴과 마찬가지로, 이들 남매의 마음속에는 또 어떤 바람이 불었던 걸까?
그런 의문을 뒤로 한 채-
“대장님이 오신다. 모두 주목하도록-!”
기수(旗手)의 외침에 따라, 테오와 랑케 남매의 시선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뚜벅, 뚜벅-
율리우스가 걸어오고 있었다.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