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카일 라그나르 (4)
호르르……!
검은 종달새가 지저귀었다.
카일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왜? 그냥 보낸 게 마음에 걸리기라도 하는 것이냐?”
호르르…….
검은 종달새의 울음소리가 낮아졌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이.
“나도 안다. 네가 뭘 우려하는지.”
호르르?
“하지만 이전에 일검을 하사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너도 보았잖느냐. 녀석이 어땠는지.”
…….
검은 종달새의 울음소리가 처음으로 그쳤다.
“그래서 조금 더 지켜봐도 되겠다 싶었을 뿐이다. 이제 막 출발하려는 아이에게서 굳이 희망을 빼앗을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카일의 한쪽 입꼬리가 크게 비틀렸다.
“밑에서 쫓아오는 놈이 있어야 그 아이들도 긴장할 것 아니냐? 재능 넘치는 경쟁자의 등장만큼 사람을 자극하는 것도 없을 테니까. 요즘 다들 너무 무뎌졌어.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던 시점인데 잘 된 거지.”
검은 종달새는 날개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 아이들. 현재 ‘5대 후보’로 불리는 계승권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각각 다른 세대에 태어났다면 충분히 소가주가 되고도 남았을 만큼 뛰어난 역량을 지닌 아이들.
하지만 카일은 그 정도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 크게.
더 사납게.
자신의 자식들을 더욱더 피 말리는 경쟁으로 몰아붙이려 하고 있었다.
테오라는 새로운 경쟁자의 출현을 통해서.
검은 종달새는 자칫 그로 인해 생길 부작용에 대해서 얘기할까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카일이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으니까.
호르르……!
그래도 우려되는 부분에 대해서 몇 가지를 지적하였고,
“그렇게 걱정이 된다면 네가 직접 나서보는 건 어떨까 싶은데?”
호르?
검은 종달새는 카일의 반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 있을 지명식 말이다. 거기서 테오를 네가 직접 데려가면 되지 않을까?”
……!
순간, 검은 종달새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잠시 후.
호르르르…….
검은 종달새는 뭔가 한참을 고민하더니 작은 날갯짓과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모습을 보면서, 카일은 웃었다.
“또 재미있어지겠군.”
조금 지루했던 가문 생활이 다시 흥미로워질 것 같았다.
새로운 아이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 * *
웅성웅성-
보름 전, 1차 개화식이 있었던 중앙청 청사 앞은 다시 많은 인파로 북적거렸다.
“역시나 사람이 많군.”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나. 역대 최고의 개화식이었다는데, 다들 눈이 돌아갈 수밖에.”
“하아……! 이번엔 부디 제대로 된 인재를 구해야 할 텐데.”
“그러게 말일세. 쉽지 않을 것 같긴 해. 그래도 어떻게든 해봐야지.”
지명식.
모든 개화식이 끝나고 난 뒤, 수료자들이 입단할 부대와 조직을 선정하는 행사였다.
당연히 각 부대와 조직들은 더 뛰어난 인재들을 영입하고자 불꽃 튀는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고,
윈터러의 모든 주민과 관계자들은 이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번 개화식에서 사람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딱 하나였다.
-테오 라그나르는 누가 데려갈 것인가?
세 차례에 걸친 모든 시험을 수석으로 수료했을 뿐 아니라, 토르켈에 버금가는 신기록을 세운 천재.
이를 영입하는 부대와 조직은 당연히 날개를 달게 되는 격이었다.
“그런데 참 신기하지 않나?”
“뭐가?”
“이번 수석 말이야. 가주님께서 데려가지 않겠다고 공언하셨었잖나. 그 때문에 더 불꽃 튀기는 거고.”
“아아, 맞아. 그랬었지.”
“데려가지 않으신 이유가 뭘까? 사실 5대 후보들은 전부 1년이라도 가주님의 손을 거쳤었는데.”
“우리가 가주님의 생각을 어찌 알겠나. 다 생각이 있으신 거겠지.”
“그렇겠지?”
“그리고 사실 따지고 보면 가주님의 손을 거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지. 이미 일검을 사사하기도 했었고.”
“흠……! 어렵구만.”
사람들의 온갖 기대와 의문, 호기심이 복잡하게 어우러지는 가운데.
끼리릭-
청사 앞으로 마차 한 대가 들어섰다.
갖가지 장식들이 화려하게 어우러지지만, 천박하다기보다는 우아하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풍기는 마차.
문이 열리면서, 천천히 누군가가 걸어 내려왔다.
또각-
“여긴가요, 아드님이 계신 곳이? 부디 괜찮으셔야 할 텐데.”
세실리아가 고개를 들어 중앙청을 바라보았다.
곧 테오가 나타날 곳.
다친 곳은 없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 상처가 나지는 않았을지, 1차 개화식 때보다 더 긴장되었다.
“누가 괜찮지 않다는 거냐? 설마 그 괴물 같은 놈? 걱정도 사서 팔자구나.”
뒤따라 내려오던 키르손이 곰방대를 쥔 채로 웃음을 터뜨렸다.
후우-
웃을 때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하게 퍼졌다.
세실리아는 그런 어머니를 도끼눈으로 쳐다봤다.
“괴물이라니요. 우리 아드님만큼 여린 분이 어디 있다고……!”
“여리다고? 혹시 내가 알고 있는 ‘여리다’는 표현의 뜻이 그새 바뀌기라도 한 건 아니지?”
월백검을 한 손에 제압하고, 공방의 지붕을 일검에 날려버린 놈이 여리다면 이 세상에 여리지 않은 아이가 없을 것이다.
“계속 이렇게 옆에서 깐족대실 거면 이만 공방으로 돌아가시는 건 어떨까요, 어머니?”
“……하, 하하하! 웃자고 한 농담이란다, 농담.”
“그딴 재미있지도 않은 농담은 그만두시는 게 어떨까요?”
“이런! 사람이 계속 많아지는구나. 이러다 자리 없겠다. 빨리 들어가자꾸나.”
키르손은 황급히 세실리아의 왼팔에다 팔짱을 끼면서 앞장섰다.
지명식을 참관할 수 있는 건 수료자의 직계가족과 동반 1인 외에는 불가능하다.
만약 이대로 세실리아가 키르손을 두고 가버리면, 지명식에서 바스크 공방을 한 번 더 광고하려던 그녀의 계획이 틀어질 수 있었다.
‘여길 들어오려고 이 못된 년에게 쓴 금화가 몇 갠데! 절대 그럴 수는 없지! 암! 그렇고말고!’
난생처음 기능용 의수라는 것도 만드느라 돈은 돈대로, 시간은 또 시간대로 썼던 것을 감안한다면…… 절대 여기서 쫓겨날 수 없었다!
이번 지명식도 개화식처럼 테오를 위한 무대가 될 게 분명한바.
키르손의 두 눈은 이미 산더미처럼 쌓인 보석과 금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짝반짝!
절레절레-
세실리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그런 양모의 손에 이끌려 청사로 향했다.
* * *
테오를 만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청사 앞에서 수료생들이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보름 만에 이뤄진 가족 상봉.
곳곳에서 다치거나 늠름해진 자식들을 붙잡는 부모와 스승들의 모습이 보였다.
세실리아도 그중 하나였다.
“아드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보름밖에 안 지났을 텐데, 이렇게 수척해지시다니요! 곱던 피부며 머릿결까지 푸석해져서는……!”
세실리아는 인상이 좀 더 날카로워진 테오를 보면서 펄쩍 뛰었다.
“피부가 햇볕에 살짝 그을린 정도구만, 호들갑은. 오히려 보기만 더 좋은데 무슨…….”
키르손이 뒤에서 어처구니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세실리아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전 괜찮으니까 진정하세요, 어머니.”
“제가 어떻게 진정한단 말입니까! 아드님이 지금 이런 몰골이신데! 누군가요! 대체 누가 우리 아드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단 말입니까!”
“그랬던 놈들 죄다 뒈지지 않았나?”
“내 당장 그놈들의 머리끄덩이라도 잡아서……!”
“요단강이 앞으로 모자들 때문에 시끄러워죽겠군.”
“어머니는 제발 조용히 좀 하세요!”
세실리아는 조금 전부터 계속 사사건건 태클만 걸어대는 키르손이 얄미워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키르손은 이미 테오의 가족 자격으로 청사 입장이 완료된 상태.
더 이상 양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네 어머니가 오늘 호들갑이 심해도 이해해라. 지난 보름 동안 얼마나 가슴앓이를 했는지 알면 아무 말도 못 할 거다. 거기다 널 위해 준비한 ‘선물’도……!”
‘선물?’
테오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세실리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
“……험험! 하여간 옆에서 보고 있던 내가 다 힘들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알고만 있어라.”
키르손은 곰방대를 입에 문 채로 껄껄 웃었다.
테오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세실리아의 무한한 사랑은 여전히 그에게 간지러웠지만…… 그래도 너무나 감사했다.
“전 정말 괜찮게 지냈습니다. 친구도 많이 사겼구요.”
“친구…… 들을 말씀이십니까?”
세실리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테오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를 사귀는 법이 없었다.
항상 혼자 놀고 책 읽기만 좋아하던 외톨이.
시종이나 하녀들에게 친절했지만, 그들이 ‘친구’가 될 수는 없었다.
항상 마음에 벽을 두르고 있어 걱정이던 아이였는데.
그런데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음의 문을 여는 모양이었다.
“네. 다음번에 소개해드릴게요.”
지금은 다들 가족들을 만나 담소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좋습니다. 아드님의 친구들이라면 언제든 대환영이랍니다. 미리 말씀만 해주세요. 이 어미도 솜씨 발휘를 해볼 테니까요.”
이제야 테오에 대한 걱정이 덜어졌던지, 세실리아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때, 키르손이 재빨리 미끼를 던졌다.
그녀가 양녀를 따라온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그보다 못난 딸아, 기껏 고생해서 가져온 거 안 풀어도 되는 거냐?”
“아!”
세실리아도 그제야 뭔가를 떠올린 듯 박수를 쳤다.
“이런……. 아드님께 드릴 수료식 선물이 있었는데, 대화에 너무 정신이 팔렸었나 봅니다.”
“선물이라니요?”
테오가 살짝 놀라는데, 세실리아가 가볍게 박수를 쳤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목함을 가져와 뚜껑을 열어 테오 앞에 내밀었다.
그 안에는 사파이어처럼 남색 빛깔이 감도는 남성 예복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살포시 놓인 붉은 브로치.
전체적으로 깔끔하면서도 아름다운 디자인에 작은 보석이 총총 박혀 있는 게 특징이었다.
“명색이 수련검사로서 이제 본격적으로 외부로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인데, 행색을 함부로 할 수 없지요.”
테오는 예복을 조심히 들어 손으로 쓰다듬었다.
이번에도 세실리아의 마음이 잔뜩 묻어났다.
다만, 브로치가 마음에 걸렸다.
“이건 어머니의 취향이 아니신 것 같습니다.”
“오호호! 이제는 이 어미의 취향도 보이십니까? 그동안 안목에 대해 가르쳐드린 보람이 있군요.”
세실리아는 가볍게 웃다가 키르손을 살짝 째려봤다.
키르손이 씩 웃었다.
“이번에 우리 공방에서 괜찮은 보석상 하나를 인수해서 말이다. 너에게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아서 특.별.히. 제작했단다. 부담가지지 말고, 이 할미가 손자에게 주는 수료식 선물이라고 생각하려무나.”
테오는 브로치를 이리저리 꼼꼼하게 살펴봤다.
“앞으로도 이렇게 종종 할미가 예쁜 액세서리가 생기면 선물로 챙겨주마. 세실리아처럼 너에게도 아주 잘 어울릴……!”
“카나카 군도의 광산 지분 2%.”
“음?”
갑자기 생뚱맞은 말.
키르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테오가 웃으면서 말했다.
“앞으로 바스크 공방에서 나올 모든 주요 제품들의 스폰 비용입니다.”
“……!”
순간, 키르손의 눈에 테오의 미소가 악마의 미소로 보였다.
얼굴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하, 하하하……. 아, 아무래도 네, 네가 뭔가 다, 단단히 오, 오해를 했나 보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손자를 위해 선의로 주는 선물……!”
“아, 그런 거였습니까? 죄송합니다. 전 그런 할머니의 깊.은. 마음도 모르고.”
“아, 아니란다. 그럴 수도 있……!”
“할머니께서 처음 주신 선물인 만큼 함부로 쓸 수 없으니 일단 잘 보관해둬야겠네요.”
테오가 예복만 꺼내고 다시 상자 뚜껑을 덮으려 하자, 키르손이 다급하게 손을 날렸다.
“자, 잠깐! 스토오오옵!”
“왜 그러십니까?”
“그, 그래도 서, 선물이니 잘 쓰는 게 좋…… 지 않을까?”
테오의 눈가가 호선을 그렸다.
“그래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지명식에서 함부로 꺼낼 수는 없죠. 잘 보관해두었다가 필요한 자리에 쓰겠습니다.”
분명히 예의 바른 말투였지만.
어째서 키르손의 귀에는 ‘영영 묻어두겠습니다’라고 들리는 건지.
‘하여간 영악하기가 제 어미랑 똑같아서는!’
혹시나 해서 슬쩍 찔러봤던 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월백검 때와 똑같았다.
하긴 그러니 저 징글징글한 개화식에서도 전체 수석이나 했던 거겠지!
“금화! 금화를 주마. 아니면 보검은 더 필요 없느냐? 너도 써봤겠지만, 이 할미가 만든 도철문의 보검은 9룡들도 가지려면 몇 년을 기다려야 할……!”
“저는 드레이크의 날붙이와 월백검으로도 충분히 만족합니다. 카나카 군도의 광산 지분이면 좋을 것 같네요.”
“……그럼 데아난 지방의 광산은 어떠냐? 거기서 나오는 철괴가 아주 품질이 뛰어나단다.”
“카나카.”
“아, 아니면 조금 전에 본 브로치의 보석상 지분은?”
“카나카.”
“그렇게 딱 잘라서 말하지 말고. 보다시피 아주 실력 뛰어난 세공사가 있단다. 거기 5%까지 줄 수 있……!”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죠. 투르칸 상회나 게오르그 공방이 요즘 괜찮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괜찮으려나.”
열 받아 미치겠다!
키르손은 당장 손에든 곰방대로 저 뻔뻔한 테오의 낯짝을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체 거긴 어떻게 알아낸 거야! 흑설 놈들에게도 안 들키려고 그렇게 조심했었는데!’
카나카 군도의 광산은 키르손이 가장 아끼는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무려 아다만트가 채굴되는 곳.
그런데 그런 곳을 콕 집어서 이야기하니……!
‘2%? 2%면 얼마나 되는 거지?’
키르손은 재빨리 머릿속으로 주판을 두들겼다.
협상을 시도해봤자 세실리아에게 안 좋은 것만 배웠을 날강도 같은 손자놈이 양보해줄 리가 만무하다.
광산이 지닌 가치를 생각해보면 어마어마한 이익을 양보해야 하는 셈이지만…… 테오라는 인물이 지니는 가치도 생각해봐야 한다.
실제로 드레이크의 날붙이를 만들 때에는 피눈물을 삼켰지만, 그 결과는 꽃밭이었으므로.
그래서 내린 결론은,
‘……시간이 좀 걸리긴 해도 이득.’
물론, 그렇다고 해도 내놓기에는 너무나 아까웠다!
어떻게 된 게 이들 모자를 만나고 나면 눈 시퍼렇게 뜬 채로 계속 코 베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꽈악!
이가 꽉 깨물렸다.
“……코, 올.”
‘콜’이라는 단어를 완성하기가 저렇게 어렵나 보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요긴하게 잘 쓰겠습니다.”
테오의 화사한 웃음이 섞인 인사가 그렇게 가증스러울 수가 없었다.
“역시 우리 아드님, 이 어미가 더 이상 가르쳐드릴 게 없네요. 하산하셔도 좋을 것 같은데요? 오호호!”
세실리아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수제자가 아주 흡족하다는 듯이.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