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수호룡의 둥지 (3)
「……이런 프로포즈가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요즘 인간 세상에선 이런 게 유행인가?」
재밌군. 하하하.
로드브로크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아무래도 이 나의 매력은 과거에나 지금이나 종을 가리질 않는 것 모양이구나. 하여간 인기녀는 이래서 고생인…….」
로드브로크는 가볍게 웃으면서 테오의 말을 농담처럼 여기려 했지만.
테오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유행은 없습니다. 농담도 아닙니다.”
로드브로크의 웃음이 뚝 그쳤다.
착 가라앉은 시선이 테오를 직시했다.
오싹!
테오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맛봤다.
‘역시 용은 용이군. 드래곤 피어가 너무 강렬해.’
레서 드레이크 피어를 슬쩍 풀어 어떻게든 기세의 압박에 맞서보려 해도, 도저히 쉽지가 않았다.
어쩔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용은 본능적으로 상위 개체에 종속하게 되어 있으므로.
쿠쿠쿠……!
그래도 테오는 어떻게든 버텼다.
여기서 기세가 꺾여서야 원하는 것을 절대 얻을 수 없으므로.
똑!
뺨을 타고 흐른 식은땀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정말 나를 원한다?」
“그렇습니다.”
「말장난으로 여기 있는 보물들을 모두 가로챌 속셈이더냐? 덤으로 내가 지닌 지식도 가져가고?」
테오는 가만히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녀가 ‘알아서’ 판단하게 내버려둬야 했다.
「안 된다.」
로드브로크는 한참 동안 테오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된다니요?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여기 둥지에 있는 보물은 무엇이든 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난 해당 되지 않는다.」
“라그나르의 수호룡이라는 존재가 ‘보물’이 아니면 뭐라는 말씀이십니까?”
「난 용이다. 이곳을 관장하는 문지기이며 겨울 산맥을 지키는 파수꾼일지니. 보물 따위가 아닐……!」
“사전에 보물에 대한 정의를 따로 주신 게 아니지 않습니까?”
「……!」
순간, 로드브로크의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그러니 보물이고 아니고의 판단은 보상을 받는 제가 판단할 문제인 것으로 보입니다만.”
「…….」
“로드브로크를 제게 주십시오. 당신께서 언령으로 약속하셨습니다.”
쿠르르르-
로브브로크의 눈매가 잔뜩 일그러졌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 테오에 대한 호의로 가득했던 시선이 이제는 짜증으로 변해 있었다.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은데.’
테오는 마른 침을 삼켰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고 알려진 고대룡인 만큼, 테오의 이러한 발언이 모욕으로 느껴졌겠지.
몇몇 고대룡들은 인간을 한낱 벌레처럼 여긴다는 말도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당장 여기서 불길을 쏟아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그래도 이 도박 수는 반드시 필요해.’
하지만 테오는 절대 자신의 말을 수습하지 않았다.
사실 그도 자신의 주장이 궤변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령에 구속되어 있는 고대룡과 같은 존재에게는 부담되는 일일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이유.
‘이걸 물리는 조건으로 더 큰 걸 얻을 수도 있을지 모르지.’
테오도 로드브로크를 ‘보상’으로 얻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순진하게 믿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둥지를 떠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마해로부터 겨울 산맥을 지켜야 할 의무를 가졌다는데 어떻게 스스로를 보상으로 내어줄 수 있을까?
그게 아니더라도, 옛 동료의 후손인 테오에게 <종속>되는 일은 절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고대룡의 자긍심이 훼손되는 사건이므로.
그러니 로드브로크는 어떻게든 거래를 하려 들 것이다.
자신에 버금가는 가치를 지닌 물건으로 갈음하자고.
‘당장 내게는 보물들을 일일이 뒤질 만한 시간이 없어. 로드브로크가 가장 값진 물건을 스스로 가져오게 만드는 게 상책이다.’
테오는 혀끝을 세게 깨물었다.
어지러운 정신을 어떻게든 차리기 위해서.
그리고.
퓨퓨퓨-
거짓말처럼 용의 기세가 그쳤다.
「……그렇군. 그런 식으로 잔머리를 굴리는 건가?」
로드브로크가 갑자기 헛웃음을 흘렸다.
‘의도를 읽혔다.’
테오는 아무 대답 없이 고개를 살짝 숙일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떼지 않았다.
어서 대답을 달라는 눈빛으로.
「그래. 좋다.」
“네. 좋…… 예?”
테오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황급히 고개를 들었고
보고 말았다.
어느새 장난기로 가득한 로드브로크의 눈동자를.
‘설마……?’
「뭘 그리 놀라느냐? 이미 언령으로 구속된 약속을 파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 약속에 따라주마.」
로드브로크의 눈꼬리가 더 굴곡 있게 휘었다.
「새로운 반려여.」
“……!”
화아아아-
그 순간, 로드브로크의 거대한 동체를 중심으로 강풍이 소용돌이쳤다.
테오가 제대로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바람.
억지로 고개를 치켜들었을 때, 동굴이 가득 찰 정도로 엄청난 빛무리가 번쩍인다 싶더니.
파아앗!
곧 고대룡이 있던 자리로 한 여인이 나타났다.
테오보다 짧은 검푸른 단발,
날카로운 것 같으면서 장난기 섞인 눈매,
거울처럼 맑은 금색 눈동자,
175센티미터쯤 돼 보이는 장신.
형형색색의 화려한 비단을 숄처럼 목에 두른 그녀의 모습을 보고, 테오는 자기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설마 로드브로크가 인간의 형태로 폴리모프를 할 줄도 몰랐지만.
그보다 옷깃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외양 때문이었다.
“후후! 내 인간형에 아주 넋이 나갔구나. 하지만 꿈에도 꾸지 말거라. 이 몸은 이미 2천 년도 넘게 살아 내 눈에 너는 갓난애란다, 갓난아기.”
로드브로크의 농담은 테오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수호룡이시여, 가슴이.”
“아, 이것 말이냐?”
로드브로크는 별 것 아니라는 투로 숄을 살짝 걷어 올렸다.
그러자 왼쪽 가슴에 난 머리 크기만 한 구멍이 나타났다.
그랬다.
그녀에겐 심장이 없었다.
“오래 전에 입은 상처이지. 이것 덕분에 나날이 죽어가고 있고.”
순간, 테오의 몸이 흠칫거렸다.
“그 말씀은……?”
“왜 놀랐더냐?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말이?”
후후.
로드브로크가 여유롭게 웃었다.
“사실이다. 나는 용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마력 기관인 드래곤 하트를 50년 전에 상실했고, 대부분의 권능과 마법을 잃어버린 상태이다.”
“……!”
“지금이야 몸에 남은 마력으로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만.”
로드브로크는 손끝으로 텅 비어버린 자신의 가슴을 매만졌다.
“얼마 안 가 자연의 품으로 귀의하게 될 테지. 2년? 3년? 오래 전에 이 세계를 떠나버렸던 옛날의 내 동족들처럼. 그렇게 떠날 것이다.”
“…….”
“그래서 너에게 몇 번이고 되물은 것이다. 보상을 바꿀 생각이 없느냐고.”
테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래도 계속 나를 보상으로 받겠다고 말하겠느냐?”
로드브로크는 웃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 나름의 배려라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테오는 어쩐지 그녀의 눈동자에 맺힌 씁쓸함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전생의 마지막.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화살 비 아래에서 자신이 짓던 눈빛과 너무나 닮았으므로.
절망.
좌절.
우울.
슬픔.
“……어쩌다 그렇게 되신 겁니까?”
“음? 이미 네게 허락된 세 가지 질문은 모두 끝났다만?”
“…….”
“알겠다. 표정이 그렇게 너무 진지하니 장난도 치지 못하겠구나. 수호룡으로서 맞은 마지막 선택자가 이렇게 목석이어서야 재미도 없지 않나.”
로드브로크는 툴툴거리면서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카일이다.”
하지만 그 한 마디가 테오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쳤다.
“아마 네 조부나 증조부쯤 될 것 같은데. 맞느냐?”
“……제 친부이십니다.”
“뭐? 허! 지금은 70세도 넘었을 인간이 또 새끼를 까? 새끼를 최대한 많이 쳐서 가문을 부흥시킬 거라더니, 쯧! 하여간 수컷이란 것들은 그저 문지방 넘을 힘만 있어도 그 짓을 잘도…….”
테오는 로드브로크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저 귀가 왱왱 울릴 뿐이었다.
‘아버지가 이런 짓을 저지르셨다고?’
대체 왜?
가문의 수호룡을 이런 식으로?
테오가 알고 있는 카일은 라그나르에 대한 자부심이 무척이나 높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노력했고, 수많은 후손을 보면서 가문의 최대 전성기를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갈등과 반목이 문제가 되었지만.
그는 전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다.
카일의 눈은 언제나 저 높은 곳에 있으므로.
아래를 신경 쓸 시간 따윈 없었던 것이다.
그런 카일이 수호룡을 만났다면 어떻게든 가문의 전력으로 삼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수호룡을 해치려고 했을까?
대체 무슨 이유로?
“혹시 아버지도 선택자이셨습니까?”
“그 반편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반편이?
이건 또 무슨 말일까?
“네 아버지가 유물을 독차지하기 위해 날 해친 것인가 물은 걸 테지?”
“예.”
“틀렸다. 애당초 네 아버지는 유물의 선택을 받을 수 없는 몸이었다. 그럴만한 재능도 없었고.”
재능.
그 말이 어쩐지 테오의 귀에 확 하고 꽂혔다.
이해가 안 되었다.
아버지가 재능이 없다니.
“그런데도 그런 모든 굴레를 부수고 찢어버려 가주직에 오른 몇 안 되는 입지적인 능력을 지닌 존재이지. 날 이렇게 만든 못된 놈이나, 그 능력과 의지만큼은 높이 살 만하다.”
“…….”
“그러니 인간으로서 너는 네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겨도 된다. 네 아버지는…… 그래. 인간의 몸을 하고 있되, 인간이 아닌. 그러면서도 가장 인간적인 존재로 신의 경지를 바라보는 괴물 같은 인간이니.”
유물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몸.
부족한 재능.
그런데도 가주가 된 존재.
수호룡을 꺾고, 이제는 신의 경지마저 엿보는.
인간의 탈을 쓴 괴물.
‘아버지는 선대 가주이셨던 조부님을 꺾고 그 자리에 앉았다고 하셨지. 그것과도 관련이 있는 걸까?’
지금 이 순간.
테오는 어쩐지 아버지가 너무나 거대하게 느껴졌다.
“이제 다시 묻겠다. 이래도 나를 데려가겠느냐?”
로드브로크는 테오의 생각을 도중에 끊었다.
숄을 아래로 내려 왼쪽 가슴을 가린 그녀의 시선은 테오를 직시했고.
테오는 그 시선을 마주하면서 마른 침을 삼켰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존재.
길어야 2년 혹은 3년을 사는 게 고작일 그녀를 데려가 봤자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카일에게 들켜 자신의 목숨마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테오가 알고 있는 카일은 절대 당신을 해칠 수 있는 불씨를 남겨두지 않는 성격이므로.
로드브로크는 그것을 모두 포함하여 묻는 것이다.
네가 자신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그러니 쓸데없는 소리 말고, 적당한 보물을 하나 챙기고 떠나라고.
“원한다면 현재 네게 있어 가장 필요할 것 같은 보물을 추천해줄 수도 있다만.”
결국 테오가 처음 의도했던 대답까지 나왔다.
그 모든 것이 마지막 배려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여러 생각들이 테오의 머릿속을 스치고.
“저는.”
결국 마지막 선택을 내리면서 입을 떼려던 바로 그때였다.
쿵!
갑자기 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동굴이 거칠게 흔들렸다.
우르르……!
테오와 로드브로크의 시선이 똑같이 입구 쪽으로 향했다.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