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개화식 (3)
“춥군.”
“그러게 말입니다.”
테오는 털옷으로 완전 무장했어도 추위에 떠는 웰링턴을 보면서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겨울 산맥의 추위는 라그나르의 사람들에게도 힘든 편이니.
북방의 6설가 중에서도 비교적 남쪽에 위치한 나르시오 가문의 소가주로서는 힘들 수밖에 없겠지.
2차 개화식이 시작되었다.
테오와 웰링턴은 율법검사와 시험관들의 인솔에 따라 두 번째 시험장인 겨울 산맥에 도착한 상태였다.
“테오 공자는…… 정말 괜찮소? 이렇게 말하기는 좀 미안지만, 입고 있는 옷이 많이 얇아 보이는데?”
자신을 친구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있은 뒤, 웰링턴은 다시 평상시처럼 테오를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이 정도 추위는 익숙해서요.”
“익숙…… 하시다고? 언제 이런 걸 겪기라도 했단 말이오?”
테오는 말없이 웃었다.
전생에 흑설 소속원으로서 세계 각지를 뛰어다녔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웰링턴도 이제는 익숙해서 더 깊게 묻진 않았다.
“그보다 이런 곳에서 대체 무슨 시험을 보겠다는 건지……!”
웰링턴은 거친 눈보라로 시야도 잘 확보되지 않는 산자락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마력을 개방했다고 해도, 그들 모두 사흘밖에 안 된 초짜들.
이런 험지에서 뭔가를 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애당초 그런 것을 고려할 라그나르가 아니었으니.
“지금부터 2차 개화식을 시작하겠다-!”
마력 섞인 심판관의 외침에 따라 산자락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바람 소리 때문에 대부분의 소리가 묻히는 와중에도, 모든 응시생들에게 선명하게 들리는 목소리.
테오와 웰링턴을 비롯한 57인의 시선이 모두 그쪽으로 향했다.
“다들 알다시피 이곳 겨울 산맥은 윈터러에서 마해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너비와 크기를 자랑한다.”
몇몇 응시생들의 눈가에 두려움이 스쳤다.
마해(魔海).
대장벽 너머의 갖가지 마수와 마물들이 득실거린다는 저주 받은 땅.
라그나르는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런 마해로부터 인류를 보호해왔으니.
라그나르에 몸을 담근 그들도 언젠가는 그 역할을 이어받을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수습검사밖에 되지 않는 그대들이 마해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 시험장은 대장벽 안쪽으로 국한한다.”
안도에 찬 한숨이 들리는 가운데.
“율법검사와 흑색철기대, 그리고 백갑용기대가 수시로 점검을 하고 있겠지만, 그래도 만약의 사태라는 것이 있으니 실수라도 그 밖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유의하도록. 알겠나?”
“예!”
“예!”
“대답 하나는 우렁차군. 그럼 시험 내용에 대해서 말해주겠다.”
테오는 심판관의 입모양에 집중했다.
만약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번 2차 시험은 깨나 어려울 것이다.
“9급 마수부터 5급의 마물까지, 이 주변에는 여러 종류의 괴수들이 퍼져 있다. 그리고 그들의 목에는 바로 이런 종이 달려있을 것이다.”
딸랑-
심판관은 손바닥 크기 만한 종을 들어보였다.
바람 소리 때문에 종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너희들의 목표는 바로 그 종들을 수거하는 것이다.”
심판관은 응시생들의 눈을 일일이 마주치면서 말을 이었다.
“빨주노초파남보, 종은 총 7개의 색으로 이뤄져 있으며 후자일수록 높은 점수를 가지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높은 점수를 가졌을수록 마물의 능력도 아주 뛰어나다. 특히 보라색 종은 너희들 실력으로는 죽다 깨어나도 절대 못 잡을 정도로 강하다.”
꼴깍!
누군가가 마른 침을 삼켰다.
“사냥 방식은 아무래도 좋다. 팀을 짜서 집단 사냥을 해도 되고, 실력이 된다면 개인으로 움직여도 된다. 함정, 매복, 전술, 전략 무엇이든 허용된다. 또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응시생들은 서로 간에 눈치를 보기 바빴다.
라그나르의 검사로서 마지막 말을 눈치채지 못하는 바보는 없었다.
뒤통수.
남들이 다 잡은 사냥감을 가로채는 것은 물론, ‘배신’ 행위도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아예 대놓고 불화를 조장하는군.’
테오는 혀를 찼다.
하지만 이것도 라그나르라면 라그나르다운 시험 내용이긴 했다.
‘그런 불화마저도 힘으로 누르든, 아니면 카리스마로 압도해서 무리를 통솔하든 알아서 하라는 거니까.’
1차 개화식이 검술과 마력에 대한 재능을 판별하는 것이라면,
2차 개화식은 통솔력과 대처 능력, 그리고 수 싸움을 판별한다.
-승리를 쟁취하는 방법.
그것이야말로 라그나르가 추종하는 진짜 ‘힘’이었으니.
“그리고 곳곳에 이렇게 생긴 토템이 설치된 지역이 있을 것이다. 토템에는 특수한 마법 장치가 되어 있어서 반경 50미터 안팎으로 마물들이 침범하지 못한다. 단, 각 지역마다 입장 가능한 인원에 제한 수가 있고, 시험에 필요한 지원 물자들도 다양하게 묻혀 있으니 참고하도록.”
어디서 마물들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겨울 산맥에서 몇 안 되는 안전 구역이란 의미였다.
정비도 가능한.
“기간은 총 보름. 보름 뒤 정확히 이 시간에 모든 시험이 종료될 예정이니 늦지 말고 복귀하도록 하라. 지각에는 감점이 따를 것이다. 그럼 해산-!”
팟, 파밧-
심판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몇몇 응시생들이 바쁘게 뛰었다.
이 주변 지형을 미리 탐색하고, 토템이 있는 장소를 찾기 위해서였다.
“보급 물자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니 다들 바쁜 것 같소.”
“보름이나 되는 기간 동안에 움직이려면 그만큼 자원이 많아야 될 테니까요.”
테오는 웰링턴을 보면서 앞으로 나섰다.
“일단 우리도 움직입시다. 견제가 더 심해지기 전에 위치부터 확보해야 할 것 같으니까.”
겨울 산맥에 도착했을 때부터. 테오는 웰링턴과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들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악시온을 비롯한 교룡회 무리는 아주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기회만 되면 언제든 뒤를 치겠다는 듯이.
테오는 2차 개화식을 본격적으로 임하기에 앞서 반드시 겨울 산맥에서 얻어야 할 것이 있었다.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되도록 방해 받지 않을 장소부터 물색하려 했는데-
“아니. 나는 두고 가시오.”
웰링턴이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테오가 그를 돌아봤다.
“웰?”
“테오 공자, 사흘 전에 내게 했던 말 기억하시오?”
진지한 말투.
테오의 눈빛도 저절로 깊게 가라앉았다.
“우리는 친구라고 했었지요.”
“그렇소. 나 역시 진심으로 테오 공자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아니, 따지자면 그 이상이오. 내 심장을 달라고 하면 고민하지 않고 열어줄 수 있을 정도로.”
“…….”
“하지만 한편으로 나는 그만큼이나 테오 공자를 라이벌로 생각하고 있기도 하오.”
‘이거였구나. 1차 개화식 전에 고민이 많았던 이유가.’
친구와 라이벌.
두 잣대는 사실 같이 양립하기가 힘들다.
친구를 위한다면 수석의 자리를 양보해줘야 할 테고, 라이벌이라면 그 자리를 빼앗아야 할 테니.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기기 쉬운 시기심은 어떻게 하기가 힘들다.
그동안 테오가 웰링턴을 보면서 느낀 점은 너무 사람이 착하다는 것.
저렇게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쉽게 마음을 열고, 바라던 만큼 돌아오지 않으면 상처를 입는다.
교룡회 때에도 그랬고, 테오를 대할 때에도 그랬다.
그러다 보니 친구와 라이벌이라는 두 관계 사이에서 갈등이 많을 수밖에 없었을 테지.
‘게다가 독재자의 성품을 추구하는 나르시오의 가풍을 생각해본다면…… 더 그랬을 테고.’
“그래서 지난 사흘 동안 깊게 생각했소. 그리고 욕심이 생겼소. 테오 공자를 진심으로 뛰어넘고 싶다고.”
“…….”
“그런 내 맘을 아시겠소?”
전생에선 웰링턴이 테오에게 절대 닿을 수 없을 신기루였다면.
현생에서는 그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
그렇기에 테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저 역시 웰을 라이벌로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그렇소? 후후! 난 또 혼자서만 그렇게 여기고 있었던 게 아닌가 노심초사했었는데. 다행이오.”
“단.”
“……?”
“그렇기 때문에 이 자리는 더더욱 놓아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화아아악!
테오를 중심으로 맹렬한 기세가 동심원을 그리면서 퍼져 나갔다.
그의 긴 머리칼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쿵쿵쿵쿵!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이를 본 웰링턴의 눈이 살짝 커졌다.
마력을 개방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마력풍(魔力風)이라니.
지난 사흘 동안에도 테오는 계속 강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웰링턴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호승심을 자극했다.
쿵쿵쿵쿵-
웰링턴의 심장도 마찬가지로 테오와 같은 박자로 거칠게 뛰었다.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양보는 이쪽에서 사양이오. 그 자리는 힘으로 빼앗아야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니.”
“맞는 말입니다. 힘으로 지켜야 할 자리지요.”
테오와 웰링턴의 웃음기 섞인 시선이 서로 허공에서 스치고.
파앗-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차아아앙!
* * *
한바탕 격돌이 있은 후, 테오가 떠난 자리에는 웰링턴만이 남았다.
“후우! 속이 한결 후련하군.”
웰링턴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진심이었다.
그동안 가슴 한편에 응어리져 있던 것을 단번에 털어낸 셈이니.
처음 제4 연무장에서 검을 겨뤘을 때부터.
웰링턴에게 테오는 닿을 수 없는 신기루와 같았다.
닿으려고 하면 멀리 떨어져 있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면 어느새 사라지고 없는 그런 신기루.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어떻게든 극복해야 할 벽이 되어 있었다.
부수거나 뛰어넘거나 해야 할 벽.
“멍청한 놈. 사자는 누군가를 쫓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따르게 해야 하는 존재라고 누누이 말했었는데-!”
그때, 웰링턴 옆으로 한 중년인이 툭 하고 떨어졌다.
시험관 복장을 하고 있는 그는 나르시오 가문에서 특별히 파견된 부가주, 티모시 나르시오였다.
당대 가주의 하나뿐인 동생.
웰링턴의 숙부이자, 집사 랄프와 같이 나타나 그동안 웰링턴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든 주범이기도 했다.
“이제 좀 나아지나 싶더니 또 이런 모습이라니. 게다가 어울리는 작자 역시 저딴 서자 나부랭이라니. 역시 타고난 피가 하찮아서 그런가, 서로가 서로에게 이끌리기라도 할……!”
“숙부님.”
티모시가 막말을 하다 말고, 웰링턴에 의해 도중에 끊어졌다.
“닥치십시오.”
“……뭐라?”
“이 이상 제 친구를 욕보이신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여태 미루고 있던 차기 가주직을 바로 받아들이고, 당장 숙부님의 목을 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
“숙부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하찮은 것들이 마음껏 구경하도록 시장 바닥 한가운데에 모가지가 걸리고 싶지 않으시거든, 닥치십시오. 이제 더 이상 무례를 묵고하지 않겠습니다.”
“…….”
티모시의 두 눈에 분노가 어렸다.
이 순간, 그동안 무시했던 조카가 자신을 저항하려 하고 있었다.
언젠가 사람들이 웰링턴을 가리켜했던 말이 떠올랐다.
검사자.
그 별호가 절대 모자라지 않았다.
병석에 누워계신 형님, 가주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거 보십시오. 조용해지시니 얼마나 편하고 얼마나 좋습니까? 앞으로도 이렇게 분부를 지키시길 바라겠습니다. 가문의 부가주로서, 그리고 여기서는 시험관으로서.”
“…….”
“아시겠습니까?”
“……알겠, 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웰링턴은 티모시의 대답도 듣지 않고 훌쩍 자리를 떠나 사라졌다.
까드득!
티모시는 이가 으스러져라 갈았다.
“……천한 놈이, 감히.”
* * *
파바바밧-
테오는 가파른 비탈길을 빠르게 오르고 있었다.
눈이 꽁꽁 얼어붙어 미끄러웠지만, 이런 것쯤이야 그에게는 식은 죽 먹기처럼 쉬웠다.
‘오러홀을 개방하고서 가장 좋은 건 이렇게 신법을 쓸 수 있다는 거지.’
<종달새의 날갯짓>.
흑설에 몸을 담그고 있을 때에 배운 신법이었다.
몸을 종달새처럼 가볍게 해서 빠르게 움직이도록 하기 때문에 장거리 이동에 아주 좋았다.
‘여기다 몇 가지 변칙만 주면 흑설에서도 크게 눈치 재지 못할 테고.’
아마 지금쯤 테오를 감시하고 있던 시험관들은 갑자기 그가 사라져서 난리가 나지 않았을까.
지금부터 그가 하려는 일은 타인의 눈에 뗘서는 안 되기 때문에 최대한 숨길 필요가 있었다.
‘용의 굴…… 지도로 위치는 몇 번이나 파악해뒀어. 이쪽이 확실해.’
그동안 테오는 메시지에 대한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몇 가지 단서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태고룡의 유물.
테오가 그동안 찾은 유물은 총 두 가지였다.
던전.
월백검.
그리고 그 유물들은 ‘용은 보물을 사랑한다’는 오랜 전설처럼 용종들이 지키고 있었다.
레서 드레이크.
그리핀.
테오는 이 사실들이 절대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메시지와 태고룡의 유물 간에 정확한 관계에 대해서는 모른다.
하지만.
다른 태고룡의 유물들을 찾아 가다보면…… 언젠가 비밀이 풀릴 것이라는 게 테오의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또 다른 태고룡의 유물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당연히 용종이 ‘지키고’ 있는 장소겠지.’
다행히 테오는 그렇게 추측되는 장소를 딱 한 곳을 알고 있었다.
앞으로 6년 뒤에 흑설에 의해 ‘우연히’ 발견될 장소.
‘해츨링의 굴.’
그곳이 바로 여기 겨울 산맥에 있었다.
타닥!
테오의 달리기가 멈췄다.
크레바스가 아슬아슬하게 깔린 낭떠러지.
매서운 바람 때문에 균형을 잃으면 당장 그 아래로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테오는 바로 그 아래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 순간.
파아아아-
저 먼 절벽 한가운데.
눈보라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푸른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동시에.
우웅, 우우웅!
왼쪽 허리춤에 찬 월백검이 푸른빛을 뿌리면서 잘게 떨렸다.
‘찾았다.’
순간, 테오의 눈이 빛났다.
그리고.
덜그럭, 덜그럭-
등에 매단 도철문의 보검…… 마장 키르손이 직접 제작해준 츠바이핸더도 마찬가지로 호응했다.
마치 뭔가를 찾은 것처럼.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