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월백검 (2)
“어머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아드님이 대체 왜 저러시냔 말이에요!”
세실리아는 사색이 되어 키르손에게 매달렸다.
테오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확 뒤로 젖혀진 머리.
두 눈은 흑구슬이라도 박은 것처럼 동공과 흰자위가 모두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다.
무엇보다.
‘요기가…… 혈관과 아예 연결되어버렸어. 이런 현상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키르손은 현재 벌어진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월백검은 테오와 한 몸이라도 된 것처럼 보였다.
검이 손바닥에 착 달라붙어서는 요기가 전부 상처에 흡수되고 있었던 것이다.
강제로 떼어낼까 싶다가도, 자칫 뭔가 잘못될까 싶어서 섣불리 건드릴 수도 없었다.
“만약 제 아들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면…… 절대……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키르손이 가장 고통스러운 건 바로 세실리아의 원망에 찬 눈빛이었다.
십여 년 전에 받았던 것과 똑같은 시선.
테오에게는 비록 무슨 일이 벌어져도 책임지지 않겠다고 말했다지만.
그때의 절망을 또 다시 겪고 싶지는 않았다.
‘안 되겠어.’
결국 키르손은 이를 악물면서 밖에 대기하고 있던 비서를 불렀다.
“너는 당장 ‘보안국’에 다녀오너라. 내가 이전 제안을 승낙했다고 한다면 사람을 보내줄 것이다.”
“하지만 대표님, 그곳은……!”
비서의 안색이 순간 창백해졌다.
키르손이 지금 하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보안국.
라그나르의 가솔은 누구나 어울리기를 거부하는 장소.
정보부 <흑설>이 소속된 기관이었다.
얼마 전에 보안국에서 키르손에 요청한 것이 있었다.
태고룡의 유물과 관련된 정보가 있으니 참여해달라는 것.
저들은 흑설이 이번에 습득한 유물이 있어 감식에 필요한 자문을 구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키르손과 바스크 공방의 간부들은 그것이 월백검에 대한 압박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비단 월백검만이 아니었다.
키르손은 원래 오래 전부터 유물에 대해 관심을 가져 왔던 바.
그 정보들까지 가로챌 속셈인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자문 요청을 미뤄왔었는데…….
갑자기 그 요청을 받아들이라고 하라고?
이건 테오를 구하기 위해서 키르손이 스스로 노예가 되겠다는 것과 다를 게 없는 말이었다.
‘세실리아 님에 대한 미련이 아직도 많이 남아계신 겁니까?’
비서는 어떻게든 키르손의 생각을 바꾸고 싶었지만.
키르손은 오히려 어서 안 가고 뭐하냐는 투로 노려보고 있었다.
비서가 결국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돌아서려던 그때.
화르르륵!
갑자기 테오의 상처에서부터 검은 불길이 일어나 전신을 뒤덮었다.
“꺄아악! 아드님!”
“세실리아, 가면 안 된다!”
“하지만! 하지만 아드님이……! 테오야! 테오야아아!”
세실리아는 이제 아예 눈이 뒤집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키르손이 어떻게든 그녀를 붙들고 있는데.
‘무슨……?’
불길이 맹렬한 소용돌이를 그리면서 왼쪽 가슴으로 스며들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그라졌다.
“…….”
“…….”
아주 잠깐 동안 적막이 흘렀다.
겉보기에 테오는 화상 자국 하나 없이 아무 이상도 없어 보였다.
그리고.
파앗!
테오가 다시 눈을 떴다. 동공 위로 안광이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테…… 오?”
세실리아가 어느새 ‘아드님’이라 부르던 호칭도 잊어버린 채로 테오를 바라봤다.
테오가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켰다. 몸이 뻐근했던지 목을 가볍게 돌리면서 말했다.
“전 무사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머니.”
세실리아는 그제야 풀린 긴장감에 털썩 바닥에 주저앉고 엉엉 눈물을 터뜨렸다.
* * *
‘운이 좋았어. 봉인에서 갓 깨어나서 녀석도 한창 어리바리할 때에 잡을 수 있었으니까.’
만약 사슬에 감긴 테오를 발견하고도, 바로 달려들지 않고 경계하느라 시간을 질질 끌었다면?
아마 테오도 녀석을 잡는데 상당한 애를 먹었을 것이다.
‘두 번 다시 하고 싶지도 않고.’
전생의 마지막을 다시 체험한다는 건 정말이지 끔찍했다.
[축하합니다! 그리핀을 사냥하는데 성공하여 튜토리얼 퀘스트 #13을 무사히 성공하였습니다.]
[평가: A+]
[보상으로 ‘월백검 소유권’을 얻었습니다.]
[평가에 따른 추가 보상으로 월백검의 요력(妖力)을 흡수하여 마력량이 대폭 증가하였습니다.]
흑룡이 그토록 애지중지했다던 월백검 뿐만 아니라 마력까지?
얼마나 늘었을까.
테오는 재빨리 상태창을 불렀다.
+
테오 라그나르 (15세/남)
· 레벨: 16
· 능력치(▼)
근력: 96 민첩: 27
체력: 21 마력: 228
지능: 20 운: -6
· 스킬(▼)
- 레서 드레이크 피어
· [열람 불가]
+
‘228이라고……? 하, 하하!’
테오는 기함을 터뜨리고 말았다.
마력량이 이전에 비해 30이나 늘어난 탓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력의 계수가 200을 돌파하였습니다.]
[숨겨져 있던 기능이 개방되어 지금부터 마력이 영성(靈性)을 띠기 시작합니다.]
+
[영성]
· 종류: 특수능력
· 효과: 신체 능력 변화. 마력 회복력 초당 1.5 증가.
+
쿠드득, 쿠득-
숨이 턱 하고 막힐 정도로 용의 심장이 꽉 조인다 싶더니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다.
부쩍 늘어난 마력도 거기에 맞춰서 맹렬하게 회전하면서 전신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여태껏 제대로 개척하지 못했던 모세혈관도 뻥 뚫렸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아서 잘 찾아가는 느낌.
그동안 마력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일일이 신경 써서 집중해야 했던 것과는 큰 차이였다.
효율성과 회복력의 증가.
이것만으로도 테오는 이미 천재 마법사에 못지않은 재능을 지니게 된 셈이었다.
‘영성을 얻었다는 게 이런 말이었구나.’
게다가 마력만 두고 본다면, 한 대도시에서 ‘패자’를 자처할 수 있을 만한 실력자가 된 것이니.
라그나르로 치면 <용문검사> 정도랄까?
이때부터 ‘용의 발톱과 이빨’이라 불린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9룡의 바로 아래 단계이기도 하니까.
물론, 9룡과 용문검사 사이에는 그 전 단계 차이를 모두 합쳐도 메울 수 없을 만큼 깊은 해자가 놓여 있긴 하지만.
테오는 월백검을 다시 꽉 쥐었다.
마력이 거기에 맞춰서 반응했다.
마치 용의 심장과 검이 직통으로 연결된 듯한 느낌.
이대로 검을 휘두르면 용의 심장도 즉각적으로 반응해서 마력을 있는 힘껏 쥐어짜지 않을까 싶었다.
우웅, 웅-
‘그리핀(Griffin)이라고 했지?’
아주 오래전에 멸종해서 이제는 전승으로만 전해지던 고대 용종.
달빛을 먹고 살아 ‘달의 짐승’이라고도 불리던 것이 그 괴물일 줄 누가 알았을까.
‘레서 드레이크도 그렇고…… 두 마리 전부 다 용종이야. 과연 이게 우연일까?’
용과 관련된 전승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용은 반짝이는 걸 사랑하는 습성이 있어 자신의 둥지를 세계의 모든 보물로 가득 채우고자 한다.
달리 말하자면, 보물을 지키는 수호자 역할을 자처한다고도 할 수 있었다.
던전과 월백검.
둘 모두 ‘보물’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혜택을 가져다주었다.
용종이 지키고 있었다는 공통점도 있었고.
테오는 다른 ‘보물’도 그런지 확인하고 싶었다.
‘태고룡의 유물이라는 거. 다른 것도 있는지 한 번 찾아봐야겠어.’
바로 그때였다.
우우우웅!
월백검이 거칠게 울었다.
당장 테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라도 하려는 듯이.
“반항을 하는구나.”
키르손이 어느새 옆에 다가와 눈을 번들거렸다.
입에 다시 곰방대까지 문 것이, 월백검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아직 절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단 뜻입니까?”
“뭐,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조금 달라.”
“어떤 식으로 말씀이십니까?”
“월백검은 아주 오랫동안 이곳에 봉인되어 있었다. 내 손에 들어오기 전에도 이와 비슷한 꼴이었으니 족히 수백 년은 갇혀 있었던 셈이지.”
프흐흐-
키르손이 웃을 때마다 하얀 연기가 자욱하게 퍼졌다.
“그러니 답답한 거다. 간만에 세상에 나왔으니 그동안 쌓인 짜증을 분출하고 싶은 거지.”
“아.”
“저기에다 어디 한 번 있는 힘껏 휘둘러보아라.”
키르손은 곰방대로 대표실 벽면 한쪽을 가리켰다.
크고 작은 칼자국이 곳곳에 나 있었다.
테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훗! 바스크 공방이 괜히 라그나르 최고의 공방이라 불리는 줄 아느냐? 이 건물 구조 자체가 웬만한 충격에는 끄떡없도록 설계되어 있다. 월백검이 아무리 날카로워도 마력 없이는 그게 그거지.”
노골적인 비웃음.
‘한 방 먹이고 싶은데.’
테오는 어쩐지 키르손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어머니가 별다른 뒷배가 없어 다른 귀부인들에게 괄시를 받던 모습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게 좋겠군.’
그래서 테오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수식을 취했다.
뒤에서 키르손이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일섬.’
월백검의 검끝을 아래로 내린 자세.
쿵쿵쿵쿵!
동시에 용의 심장이 저절로 거칠게 울리기 시작했다.
영성의 발현.
이전보다 훨씬 맑아진 마력이 혈관을 따라 거칠게 회전했다.
심장 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테오의 귀에도 선명하게 들릴 정도였다.
문제는 그 소리가 귀 큰 키르손에게도 들릴 만큼 크다는 점이었다.
“응……? 자, 잠깐!”
키르손은 그제야 테오의 기세가 범상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뭐라고 소리쳤지만.
촤아아악!
이미 늦은 뒤였다.
바닥에서부터 일어난 칼자국은 벽면을 스치고 지붕까지 순식간에 휩쓸고 지나갔다.
마치 용이 거칠게 발톱을 휘두르기라도 한 듯한 흔적.
얼마나 강렬하던지, 테오가 반발력을 버티지 못하고 반대쪽 벽으로 튕겨날 정도였다.
큭!
테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칼자국을 따라 천장과 벽면이 먼지를 풀풀 날리면서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와르르-
쿠쿠쿠!
“…….”
“…….”
세실리아는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고,
툭! 데구르르-
키르손은 손에 쥐고 있던 곰방대가 바닥에 떨어져 구르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내 공방이…… 내 돈이……! 내 도오오오온! 아아아악!”
키르손은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비명을 질렀다.
월백검이 그런 그녀를 놀리듯이 울어댔다.
우웅, 우우웅-
다만, 이번에는 어딘지 모르게 후련하다는 감정이 강해 보였다.
‘이거, 긴급한 상황이 아니면 절대 써서는 안 되겠어.’
테오는 우수수 쏟아지는 벽 가루를 털어내면서 뻐근한 몸을 일으켰다.
좌흉근이 너무 아팠다.
용의 심장 때문에 근육이 꽉 조였던 탓도 있었지만.
월백검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마력을 먹어치운 이유가 가장 컸다.
그 많던 마력이 텅 비고 말았으니까.
덕분에 테오는 한순간 핑, 하고 도는 현기증을 겨우 억눌러야 했다.
우우우웅!
그때, 월백검이 마치 으스대기라도 하듯이 거칠게 울었다.
“…….”
어쩐지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든 그리핀이 보이는 건 그의 착각일까?
헛웃음이 나왔다.
“……너 정말 마력을 익히지 않은 게 사실이냐?”
키르손은 그새 십 년은 족히 늙은 얼굴로 터덜터덜 다가왔다.
테오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개화식이 불과 닷새 후입니다만.”
“그럼 검의 예기만으로 이걸 해냈다는 건데……!”
순간, 키르손이 이쪽으로 빠르게 손을 뻗어왔다.
테오는 반사적으로 팔을 뒤로 내뺐지만,
‘빠르다……!’
그보다 먼저 키르손이 그의 손목을 낚아채고 있었다.
‘검술을 익혔어. 그것도 최소한 용문검사 이상의 수준……!’
바스크 공방의 주인이 검술을 익혔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키르손은 테오의 맥을 짚으면서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테오에게서 정말 아무런 마력도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허! 정말 이걸 예기만으로 해냈다고?”
테오는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조금 전 일격으로 모든 마력을 소모한 것도 있지만, 이 시대의 상식으로 심장에다 마력을 축적한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쩝!
키르손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기능이 뛰어난 월백검을 이대로 넘겨줘야 한다는 사실에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명색이 외손주에게 주겠다고 선언했었는데 다시 빼앗는 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아니지. 꼭 그렇게만 볼 건 아닌가? 이만한 예기를 지닌 보검이라면 쥐는 것만으로도 심력 소모가 만만치 않을 텐데…… 마력 한 푼 없이 그걸 버텨냈다고?’
키르손의 머릿속으로 그런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천재.
하늘이 내린 재능을 지닌 사람.
‘그게 내 외손주다, 이 말이렷다?’
키르손은 마침 문득 드는 생각이 있어 히죽 웃으면서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이런 녀석은 가만히 놔둬도 언젠가 두각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특히 곧 있을 개화식은 라그나르를 비롯한 북방의 내로라하는 검사와 무도가들이 한데 모이는 자리.
당연히 거기서 얼마나 빛날지는 불에 보듯 뻔한 일.
그런데.
그런 녀석이 바스크 공방의 마크가 떠억 하니 찍힌 검을 쥐고 있다면?
‘꺄하하하! 돈이다! 돈이 넝쿨째 굴러들어오는 게 보인다, 이 말이야!’
새로운 노다지를 발견한 키르손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무너진 천장과 벽?
그딴 거야 다시 지으면 그만이지만, 이런 대홍보의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었다.
테오는 어쩐지 자신을 잡아먹을 것처럼 구는 키르손의 시선에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섰지만.
“개화식에서 그런 요검을 들고 다니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렇지 않아도 새로운 검이 필요하다고 했었지?”
그녀가 던진 질문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설마?’
테오의 눈이 살짝 커졌다.
마장 키르손이 직접 제작한 보검.
검사라면 누구나 바라마지 않을 기회였다.
“내가 최선을 다해 만들어주마. 대신에 너는 수석만 차지해라.”
키르손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입가에 군침이 싹 돌았다.
츄릅!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