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태고룡의 유물 (5)
‘어머니?’
테오는 한순간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어머니? 키르손이?’
테오가 알기로 세실리아는 가족 하나 없는 천애고아였다.
그래서 가문 내에서 입지도 좋지 못했다.
그런데 바스크 공방의 주인을 어머니라고 부른다고?
도저히 연결이 되지 않았다.
하물며 키르손은 돈에 미치긴 해도 명색이 엘프.
그것도 테오가 알기로 대륙에 얼마 남지 않은 ‘하이 엘프’였다.
그러니 세실리아의 모친이 될 수 없었다.
그런 테오의 의문을 아는지 모르는지.
키르손은 세실리아의 호칭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치고 있었다.
아주 못마땅하다는 듯이.
“어머니는 무슨. 네가 정말 날 어머니라고 생각하긴 하는 거냐?”
“절 반년밖에 길러주지 않은 양모이셔도, 어머니는 어머니니까요.”
“망할 년. 평소에는 얼굴 한 번 비치지 않던 것이.”
“아니면 그냥 평소처럼 ‘늙은이’나 ‘검버섯’이라고 불러드릴까요?”
테오는 어머니의 말솜씨가 참 맵다 싶었다.
“하여간 말본새 하고는……! 그냥 썩 꺼져라. 나와 너 간에 있었던 인연은 모두 끝난 지 오래니.”
키르손이 화를 내며 몸을 돌리려던 그때였다.
갑자기 세실리아가 손에 들고 있던 세 자루의 예검을 그쪽으로 던졌다.
“이게 무슨 짓이냐?”
키르손은 곰방대를 들지 않은 왼손을 뻗어 아주 능숙하게 예검들을 받아 챘다.
마치 바람이 그녀의 의지대로 따라주는 느낌이었다.
‘망치질 솜씨만큼 가지고 있는 실력도 매우 뛰어나더니.’
테오의 눈이 반짝이는 동안.
키르손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작년에 세실리아가 아들에게 줄 선물이 필요하다며 그녀를 닦달해서 가져간 보검들이기 때문이었다.
“반품하러 왔어요.”
“기가 차는구나. 감히 이 키르손이 직접 제련한 검을 반품하겠다니.”
테오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냥 품질 좋은 예장용 검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장이 직접 제련한 거였다고?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산 지 1년도 넘은 제품을 대체 누가 반품해준단 말이냐?”
“그야 불량품이라면 몇 년이 지나도 당연히 반품이 가능해야 하지 않나요? 바스크 공방의 표어에도 신뢰니 정성이니 하는 말을 있었던 것 같은데요.”
“불량품이라니! 내가 만든 물건에 감히 하자 따위가 있을 리 없……!”
“못 믿겠으면 직접 보시던가요.”
키르손은 끝까지 자신만만한 세실리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은지 인상을 팍 찡그렸지만,
스르릉!
예검을 뽑은 순간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남은 두 자루도 마찬가지.
키르손은 말을 잃었다.
“……이건.”
“이러고도 불량품이 아니라고 말씀하실 건가요?”
“…….”
키르손은 잠시 말없이 예검들을 차례대로 살펴보았다.
날의 마모된 상태,
검신에 가해진 충격,
검의 균형까지 전부.
그러다 곧 처음으로 진지한 표정으로 눈을 뗐다.
“이 검, 누가 쓴 것이지?”
“누가 썼겠어요? 당연히 제 아들이지요.”
“네 뒤에 있는 그놈?”
“말씀 조심하세요. 이제는 차기 라그나르를 이끌 존재이니까요. 닷새 뒤에 있을 개화식의 주인공이 될 아이이기도 하죠.”
테오는 세실리아의 금칠이 너무 부끄러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공손하게 예를 갖췄다.
“동백궁의 테오 라그나르입니다. 명성 높으신 바스크 공방의 주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테오 라그나르. 그래. 젊은 야장들 사이에 입소문이 도는 것을 들은 적이 있지. 하나비의 아들내미 오른팔을 자르고, 랑케 가문의 둘째 아들은 피떡으로 만들었다지?”
“과장된 명성일 뿐입니……!”
“말씀드렸잖아요? 라그나르의 차기 역사를 새롭게 쓸 유망주라고 말이죠.”
세실리아가 다시 콧대를 높이 세웠다.
테오는 이제 어머니의 치맛바람에 어디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제 아드님이 그딴 불량품을 쓴 것이에요. 한데, 만약 이런 상태도 모르고 개화식에 참가했었다면? 그때 받게 될 비웃음을 감당할 자신이나 있으신가요? 바스크 공방의 명예도, 마장의 명성도 추락하게 될 텐데요?”
“이 흔적은 그런 게 아닌……!”
키르손은 뭔가를 말하려다 말고 고개를 저으면서 몸을 반대로 돌렸다.
“되었다. 여기서 나눌 이야기는 아닌 듯하니 따라오거라.”
* * *
까앙, 까앙, 까앙-
테오와 세실리아는 키르손의 뒤를 따라 공방 내부를 가로질렀다.
야심한 시각인데도 불구하고, 백여 명에 가까운 야장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개화식이 얼마 남지 않아 밀린 주문량을 감당하느라 그런 것 같았다.
그래서 키르손의 갑작스런 손님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었다.
덕분에 테오는 이제야 겨우 궁금한 것을 물을 수 있었다
“마장과는 어떤 사이이십니까?”
세실리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들은 그대로랍니다.”
“그럼 정말로 양모이신……?”
“반년도 안 되는 짧은 인연이긴 하지만, 이 어미를 거둬준 어머니이긴 하지요.”
옛 추억을 회상하는 듯한 아련한 미소.
“이 어미가 라그나르로 시집오기 전에 배우였다는 것은 알고 계시겠지요?”
“예. 예전에 말씀해주셔서.”
“어머니와는 그때 알게 되었답니다. 어머니는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든 사랑하거든요. 그것이 보석이든, 금붙이이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연극이든.”
세실리아가 뒷말을 붙였다.
“혹은 사람이든.”
“…….”
“그래서 절 양딸로 거뒀답니다. 제법 마음에 든다나 뭐라나? 저 역시 꽤 든든한 뒷배가 생기면 좋은 일이니 나쁘지 않았고 말이죠.”
테오는 세실라아가 말은 저렇게 해도 그 속에 깔린 짙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모녀 관계로 있던 그 반년은 그녀에게도 좋은 추억이었던 게 아닐까?
‘예술에 대한 어머니의 안목이 뛰어나신 것도 키르손의 영향이었구나.’
“그런데 어쩌다 곁을 떠나게 되신 겁니까?”
“그때쯤 이 어미가 가주님의 눈에 뗬으니까요.”
“…….”
“당시 가주님은 너무나 멋지셨지요. 아름답고, 늠름하고……. 그래서 이 어미가 홀딱 빠지고 말았답니다.”
어머니는 그걸 반대했었고 말이죠.
세실리아가 덧붙인 뒷말에 테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안 된다.
-하지만 어머니……!
-다른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하여라. 얼마든지 지원해주마. 저번에 너만의 극단을 차리고 싶다 했었지? 얼마나 필요하더냐. 이 어미가 지원해주마.
-이제 필요 없게 되었어요. 전 그이만 있으면……!
-허튼 소리 마라! 지금 네 눈은 뭐에 씌었을 뿐이다! 라그나르라는 명성이 주는 빛에 눈이 가려진 것이야!
-하지만!
-네가 그곳에 간다면 제대로 사람 취급이나 받을 것 같으냐? 그곳은 인간 같지 않은 것들로 가득한 밀림이다. 그딴 곳으로 널 보낼 순 없어!
-자꾸 반대만 하신다면 어쩔 수 없네요. 제가 독하게 마음먹을 수밖에.
-너, 뭘 어쩌려고……?
-그동안 절 키워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어머니.
세실리아의 머릿속으로 지난날에 있었던 일들이 잠깐 동안 스쳤다.
이제는 잘 떠오르지도 않는 과거.
“그 뒤로 거의 연락을 하지 않다가 작년에 다시 찾아갔었지요.”
-여긴 무슨 일로 온 것이냐? 집을 나갈 때는 언제고.
-검이 필요해요.
-검?
-네. 제 아들에게 선물해줄 것으로요. 지난 인연으로 만들어주실 수 없나요? 셈은 치르겠어요.
-……그래. 알아서 해라.
“그래서 만들어진 게 세 예검들인 거군요.”
“맞아요. 그런데…… 검을 저런 식으로 만들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요? 의절한 딸이라고 엉망으로 만든 건지, 따져 물을 생각이랍니다.”
테오는 검지로 볼을 긁적였다.
어머니의 키르손에 대한 애정과 원망이 같이 느껴졌으니.
사실 그는 키르손이 만든 예검이 불량품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날이 상한 건 드레이크의 비늘 때문인데……. 어떻게 말씀드리지?’
던전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는 제약이 있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난감할 뿐.
그렇다고 키르손이 계속 이유 모를 원망을 받게 할 수 없는 노릇.
‘마장도 아직까지 어머니를 아끼시는 것 같고.’
그러다 테오는 연기가 풀풀 날리는 키르손의 뒷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런데…… 전생에선 왜 어머니의 장례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던 걸까?’
* * *
“검은 새로 벼려주겠다. 이런저런 설명을 해봤자 옛 양딸에겐 핑계로밖에 보이지 않을 테니.”
키르손은 대표실로 들어오자마자 테오와 세실리아의 모자에게 그렇게 말했다.
푸우우-
말하는 내내 하얀 연기가 퍼지는 건 덤.
세실리아는 손사래로 연기를 치우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말씀은 좋은데 이 연기는 좀 어떻게……!”
“다만, 한 가지만 물으마.”
키르손은 또 잔소리만 퍼부어댈 세실리아의 말허리를 끊고, 테오를 보면서 입술을 벙긋거렸다.
「너, 태고룡의 어떤 유물을 갖고 있는 것이냐?」
전음술이었다.
세실리아가 쌍심지를 켜면서 테오와 키르손을 바라봤다.
그녀는 기초 호흡법밖에 익히지 않았지만, 검술 명가의 안주인답게 기예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다.
키르손이 테오와 단 둘이서 대화를 나누고 싶어한다는 것도.
그녀는 뒤로 슬쩍 물러섰다.
「아! 아직 개화식은 안 치렀다고 했나? 그럼 입술만 벙긋거려라. 그 정도는 알아볼 수 있으니.」
테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술을 벙긋거렸다.
‘태고룡이면 본가를 수호한다는 수호룡의 조상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키르손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유물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냐?」
‘시조께서 라그나르의 후손들을 위해 태고룡이 쓰시던 보물들을 곳곳에 안배했다는 ‘전설’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테오는 키르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라그나르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동화를 말하는 걸까?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전설? 전설이라! 하! 그렇게 안다고? 시치미 뗄 생각 마라.」
키르손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예검을 한 자루 뽑았다.
「유물을 갖고 있지 않다면, 이 검에 남은 흔적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이냐?」
키르손이 가리키는 흔적들은 대부분 드레이크의 비늘을 때리거나, 직접 이로 깨물린 자국이었다.
「이 특유의 무늬야말로 유물을 깨운 이들만이 남길 수 있는 흔적일진대!」
테오는 눈을 부릅떴다.
지금 키르손의 말은 던전에 대해서 알고 있단 뜻이니까!
두근두근두근!
테오의 심장이 마구 뛰었다.
하지만 테오는 침착했다.
아직은 내색할 때가 아니었다.
‘검에 남은 상처들은 제가 그동안 훈련을 너무 격하게 하면서 생긴 것들일 뿐입니다.’
「끝까지 시치미를 떼겠다는 거군. 뭐, 하긴. 오늘 처음 만난 나에게 비밀을 섣불리 꺼낼 수는 없으려나? 이해한다. 나라도 그럴 테니.」
후우-
키르손은 곰방대를 깊게 빨아들였다가 내뱉었다.
대표실이 연기로 가득 찼다.
세실리아는 키르손을 노려봤지만, 분위기를 깨지는 않았다.
「다만, 한 가지만 말해주마. 유물을 연다는 건 아무나 해내지 못하는 일이다.」
키르손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동안 봤던 신경질적이고 돈에 환장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
테오는 이 모습이 ‘진짜’ 키르손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어떻게든 열고 싶어도 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아니, 대부분이지.」
그러다 말아 올리는 한쪽 입술 끝.
「그런데 너는 해낸 듯하니…… 어디 한 번 확인해볼까? 다른 유물의 선택도 받을 수 있을지.」
키르손은 테오의 대답도 듣지 않고 갑자기 박수를 쳤다.
짝!
곧 대표실 문이 열리면서 밖에서 대기하던 비서가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대표님?”
“창고에 있는 ‘그걸’ 가지고 와라.”
“‘그것’……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대표님, 그건……!”
“잔말 말고 가져와.”
“……알겠습니다.”
비서는 테오와 세실리아를 의심하는 기색으로 번갈아 보다가 자리를 비웠다.
세실리아가 물었다.
“뭘 가지고 오라고 하신 거죠?”
“네가 그러지 않았더냐. 내가 불량품을 주었다고. 그래서 보상도 할 겸, 소문 퍼지는 것도 막을 겸, 처음으로 만난 ‘손자’에게 이 할미가 선물이라도 주려고 그런다만.”
키르손이 곰방대를 물면서 방실방실 웃자, 세실리아는 가만히 눈살을 좁혔다.
손자라는 단어에 유독 힘을 주는 게 영 의심스러웠으니.
그래서 괜찮겠냐면서 테오 쪽을 돌아봤지만,
“전 괜찮습니다, 어머니.”
“거봐라. 우리 손주도 괜찮다고 하잖니. 네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인 것일 뿐이다.”
테오는 덤덤하게 웃으면서 세실리아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다른 유물…… 키르손이 대체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게 만약 사실이라면.’
자칫 그동안 철저하게 숨겼던 메시지에 대해서 들킬 수도 있었지만.
테오는 충분히 도박수를 걸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를 아끼는 분이시라면 어느 정도 믿을 수도 있을 테고.’
테오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는 동안, 비서가 돌아왔다.
“지시하신 대로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그럼.”
비서는 물건을 내려놓고 도망치듯이 대표실을 빠져나갔다.
물건은 길쭉한 나무함이었다.
다만, 모습이 조금 특이했다.
겉면이 쇠사슬로 칭칭 감겨 있을 뿐만 아니라, 여닫이 입구에는 녹슨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 있었으니.
그 외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세실리아는 이게 대체 뭔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
나무함을 보는 테오의 눈동자는 살짝 떨렸다.
파아아-
자물쇠 안쪽에서부터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동백궁의 창고방.
던전의 문을 열었을 때에 봤던 것과 똑같은.
「역시 네게는 보이는 모양이로군. 내게는 전혀 안 보이는데 말이다.」
키르손의 웃음소리가 다시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것은 원래 내가 열고자 하였으나 열지 못했던. 갖고자 했으나 끝내 갖지 못했던 것이다.」
테오는 키르손을 바라봤다.
이 안에 든 게 대체 무엇이냐는 듯.
「내가 갖고 싶었던 것은 마검…… 아니, 요괴가 담겼으니 요검(妖劍)이라는 표현이 옳겠군. 하여간 저 머나먼 신화시대에 태고룡이 자신의 송곳니를 뽑아 만들었다는 검이, 바로 그 안에 들어있다.」
후우우-
키르손이 다시 한 번 더 짙은 연기를 내뱉으면서 말했다.
「월백검이라고 한다.」
“……!”
테오의 눈이 커졌다.
그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이름이었으므로.
-흑룡(黑龍)의 검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