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태고룡의 유물 (4)
테오는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여차하면 예검을 뽑을 요량으로.
그리고 재빨리 정문을 벌컥 열며 들어선 순간.
퍼버벙-
“……응?”
테오는 갑자기 눈앞으로 터지는 폭죽에 자기도 모르게 눈을 끔뻑였다.
“도련님, 축하드려요!”
“별호가 생기셨다면서요?”
“그동안, 정말, 정말정말정말로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지금 이 기세로 개화식까지 쭉 달리시는 거예요! 화이팅!”
그 순간, 어둡던 실내에 조명이 탁 켜지면서 시녀와 집사들이 환영 인사를 해댔다.
짝짝짝짝!
그들의 머리 위에는 플랜 카드까지 날리고 있었다.
-경! 테오 님, 별호 생기다! 축!
“……이게 다 뭐야?”
테오는 얼떨떨했다.
“뭐긴요. 도련님이 드디어 별호가 생기신 것에 대한 축하 파티죠.”
“맞아요, 맞아요. 요즘 저희가 얼마나 즐거운지 모르시죠? 다들 도련님 때문에 난리라구요. 글쎄, 오늘은 매화궁의 동기가 저한테 도련님에 대해서 이것저것 묻는데, 시샘이 아주 가득한 게…… 오호호호!”
테오는 순간 어디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래도 북부 4준과 검을 맞댔다는 소문 때문에 이런 것 같은데…… 너무 쪽팔렸다.
“어머니는……?”
그래서 다른 핑계를 대면서 자리를 후딱 피할 생각이었지만.
“마님은 지금 도련님이 물올랐을 때 하나라도 더 챙겨드려야 한다면서 윈터러에서 아주 유명한 셰프님들을 초빙해서 보양식을 직접 만들고 계세요. 그 때문에 지금 주방이 얼마나 어수선한지 모르실 걸요? 오호호호!“
“…….”
아무래도 오늘은 편하게 보내기 그른 것 같았다.
* * *
“아드님, 이 전복구이 한 번 드셔보세요. 이드리아 해에서도 아주 소량으로만 잡히는 녀석에다 프알 산맥의 낙농가에서 어렵게 구한 버터를 발라 천천히 구워서 열기를 높인……!”
“어머니, 이미 전복만 스무 개 넘게 먹었습니…….”
“아, 이것도 맛보세요. 서쪽 라지리아 사막에서 도토리만 먹고 자란 닭을 딱 영계일 때에 잡아, 먼 동쪽의 쥬선이라는 나라에서 공수한 인삼과 같이 고아……!”
“닭도 많이 뜯었습니다. 내일 뱃속에서 꼬끼오 소리가 들릴 것 같습…….”
“이것도 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아드님? 아드님이 다섯 살 무렵이었던가, 북해에 놀러 가서 맛있다고 했던 대구가 기억나서 이참에……!”
“…….”
테오는 세실리아가 권유하는 음식들을 먹느라 죽을 지경이었다.
배가 부르다며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런 눈빛을 보이시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꺼내겠어.’
세실리아의 눈이 다른 어느 때보다 생기로 반짝반짝 빛나 섣불리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덕분에 식탁에는 그릇이 탑처럼 잔뜩 쌓여 있었다.
-원래 도련님 소식하지 않으셨어?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음식이 입에 맞으시면 저렇게 드시는구나. 그동안 우리 음식이 맛없었단 뜻이겠지?
-안 되겠다. 앞으로 주방장들을 닦달해야겠어.
-맞아. 우리 도련님은 항상 맛있는 음식을 드셔야 해!
시녀와 집사들도 이상한 방향(?)으로 불이 붙는 것 같았지만, 도저히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도…… 맛있네.’
테오는 뜯은 닭다리를 씹으면서 쓰게 웃었다.
재단사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세실리아가 직접 맛을 보고 재료들을 선별하면서 셰프들을 진두지휘했다더니.
또 어머니의 못 보던 새로운 면을 본 것 같았다.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재주가 다양하신 것 같단 말이지.’
“오호호! 아드님은 모르실 겁니다. 제가 요즘 얼마나 하루하루가 기쁜지 말이죠.”
“다행히 동백궁 생활이 마음에 드신 것 같습니다.”
순간, 세실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평소 3부인을 싫어하시던 것 아니셨습니까?”
“아, 이런! 이 어미가 하루하루가 기쁘다고 하니 아무래도 아드님이 잘못 이해하셨던 모양입니다.”
“……?”
“물론, 에밀, 고것을 쫓아내고 이 동백궁을 차지한 것도 기쁘지요. 고것은 항상 어디서나 아드님과 저에 대한 험담을 했었으니까요.”
그랬…… 었나?
“그러니 즐거울 수밖에요. 아드님께서 지난날 동안 갖고 있던 별…… 별명은 무슨! 입에도 올리기 싫은 그 멸칭을 처음 쓴 것이 바로 에밀이었답니다.”
라그나르의 병신.
오랫동안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던 별명을 말하는 것 같았다.
“사실 그동안 아드님은 모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누가 붙였는지 알지 못하게 하라고 시녀들을 단속했던 게 바로 저였으니까요.”
테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혀 짐작도 못 했으니까.
“사는 곳이 장미궁이 됐든, 동백궁이 됐든, 이 어미는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답니다. 아드님과 같이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며 식사할 수 있는 곳이면 충분하니까요.”
“…….”
“제가 기쁜 것은 이제야 겨우 사람들이 아드님의 진가를 똑바로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전처럼 심장 한편이 또 간질간질했다.
“죄다 눈이 삔 것들 투성이지요. 이리도 늠름하고도 멋진 아드님이신 것을. 그래도 다행히 지금이라도 알기 시작했으니 앞으로는 다들 아드님 앞에서 말조심, 몸조심 하지 않겠어요? 오호호!”
기분 좋게 웃는 세실리아의 모습에서는 가식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동안 내가 어머니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었던 걸지도.’
그동안 어머니가 바라는 것은 아들을 통한 사회적 지위의 향상, 권력에 대한 탐욕, 그로 인한 비뚤어진 애정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았다.
어머니와 진솔하게 대화를 나눴더라면 쉽게 풀렸을 오해.
하지만.
단 한 번도 풀지 못했던 오해.
“그리고 아드님 핑계를 대면서 옷이며 요리며 예전에 취미 붙였던 것들을 다시 만져보니 예전 생각도 새록새록 나고. 아주 재미있답니다.”
테오는 언뜻 생기와 열의로 가득하던 세실리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토록 뛰어난 열의와 재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가주의 여인으로 시집오면서,
한 아이의 어머니로 살면서,
주변의 멸시와 압박을 받으면서,
그들로부터 어떻게든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손에서 떠나보내야만 했던 젊은 날의 꿈.
어머니의 생기와 웃음을 계속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혹시 예전에 하셨던 일들을 다시 해보실……!”
“아, 그보다 그 검은 잘 쓰고 계십니까? 저번에 보니 갖고 다니시는 것 같던데요.”
세실리아가 도중에 말허리를 끊으면서 테오가 식탁 옆에 걸어둔 세 자루의 예검을 바라봤다.
테오는 섣불리 뒷말을 잇지 못했다.
세실리아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더 이상 뒷말을 잇지 말라고.
-아드님 핑계를 대면서 옷이며 요리며 예전에 취미 붙였던 것들을…….
왜 조금 전에 하셨던 말씀 중 일부가 머릿속을 맴도는 걸까?
“계속 벽에다 걸어두기만 하셔서 마음에 들지 않는 걸 선물해드렸나 싶어 마음이 쓰였었는데 말이죠.”
“보시겠습니까?”
테오는 다음 기회에 마저 대화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세 자루 중 한 자루를 집었다.
스르릉-
검집에서 검이 분리되었다.
순백색의 검신을 본 세실리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날이 상당히 많이 손상되었군요.”
“예. 어쩌다 보니.”
“다른 검들도 그런가요?”
테오는 다른 두 개의 검신도 똑같이 보여주었다.
세실리아는 탐탁지 않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 망할 늙은이가……! 설백괴에다 ‘흑단목’까지 들어갔으니 절대 망가질 일이 없을 거라고 그렇게 큰소리를 뻥뻥 치더니.”
“흑단목? 설마 남쪽 가이아 밀림 지대에서나 나온다는 그 흑단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흑단목은 오로지 쇠를 먹고 자란다는 기형 식물이었다.
쇠의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주 단단한 강도를 자랑해서 설백괴와 같이 손에 꼽히는 보검의 재료로 통했다.
그런데 여기에 그것까지 있다고?
“그것 말고 흑단목이 또 어디 있을까요. 아, 안 되겠어요. 가서 따져 묻던가 해야지. 이대로는 이 어미의 속이 터져 문드러질 것 같군요.”
“……!”
“그 검들을 이리 주시겠어요? 다시 제대로 만들어서 가져올 터이니.”
“지금으로도 괜찮습니다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지금! 설마 그런 상태의 검들을 가지고 개화식에 참여하겠다는 건 아니실 테죠?”
테오는 검지로 볼을 긁적였다.
“역시 그럴 생각이었군요. 절대 안 돼요! 명심하세요. 이전에도 비슷하게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이제야 겨우 아드님의 명성이 갓 퍼지기 시작한 이때, 행동 하나하나 어투 하나하나, 외양 하나하나에 다른 어느 때보다 각별히 신경 써야만 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남들의 입방아에 오를 만한 건덕지 하나 줘서는 안 된답니다 세실리아는 그렇게 뒷말을 덧붙였다.
“아드님에 대한 사소한 평가 하나하나가 모여 결국 아드님의 평판이 만들어지는 것이니. 허투루 여겨서는 안 됩니다. 아시겠죠?”
테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세실리아의 말을 이해했으니까.
이 말을 들은 남들은 실속이 더 중요한 게 아니냐고 말할지 모른다.
물론, 그것도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실속은 반드시 챙겨야 할 것일 뿐, 이것을 포장하는 겉모습 또한 중요하다.
결국 테오라는 존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비추는 겉모습을 먼저 보고 판단할 테니까.
그리고 테오가 바라보는 곳은 단순한 강자의 반열이 아니었다.
-가주.
라그나르의 정점이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그런 평판을 서서히 쌓아나갈 필요가 있었다.
어머니의 말씀이 옳았다.
“그러니 이 어미는 개화식에 참여하는 아드님의 행동 하나하나, 외양 하나하나 참견할 것이에요. 그곳의 주인공은 마땅히 아드님이 되어야 하니까요.”
탁!
세실리아가 탁상을 내려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럴 게 아니라, 말이 나온 김에 찾아가도록 하죠. 이 망할 늙은이, 오늘이야말로 잡고 말 터이니.”
“……지금 밤 9시이지 않습니까?”
“시간이 중요한가요. 그 비싼 돈을 받아가고도 이딴 불량품을 준 사기꾼부터 잡아야지.”
간만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세실리아를 보면서 생각했다.
대체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망할 늙은이’가 누구일까?
* * *
‘그러고 보니까 여태 어머니의 인간관계도 잘 모르고 있었구나.’
테오가 너무 무심했던 지난날을 반성하는 동안.
두 모자를 태운 마차는 동백궁을 떠나 윈터러의 야장 지구 쪽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레이는 아직도 쫓아오나……?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이 추운 날에 동백궁 밖에서 홀로 세 시간을 넘게 있었단 뜻인데.
왜 자꾸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는 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방해를 할 것 같지는 않아 그냥 내버려 두고 있었는데.
‘계속 저런다면 붙잡고 이야기를 해보긴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여기랍니다.”
그러다 멈춘 곳.
테오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
“<바스크 공방>? 여길 알고 계셨습니까?”
대장간이라기보다는 ‘공장’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건물.
이 늦은 시간에도 굴뚝에서는 연기가 풀풀 날리고, 문밖에까지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테오도 아주 잘 아는 곳이었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바스크 공방.
윈터러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무기 제작소였으니.
라그나르에 몸을 담은 검사들 중에 이곳에서 제작한 검을 단 한 번이라도 만져보지 않은 사람은 없지 않을까?
“아무런 밑천도 없는 이 어미가 이곳을 어떻게 알까요. 그저 여기 있는 한 사람을 알 뿐이지.”
“……?”
대체 누구를 말씀하시는 걸까?
설백괴와 흑단목을 직접 만질 정도라면 ‘명인’의 등급은 받은 야장일 텐데.
테오가 누구냐고 물어보려는 순간.
“이 버러지 새끼들아! 귓구녕이 막히기라도 했냐! 똑바로 안 옮겨? 이게 전부 얼마짜린데……! 야! 거기 제대로 하라고! 그것도 다 돈이란 말이다, 돈!”
안쪽에서 히스테리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돈?”
테오가 묘한 표정을 지을 때, 갑자기 공방 문이 ‘쾅!’하고 열렸다.
“아아아악! 진짜 이번 건을 내가 어떻게 따낸 건데! 이래서야 납기일이나 제대로 맞추겠냐고!”
대체 며칠을 감지 않은 건지 퍼석퍼석한 은발을 박박 긁어대는 손길.
눈 밑에는 다크 서클이 가득하고, 입에 물린 곰방대에서는 하얀 연기가 쉴 새 없이 풀풀 날렸다.
하지만 곰방대를 쥔 손은 손가락마다 두세 개씩 낀 반지의 원석들로 번쩍번쩍거렸고,
목과 손목에는 금목걸이며 금팔찌가 주렁주렁 매달려 눈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누가 봐도 일에 잔뜩 치여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부하 직원들을 쥐어짜는 데만 골몰한 졸부의 모습.
반면에 그녀는 새하얀 얼굴이며 뾰족한 귀를 갖고 있었으니.
그때, 신경질 가득한 시선이 테오를 째려봤다.
“뭘 봐? 담배 피는 엘프 처음 봐?”
상상을 초월하는 엘프의 모습.
‘이 사람……!’
테오는 그녀가 누군지 깨달았다.
-바스크 공방의 주인.
-자연을 사랑하는 엘프인 주제에 대장장이 업에 빠져 부족에서 쫓겨난 돌연변이.
-보석과 금과 돈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는 미치광이 엘프.
-그러면서도 실력만큼은 확실해 라그나르에서 단 셋밖에 없는 ‘명장’의 칭호를 받은 신장(神匠).
-일명, ‘자본주의가 낳은 엘프’.
정보부에서도 ‘특급’으로 분류되었던 존재.
‘마장(魔匠) 키르손!’
갑자기 이런 거물을 만날 줄 몰랐기에 황급히 뭐라고 대답하려는데,
갑자기 세실리아가 성큼 나섰다.
“그 망할 흡연은 아직도 끊지 못하셨나요? 아무리 엘프라고 해도 그렇게 열기를 계속 쬐는 판국에 흡연까지 하면 언젠가 팍 삭는다구요?”
세실리아의 고운 이마에 골이 팼다.
“어머니!”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