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태고룡의 유물 (3)
‘다행이군, 그래도. 레이까지 겨뤘다간 힘들었을 텐데.’
겉보기와 다르게.
테오는 속으로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던전에서부터 연무장까지.
계속된 격전으로 이미 체력과 마력이 모두 바닥났기 때문이었다.
던전 클리어를 마무리하고 밖으로 나온 뒤.
-도, 도련님! 저희 모두 계속 찾고 있었는데 어디 가셨었어요?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어?
-지금 제4연무장에서 패싸움이……!
제4 연무장이 난장이 됐다는 소식에 다급하게 뛰어왔기 때문에 제대로 쉬지 못했던 것이다.
‘클리어 추가 보상으로 얻은 것도 있었고.’
[축하합니다! 레서 드레이크를 사냥하는데 성공하여 튜토리얼 퀘스트 #12를 무사히 성공하였습니다.]
[평가: A+]
[보상으로 ‘레서 드레이크의 이빨’을 얻었습니다.]
[보상으로 ‘레서 드레이크의 발톱’을 얻었습니다.]
[평가에 따른 추가 보상으로 <스킬> 권한을 획득했습니다.]
두 달 만에 받은 퀘스트 보상은 오랜 기다림을 전부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값졌다.
먼저 아이템.
+
[레서 드레이크의 이빨]
· 종류: 재료
· 효과: 무구 제작의 강화 재료. 강도를 올려주는데 효과가 있다.
· 사용 조건: 10레벨
+
+
[레서 드레이크의 발톱]
· 종류: 재료
· 효과: 무구 제작의 강화 재료. 예기를 올려주는데 효과가 있다.
· 사용 조건: 10레벨
+
보통 마해에서 잡히는 마수들은 형태가 온전할 경우에 ‘횡재’를 했다고 말한다.
무기나 갑옷을 제작하는데 아주 요긴하게 쓰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마수들 중에서도 높은 등급을 가진 레서 드레이크는 예검의 날을 무디게 만들고 테오를 위협할 정도였으니.
<비기너 시리즈>가 아니더라도, 테오가 새로운 무기와 갑옷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어줄 게 분명했다.
하지만.
테오가 보상으로 받은 것들 중에서 가장 눈을 빛낸 것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스킬’이었다.
+
[스킬 목록(▼)]
- 레서 드레이크 피어
- [해당 없음]
- [해당 없음]
+
+
[레서 드레이크 피어]
· 등급: D+
· 숙련도: 1%
· 효과: 레서 드레이크만의 살기를 뿜어 주변을 압도한다. 시전자보다 낮은 대상에게 공포 효과를 심는다.
+
살갗이 쩌릿쩌릿할 정도로 강렬한 살기는 상대를 혼란과 공포로 몰아넣는다. 냉철한 판단력이 중요한 전장에서 이보다 치명적인 무기는 없을 것이다.
생태계에서 용종이 포식자로 군림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용살기에 노출된 생명체는 누구나 고개를 숙이게 되어 있으므로.
그런데 스킬이란 것은 그런 용살기를 인위적으로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았다.
품이 떨어지는 레서 드레이크의 것이라지만.
그래도 이를 갖고 있는 것으로 가지는 장점은 아주 많았다.
실제로 테오는 단순히 스킬을 발동시킨 것만으로 제4 연무장의 분위기를 한껏 휘어잡을 수 있었으니까.
체력이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홀커스를 단번에 제압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기세를 먼저 꺾어버린 덕분이기도 했다.
‘남은 칸도 두 개. 이런 기술을 앞으로 두 개나 더 익힐 수 있단 말이지……? 정말이지 사기가 따로 없는 것 같은데.’
테오는 스킬이 주는 효과를 한껏 만끽하면서도,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고 레이를 경계했다.
그리고.
“기운, 살벌해. 정신없고. 대화가 안 되겠어. 그냥 개화식에서 보자.”
그녀는 테오와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떠들고 나타났을 때처럼 훌쩍 자리를 떠났다.
휘릭!
테오의 안력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신법.
“……?”
‘대화? 무슨 말이지?’
대체 무슨 용건으로 온 건지.
전생에서도 그랬지만, 레이의 속마음은 도저히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저, 저희도 그럼……!”
한편, 레이와 홀커스에게 묻어가려던 젠킨스 일당은 눈치를 보면 슬금슬금 물러서려 했지만.
촤아악!
어느새 웰링턴이 그들 앞으로 검풍을 휘둘러 길을 막았다.
“가기 전에 팔 한 짝씩은 두고 가야 하지 않나?”
“……!”
“……!”
“……!”
순간, 젠킨스 일당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 * *
이블린은 관자놀이가 쿡쿡 쑤셨다.
그녀가 잠깐 자리를 비운 동안 큰 사달이 벌어진 탓이었다.
“그러니까…… 저쪽이 먼저 테오 도련님에 대한 뒷담화를 했고, 너희들은 그걸 참지 못하고 싸웠었다?”
“그, 그렇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 사달이 났다?”
끄덕끄덕…….
추종자들은 이블린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땅바닥만 바라봤다.
바득바득!
이 갈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고개도 점점 아래로 향했다.
그동안 그들이 겪은 이블린은 그만큼 무서운 사람이었다.
백갑용기대에서도 괜히 호랑이 사범으로 불렸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분명히 싸우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을 텐데? 그런데 그것도 안 지키다가 이 꼬라지가 나? 환장하겠네.”
이미 제4 연무장의 사건은 윈터러 곳곳에 소문이 쫙 퍼진 상태였다.
-지난 두 달 동안 장미궁의 병신이 가주님께 배운 일검을 가지고 폐관 수련을 거듭해 엄청 강해졌다더라.
-이걸 알게 된 북부 4준이 테오와 맞붙었다더라.
-테오가 일격에 4준을 전부 다 쓰러뜨렸다더라.
-흑웅이 중상을 입어 응급실로 실려 가고, 설빙검이 꽁무니를 빼고, 검사자(劍獅子)가 무릎을 꿇었다더라.
-장미궁의 병신이 이 중에 자신의 상대가 될 놈이 없으니, 실력을 증명하고 싶은 자는 누구나 제4 연무장으로 찾아오라고 했다더라.
어떤 것은 맞기도, 또 어떤 것은 터무니없이 과장되기도 한 소문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테오의 이름이 윈터러의 모든 사람들에게 강렬하게 각인되었다는 것.
-섬호.
소수의 몇몇 사람들 사이에서나 돌아다니던 별호가 쫙 퍼지게 되었다.
‘적당한 유명세는 좋지만, 너무 큰 유명세는 오히려 견제만 부르는 법인데.’
하지만 이블린은 그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당한 유명세는 분명히 좋다.
하지만 너무 거센 유명세는 오히려 경계만 부를 뿐이니.
특히 지금처럼 개화식이라는 큰 행사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는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뿐이었다.
‘개화식은 개인 기량도 중요하지만, 팀워크도 그만큼 중요하니까.’
테오를 견제한답시고 여러 명이서 작정하고 그를 골리려 하면 얼마든지 골릴 수 있었다.
이런 이블린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테오는 오랜만에 만난 웰링턴과 검술 대련을 하고 있었다.
차차차창-
‘훨씬 날카로워졌어. 집요해지고.’
테오의 검이 번쩍일 때마다 웰링턴의 발걸음이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이제 두 사람의 실력 차는 누가 더 우위에 있는지 확실하게 보였다.
분명히 검술 실력은 여전히 웰링턴이 높건만.
테오의 검은 상대의 약점을 빠르게 찾아내어 집요하게 공략하는 특징이 있었다.
대련이라기보다는 대전,
검술이라기보다는 검투(劍鬪)에 가까워 보였다.
‘어디서 실전이라도 치르셨나?’
테오가 그동안 동백궁에서 꿈쩍도 않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전장과 사선을 숱하게 구르면서 검을 터득한 사람들의 냄새가 너무 강하게 났으니까.
보통 저런 사람들은 ‘검사’라고 부르지 않는다.
‘전사(戰士)’라고 부르지.
어쩌면 라그나르에 가장 가까운 모습일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될 정도로 뛰어난 발전 속도란 말이야.’
이블린은 속으로 혀를 찼다.
스승으로서 제자가 강해진다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그만큼 부담이 되기도 했다.
물론, 이 재미난 걸 포기할 생각은 절대 없었지만.
‘남은 닷새 동안에는 투박한 투로를 다듬는데 집중해야겠어.’
이블린은 그냥 걱정을 접어두기로 마음먹었다.
주변의 견제는 이미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쩌겠나.
그 견제로도 테오를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더 압도적으로 강하게 만들어버리면 그만이지.
이블린은 이미 테오를 개화식의 주인공으로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율리우스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경쟁자가 너무 많아진다고 길길이 날뛰겠지만.
뭐, 어쩌겠나.
‘자기가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지.’
그동안 저를 못살게 괴롭혔으니 이제 대장님도 고생 좀 하셔야죠?
이블린은 머리를 쥐어뜯을 율리우스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아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으흐흐!
“…….”
“…….”
“…….”
이블린의 웃음을 본 시빌과 추종자들은 몸을 떨면서 못 본 척 고개를 재빨리 옆으로 돌렸다.
* * *
모든 훈련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웰링턴은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에 싸여 있었다.
‘이제는 정말 실력으로도 당해내지 못하겠군.’
웰링턴은 테오가 레이와 홀커스를 상대로 압도하던 기세를 떠올리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테오가 본격적인 수련에 들어가기 전인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전력을 다한다면 질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었는데.
그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테오는 그새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투기와 실력, 전투 감각이 모두 바짝 날이 선 느낌.
‘그 홀커스를 단칼에 이길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지.’
자신도 그러지 못할 것이다.
북부 4준은 대부분 예나 지금이나 실력 차가 크게 나지 않았으니까.
‘나도 강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만큼 노력도 했었고.’
웰링턴은 허리춤에 매달린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이게 재능의 차이라는 걸까?”
분명히 친구가 강해졌다는 사실은 기쁘다.
가문에서 받던 무시를 깨버리고 주목받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내 일처럼 자랑스럽다.
하지만 그래도.
이 씁쓸함은 어쩔 수 없다.
재능.
그 단어 때문일까.
언젠가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네 절반을 차지하는 피가 천하기 때문인가? 재능이 참으로 아쉽구나. 하늘이 내게 허락한 후계자가 너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
그분의 눈에 들기 위해 지난 10여 년 동안 밤잠도 설쳐가면서 거듭 검을 쥐었는데.
여기서 대체 얼마나 더 혹독하게 검을 쥐어야 한다는 걸까.
꽈아악.
검 손잡이를 쥐는 손길에 바짝 힘이 실릴 무렵.
휙!
“……누구냐?”
웰링턴은 길을 걷다 말고 갑자기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뒤쪽을 겨누었다.
스산한 눈빛이 아무것도 없는 골목을 응시했다.
그리고.
“나오지 않겠다면, 용건이 불민한 것으로 판단하고 베겠……!”
“역시 도련님의 감각은 당해내지 못하겠습니다.”
뚜벅뚜벅-
분명히 아무것도 없던 골목으로 낯익은 얼굴이 걸어 나왔다.
웰링턴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을 만났으니.
“랄프?”
집사복을 입은 중년인.
어렸을 때부터 웰링턴을 보살펴 주었던 나르시오 가문의 수석 집사, 랄프 긱스였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도련님?”
“그럭저럭. 그보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당연히 개화식이 얼마 남지 않아 도련님을 뵈러 왔지요.”
“나를? 가문에서는 내게 별 관심이 없는 거 아녔나?”
타인을 대할 때면 언제나 예의 바른 모습을 보여주었던 웰링턴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유독 냉소적이었다.
랄프가 쓰게 웃었다.
“어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도련님은 본가의 미래를 책임질 분이실진대……. 그보다 도련님께 먼저 양해를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양해?”
“예. 원래는 저와 가신단만 올 예정이었으나, 부득이하게 다른 한 분도 같이 모시게 되었습니다.”
저벅버적-
랄프 뒤편으로 한 사람이 묵묵한 발걸음으로 나타났다.
그 순간, 웰링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 * *
휙-
스르륵!
‘레이 라그나르?’
테오는 동백궁으로 돌아가다 말고, 몰래 자신의 뒤를 밟는 기척에 묘하게 눈을 떴다.
제 딴에는 조용히 움직인답시고 조용히 움직이는 거겠지만.
테오의 예민한 기감을 속을 정도는 아니었다.
‘훈련 시간 내내 연무장 주변에서도 떠나지 않더니. 뭐 때문에 내 뒤를 밟는 거지? 제대로 승부를 보고 싶은 건가?’
하지만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랬다면 진즉에 나와서 검을 겨루자고 했을 테니까.’
사실 레이는 차가운 겉모습과 다르게, 돌발 행위가 잦은 편이어서 전생의 정보부에게 큰 골칫거리였다.
-레이 라그나르를 이해하려고 하지 마라. 그럼 끝도 없을 테니. 그냥 그러겠거니 하고 받아들여라.
오죽하면 저런 말까지 나돌았을까.
용건이 있다면 나중에 어떻게든 접근하겠지.
테오는 그냥 모른 척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테오 라그나르, 많이 컸네. 북부 4준의 경계를 살 뿐만 아니라, 같이 비교되기까지 하고.’
전생에선 생각지도 못한 상황.
동경하던 대상들과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은 분명히 기쁜 일이다.
한 명의 검사로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는 뜻이니.
하지만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엄청 들뜨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무덤덤한 편에 가까웠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는 느낌?
‘눈이 너무 높아져 버린 걸까?’
테오는 아마 그것이 율리우스와 카일의 일검을 봤기 때문에 생긴 결과가 아닐까 싶었다.
마음 깊숙한 곳에 남은 용섬은 그만큼 그의 사고와 관심사를 완전히 바꿔 버렸으니까.
“…….”
테오는 어느새 달이 뜬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주먹을 오므려봤지만, 달빛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올 뿐.
용섬을 보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든 따라잡고 싶어서 계속 연습하긴 했었는데…… 제대로 찾아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어려울 거라던 율리우스의 말이 맞았다.
험준하고 높은 곳에 오른다는 것은 그만큼 힘들었다.
그 과정에서 주변의 풍경이나, 같이 산을 오르던 다른 사람들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북부 4준이 딱 그런 것 같았다.
그 때문일까?
지금 이 순간.
테오의 마음속에선 아주 작지만 큰 변화가 벌어지고 있었다.
-검의 끝을 보고 싶다는 열망.
단순하게 검으로 타인에게 인정을 받고 싶다는 욕구가 변했다.
물론, 가주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나, 전생의 원수들을 찾아 복수하겠다는 다짐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보다 더 고차원적인 열망.
추구하는 이상(理想)이 생겼다는 의미였다.
그 전에는 주어진 하루하루를 그저 살아가기 바빴고, 자신의 좋지 않은 환경만 탓할 뿐이었으니까.
이것을 어떻게든 타파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어떻게든 부술 것이다.
그리고 일어서서 저 높은 곳에 닿을 것이다.
테오는 그렇게 다짐했다.
파스스…….
그도 모르는 사이에 여태 그의 몸과 마음을 묶고 있던 마지막 남아있던 쇠사슬도 부서져 사라지던 그때.
“……뭐지?”
테오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동백궁의 입구로 발을 들이다 말고 도중에 멈췄다.
…….
어째선지 동백궁과 주변이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인위적인 듯한 광경.
침입자가 있는 것 같았다.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