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태고룡의 유물 (2)
“레이에 홀커스까지 갔다고?”
“그, 그렇습니다.”
“그래그래. 이렇게 다들 알아서 장기말처럼 움직여주니 얼마나 예쁘냐고.”
악시온은 수하가 가져다준 소식에 스테이크를 썰다 말고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레이와 홀커스를 제4 연무장으로 보낸 것은 악시온이었다.
외숙부께서는 개화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함부로 테오를 건드리지 말라고 하셨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악시온은 이미 더 이상 에드의 분부를 따르지 않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외숙부님은 항상 너무 조용히 움직이시는 게 흠이다. 필요할 때는 작정하고 상대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필요도 있는 것인데.’
그가 봤을 때, 테오와 웰링턴은 되도록 빨리 제거를 해야 하는 놈들이었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개화식을 시작하기 전부터 ‘판’을 깔아둘 필요가 있었다.
놈들이 절대 빠져나갈 수 없을.
그런 올가미를 둘 수 있는 완벽한 판을.
‘덧붙여 테오나 웰링턴이 그동안 얼마나 성장했는지 살펴볼 수도 있을 테고.’
악시온은 자신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레이와 홀커스가 그동안 개화식을 앞두고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슬슬 나올 때쯤에 맞춰서 두 사람에 편지를 보냈다.
내용은 크게 두 가지.
-웰링턴이 졌다.
-가주님의 일검을 사사받은 라그나르이다.
북부 4준 중에서도 가장 호승심이 뛰어난 두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반응을 보일 거라 예상했고.
그것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이로써 첫 번째 판은 완벽하게 깔린 셈이 되었다.
“놈들은 성격이 급해. 특히 홀커스는 기다리는 걸 못하지. 레이는…… 궁금할 수밖에 없을 거고.”
어차피 이번에 저들이 싸우다 공멸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불씨를 지필 수 있는 정도는 될 것이다.
그럼 나머지는 개화식 때 부채질해서 모조리 활활 불태워버리면 그만이었다.
테오도, 웰링턴도.
다른 4준도 전부.
달그락, 달그락-
나이프와 포크가 그릇에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방을 울렸다.
* * *
레이는 아직도 어린 시절의 유일한 추억이라 할 수 있는 그날을 기억했다.
-안 추워? 이거라도 두를래?
눈보라가 치던 어느 날.
레이는 유모 몰래 궁 밖으로 나온 적이 있었다.
몸이 좋지 않아 늘 방에만 박혀 있던 게 너무 답답해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곧 후회했다.
눈보라 때문에 길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추위 때문에 몸도 얼어붙어 엄마만 애타게 찾고 있을 때.
한 소년을 만났다.
두꺼운 목도리와 벙어리 장갑, 비니와 코트로 똘똘 무장해서 눈사람처럼 보이던 소년.
소년은 괜찮냐며 목도리를 풀어 레이의 목에 둘러주었다.
그때, 레이는 한참 동안 소년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소년에게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도 체온이었지만.
‘너무 예뻐.’
복숭아처럼 뽀얀 뺨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삐쩍 말라서 못생긴 자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
-이렇게 얇게 입고 나오면 감기 걸려. 큰일 난다구. 그러니까 집에 다시 들어가자. 알겠지?
하지만 소년은 레이의 생김새 따윈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녀의 손을 꼭 붙잡은 채로 자신도 모를 집을 찾아 움직였다.
사박, 사박-
새하얀 설원에 길쭉하게 남았던 두 사람의 발자국이 기억에 선명했다.
이후.
레이는 다행히 무사하게 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며칠 간 감기 몸살로 고생하긴 했지만.
오히려 그때의 추억이 밑거름이 되어 어떻게든 ‘뛰어 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그녀가 구음절맥이라는 저주를 딛고 일어설 수 있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레이는 추억 속의 소년이 자신과 동갑내기 형제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이름은 테오 라그나르.
익히 그녀도 들은 적이 있던 ‘장미궁의 병신’이었다.
‘그런데 달라졌다고……? 갑자기?’
레이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추억 속 소년이 어떻게 변했는지.
이전에는 찾고 싶어도 사정이 있어서 찾지 못했었지만.
폐관 수련이 끝나 <빙백신검>을 손에 넣은 지금은 달랐으니까.
‘정확하게 보고 싶어. 어떤 검을 쥐고 있는지.’
그리고.
웰링턴은 그런 레이를 상대하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호승심인 줄 알았지만 그런 게 아냐. 대체 뭐지? 그렇다고 테오 공자와 교류를 가졌던 것 같지도 않고.’
웰링턴은 레이가 어렸을 때부터 병실에만 있어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서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말투도 늘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도 더뎌서 얼음장 같다는 말을 많이 듣는 것이다.
그런데 레이가 처음으로 큰 감정 기복을 보인다.
뭔가가 있단 뜻.
하지만 섣불리 묻지는 못했다.
레이의 속을 알기가 너무 어려운 데다가, 다른 방해꾼이 있었으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레이 라그나르! 테오 라그나르는 나와 먼저 승부를 볼 것이다!”
쿵!
홀커스가 지면을 세게 발로 찍으면서 소리쳤다.
메아리가 아주 쩌렁쩌렁했다.
레이는 시끄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패배자는 빠져.”
“설마 3년도 전에 벌인 승부를 가지고 그렇게 말하는 거냐? 우리 나이에는 한 달 한 달이 아주 중요하거늘! 3년이면 충분히 그 차이를 메우고도 남을……!”
“응. 너 패배자.”
순간, 홀커스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이년이 그래도! 안 되겠다. 다시 승부를 겨루자! 이기는 놈이 테오 라그나르와 검을 겨루는 거다!”
“그런다면 못할 줄 알고?”
레이와 홀커스가 서로를 향해 검을 뽑으면서 으르렁거렸다.
고오오오-
두 사람을 둘러싸고 막강한 파동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중앙에 있던 웰링턴은 인상을 와락 찡그렸다.
이 녀석들은 대체 왜 하필 여기서 지랄인 건지.
‘혹시 악시온이……?’
이따위 ‘장난’을 뒤에서 꾸며댈 사람이 문득 떠올랐지만.
저 두 사람을 먼저 제지하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에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지이잉-
<나르시오 비전 – 나락검>
거센 검명과 함께 일어난 검풍이 레이와 홀커스 사이를 가로질렀다.
촤아아악!
“……!”
“……!”
순간, 본능적으로 떨어진 레이의 눈가에 이채가 어렸다.
홀커스도 마찬가지.
“둘 다 싸움박질 할 거면 집에 가서 해. 여긴 테오 라그나르의 영역. 집주인 없이 소란 피우는 건 용납 못한다.”
웰링턴에게서는 살벌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오!
홀커스가 가볍게 탄성을 터뜨리면서 그를 바라봤다.
“웰, 너 정말 웰 맞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지? 그럼 내가 가짜라는 거냐?”
“그럴지도.”
“뭐?”
“최소한 내가 아는 웰은 이러지 않았었다고.”
홀커스의 한쪽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따분할 정도로 아주 예의 바르고 올바른 느낌이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너무 날카로워.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바뀌기가 쉽지 않은데. 뭐냐? 그동안 뭘 배운 거냐?”
웰링턴은 순간 뭔가를 떠올렸다.
테오와 함께 하던 순간들.
이블린에게 검을 배우던 순간들.
추종자들과 검을 섞던 순간들.
지난 몇 달은 사실 그의 인생을 크게 바꿔놓은 기로이긴 했다.
가문에서 겪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나날들이었으니.
그것이 그의 마음가짐을 알게 모르게 바꿔놨었다.
물론, 웰링턴이 홀커스에게 그런 걸 말해줄 이유는 없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꺼져.”
“으음! 너를 이렇게 바꾼 사람이 테오 라그나르라면 더욱더 얼굴을 보고 싶은데. 어떡하지?”
웰링턴은 더 이상 말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검명을 일으키려 했다.
그 순간.
화아아악!
“뭐지……?”
“……이건?”
별안간 제4 연무장을 강렬하게 짓누르는 압박감.
홀커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고, 레이가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웰링턴의 시선도 저절로 돌아간 곳.
저벅, 저벅-
테오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느릿한 발걸음으로.
하지만 발걸음과 다르게 테오의 분위기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대체 어디서 격전이라도 치르고 온 건지.
봉두난발이 된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선홍빛 눈은 야수처럼 날카롭고,
여기저기 해진 옷자락 사이로 비친 상처들은 살이 떨릴 정도였다.
무엇보다 이 위압감.
마치 전설 속 용이 풍긴다는 드래곤 피어라도 되는 것처럼 살벌해도 너무 살벌했다.
“크으윽……!”
“부, 분명히 마, 마력도 아직 개, 개, 개방을 하지 못했을 텐데……!”
“대, 대체……?”
북부 4준도 화들짝 놀랄 정도로 강한 기세인데 다른 일반인들이야 오죽할까.
젠킨스 일당들은 대부분 사색이 되거나, 몇몇은 아예 게거품을 물고 자지러지기도 했다.
문제는.
테오가 이곳에 가까워질수록 살기며 그의 존재감도 점점 또렷해진다는 점이었다.
“파하하하! 내 예상이 맞았어. 재미있을 것 같더라니. 너는 내 꺼라고-!”
콰아아앙-
홀커스는 정신 나가도록 웃더니 거세게 지면을 박차면서 단박에 테오 쪽으로 쇄도했다.
웰링턴은 순간 아차 싶었다.
테오의 등장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미처 녀석을 깜빡하고 말았으니까.
‘내가 알기로 테오 공자는 분명히 폐관 수련을 갓 끝내고 나온 걸 텐데……!’
아무리 깨달음이 깊어져 기세가 달라졌다고 해도, 지친 상태로는 제 실력을 온전히 발휘하기 힘들다.
더군다나 지금은 개화식을 치르기 닷새밖에 안 남은 상황에서 자칫 다치기라도 했다간 큰일이었다.
그래서 서둘러 홀커스를 붙잡으려 나서려는데-
그때, 웰링턴은 볼 수 있었다.
테오가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화려한 장식의 검을 이쪽으로 겨누는가 싶더니.
파아아앗-
홀커스가 있는 방향으로 검을 거세게 휘두르는 것을.
제4 연무장을 압도하던 위압감이 한순간 하나로 뭉치는가 싶더니 마치 검이라도 된 것 같았다.
‘섬광……!’
순백색의 무언가가 번쩍였다.
웰링턴이 인식한 건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푸화악-
“대체…… 무엇을 한……?”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된 홀커스가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경악에 찬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우측 어깨에서부터 좌측 허리까지. 사선으로 쭉 그어진 혈선을 따라 핏물이 짙게 번져 나오고 있었다.
그가 들고 있던 클레이모어도 반 토막이 난 채로 땅바닥에 구르는 중인 상태.
‘언제……?’
웰링턴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레이도 눈을 크게 뜨는 동안.
“으아아아!”
홀커스는 도저히 이 상황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괴성을 내뱉으면서 다시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시끄러워.”
어느덧 코앞까지 접근한 테오가 예검의 손잡이로 그의 관자놀이를 세게 후려쳤다.
빠아악!
홀커스는 어떻게 말도 못하고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다.
쿵-
그만한 덩치가 뒤로 넘어가니 연무장이 들썩이는 것 같았다.
‘하, 한 번도 테오 공자의 움직임을 보지 못했어. 홀커스에게 접근할 때까지도.’
마치 산보라도 나온 것처럼 가벼운 발걸음.
웰링턴은 물론, 추종자 무리며 젠킨스 일당까지 모두 강한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흑웅’이 졌다고……?”
“북부 4준이 지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몇 달 전에 테오와 웰링턴이 대련을 치르기도 했었지만.
대련은 대련일 뿐.
사람들은 그걸 ‘진짜’ 승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소문이 과장되거나, 진짜였어도 웰링턴이 테오를 위해 어느 정도 패널티를 안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누가 봐도 홀커스는 전력을 다해 테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에게 닿지도 못하고 치명상을 입은 채로 쓰러졌으니.
그것도 일격(一擊)이었다.
북방의 미래라던 천재를 단번에 쓰러뜨린 것이다.
당연히 그 여파도 컸으니.
테오는 계속하겠냐는 투로 레이를 바라봤다.
여차하면 그쪽으로도 예검을 휘두르겠다는 듯.
선홍색 안광이 강렬하게 빛났다.
레이는 자신의 검과 테오의 검을 물끄러미 번갈아 보다가.
“…….”
조용히 검을 도로 검집에 밀어 넣었다.
철컥!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