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태고룡의 유물 (1)
캬아아악!
졸지에 자다 말고 한쪽 눈을 잃게 된 레서 드레이크는 고통에 이리저리 몸부림쳤다.
쾅, 쾅, 쾅, 쾅!
힘이 얼마나 대단하던지 날뛸 때마다 동굴이 무너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요란하게 울렸다.
‘뇌에까지 박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얕았나?’
테오는 가볍게 혀를 차면서 앞으로 뛰었다.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지금은 사냥에만 집중할 때였다.
녀석의 눈덩이에 박힌 예검을 제외하면 남은 예검은 두 개. 각각 양손에 쥐고서 목덜미에다 교차시켰다.
터어엉!
하지만 목덜미의 비늘이 얼마나 단단한지 예리한 예검이 튕겨날 정도였으니.
‘이런……!’
크어어어-
레서 드레이크는 테오가 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거칠게 달려들었다.
[드래곤 피어가 전장을 지배합니다. 공포 상태가 적용되어 움직임이 10% 하락합니다.]
거기다 용종 특유의 용살기(龍殺氣)까지.
테오는 재빨리 양검을 안쪽으로 잡아당기면서 가까스로 레서 드레이크를 옆으로 밀쳤다.
‘놈의 비늘이 너무 단단해서 검이 들어가질 않아. 그럼 비늘과 비늘의 틈새를 노려야 해.’
위험천만한 상황에서도, 라그나르의 기민한 전투 감각은 테오가 어디로 움직여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머리와 몸통을 잇는 아래쪽 목 부위.
흔히 역린이라고도 불리는 곳.
테오가 빠르게 몸을 회전시키면서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 다시 지면을 거세게 밟았다.
‘일섬.’
파아앗-
다시 한 번 더 오른손에 들고 잇던 예검이 순백색의 궤적이 되어 드레이크의 목덜미를 찔렀다.
푸우욱-
이번에는 살갗을 꿰뚫는 감각이 손끝에 느껴졌다.
“그럼 이어서……!”
테오는 하나 남은 예검을 사선 방향으로 크게 회전시키면서 레서 드레이크의 왼쪽 눈을 깊게 갈랐다.
<비전 검술 – 용의 세 이빨>
이번에는 기존에 익혔던 비전 검술들을 이용한 일섬이었다.
단, 찌르기가 아닌 베기의 방식.
촤아아악!
레서 드레이크의 남은 눈이 폭죽처럼 터졌다.
<비전 검술 – 광대의 발놀림>
콰아아앙!
테오가 드레이크의 꼬리가 작렬한 자리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벗어났다.
역시나 비전 검술을 활용한 신법.
그의 실력은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쿵쿵쿵쿵……!
용의 심장이 거칠게 뛰면서 마구 분비되는 아드레날린에.
테오가 한껏 크게 웃었다.
* * *
최근 들어서.
시빌을 비롯한 테오의 추종자 무리는 자신들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체감하고 있었다.
“이봐, 시빌.”
“왜?”
“사람 또 늘었다.”
“그러네. 이 정도면 연무장을 바꿔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
시빌은 꼭두새벽부터 제4 연무장을 꽉 채운 인파를 보면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 역시 최근 들어 생긴 현상.
전부 테오가 새벽마다 제4 연무장에서 훈련한다는 소문이 돌자 찾아온 인파들이었다.
모두 테오와 검을 겨루고자 하는 사람들.
테오가 가주의 일검을 사사받았다고 하니, 그 실력을 확인하고 싶어서 찾아온 것이다.
문제는.
“제발 이번에는 문제 일으키는 놈들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찾아오는 사람들이 하나 같이 인성이 안 좋다는 점이었다.
테오를 눈 아래로 보기 때문일까?
그들은 테오를 꺾어서 자신들의 위상을 올릴 생각만 하지, 절대 테오와 어울릴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그러니 테오를 따르는 무리를 ‘떨거지들’ 취급하기 바쁘고, 사사건건 시비와 갈등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만약 이블린이 없었다면?
아마 하는 꼬락서니가 더 볼만 했을 거다.
그러니 이번에는 제발 정상적인(?) 녀석들만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테오 님은 요새 통 왜 이렇게 안 보이시는 거야?”
그때, 누군가 던진 질문에 시빌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게. 이제 개화식까지 닷새밖에 안 남았을 텐데.”
“그렇지.”
“단 하루도 안 빠지시던 분이 그러니 괜히 걱정되네. 개인 훈련에 집중하시느라 그런가? 이블린 님한테 따로 들은 건 없지?”
“없어.”
“으음……. 아무 일도 없으셔야 할 텐데.”
개화식이 얼마 남지 않다 보니, 윈터러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긴장감으로 별의별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었다.
그러니 테오에 대해서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건데.
-며칠을 기다렸는데 왜 코빼기도 안 비치는 거야.
그러던 중에 시빌과 동료들의 귓가로 테오에 대한 호박씨가 들렸다.
아니, 그냥 호박씨는 아니었다.
아예 남들더러 들으라는 듯이 대놓고 비아냥대고 있었으니.
-그러게 말이다. 여기 계속 있으려니 나까지 좀이 쑤시는데.
-그야 여기 보이는 면면들을 봐라. 안 그러고 배기겠나.
-흐흐. 그것도 그래?
몇몇이 깔깔 터뜨리는 웃음소리에 테오를 보러 왔던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나머지는 인상을 굳혔다.
“저 새끼들이 진짜……!”
발끈한 상태로 나서려는 시빌의 팔을 에오드가 붙잡았다.
“야, 가만히 있어. 전에 이블린 님이 하신 말씀 못 들었어? 개화식이 다가올수록 테오 님의 명성 깎아내려는 개수작들이 있을 거라는 말? 잠자코 있어.”
시빌은 이를 악물었다.
“그럼 저걸 그냥 두고 봐?”
“그냥 우리한테만 하는 말이잖아. 하루 이틀 듣는 것도 아니고 왜 그래?”
“제기랄.”
시빌이 화를 삭이면서 겨우 진정하려는데.
-그런데 사실 한 번씩 그런 생각도 든단 말이지?
-무슨 생각?
-그 소문, 진짜일까? 가주님의 일검을 받았다는 거. 사실 따지고 보면 제대로 본 사람도 없잖아?
-에이, 그럼 설마 거짓말이려고?
-그야 거짓말은 아니겠지. 하지만 소문은 얼마든지 과장될 수 있는 거잖아?
-응? 그것도 그러네? 그럼 안 나타나는 건 실력 뽀록날까 봐 숨는 거다?
-우리가 무서운 거지.
-오, 말 되는데? 낄낄낄! 겁을 잔뜩 드시고 숨는다는데 끌고 나오는 것도 우습고. 어렵다, 어려워.
시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건 아예 대놓고 테오를 무시하는 꼴이었으니까.
그래서 에오드 쪽을 돌아보는데.
“엥?”
에오드가 없다?
어디 갔나 싶어서 주변을 둘러본 순간, 볼 수 있었다.
낄낄 때며 웃던 놈들에게로 날아 차기(?)를 하는 에오드의 모습을.
퍼어억-
“커헉!”
가만히 있다가 머리통이 걷어차인 녀석이 볼썽 사납게 튕겨나고 말았다.
“헤, 헨리!”
“이런 미친놈이!”
“이 낙오자 새끼가 뭐 하는 짓이야!”
조금 전까지 같이 낄낄대던 이들이 일제히 검을 뽑으면서 에오드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저 미친 새끼가. 나한테는 침착하게 굴라더니, 지는.”
잠시 깜빡하고 있었다.
사실 에오드는 추종자들 중에서도 가장 극렬한 테오‘빠’라는 사실을.
테오를 무시하는 소리를 들으니 아예 눈동자가 뒤집힌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저 못난 친구 녀석을 모른 척할 수는 없는 일.
“전부 칼 뽑아!”
스릉! 스르릉!
시빌의 지시대로 추종자들이 일제히 검을 뽑으면서 에오드 주변으로 몰렸다.
졸지에 제4 연무장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고 말았다.
“감히 테오 공자님을 무시해? 이 새끼들이 뒈지려고!”
“공자님보다 면상도 걸레짝 같은 새끼들이!”
“……야, 얼굴 이야기 하지 마라. 우리도 좋은 건 아니잖아.”
“그래도 우리는 평균이 되잖아, 평균이! 저것들은 아니고!”
“그래. 테오 공자님을 합치면 평균값이 올라가긴 하지…….”
“하여간 저 새끼들 하는 꼬락서니 맘에 안 들었어.”
“밟아!”
와아아-
우렁찬 함성과 함께 패싸움이 시작되려던 바로 그때였다.
콰아앙!
갑자기 두 패거리 사이로 검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
“……!”
연무장이 흔들릴 정도로 강렬한 파괴력.
사람들은 전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되어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무덤처럼 바닥에 꽂힌 검의 손잡이 위.
웰링턴이 팔짱을 낀 채로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웰링턴 공자!”
아군을 만난 시빌 등 추종자들의 얼굴에 환희가 어리고.
“나, 나르시오 소가주……!”
강자를 만난 것에 상대편 패거리는 마른 침을 삼켰다.
-나, 나르시오 소가주가 테오 공자와 친분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지, 진짜였나……?
-요즘에는 보이지 않아서 거, 걱정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필……!
-제기랄, 이거 일이 꼬인 거 아냐?
웰링턴은 최근에야 이름을 각광 받기 시작한 테오와 다르게 원래 천재라 불렸던 인물.
게다가 나르시오 소가주라는 직위는 결코 낮은 것이 아니었다.
패거리들은 서로 간에 재빠르게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나르시오 소가주는 사람이 좋기로 유명하지 않아? 잘 이야기하면 되지 않을까?
-맞아! 오해가 있었다고 말한다면 어떻게든 될……!
그들은 어떻게든 웰링턴을 설득하려 했지만.
“다들 라그나르의 계승권자에 대해 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리다가 오른팔 여러 개가 날아갔다는 말을 아직 못 들었나 보지?”
그들을 내려 보는 웰링턴의 시선은 아주 차가웠다.
“오,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르시오 소가주.”
그때, 패거리의 우두머리인 젠킨스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웰링턴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오해?”
“그, 그렇습니다. 저희는 어디까지나 테오 공자님의 실력이 궁……!”
“가주님의 일검을 받았다는 걸 제대로 본 사람이 없다, 소문은 얼마든지 과장될 수 있다, 실력이 들킬까 봐 숨는 거다…… 이 말 어디에서 오해가 있다는 거지?”
“……!”
처음부터 전부 다 듣고 있었다고?
젠킨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이래서는 변명거리도 없었으니까.
“더 이상 변명할 거리가 없다면 똑같이 팔 한 짝씩 거둬가는 걸로 끝내도록 하지.”
“자, 잠……!”
젠킨스와 패거리가 뭐라고 소리치기 전에 웰링턴이 바닥에 내려와 검을 뽑았다.
쐐애액-
갑자기 웰링턴 앞으로 길쭉한 검신을 자랑하는 에페(Épée)가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차아아앙!
웰링턴은 몸을 그쪽으로 비틀면서 에페를 위로 쳐올렸다.
에페는 빙그르르 허공에서 회전하다가 근방에 있던 나무 위에 조용히 떨어졌으니.
그곳에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을 한 여인이 앉아 에페를 회수하고 있었다.
“레, 레이 님!”
순간, 그녀를 본 젠킨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네가 여기는 무슨 일이지, 레이 라그나르?”
반면에 웰링턴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설빙검’ 레이 라그나르.
당대 열다섯 살 라그나르 중에서 악시온과 함께 가장 촉망받는 천재.
‘구음절맥’이라는 저주를 딛고 일어서서 검을 쥐게 된 그녀의 명성은 북방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외부에는 전혀 관심도 두지 않는다는 그녀가 여긴 왜?
문제는 그녀만 나타난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콰아아앙!
레이가 있는 반대쪽.
마치 포탄이라도 날아든 것처럼 엄청난 폭발과 함께 먼지 기둥이 치솟았다.
그곳에는 앳된 얼굴과 다르게 190센티미터는 될 듯한 체구에 우락부락한 근육을 지닌 남자가 있었다.
“홀커스 랑케까지?”
랑케 가문은 나르시오, 하나비와 함께 6설가에 꼽히는 기수 가문.
북극곰처럼 거대한 체구와 완력으로도 유명해 ‘북곰 가문’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했다.
홀커스는 그런 랑케 가문의 둘째 아들로, 역시나 이번 개화식에서 큰 두각을 드러낼 것이라 기대되는 천재였다.
“크하하하! 이거, 이거, 이렇게 재미있을 것 같은 자리에 나만 쏙 빼놓으면 쓰나! 다들 너무하는구만?”
홀커스는 흉악하게 웃으면서 웰링턴과 웰링턴을 돌아봤다.
그럴수록 웰링턴의 표정은 더욱더 딱딱하게 굳었다.
레이에 이어 홀커스까지.
그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제4 연무장에 나타난 게 절대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웰링턴, 악시온, 레이, 홀커스.
북방에서는 이들 네 명을 가리켜 따로 부르는 별명이 있었다.
-북부 4준.
북방의 미래를 대표하는 네 명의 준재들이라고.
악시온을 제외하면 셋이나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개화식을 준비하기도 바쁜 녀석들이 움직였다는 건, 분명히 어떤 꿍꿍이가 있다는 뜻.
웰링턴은 도저히 그게 무엇인지 짐작이 가지 않아 바짝 긴장했다.
여차하면 두 사람을 상대하겠다는 듯 검까지 움켜쥐면서.
하지만 정작 레이는 웰링턴의 경계를 받고도 그에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주변을 빠르게 살피면서 다른 사람을 찾을 뿐.
“어디 있지?”
“뭐가?”
“섬호(閃虎).”
“섬호……?”
“여기 연무장 주인.”
웰링턴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섬호’라는 단어가 테오를 가리키는 별호라는 사실을.
‘그새 별호가 생기셨구나.’
몰랐다.
그도 그동안 개인 훈련에만 집중하느라 바깥일은 전혀 신경 쓰지 못해서.
그런데 섬호라?
섬광처럼 번뜩이는 호랑이란 뜻이다.
어쩌면 테오에게 이만큼 어울릴 만한 별호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지었을까?
“테오 공자는 왜?”
“개화식 전에 승부를 보고 싶어서.”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