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잠룡은 이제 기지개를 켠다 (5)
‘대장님의 말씀이 맞았어.’
이블린은 테오와 검을 나누면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분이 갖고 계신 재능은 단순히 검술에만 있는 게 아냐.’
‘적도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매력, 그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카리스마, 심장을 뛰게 만드는 열기, 열망, 갈망…… 모든 걸 갖고 계신다.’
그런 걸 모두 갖고 있는 사람을 가리켜 보통 이렇게 부른다.
-가주.
‘가주의 그릇…….’
한낱 일개 검사에 불과한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부터가 건방진 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블린은 정말 그렇게 믿고 있었다.
‘어쩌면…… 천 년간 고여서 썩어가는 가문을 통째로 바꾸실 수 있을지도 몰라.’
혹자는 말한다.
라그나르가 현재 품고 있는 전력은 고금을 통틀어 역대 최강이라고.
실제로 라그나르가 마음만 먹는다면 북방에는 새로운 제국이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천 년이 넘게 이어져 오면서 쌓인 정통성,
북방 주민들의 깊은 신뢰도,
마해의 괴물들과 싸우면서 단련된 실전 능력과 최신 전술,
남들은 ‘저주 받았다’고 말할 정도로 뛰어난 육체적 능력,
그리고.
그 뒤를 떠받칠 6설가까지.
그러다 보니 라그나르는 고이다 못해 이제 썩어가고 있었다.
도처에 악취가 풀풀 날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블린도…… 바로 그런 악취의 희생양 중 한 명이었다.
그토록 사랑하던 고삐를 놓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기던 검을 함에다 넣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블린은 다시 검을 꺼내 이 손에 쥐었다.
비록 이제는 하나뿐인 팔이었지만.
그래서 무게 중심도 맞지 않아 예전의 실력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이블린은 믿고 싶은 곳이 있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더 혹독하게 몰아붙일 필요가 있겠지만.
콰아아앙!
쿠르르-
“하아…… 하아……!”
“후우…… 후우……!”
이블린 내지른 검격에 저만치 뒤로 밀려난 테오와 웰링턴이 보였다.
온통 땀으로 흠뻑 젖은 두 사람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이 위태로웠지만, 두 눈만큼은 다른 어느 때보다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절대 지지 않겠다는 승부욕이 보였다.
그래. 이거지.
검을 들었다면 당연히 저런 자세부터 가져야 하지 않겠어?
‘그럼 더 몰아붙여 볼까?’
히죽-
이블린은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도록 웃었다.
“다시 제대로 막아보십시오. 이대로면 테스트는 실패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면서.
타다닥!
이블린은 다시 지면을 박찼다.
4년 만에 맛보는 감각이 이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 * *
분명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햇볕이 제대로 들지 않는 곳.
어느 중년인은 시종이 건넨 서류를 보고 코끝에 걸려있던 안경을 고쳐 썼다.
“이게 ‘그놈’에 대한 자료라고?”
“예. 그렇습니다.”
“좋아. 이만 나가봐.”
중년인은 가볍게 손사래를 치면서 손에 들린 것들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거기엔 최근 들어 테오와 율리우스, 그리고 이블린이 만나 담소를 나누는 사진이 찍혀 있었다.
“장미궁의 병신 새끼가 백갑용기대장과 만난다……? 하, 출세했군. 출세했어.”
테오를 바라보는 중년인의 시선에 담긴 감정은 딱 한 가지였다.
경멸.
시궁창의 들쥐라도 보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렇게 쉽게 여길 만한 사안이 절대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바로 그때, 머리 위에서 메아리처럼 울리는 목소리에 중년인의 인상이 살짝 굳어졌다.
그가 고개를 든 곳.
천장에 맺힌 그림자에서부터 용의 머리가 불쑥 아래로 튀어나왔다.
“내 허락 없이 함부로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샤튼?”
그림자 용.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용종(龍種)들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외양과 특징을 자랑한다는 용.
이제는 남아있는 개체수가 100여 마리도 되지 않아 멸종 위기 판정까지 받았다는 이들의 수장이 바로 샤튼이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외부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극비 사항.
때문에 샤튼은 늘 그림자 속에 둥지를 틀고 살아야 했고, 평소 이에 대한 불만이 아주 가득했다.
「여긴 답답하다고. 언제까지 들쥐처럼 숨어만 있으라는 거야? 난 좀 더 날뛰고 싶다고!」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그놈의 때, 때, 때……. 때가 아주 벗겨지겠어, 응?」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하고. 그보다 쉽게 여길 사안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무슨 뜻이긴. 말한 그대로지. 거기 사진에 있는 다른 한 명 보여?」
중년인은 사진 속에 있던 이블린을 보고 눈살을 좁혔다.
“이 팔 병신 여자를 말하나?”
「응. 걔.」
“이 자가 누군데?”
「이블린 네레빌이라고, 제4 연무장의 관리자야.」
“그런 여자를 굳이 내가 알 필요가 있나?”
「그래도 명색이 전직 백갑용기대의 상급검사 출신이거든.」
“음……?”
「한창 활동하던 시절에는 백갑용기대장의 오른팔이라는 소문도 자자했었고.」
중년인은 기억 한편에 처박아뒀던 ‘사소한’ 기억 중 하나가 떠올랐다.
어느날, 율리우스가 원로원에 다짜고자 쳐들어와서는 원로원을 한바탕 뒤집어엎고, 몇몇 원로들을 묵사발로 만들어버렸던 사건.
평상시 너무 예의 발랐던 율리우스가 저지른 사고였기에 그만큼 파장력은 엄청 났다.
최소 전치 12주의 부상을 입은 원로들은 당장 율리우스에게 징계를 가해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원로원은 최종적으로 그 일은 불문에 붙이기로 결정했다.
율리우스에 대한 가주의 신임이 워낙에 큰 데다가, 일개 부대장에게 원로원이 쑥대밭이 되었다는 사실이 외부에 발표되어서야 원로원의 권위만 실추되기 때문이었다.
‘그때 용기대장이 날뛰었던 이유가 어느 한 여자 때문이라고 했었지, 아마……?’
「이제야 떠오르나보네.」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하여간 이 여자가 왜?”
「그 여자,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장미궁의 병신 새끼랑 같이 붙어있거든.」
“뭐?”
「보아하니 검술 스승이라도 된 것 같던데?」
“……백갑용기대장의 옛 충견과 병신 새끼가 사제 관계가 되었다?”
「빙고. 한 석 달쯤 됐을걸?」
중년인의 얼굴이 고민에 잠겼다.
이게 사실이라면 결코 쉽게 넘길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테오와 백갑용기대가 정말 손을 잡은 것이라면, 장미궁을 손에 넣으려는 그의 계획이 잔뜩 꼬이기 때문이었다.
백갑용기대는 가문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기에 중년인으로서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곳이었으니.
‘렌던……. 그 멍청한 놈도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뒈져버려서 일의 순번이 꼬였었는데, 또 꼬이게 생겼다면?’
툭.
툭.
중년인은 한참 동안 검지로 책상을 두들겼다.
고민이 깊어질 때면 나타나는 그만의 버릇이었다.
「아, 이 소식도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는데.」
“또 뭐가 있나?”
「나르시오 있잖아? 거기 소가주와도 요즘 잘 어울리던데?」
중년인의 고민은 거기서 끝났다.
“내 예측에서 벗어나는 변수들은 두고 싶지 않은데. 안 되겠군. 일단 한 번 확인을 해봐야겠어.”
「오, 또 무슨 음모 꾸미는 거야? 뭔데? 뭔데뭔데? 나도 좀 말해줘!」
중년인은 샤튼이 난리를 치건 말건 간에 조용히 종이를 꺼내 만년필로 무언가를 끄적이고는 고이 접어 봉투에 넣었다.
-친애하는 장미궁주께.
중년인은 그렇게 적힌 봉투에 밀봉까지 끝내면서 말했다.
「또 시작이네! 그거 좀 말해주면 어디 덧나……!」
“샤튼.”
「오! 드디어 말해주는 거야?」
“앞으로 한 달 간 근신이다.”
「그, 그, 그게 무슨 소리……!」
“그동안 내 허락 없이 밖으로 잘도 싸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많이 주워들은 모양인데, 거기서 머리 좀 식히고 있도록.”
「자, 잠깐만 주인아! 주인? 내 말 좀 들으……! 야! 야아아아아!」
샤튼이 난리를 치거나 말거나.
중년인은 편지를 들고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 * *
지난 석 달간, 테오의 일정은 오로지 훈련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오전 6시 정각만 되면 어김없이 제4 연무장에 나타나 달리기를 하고,
9시부터 이블린과의 기초 검술 훈련, 12시부터 연속 대련을 했다.
첫날 테오와 대련을 하지 못했던 이들이 이튿날 찾아오고, 또 그 날 대련하지 못했던 이들이 다시 사흘째에 찾아오면서,
나흘, 닷새, 엿새를 넘어 석 달 동안 이어진 연속 대련은 이제 제4 연무장에만 있는 일종의 문화처럼 굳어 버렸다.
그들은 테오와 뭔가를 같이 하는 걸 좋아했다.
체력 단련, 검술 훈련, 연속 대련까지 전부.
테오와 대련을 하지 못할 때면?
그들끼리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대련을 하기도 했으니.
여기다 이블린까지 조언을 더해주면서.
언젠가 ‘낙오’되었다고 알려진 그들의 실력이 조금씩 증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단체 일정이 끝나고 저녁이 되면 개인 일정이 시작되었다.
오후 6시부터는 그날 있었던 것들에 대한 복기를,
9시부터는 깨달은 바를 통한 비전 검술 탐독을 시도했다.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훈련에서 휴식 시간은 거의 들어있지 않았다.
그 때문일까?
처음에는 테오가 하는 일에 많은 관심을 보이던 웰링턴은 한 달도 채 가지 않아 질린 얼굴이 되고 말았다.
“힘들지 않소?”
오늘도 마찬가지.
대련까지 모두 끝나고 난 뒤, 웰링턴은 연무장 바닥에 대(大)자로 뻗어버렸다.
훈련이 혹독하기로 유명한 나르시오 가 출신의 그도 많이 힘든 모양이었다.
“할 만합니다.”
“이게 ‘할 만’하다고……?”
“예. 그래서 내일부터는 강도를 좀 올릴까 합니다만.”
“……더?”
“더.”
“……내 장담하건대, 테오 님 같은 괴물은 어디에도 없을 거요.”
테오는 반쯤 얼이 빠진 웰링턴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사실 그도 웰링턴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실시간으로 강해지는 게 보이는데 힘들 리가.’
+
테오 라그나르 (15세/남)
· 레벨: 1
· 능력치(▼)
근력: 18 민첩: 16
체력: 17 마력: 195
지능: 16 운: -35
· [열람 불가]
· [열람 불가]
+
[운]을 제외한 다른 다섯 개의 능력치는 벌써 총합 20여 개나 오른 상태.
[운]도 그동안 많은 폭으로 깎을 수 있었다.
‘[마력]도 1년치 양이나 늘었어. 대략 계수 5가 1년치라고 보면 될 것 같은데.’
테오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문제는 이런 것들이 전부 요즘은 정체기란 말이지.’
최근 테오가 고민되는 부분이 바로 이 점이었다.
약 보름쯤 되었을 것이다.
더 이상 능력치 계수가 오르지 않기 시작한 것이.
아무래도 똑같은 훈련법이 더 이상 성장을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른 무언가가 필요한 것 같은데.’
+
[튜토리얼 퀘스트 #11]
실전을 경험하세요.
· 난이도: D
· 보상: 비기너의 상의
· 실패시: ■■
+
‘그동안 오러홀도 개방하고 훈련도 열심히 했으니 이제 직접 칼을 맞대고 싸우라는 건가?’
테오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하지만 그러려면 윈터러 밖으로 나가는 임무라도 맡아야 할 텐데.
당장 개화식을 앞에 두고 있는 테오는 현재 외부 출입 금지령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게 아니면……!’
굳이 임무가 아니어도 렌던 때와 비슷한 상황이면 싸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던 그때였다.
“……해서 테오 님을 그 모임에 초대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테오는 웰링턴이 던진 질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죄송합니다. 다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딴 생각을 하고 계셨나 보군.”
“이따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거기에 정신이 잠깐 팔렸습니다.”
“괜찮소.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었으니. 개화식도 이제 두 달밖에 안 남지 않았소? 해서 이번에 개화식에 참여하는 또래들끼리 친목도 도모할 겸 해서 모임을 가질까 하오. 테오 님도 거길 참석해 빛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고.”
‘친목회? 아, 교룡회(蛟龍會)를 말하는 거구나.’
교룡은 물속에 깊이 잠들어있는 용을 뜻하는 단어로, 테오가 개화식을 치르던 해에 처음으로 결성된 모임의 별칭이기도 했다.
웰링턴을 포함해 테오의 또래에는 천재들이 가득하다.
오죽하면 라그나르에서는 ‘축복받은 세대’라고 하고, 그들 앞뒤의 세대들은 ‘저주받을 세대’라고 할까?
실제로 단순한 사교 모임으로 시작했던 교룡회는 나중에 라그나르의 중대사를 좌지우지할 만큼 막대한 권한을 얻게 된다.
오죽하면 원로회에서도 그들을 경계하여 어떻게든 분열시키고자 애썼을까.
하지만 테오는 거기에 발길도 붙이지 못했다.
애당초 재능도 자격도 안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 생애에는 같이 참석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대체 이게 무슨 아이러니인지.
‘확실히 이들과 친분을 맺어두면 여러 모로 도움이 되긴 할 거야. 개화식 전에 부딪쳐 볼 만한 놈들의 실력도 확인해볼 수 있을 거고.’
하지만 그게 정말 제대로 된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어차피 승냥이들만 가득한 곳, 가봤자 머리만 아파질 텐데.
테오의 기억으로 전생에서는 웰링턴도 나중에 머리를 싸매면서 빠져나왔던 걸로 기억했다.
‘그래. 거절하자. 오늘 얻은 심득도 정리해야 하고.’
“저도 다녀오시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수련만 하고 사시는 것도 안 좋습니다. 한 번씩 머리도 식혀야죠.”
갑자기 여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이블린이 끼면서 웰링턴에 힘을 실어주었다.
테오가 난감하다는 듯 검지로 관자놀이를 긁던 그때였다.
‘이건……?’
파아아-
웰링턴이 건네려던 초대장이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메시지 창과 똑같은 빛으로.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