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9화 (9/224)

9화

잠룡은 이제 기지개를 켠다 (4)

감시꾼들은 현재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분명히 검이 부러진 건 테오 쪽이었다.

실력이나 힘에 있어서 그만큼 차이가 있었다는 뜻.

그런데도 웰링턴이 패배 선언을 했다?

혹시 테오가 앞선 결투로 지친 상태라, 겸양의 뜻으로 저런 반응을 하는-

“그게 아니잖아. 이 멍청이들아.”

감시꾼들의 생각은 갑자기 뒤쪽에서 들린 목소리에 깨지고 말았다.

황급히 시선들이 뒤로 돌아갔다.

저벅. 저벅.

“이블린 관리장……?”

그녀를 알아본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평상시 그들이 알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몸맵시가 드러나는 하얀 정복.

어깨에 달린 견장이 아름답게 반짝이고, 용이 새겨진 금단추가 당장이라도 불꽃을 뿜을 것 같았다.

걸음걸이를 옮길 때마다 허리춤에 매단 레이피어가 절도 있게 철그럭 소리를 냈다.

텅 빈 왼쪽 소매가 들썩였지만, 그 모습이 더 우아하고 기품이 가득 넘치는 것 같았다.

백갑용기대의 선임 급에게만 지급된다는 백색예복.

감시꾼들은 이 순간 이블린이 풍기는 기도에 완연히 압도된 상태였다.

라그나르의 검사라면 누구나 바라마지 않는 우상이 바로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만약 저기에 마력을 실을 수 있었다면? 오러를 덧씌웠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나?”

감시꾼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이블린의 시선은 여전히 연무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도 모르겠다면 그냥 어깨 위에 올려둔 건 버리고.”

이블린은 감시꾼들을 지나쳐 테오와 웰링턴 쪽으로 다가갔다.

감시꾼들은 그제야 말뜻을 깨닫고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테오와 웰링턴의 충돌은 분명히 ‘동시’였다.

하지만 검의 린치가 문제였다.

테오의 츠바이핸더가 웰링턴보다 훨씬 길었던 것이다.

그리고 웰링턴은 그 거리 안에 들어와 있었다.

거기다 무게까지 고려해본다면?

주르륵!

순간, 그들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츠바이핸더를 가지고도 저런 속도를 낸다고?’

‘그것도 쾌검으로 유명한 나르시오에 버금갈 정도로?’

‘마력까지 쓸 수 있으면 대체 얼마나 더 빨라진다는 거지?’

감시꾼들은 그제야 테오가 괴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소문에 거짓말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소문이 더 부족하다!

그런 생각이 동시에 스쳤다.

그리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검이 부러진 것은 제 쪽인데요. 제 패배입니다. 좋은 승부를 나눌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테오가 검례를 갖추며 고개를 숙였다.

여태 보여주었던 오만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절도와 기품으로 가득한 모습.

두근두근!

검사들의 원초적인 감정이 다시 그들의 심장을 거칠게 뛰게 했다.

테오와 웰링턴의 승부욕이 주는 열기가,

대결 후에 깔끔하게 서로를 인정하는 두 사람의 건전한 태도가,

강렬한 눈빛이,

어쩐지 그들에게도 저 속에 같이 어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언젠가 꿈에서나 바라던 검사들의 기사도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 * *

“테오 공께서 사용하던 검은 이미 여러 번의 대결로 상당히 낡은 상태가 아니었소? 더군다나 체력도 지칠 대로 지친 상태이셨으니, 이번 승부는 본인의 패배요.”

“눈 먼 칼과 화살이 날아드는 전장에서 누가 그런 사정들을 일일이 다 배려해준답니까? 검을 잃은 검사는 결국 패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졌네, 마네 하는 별 이상한 주제로 말싸움 아닌 말싸움이 오가는 동안.

테오는 총 열 번의 대련으로 얻은 성과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운]이 무려 10이나 오른 것이다.

다른 능력치들도 소소하게나마 오르면서 실력 증진이 이뤄졌지만.

‘역시. 난 아직 많이 부족해.’

한편으로는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웰링턴과 일합을 나누고 난 뒤, 자신의 약점을 확실하게 깨달은 것이다.

‘비전 검술들이 지닌 형(形)은 이제 얼추 외웠어. 연계나 응용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그 이상으로 넘어가질 못해.’

비전 검술들은 보통 크게 두 개로 나뉜다.

초식이나 구결을 담은 형(形).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의(意).

형은 말 그대로 형태이다.

멍청하지만 않다면 그걸 외우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몸에 숙달되었다면 구조에 변형을 주는 것도 가능하다.

그것이 바로 응용이다.

하지만 의는 달랐다.

달걀이 딱딱한 껍질 안에 가장 많은 영양소를 담은 노른자를 갖고 있듯이.

의에는 비전 검술의 모든 묘리가 총망라되어 있다.

이것을 깨우치지 못한다면?

그냥 수박 겉핥기밖에 되지 않는다.

테오가 도서관에서 가져온 비전 검술들은 모두 훗날 원로들도 감탄을 터뜨릴 정도로 뛰어난 것들이었다.

문제는 테오가 검술에 대해 그리 뛰어난 안목을 지니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이것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스승.’

테오는 마른 침을 삼켰다.

‘날 바른 길로 인도해주고 가르침을 줄 스승이 필요해.’

하지만 과연 자신에게 가르침을 줄 만한 스승이 있을까?

아니, 단언컨대 없다.

워낙에 그동안 ‘테오 라그나르’가 쌓은 이미지가 안 좋기 때문이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이미지를 바꿀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이들 역시 라그나르에서 도태되었던 낙오자들.

단순히 이들을 꺾는다고 해서 당장 좋은 여론을 형성하기는 어려웠다.

이건 시간을 길게 두고 천천히 진행해야 할 사안이었다.

그리고 설사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있다고 해도, 개화식 때문에 이미 다른 곳에 줄을 댔을 테지.

‘마음 같아서는 뉴위츠 스승님이라도 뵙고 싶지만…… 개화식이 끝날 때까지는 윈터러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몸이니 불가능해. 더군다나 그분은 무술을 이론으로만 접한 학자에 가깝지, 실전은 젬병이시니.’

무엇보다 그분은 5년 뒤에나 본격적으로 나타날 예정이니 아직은 만날 시기가 아니었다.

결국 이런저런 조건들을 제하면 딱 한 사람밖에 남지 않는다.

‘율리우스…….’

하지만 테오는 고개를 털었다.

여전히 자신을 좋게 봐주고 있으니 부탁한다면 들어주긴 할 것이다.

하지만 한 번 거절한 사람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건 도리가 아니잖나?

부탁을 할 거라면, 정말 백갑용기대에 들어갈 생각을 해야만 한다.

‘역시 그냥 깨우치는 수밖에는 없나.’

아직 개화식까지 다섯 달이나 남았고, 그동안 대련도 꾸준히 한다면 어떻게든 ‘의’를 깨달을 수 있을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던 그때였다.

“잘못 생각하고 계십니다. 부족한 건 ‘의’가 아니에요.”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 같은 목소리.

테오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뒤로 돌렸다.

정복 차림을 한 낯선 모습의 이블린이 서 있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차림이냐고 묻기도 전에 먼저 속에 든 다른 생각부터 튀어나갔다.

“내가 고민하는 걸 어떻게……?”

“그야 딱 이맘때쯤에 테오 님 같은 분들이 하시는 고민이란 게 다 거기서 거기잖습니까.”

“…….”

이건 칭찬일까, 아니면 면박일까?

피식.

이블린은 자신을 얼빠진 얼굴로 빤히 쳐다보는 테오를 보면서 가볍게 실웃음을 흘렸다.

“제가 무례를 저지른 것이라면 용서해주시길.”

“……아, 아냐. 그보다 자세히 말해줘.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게 뭐야?”

“테오 님은 ‘의’를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검술에 담긴 묘리가 아닐까?”

“그럼 묘리는 또 무엇일까요?”

“검술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

“그럼 그 추구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창안자의 목표?”

“그럼 또 그 목표는 무엇일까요?”

“…….”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가는 선문답.

테오는 언제부턴가 말문이 턱 하고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의’라는 것은 결국 검술의 핵심입니다.”

“핵심…….”

“하지만 그 핵심이라는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대단한 게 아닙니다. 누군가는 하늘의 푸르름을 담는다느니, 바다의 웅장함을 모방한다느니 하는 식으로 화려하게 포장합니다만, 결국 그것들의 모습은 휘두르고, 찌르고, 막고, 가르고, 베고…… 우리가 아는 것들의 단순 조합에 지나지 않습니다.”

테오는 그제야 이블린이 하려는 말을 깨달을 수 있었다.

-기본기.

갓 검술에 입문한 이들이나 단련할 법한 기본 동작들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것이다.

“테오 님은 신기하십니다. 기본기가 완벽하시지도 않은 분이 어째서인지 저도 처음 보는 비전들을 엄청 많이 알고 계시는 것처럼 보이시니까요.”

“…….”

“아, 물론, 그 비전들의 출처를 여쭙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순서가 잘못되었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블린의 눈빛은 고요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뛰는 법을 가르친다고 해서 제대로 뛸 수 있겠습니까? 아직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새끼 새에게 날갯짓을 가르친다고 한들 제대로 날 수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 압니다. 그래도 그동안 잘 대련해왔고, 문제가 없었다고 말씀하고 싶으시겠지요?”

끄덕.

“하지만 그거야 ‘라그나르’니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

“라그나르의 육체는 걷지 못하는 아이가 날 수 있도록 해주고,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아이에게 천적의 목을 물어뜯게 해주는 축복받은 육체입니다. 테오 님은 아예 물어뜯은 천적을 가지고 하늘을 날 수 있는 더 뛰어난 재능을 지니셨구요.”

그동안 재능에 기대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용의 심장에 의존했던 바도 컸겠지.

“그러니 더 그 재능에 기대기 전에 기본기를 바로 잡으셔야 합니다. 단단한 바닥을 다지셔야 더 높은 곳으로 올라도 밑이 걱정되지 않을 테니까요.”

테오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무언가 간질간질한 것이 잡힐 듯 말 듯 손끝에서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이걸 붙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역시 답은 하나 뿐이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든, 그릇된 판단을 내리고 있든 계속 나를 옆에서 바로 잡아줄 사람이 필요해.’

스승.

렌던 같은 사기꾼이 아닌, 진짜 스승이라 할 만한 사람.

이를테면.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과 같은-

“이블린.”

“예.”

“내 검술 스승이 되어 주지 않겠어?”

-헉!

주변에서 헛바람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감시꾼들이었다.

아무리 은퇴를 했다지만, 백갑용기대 출신에게 검술을 사사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영광이기 때문이었다.

한 발자국 떨어져 있던 웰링턴도 어느덧 이쪽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혹시 제 옷차림이 보이십니까?”

이블린은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

“으, 응? 아, 맞네. 혹시 백갑용기대로 돌아가기로 한 거야?”

“예. 이번에 임시로나마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전생과 현생을 포함해 이블린과 친분을 가진 적은 많았다.

하지만 그동안 그녀는 절대 자신의 과거사를 꺼낸 법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예 부대로 복귀까지 했단다.

나비 효과인 걸까?

하지만 자신은 아직 이렇다 할 과거를 크게 비튼 사건은 없을 텐데?

“그런데 임시라니?”

“말씀드린 그대롭니다. 대장님께서 조건을 거셨습니다.”

“조건?”

“예. 테오 님의 검술 스승이 되라고 하시더군요.”

“…….”

“지금쯤이면 테오 님께 가장 필요하실 거라고 하시면서요.”

“……!”

주변도 소란스러워졌다.

-무, 뭐야?

-백갑용기대원이 검술 스승……?

-그것도 그냥 대원이 아냐! 이블린 님! 대장님의 오른팔이었다던, 바로 그 이블린 님이란 말야!

-그럼 사실상 재스카웃 아냐?

-미쳤다……. 실화냐. 저 콧대 높은 백갑용기대가 두 번이나 러브콜 하는 남자라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개화식을 하기도 전에 개인 교습까지? 허!

-그런데 그럴 만하지 않아?

-하기야 웰링턴 님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라면…….

이제 테오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선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어쩐지 눈이 너무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은데.

‘율리우스…… 그 짧은 만남으로 여기까지 내다봤단 건가. 역시 난 사람은 난 사람이라는 걸까.’

“혹시 이게 일종의 조건인 거라면……!”

“아, 그런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장님께서도 이건 어디까지나 ‘호의’라고 하셨으니까요.”

“호의?”

“예. 투자라고 하시더군요. 미래를 위한.”

“…….”

테오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쯤 되니 율리우스의 생각을 도저히 알기 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굳이 이것까지 거부할 필요는 없겠지.

애당초 이블린을 검술 스승으로 삼고 싶었던 건 자신이었고.

“고마워. 그럼 염치 불구하고 부탁할게.”

“좋습니다. 그럼 검을 드십시오.”

“……어?”

“대장님은 대장님이고. 저는 저대로 테오 님이 저의 제자가 될 자격이 있는지를 테스트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어서 테오도 얼결에 츠바이핸더를 들었다가, 뒤늦게 검이 부러졌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럼 검이라도 바꾸……!”

“테오 님이 조금 전에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실전에 그런 건 다 변명일 뿐이라구요.”

“……!”

“일단 막아보십시오.”

쐐애애액-

‘빠르다!’

정말 몸이 불편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지난 몇 년 동안 검을 손에서 놓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빠른 섬광.

테오는 용의 심장을 있는 힘껏 쥐어짜 어떻게든 이블린의 움직임을 쫓았다.

그걸 막기 위해 츠바이핸더의 각도를 돌리려는 찰나.

쉿!

갑자기 테오와 이블린 사이로 웰링턴의 검이 불쑥 비집고 들어왔다.

차아아앙!

“검이 반쪽이니 남은 부분도 채워야 하지 않겠소? 때마침 내 검을 합치면 길이가 딱 될 듯한데.”

웰링턴이 힐끗 이쪽을 보면서 씩 웃어 보이고.

피식!

테오도 따라서 웃으면서 웰링턴을 쫓아 움직였다.

테오는 좌측에서, 그리고 웰링턴은 우측에서.

파아아앗-

쉬쉬쉭!

마치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발맞춰 움직이는 모습이 아주 날카로웠다.

“두 분 다 좋은 생각입니다.”

이블린도 갑작스러운 방해꾼의 등장이 나쁘지 않았던지, 오히려 감탄을 터뜨리면서 빠르게 맞대응해나갔다.

따다다다당-

순식간에 세 자루의 검이 허공에서 한데 어우러지면서 요란한 쇳소리를 정신없이 울려대고.

“와아아아!”

감시꾼. 아니, 이제는 테오를 인정하고 선망하다가, 아예 그 정도도 넘어서서 완전히 그가 내뿜는 열기에 동화되어버린 추종자들.

그들이 내뱉는 함성이 연무장을 한껏 들썩이게 만들었다.

그럴수록.

쿵쿵쿵쿵!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심장도 덩달아 거칠게 뛰었다.

[축하합니다! 튜토리얼 퀘스트 #8을 무사히 완수…….]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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