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307화
“…….”
말없이 석상을 바라보는 배교자.
자신의 말을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세훈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었다.
“신성력이 은혜의 권능에서 파생된 힘이라는 걸 들었을 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
“신과 인류의 소통을 도와 신성력을 만들어낸다. 순례교인에 한해서는 그럴싸하지만, 나랑 너는 경우가 다르니까.”
순례교의 교인들은 신, 황금의 고리를 초월적인 존재로 여기며 기적을 ‘간청’하는 것으로 신성력을 사용한다.
그렇기에 그것은 소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세훈이나 배교자는 경우가 달랐다.
“나는 신을 인정하되 기계처럼 자아가 없는 존재로 여겼고, 너는 그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고 있지. 그런데 어째서 신성력과 유사한 힘이 내려질까.”
대답 없는 배교자를 바라보며 이세훈이 자신의 추측을 담담이 이야기했다.
“그건 신성력의 근원이 은혜의 권능이기 때문이야.”
칼은 은혜의 권능이 신과 인류를 연결시켜주는 송신탑과 같은 것이며 신성력은 신이 내려주는 힘이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선악의 구분 없이 무분별하게 힘을 흩뿌려대는 그 거대한 존재가 개미나 다름없는 인간에게 그만큼 정확하게 힘을 ‘배분’할 수 있는가.
이세훈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칼이 중재한다면 다르겠지.’
신보다 자비롭고 인간적이며 초월적인 힘을 가진 존재가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신의 힘을 인류를 위해 정제한다.
그 거름망의 역할을 하는 것이 은혜의 권능이었고, 이세훈과 배교자의 신성력이 다른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나는 신의 힘을 직접 사용하려고 했기에 은혜의 권능과 유사한 신력을 얻었고, 배교자는 칼을 신으로 추종하면서 은혜의 권능 그 자체에 힘을 받게 되었다.’
간단히 비유하자면 이세훈은 가공되지 않은 원액을, 순례교의 교인들은 깨끗하게 정제된 물을, 배교자는 거름망에 남은 찌꺼기를 사용한다.
그것이 황금색과 회색, 검은색의 신성력들이 가지고 있는 차이점이었던 것이다.
“넌 십악에 다다를 만큼 교주님을 숭배하고 있어. 순수하게 믿음으로만 보면 다른 대주교들과는 비교도 안 되겠지.”
“…….”
“그래서 이해가 안 가. 그렇게까지 숭배하면서 왜 교주님을 미워하고 죽이려는 거지? 네 신앙은 도대체 뭐야?”
지금 이세훈의 질문은 사실상 배교자의 심상을 물어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심상이란 모든 기술의 근원이 되는 뼈대.
비전이나 약점이나 다름없었기에 타인에게는 쉽게 말해주지 않았으며 적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세훈이 배교자에게 물어본 이유는 간단했다.
“……16년 전.”
그것을 숨김없이 말하는 것이 ‘전도’였기 때문이다.
“고향이 몬스터에게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그곳으로 향했었다.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은 모두 그곳에 있었으니까.”
만마전과의 냉전으로 넘어가기 직전. 그때만 해도 배교자, 막스 싱클레어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B급 영웅이었다.
“하지만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지. 고향사람들은 모두 죽었고, 부모님과 친구들은 시체도 찾을 수 없었다.”
우웅
배교자의 이야기가 계속되면서 성당의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들이 크게 일렁이며 다른 풍경을 비추기 시작했다.
불타오르는 마을과 상처 입은 청년.
배교자의 기억이 성역의 힘으로 이세훈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남은 몬스터들에게 공격받아 죽어가던 그때. 그자가 내 앞에 나타났었지.”
막스의 앞에 나타나 주변을 둘러싼 몬스터들을 학살하는 황금빛을 두른 사내. 얼굴이나 복장 모두 흐릿하게 보였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병원이었고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처음에는 꿈이라도 꾼 건가 싶었지만, TV를 통해서 그게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일곱 번째로 완등에 성공한 순례자 칼 안데르센.
그 존재가 전 세계에 널리 퍼졌고, 막스는 무턱대고 그를 찾아가 제자로 받아달라고 간청했었다.
만마전에게 복수하기 위해선 강한 힘이 필요했고 막스가 직접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칼이었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칼은 미소를 지으며 막스를 제자로 받아들였고, 그날 이후 두 사람은 하루도 쉬지 않고 전장을 떠돌았다.
적을 죽이고 환자들을 치료하며 마기에 오염된 땅을 정화한다.
그 과정에 신성력을 각성한 이들이 칼의 아래에 모여들며 자연스럽게 순례교가 만들어졌다.
“그때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순례교는 기존의 종교를 합병하며 빠르게 커졌고, 순례길이 세워졌을 때 그 위상이 정점에 다다랐지.”
다른 완등자들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던 만마의 늪을 완벽하게 막아내는 데 성공한 순례길.
그 이후로 순례교는 모든 세력에게 존중받는 위치가 되었고 기존의 종교를 합병하는 것도 빠르게 이뤄졌다.
“그리고 각지에서 이단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순례교는 기존 종교의 숭배 대상과 교리를 존중했기에 그들을 다른 계파로 두고 자유롭게 믿게 하였다.
하지만 딱 한 가지 금지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신, 황금의 고리를 그들이 숭배하는 대상의 분신으로 격하시키는 것이었다.
“한 지도자가 황금의 고리는 자신이 믿는 신의 분신에 불과하며 자신 역시 그 분신이라고 주장했고, 수백 명의 교인들이 그를 지지했었지. 그들이 어떻게 됐는지 아나?”
“…….”
“칼 안데르센에게 처형당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황금빛 말뚝에 명치를 꿰뚫려 죽은 수백 명의 사람.
고통은 없었는지 모두가 평안한 얼굴이었는데 그에 반해 그들을 죽인 칼 안데르센은 슬픈 표정으로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봤을 때, 나는 그 슬픔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단자들의 죽음을 어째서 슬퍼하는가, 왜 그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가.
열렬하게 신을 숭배하고 있었던 막스의 물음에 칼은 서글픈 표정으로 대답했었다.
“그들도 인간이니까요.”
그 알 수 없는 대답을 들은 순간. 막스는 처음으로 자신의 신과 스승을 향한 의문이 생겨났다.
그토록 가엾다면 어째서 그들을 처형했는가. 어째서 신은 자신을 불신하는 존재들을 만들어내는가.
“처음에는 진정한 신앙을 구분하기 위해서라 생각했고, 나중에는 필멸자인 내가 알 수 없는 숭고한 뜻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지.”
견고하다 생각했던 믿음은 조금씩 무너져 내려갔고, 신을 향한 의심이 커져가는 와중에도 막스의 신성력은 계속해서 강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칼의 후계자로 인정받아 은혜의 권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막스는 신의 본질을 깨달았다.
“너는 그걸 기계라고 했었던가? 나는 생각이 다르다. 그건 그냥 재앙에 불과해.”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과 죽음이 고리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녀석에게 벗어나지 않는 한 구원은 없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지.”
그 비참한 진실에 막스는 절망했고.
“인류를 위한 신은 바로 곁에 있었다고.”
자신의 스승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다.
그 누구보다도 인류를 위해 헌신하며 그들의 불행과 죽음을 슬퍼하는 그라면, 진정으로 인류를 위한 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막스는 그 깨달음으로 자신의 스승인 칼을 설득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막스. 저는 신이 아닙니다. 이단에 빠져들지 마세요.”
칼은 자신을 신으로 추종하려는 막스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고, 그를 성역에 가둔 채 설득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막스의 생각은 더욱더 확고해졌고, 세간에 알려진 그 사건이 터졌다.
“신이 정말로 우리를 보살피고 있다면, 자신을 믿는 교인들이 죽게 내버려두지 않겠지. 그렇기에 직접 확인했다.”
막스는 신성마법으로 성당에 모인 수천 명의 교인을 학살했고, 자신의 스승이 그토록 숭배하는 신의 자비와 구원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성당이 피로 물들 때까지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고 칼이 도착한 것은 모두가 죽은 뒤였다.
“아까 왜 교주를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냐고 물었지? 그 대답은 간단하다.”
석상에서 눈을 뗀 배교자가 천천히 뒤돌았다.
“칼 안데르센은 누구보다도 인류를 위하면서도 바보같이 거짓된 신에게 얽매여 있지. 아마 죽어야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그래서 죽이겠다는 거냐?”
“그래.”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 배교자가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완등이라는 저주받은 굴레 속에서 꺼내 인류를 위한 진정한 신으로 만들어낸다. 그게 바로 나의 사명이다.”
배교자의 이야기에 이세훈은 그제야 그가 왜 칼과 순례교에게 그토록 집착했는지 깨달았다.
‘신을 향한 믿음을 무너뜨리려고 했던 건가.’
그렇기에 칼이 아끼는 모든 것을, 순례교를 계속해서 타락시키며 파괴한다.
그 광신에 이세훈이 질린 표정으로 보고 있을 때. 배교자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었다.
“이세훈. 날 도와라. 너와 내가 힘을 합친다면 칼 안데르센을 신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인류에게 구원이 찾아올 수 있단 말이다.”
“…….”
“아니면 계속해서 그 재앙에게 희롱당할 생각인가?”
배교자의 물음에 이세훈이 그 뒤편에 있는 칼의 석상을 바라보라보았다.
고리를 파괴하고 그 빈자리에 인류를 위하는 칼을 앉혀둔다. 당사자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리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사람 살리는데 신이 허락 안 했다든가 그런 개소리는 안 할 테니까 말이지.’
그리고 어쩌면 과거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도 다시 되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흔히 말하는 신이란 그런 존재니까.
그 무궁무진한 가능성에 이세훈은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좋아.”
“……정말인가?”
설마 진짜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는지 깜짝 놀란 배교자의 모습에 이세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이지. 그렇게 못 믿을 거면 제안은 왜 한 거야?”
“…….”
“인류를 위한 신이 생긴다면 나쁠 건 없지. 솔직히 지금처럼 아등바등 사는 것도 지긋지긋하니까.”
자신이라고 이렇게 싸우고 수련하고 일하면서 살고 싶겠는가. 평화를 얻을 수 있다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대신 딱 하나만 물어볼게.”
한 가지만 확실하다면.
“……뭐지?”
경계심 섞인 배교자의 대답에 이세훈이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말하는 인류에 너도 포함되는 거냐?”
새하얀 면사로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배교자가 마인이 되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세간에서 마인은 인류로 취급하지 않는다. 즉, 배교자는 자신이 숭배하는 신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이단자’인 것이다.
“…….”
이세훈의 물음에 침묵이 감돌았고, 면사 너머로 이글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적의와 분노, 그리고 마지막으로 질투심이 느껴지는 그 눈빛에 이세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마인 새끼들이랑은 상종하면 안 된다니까.”
콰아앙!!!
검은 십자가 수십 개가 눈 깜짝할 사이에 떨어졌고, 재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온 이세훈은 순례자의 향로로 신성마법을 발동했다.
촤르륵!
배교자를 향해 쏟아지는 황금빛의 쇠사슬. 그 모습을 본 배교자가 거세게 손을 휘둘렀다.
파앙!!
검은 거인들이 양팔로 쇠사슬을 막아냈고 이어서 성당 전체가 불길하게 뒤흔들린다.
“너만 시간을 끌었다고 생각하지마라.”
무슨 이유로 자신과 대화를 시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우웅─!
앞서 퍼졌던 칠최종의 법칙이 성역에 완벽히 자리 잡으며 내부를 고리에게서 벗어난 자신만의 세계로 만들어낸다.
그 압도적인 전능감 속에서 배교자의 힘이 성역 전체로 뻗어나갔고.
「종말Finis」
종말을 알리는 종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이디그나 열대우림을 뒤덮었던 검은 장막이 참회의 성당을 향해 좁혀지기 시작했고, 거기에 닿은 모든 생명체를 소멸시켜 나갔다.
고리로부터 태어난 존재를 모조리 지워 버리는 종말. 그 마지막 법칙이 성역에 적용된 것이다.
“하하하하!!!”
밀려오는 힘에 배교자가 웃음을 터뜨렸고, 그 모습에 이세훈은 더 이상 덤벼들지 않고 제자리에서 바라보았다.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그 모습에 배교자가 의기양양하게 내려다보고 있을 때.
“마지막까지 고리와 관련된 것만 없애는 건가.”
황금색 고리, 스티그마를 꺼내든 이세훈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너 교주님을 진짜로 좋아하는구나?”
그 황당한 물음에 배교자가 뭐라고 말하려던 순간. 그보다 먼저 이세훈이 순례의 기도로 스티그마를 날카로운 가시로 만든 다음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푸욱!
사방으로 피가 튀어 오르고, 앞서 적용된 칠죄종의 법칙이 눈 깜짝할 사이에 상처를 악화시킨다.
주르륵
눈과 코, 입가에 검붉은 피가 흘렀고 심장의 상처에서도 미친 듯이 피가 터져 나왔다.
이대로라면 종말의 법칙에 휩쓸리기도 전에 과다출혈로 죽어버릴 수준. 하지만 이세훈은 출혈을 멈추는 대신 더욱더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영연신마법靈硏身磨㳒 마혈기魔血氣
쿠드득─콰득─
심장이 쥐어짜내는 피가 황금색으로 빛나던 스티그마를 뒤덮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찬란한 빛이 터져 나오며 영혼 속에 각인된 무구가 모습을 드러낸다.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대검. 거기서 뻗어 나온 힘이 참회의 성당에 깔린 어둠을 몰아내며 성역 전체를 뒤흔든다.
“……!”
그 모습에 배교자가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며 공격을 쏟아냈지만, 그 결과는 시원찮았다.
우우웅!
검은 십자가와 대검, 창과 거인들이 다가가기도 전에 소멸하며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마치 순례자 본인이 강림한 것 같은 압도적인 신성력에 배교자가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저런 스티그마타가, 성법기가 존재했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배교자가 굳어 있을 때. 이세훈이 자신이 만들어낸 대검을 꽉 움켜쥐었다.
본래라면 칠죄종의 법칙으로 진작 죽었을 육체. 하지만 전신을 휘감은 황금빛의 신성력이 그 몸을 완벽히 회복시킨다.
우우웅!
회귀 전의 마지막, 목뼈와 척추가 부서져 죽어가던 자신의 목숨을 붙잡아둔 인류 최후의 성법기.
혼원무구魂原武具 대성검大聖劍
그 끝에서 터져 나온 황금빛의 참격이 성당과 함께 검은 장막을 반으로 갈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