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306화
뾰족한 첨탑을 지닌 고풍스러운 성당.
멀리서 보이는 외관은 하나의 예술품처럼 보였지만, 가까이서 보면 그 인상은 완전히 변한다.
금이 간 스테인드글라스와 깨지고 부식된 외벽.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되어온 듯한 건물이 검은 장막을 지면 삼아 중력이라는 법칙을 거스른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열대우림에서 남아 있던 이들이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저건 또 뭐야?”
“환영 같은데…… 마기로 만든 건가?”
불길한 외형을 제외하면 별다른 존재감이 없는 모습.
그 기괴한 모습에 숨어들어온 범죄자나 마인들은 의아하게만 봤지만 고위영웅들은 달랐다.
“이런……!”
“당장 탈출해!”
몇 없는 S급 영웅들이 가장 먼저 비상용 공간이동 소모품을 사용하며 대피했고, 휘하의 다른 영웅들도 영문을 모르면서 같이 도망쳤다.
그리고 하늘 위의 성당을 모르거나 맞서려는 무지한 이들만이 남은 순간.
「나태Pigritia」
지상을 겨누던 첨탑의 끝자락, 검은 종이 하늘 위에서 무겁게 울려 퍼졌다.
“어…… 어어…….”
“잠깐…….”
몸이 아니라 영혼 그 자체를 뒤흔드는 무거운 종소리.
그 한 번의 울림으로 하늘을 가렸던 검은 장막이 눈 깜짝할 사이에 열대우림 전역을 뒤덮었고, 내부에 남아 있는 이들로 하여금 기묘한 압박감을 가했다.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듯한 눈앞의 광경에 한 범죄자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 나가야겠어. 뭔가 이상해.”
“뭐? 너 설마 돈 아깝게 그걸…….”
파캉!
같이 들어온 동료들의 핀잔도 무시한 채 다급히 공간이동 아뮬렛을 꺼내서 깨뜨리는 범죄자.
“……어?”
하지만 아뮬렛에 각인되어 있던 공간이동 술식은 어떤 식으로든 작동하지 않았고.
쾅!
하늘에서 떨어진 검은 십자가에 범죄자의 몸은 으깨졌다.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주변에 있던 동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이내 공포와 경악으로 물든 표정으로 소리쳤다.
“고위결계……!”
“당장 도망쳐!”
힘을 증폭시키거나 무언가를 지키는 용도가 아닌, 세계의 법칙을 뒤흔드는 압도적인 힘.
그제야 자신들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곳에서 한가롭게 있었는지 깨달은 이들이 도망치려했지만, 그 결과가 썩 좋지는 않았다.
콰과과광!
열대우림 곳곳에 검은 십자가들이 계속해서 떨어지며 도망치는 이들을 짓뭉갰고, 그사이 다시 한번 검은 종이 무겁게 울린다.
「탐식Gula」
터엉!
“크윽……?!”
“이런 개 같은…….”
간발의 차로 검은 십자가를 피하거나 막아낸 이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상처가 심했기에 다급히 회복 포션을 들이켰다.
푸콰악!
그러자 목으로 넘어간 액체들이 체내에서 검은 가시가 되어 전신을 꿰뚫었고, 다시 한번 열대우림 곳곳에서 고통과 절망에 찬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발아래에 펼쳐진 아비규환에 이세훈이 모든 원흉인 성당을 올려다보았다.
‘이게 참회의 성당인가.’
범위 내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에게 ‘칠죄종’이라 불리는 법칙을 적용시키는 성역.
회귀 전에 읽었던 순례교의 자료와 칼의 설명으로만 들었던 기술에 이세훈이 앞서 울렸던 두 번의 종소리를 떠올렸다.
‘법칙은 순차적으로 적용된다고 했으니 지금은 나태와 탐식이겠네.’
영역에서 도망치려는 이들을 공격하는 나태.
체내에 섭취된 물질을 변질시키는 탐식.
대표적인 발동 조건은 저렇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세부조건이 존재했다.
“성역의 법칙은 결국 사용자의 주관, 심상이 담겨져 있습니다. 명칭에 사로잡히면 자신도 모르게 법칙을 어길 수 있으니 주의해 주십시오.”
이전에 칼의 성역에 지낼 때 들었던 조언.
그 내용을 이세훈이 다시금 되새기고 있을 때. 아래쪽에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퍼엉!
마지막까지 발버둥 치던 아포피스의 머리가 류은하의 주먹에 흔적도 없이 날아갔고, 아리아의 세검에 난도질당한 몸이 안개로 변해 흩어졌다.
“……!”
전투가 끝나기 무섭게 이쪽을 바라보는 아리아.
당장에라도 바닥을 박차고 뛰어오를 것 같은 그 모습에 이세훈이 재빠르게 압그룬트를 날려 그 주변에 경계의 권능을 펼쳐냈다.
스스스
압그룬트를 중심으로 류은하와 아리아를 둘러싸는 정육면체의 선이 새겨지며 주변의 공간과 분리된다.
경계의 권능으로 칠죄종의 법칙에 영향을 받지 않는 장소를 만들어낸 이세훈이 아리아를 바라보며 입을 뻐금거렸다.
‘다수는 불리. 거기서 대기.’
전투 중에 칠죄종의 법칙이 언제 어떻게 적용될지 장담할 수 없는 만큼 배교자를 상대할 때는 혼자가 낫다.
입모양을 읽어낸 아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불만을 드러냈지만 이세훈은 더 설명하는 대신 하늘 위의 성당으로 향했다.
‘나머진 류은하가 설명해 주겠지.’
지금은 배교자와 칠죄종의 법칙에 집중한다.
경계의 권능으로 발판을 만들어 박차 오르던 이세훈이 순식간에 성당의 근처까지 도달한 순간.
「색욕Luxuria」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무겁게 흔들리는 검은 종.
심상의 일그러짐을 극대화시키는 색욕. 부상을 입은 상태라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해당될 부분이 없다.
그리고 생각하며 이세훈이 마력을 끌어올려 금이 간 스테인드글라스를 향해 도약했고.
콰득─
입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
예상치 못한 현상에 이세훈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체내의 마력과 장기들이 다른 생물들처럼 날뛰며 전신을 찢어발긴다.
그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 속에서 이세훈의 자세가 흐트러지며 스테인드글라스를 향해 맨몸으로 부딪쳤다.
쨍그랑!
전신에 유리 조각이 박힌 채로 이세훈의 몸이 성당의 바닥에 나뒹굴었고,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엄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격노Ira」
바깥에서 들리지 않았던 배교자의 선언.
그와 동시에 종소리가 성당 전체를 뒤흔들며 이세훈의 몸에 가해지는 압력을 폭발적으로 상승시켰다.
육체와 마력의 폭주를 증폭시키는 격노. 당장에라도 몸이 터져 나갈 것 같은 그 상황 속에서 이세훈이 본능적으로 토속성마력인 신력을 끌어올렸다.
우웅!
신력이 피부 아래로 코팅을 하듯이 전신을 휘감자 전신에 가해지던 칠최종의 법칙이 조금 약화되었다.
그사이에 정신을 가다듬은 이세훈은 곧장 순례의 기도를 발동해 전신의 부상을 치료했다.
후웅!
눈 깜짝할 사이에 중상을 입었던 몸이 본래의 상태로 돌아왔고, 거칠어졌던 숨을 고른 이세훈이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도대체 어디서 색욕의 법칙에 걸린 것인가. 이세훈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너…… 방금 그건 뭐지?”
어두컴컴한 성당에 울려 퍼지는 배교자의 목소리.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이세훈이 소리가 들리는 곳을 올려다보았다.
바깥과 마찬가지로 거꾸로 뒤집혀진 내부. 자신이 거꾸로 서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이질적인 풍경 속에서 배교자의 모습이 보였다.
우웅
얼굴을 가리는 면사에 검은 신부복. 그 뒤쪽에는 4m 남짓한 석상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 형태가 상당히 독특했다.
반으로 갈라진 검은 고리에 십자가 자세로 매달려 있는 사내의 조각상. 곳곳이 부서지고 검은 얼룩이 묻어 엉망이었는데 안쪽에서 요동치는 힘이 심상치 않았다.
‘저게 성역을 유지하는 핵…….’
저걸 파괴하거나 배교자를 제압해야 성역이 해제된다.
칼에게 들은 설명을 떠올리며 이세훈이 주변을 파악하는 사이 배교자가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방금 그게 뭔지 말하란 말이다!!”
쿠구궁!
성당 전역을 짓누르듯이 울려 퍼지는 배교자의 힘.
그와 동시에 칠죄종의 법칙이 더욱 강화되었고, 이세훈이 신력으로 그것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알고 있으면서 물어보기는…… 내가 아니라고 말해주길 바라는 거냐?”
이세훈의 비아냥에 배교자의 몸이 흠칫 떨렸고, 이내 믿을 수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로…… 은혜의 권능을 사용했다고……?”
“그러니까 내가 총대주교로 임명받은 거지……!”
투웅!
대답과 동시에 천충검으로 만들어낸 백광과 금원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고, 아무런 저항도 없이 배교자의 머리와 명치를 꿰뚫었다.
푸화악!
등 뒤의 석상에 튀는 검은 피.
환영이 아니라 본체에 제대로 직격했지만, 거기에 꿰뚫린 배교자는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말도 안 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제자리에서 무언가를 미친 듯이 중얼거리는 배교자.
그 기괴하기 그지없는 모습에 이세훈은 좀 더 확실한 타격을 주기 위해 경계의 권능으로 명계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아직 언데드의 제어에 서툴러 아인헤랴르는 꺼낼 수 없지만, 명계의 무한한 마력 그 자체만으로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콰가가강!
명계의 마력으로 빚어낸 수천 자루의 무구들이 배교자를 향해 포탄처럼 쏘아졌고, 뒤집혀진 성당의 바닥을 부수며 배교자의 육체를 터뜨렸다.
단순 화력만으로는 어지간한 S급들을 압도하는 위력.
하지만 그 와중에도 배교자는 피하기는커녕 막지도 않은 채 폭발에 휩쓸렸고.
“……알았다.”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거짓말이구나.”
파앙!
아래쪽에서 울려 퍼진 종소리가 성당 내부의 모든 힘을 강제로 흩뜨렸고, 그 안쪽에 배교자의 목소리가 채워졌다.
「질투Invidia」
파스스
천충검으로 만들어낸 어검과 명계의 마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파괴되었던 성당과 배교자의 몸 역시 본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앞서 날렸던 모든 공격이 배교자의 검은 신성력으로 재현되어 이세훈을 향해 쇄도했다.
콰가가강!
배교자에게 적의를 가지고 펼친 행동을 모두 되돌려줄 수 있는 질투. 자신에게 돌아온 그 공격에 이세훈이 재빠르게 여백의 휘장을 전신에 휘감아 피해냈다.
‘더럽게 쎄구만……!’
적에게 날릴 때는 별생각 안 했지만 직접 보니 하나만 제대로 맞아도 중상은 입을 것 같았다.
여백의 휘장으로 모든 공격을 흘려내면서 이세훈이 그동안 적용된 법칙의 수를 헤아렸다.
‘방금 질투까지 해서 다섯 개니까…… 남은 건 두 개인가.’
색욕을 제외하면 아직 해당되는 것은 없지만 신력에 한계가 있으니 그 전에 승부를 봐야 한다.
남은 두 개의 법칙을 유도하기 위해 이세훈이 적의가 담기지 않은 반격을 준비하던 그때.
“왜 은혜를 사용하지 않지?”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배교자가 면사 너머로 입가를 비틀며 이야기했다.
“조금 전에 사용한 그게 정말 은혜의 권능이라면 이깟 법칙 정도는 얼마든지 비틀어 버릴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성역을 만들어 받아칠 수도 있고.”
“…….”
“아, 다른 유용한 권능이 너무 많아서 그런가? 그렇다면 내가 좀 거들어주지.”
배교자가 앞으로 손을 뻗었고, 뒤쪽의 조각상이 희미하게 떨리며 검은 파동을 내뿜었다.
「탐욕Avaritia」
끼긱─
종소리와 함께 이세훈의 모든 마력과 권능이 멈췄다.
한 가지 힘만 사용할 수 있게 제약하는 탐욕. 그 제약에 이세훈이 재빠르게 신력에 집중하여 순례의 기도를 펼쳤다.
콰아아앙!
눈 깜짝할 사이에 이세훈의 주변을 감싸는 회색빛 방벽.
그 위로 남아 있던 포격이 계속해서 쏟아졌고, 배교자의 신성마법도 더해져 방벽을 부수기 위해 쏟아졌다.
쩌적!
방벽이 부서지려고 할 때마다 신력으로 회복하곤 있지만 이대로라면 힘이 바닥나 색욕의 법칙에 당한다.
그에 이세훈이 재빠르게 판단을 내리며 신력을 멈추고 몽상수납을 발동한 순간.
파각─
검은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창날이 방벽을 꿰뚫었다.
처참하게 부서진 회색빛 방벽. 그 모습에 배교자가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을 때.
투웅!
황금빛으로 빛나는 창이 잔해를 꿰뚫으며 쏘아졌다.
“……!”
그 모습에 배교자가 재빠르게 신성마법을 펼쳤고, 주변에 검은 신성력으로 이뤄진 거인들이 나타나 방패로 배교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콰앙!
방패와 거인을 꿰뚫고 파고드는 황금빛 창.
하지만 면사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췄고, 그것을 바라보던 배교자가 그대로 손끝을 가져다댔다.
화르륵!
살짝 닿았을 뿐인데도 창날에 담긴 신성력이 손가락을 타고 몸 안에 파고들어 마기를 불태우려 한다.
자신의 왼팔을 불태우는 황금색 불꽃을 바라보며 배교자가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정화의 창이군…….”
신성마법 중에서도 위력만 놓고 봤을 때는 손꼽히는 기술.
그리고 과거에 자신이 사용했던 기술. 익숙한 힘에 배교자가 슬쩍 웃으며 왼팔을 털어냈다.
파앙!
눈앞을 가로막은 거인들과 창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새카맣게 타올랐던 배교자의 팔도 복구되었다.
애써 펼쳤던 공격을 아무렇지 않게 떨쳐낸 배교자는 장벽에서 빠져나온 이세훈, 그 손에 들려 있는 새하얀 향로를 바라보았다.
“역시 그 향로였군.”
완등자도 아닌 이가 권능을 사용하려면 그 힘이 담긴 무구를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
과거에 자신도 사용한 적 있었던 순례자의 향로를 본 배교자가 피식 웃었다.
“은혜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다고 속여서 기회를 노렸던 건가. 시도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
“하지만 과거에 내가 누구였는지 정도는 기억했어야지. 진짜와 가짜도 구분 못 할 거라 생각했나.”
진짜 은혜의 권능은 저런 무구로 흉내 내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처음의 혼란이 가라앉은 배교자가 문득 이세훈이 펼쳤던 기술을 떠올렸다.
“그런데 회색 신성력이라…… 너는 조금 알아차린 모양이군.”
“……그게 무슨 소리지?”
“신성력이란 은혜의 산물. 네가 어떤 기도를 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달라지지.”
배교자의 손이 앞으로 뻗어졌고, 그 위로 검은 신성력이 불길하게 일렁거렸다.
“하지만 교단이 추구하는 신성력은 거짓된 우상에게서 비롯된 힘. 그 자체로 죄이며 추악한 존재에게 힘을 보태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
“믿기지 않는 모양이군. 그럼 신탁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우우웅!
배교자의 신성력이 사방으로 분리되며 검은 카드를 만들었고 시계방향을 그리며 12장이 나열되었다.
“신성마법 중에는 신탁이 존재한다. 저 멀리, 모든 세계를 창조한 거룩한 존재로부터 미래를 예지 받는다고 하지. 그러나 그게 정말일까?”
휘릭
이세훈에게 보이도록 검은 카드가 뒤집혔고 목이 베인 사내의 그림이 나타났다.
“정말로 미래를 예지할 수 있다면 어째서 너희들은 어째서 눈앞의 위험은 피하지 못하고 죽는 거지? 미래를 제대로 보지 못해서? 아니면 해석을 잘못해서?”
계속해서 카드가 뒤집히고 그때마다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한 그림이 나타난다.
그렇게 총 12개의 죽음이 카드롤 통해서 비쳤을 때.
“그 답은 너희들이 거짓된 우상을 믿었기 때문이다.”
면사 너머로 배교자의 두 눈이 흉흉하게 번뜩였다.
“그 고리는 단순한 기계에 불과하다. 선악의 구분조차 없이 무분별하게 축복과 저주를 흩뿌리며 이 세계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무지한 존재. 그게 바로 너희들이 믿던 신이다!”
배교자의 목소리가 성당에 울려 퍼졌고, 그 목소리가 머릿속에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어째서 선악의 구분조차 못 하는 존재에게 의존하는 거냐. 너희들의 고통, 위기, 죽음 그 모든 것이 그 가증스러운 고리로부터 비롯되는데도 왜 칼자루를 쥐어주느냔 말이다!”
“…….”
“그게 정말 우리들의 신인가? 아니! 단언컨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들에게는 보다 완벽하고 숭고한 신을 숭배할 자격과 권리가 있어!”
흐느끼는 것처럼 울려 퍼지는 광신狂信의 외침.
그 흔들림 없는 확신 속에서 이세훈은 조금씩 배교자의 신앙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너라면 알 거다. 모르더라도 느낄 수 있겠지. 이 세계가 저지른 원죄를, 그 고리에게서 받은 축복과 저주가 무엇인지.”
“……탑과 늪.”
수십 년 전 세계에 나타나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끼친 영웅의 탑과 만마의 늪.
그것만큼 축복과 저주라는 말이 어울리는 게 또 있을까. 그런 이세훈의 대답에 배교자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 사실을 알기에 너의 신성력은 회색이다. 그 존재가 순수한 빛이 아님을, 신이라 불릴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
“하지만 그것으론 부족하다. 그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 이상 우리들…… 인류를 위한 신은 나타나지 않아.”
마인이 되어서도 자신을 인류라 지칭하는 배교자. 그 모습에 이세훈이 말없이 바라보다 물었다.
“나보고 마인이 되라는 거냐?”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리하면 그 가증스러운 고리를 파괴할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날 수도 있으니.”
처음보다 부드러운 눈길로 이세훈을 바라본 배교자가 담담히 이야기했다.
“하지만 아직 거부감이 남아 있을 테니…… 내가 그 족쇄부터 풀어주지.”
배교자의 검은 신성력이 성당 전체로 퍼져 나갔고, 이내 아래로 흘러내리며 첨탑의 끝에 뭉쳤다.
그리고 검은 종이 불길하게 떨리며 크게 흔들린 순간.
「오만Superbia」
마지막 칠죄종의 법칙이 성역 내부를 가득 채웠다.
마음 깊숙한 곳에 품은 의심을 번지게 만드는, 배교자가 수많은 교인들을 타락시키고 죽음으로 내몰았던 힘.
그 법칙이 이세훈의 마음 깊숙한 곳에 파고들었고 전신에 검은빛이 일렁이며 맺힌다.
‘아아…… 역시…….’
거짓된 우상에게 희롱 당하던 존재가 진정한 신을 목도하게 되는 그 광경에 배교자가 감동스러워하던 그때.
“……그래.”
무거운 표정을 짓던 이세훈이 슬쩍 웃었다.
“이제 확실히 알겠네.”
빠악!
이세훈의 주먹이 자신의 볼을 있는 힘껏 후려갈겼고, 전신에 맺혔던 검은 신성력이 단숨에 사라졌다.
“뭐…….”
한 번 검은색으로 물든 신성력이 어떻게 다시 돌아온단 말인가.
배교자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보고 있을 때. 볼을 쓰다듬은 이세훈이 눈매를 찌푸렸다.
“으윽…… 너무 세게 때렸나.”
확실하게 하려고 했을 뿐인데 잘못하면 다른 법칙을 자극할 뻔했다. 이세훈이 속으로 투덜거리던 그때. 배교자가 경악하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뭘 어떻게…….”
은혜의 권능을 사용했을 때보다 더 당황하는 배교자. 그 모습에 이세훈이 담담히 이야기했다.
“아까 네가 말했었지. 우리들한테는 더 완벽하고 숭고한 신을 믿을 자격이 있다고.”
“…….”
“그 자체는 나도 동감하긴 하는데…… 딱 한 가지 의문점이 있거든.”
면사 너머로 느껴지는 긴장한 시선. 그와 눈을 마주하며 이세훈이 물었다.
“그래서 네가 믿는 신이 도대체 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황금의 고리를 대신하는, 순례교를 저버린 배교자가 믿는 신.
그 존재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 근본적인 질문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
진정한 광신도였다면 이때 망설임 없이 대답했어야 할 터. 하지만 어째서인지 배교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했다기보다는 자신이 떠받드는 신이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는, 그런 걱정이 뒤섞인 시선과 태도.
“못 말하겠어? 그럼 내가 대신 말하지 뭐.”
“뭐…….”
배교자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이세훈이 신력으로 은혜의 권능을 펼쳐냈다.
후웅!
자신의 뒤쪽에서 터져 나온 회색빛. 그에 배교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복원된 석상을 올려다보았고.
“그 사람 맞지?”
배교자가 숭배하는 신, 칼 안데르센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