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300화 (300/309)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300화

성역에서 지낸 지 40일, 바깥 시간으로 4초째.

팔짱을 낀 이세훈은 황금빛으로 가득 차 있는 세계, 그 위에 펼쳐진 수많은 회색 글자와 도형들을 바라보았다.

“으음……. 이건 아니네.”

그 내용을 다시 훑어보던 이세훈이 순례의 기도를 사용했고, 그 순간 몇몇 글자와 도형이 사라지고 거기에 새로운 내용이 다시금 나타난다.

성역 내부에 마땅한 필기도구가 없어 은혜의 권능을 이용해서 공간 전체를 필기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됐다.”

지난 이틀 동안 쉴 새 없이 검토한 계산식이 완성되었고, 그 내용을 곱씹은 이세훈이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정신을 날카롭게 가다듬은 다음 자신이 찾아낸 해답을 순례의 기도로 만들어냈다.

스스스

눈앞에 나타나는 회색빛의 육체.

장기와 혈관, 근육과 뼈를 비롯하여 모든 형상이 맞춰지더니 마지막으로 피부가 전체를 덮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세훈이 계산한 경로를 통해 회색 불꽃이 깃든 순간.

화르륵!

눈 깜짝할 사이에 회색 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

성냥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타버리는 몸.

진짜 사람이었다면 바로 즉사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이세훈이 눈매를 찌푸렸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또 실패네…….”

리 켄세의 권능, 거기서 파생되었을지도 모를 ‘체질’을 재현하려고 시도한 지 벌써 열흘 차.

성화를 습득하기도 했고 비슷한 증상을 겪었기에 몇 번 시행착오만 겪으면 성공하지 않을까 했는데 좀처럼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기본적인 틀은 맞는 것 같은데……. 역시 알맹이가 문제인가.’

불꽃의 구성은 어느 정도 파악했지만 그것으로 무엇을 추구하는지, 그 심상을 좀처럼 짐작하기가 어렵다.

기껏 풀리는가 싶더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상황에 이세훈이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쉬운 일이 없구만…….’

단서를 찾을 때마다 다시 미궁으로 돌아오는 상황에 이세훈이 피곤함을 느끼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온통 황금빛으로 가득 차 있는 세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광경을 바라보며 이세훈이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영웅의 탑은 도대체 뭐지?’

도대체 무엇이기에 완등에 오른 이들에게 그토록 강력한 권능을 하사하고, 새로운 개념을 인류에게 안겨주는 것일까.

회귀 전보다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의문이 풀리기보다는 더욱더 늘어나기만 했다.

영웅의 탑의 본질. 완등자들이 창조한 개념. 그리고 이렇게 세계가 변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

생각을 거듭해도 풀리지 않는 의문에 이세훈이 점점 빠져들려던 찰나.

후웅

머리 위로 새햐안 단검이 떨어졌다.

캉!

코앞에 나타나 아슬아슬하게 단검을 막아낸 회색 방패.

얼굴이 꿰뚫리기 바로 직전에 간발의 차로 공격을 막아낸 이세훈이 느슨해졌던 정신을 다잡으며 방패를 치워냈다.

“……위험했네.”

조금만 반응이 늦었으면 단검에 꿰뚫리면서 성역 밖으로 튕겨져 나갈 뻔했다.

머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때린 이세훈은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단검을 날린 인물을 바라보았다.

“…….”

화원의 정자 안쪽에서 무릎을 꿇은 채 기도 중인 칼. 일주일 전과 변함없는 자세에 이세훈이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했었는데…… 이게 진짜로 되네.’

성역 안에서 은혜의 권능이 만능에 가깝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발동되었을 때의 이야기.

그 때문에 본래라면 저렇게 기도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이세훈을 정확히 노리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또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권능으로 성역 내부에 새로운 법칙을 만들어내다니…… 참 무서운 기술이야.’

일주일 전. 칼은 기도에 들어가기 전에 은혜의 권능으로 성역 전체에 하나의 법칙을 선포했다.

[나약한 자, 처벌받으리.]

나약한 자,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쇠약해진 사람이 생겨나면 그 즉시 처벌을 가한다.

바깥이었다면 그런 법칙을 세워봐야 본인이 직접 나서거나 다른 사람들이 움직여야 했지만 성역 내부에서는 달랐다.

‘성역이라는 공간 전체가 법칙을 지키기 위해 움직인다.’

방금도 자신이 곧장 정신을 차렸기에 단검 하나로 끝난 거지 끝까지 정신을 못 차렸다면 성역에서 사라질 때까지 처벌을 가했으리라.

‘집단을 상대할 때도 편하겠네.’

영역에 들어선 적이 몇 명이든 간에 법칙을 통해 효율적이고 일관적인 대응이 가능하다.

물론 법칙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게 어디까지인지가 관건이긴 하지만 여태까지 은혜의 권능이 보여준 힘을 생각한다면 어지간한 것은 다 가능하리라.

‘이게 만약 전 세계에 펼쳐진다면…….’

만마전이 전 세계에 돌발적인 테러를 시도하더라도 곧장 대응할 수 있지 않을까.

머릿속으로 설계도를 만들어보려던 이세훈은 금방 고개를 가로저으며 생각을 떨쳐냈다.

‘효율적이긴 하지만 너무 위험하네.’

한 사람의 심상이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친다니.

그동안 칼이 보여준 행적을 생각한다면 큰 문제가 없을 수도 있지만, 한 번이라도 문제가 생기는 순간 전 세계에 재앙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조심하는 편이 좋았다.

“흐음. 슬슬 끝낼까.”

아직 열흘은 더 지낼 수 있지만 할 일도 없는데 굳이 다 채울 필요는 없다.

괜히 의미도 없는 계산을 반복하기보다는 리 켄세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든 성화를 사용해 보든 경험을 늘리는 것이 나으리라.

“음. 좋아.”

빠르게 결정을 내린 이세훈은 주변에 남아 있는 것을 없앤 다음 곧장 화원을 향해 다가갔다.

“……끝나셨습니까?”

눈을 뜬 칼의 물음에 이세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본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칼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길어도 삼 주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지낼 줄은 몰랐군요.”

지금까지 버틴 것도 대단하지만 칼은 아직 지치지 않은 모습이 더욱 놀라웠다.

‘이 정도라면 성역 내부에서 1년도 버틸 수 있을지도…….’

대주교들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정신력. 과거의 제자를 떠오르게 만드는 그 모습에 칼이 물끄러미 바라보다 물었다.

“이세훈 님. 혹시 리 켄세 님과의 내기가 끝난 다음에 예정된 일이 있으십니까?”

“음……. 지금으로서는 딱히 없네요.”

해야 할 일들이야 질릴 정도로 많지만 그중에 뭘 먼저 해야 할지는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진 게 없다.

이세훈의 대답에 칼이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그럼 제게 신성마법을 배워보시지 않겠습니까?”

“신성마법이요?”

“예. 좀 더 본격적으로 말입니다.”

칼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순례길을 오가며 만마전과 만마의 늪을 경계하느라 바쁜 칼이 직접, 그것도 본격적으로 가르치겠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직접 가르친다면…… 후계자 교육인가.’

이전부터 자신을 차기 교주 후보로 보고 있기는 했었지만 지금 보이는 태도는 느낌이 달랐다.

그때가 최악의 사태를 대비한 비상품이었다면 지금은 자신의 자리를 완전히 넘길 수 있는 대용품을 보는 듯한 시선.

“뭔가 이유라도 있나요?”

“으음. 이유야 많지만…… 가장 큰 건 이번에 성역에서 생활하며 보여주신 정신력이겠네요. 신성마법에서 생각보다 중요한 부분이거든요.”

자신의 윗사람과 소통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 것이 인간인데 그보다 더 까마득한 존재, 신과의 소통을 반복한다면 얼마나 많은 압력을 느끼겠는가.

특히 은혜의 권능을 직접 다루기 시작하면 그 압력이 차원이 달라지기에 기본적으로 정신력이 갖춰져야만 했다.

“그리고 이세훈님이라면 배교자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같아서 말입니다.”

“유혹이라면…….”

“이단자의 유혹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습니까. 거짓된 신이라든가 그런 흔해 빠진 이야기죠.”

씁쓸한 표정을 지은 칼이 황금빛으로 가득 차 있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이들을 볼 때마다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인간은 늘 유혹에 시험받는 존재이니 말입니다.”

“…….”

“하지만 이세훈 님은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과 거기서 파생된 신성력을 단순한 현상으로 여기는 이세훈이라면 반대로 이단자들의 유혹에도 거뜬히 버틸 것이다.

칼이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깨달은 이세훈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흐음. 신성마법이라…….’

회귀 전에 순례교와 함께 작업을 하면서 신성마법과 관련된 서적도 많이 보긴 했지만 잘 모르는 것들도 몇 가지 있었다.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것들도 있었으며 특히나 성역은 칼에게 직접 교육을 받은 대주교들만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역도 배워두면 유용하긴 하겠지.’

여기에 칼이 죽으면서 실전됐던 성법기, 스티그마타의 제작법까지 배운다면 무구 제작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딱 한 가지, 그리고 아주 큰 단점이 있었는데 배교자에게 표적이 된다는 점이었다.

‘그 미친놈한테 찍히면 골치가……. 음?’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이세훈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칼에게 물었다.

“순례자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요.”

“말씀하시죠.”

“저랑 배교자랑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그건…… 으음…….”

이세훈의 물음에 칼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바라보았다.

순수한 신체 능력만 해도 A급. 전설등급 무구도 보유하고 있으며 전투 경험은 몽환마와 멸각의 마신이란 괴물을 죽이면서 증명됐다.

거기에 완등자들의 권능도 다수 습득했으며 정신력이 뛰어나 배교자의 힘에 은혜를 침식당할 위험이 없다.

그리고 설령 침식당하더라도 마력만 사용해서 싸우면 될 테니 별다른 제약은 없으리라.

‘그리고 배교자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테니…… 어?’

머릿속으로 전투를 가늠해 보던 칼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

“…….”

두 사람이 잠시 동안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고, 이내 이세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그 녀석…… 생각보다 약하네요?”

“그러게요…….”

정확히는 이세훈이 가진 능력이 다양해서 상성적으로 유리해진 것이지만, 어찌 됐든 배교자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적이 된 것은 확실했다.

그 예상치 못한 상황에 칼이 당혹스러워하고 있을 때.

“순례자님.”

그 모습을 바라본 이세훈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저희 낚시나 한번 해볼까요?”

* * *

이세훈이 성역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현실도 느리지만 확실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단자다!”

“당장 제압해!”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이세훈을 향해 달려드는 교인들.

파라데이 수도원에 파견된 이들은 순례교에서도 실력 있는 기술자들이다 보니 기본적인 능력이 뛰어난 편이었는데 무력도 어지간한 B급 영웅 수준은 되었다.

그 때문에 아무런 저항도 없는 상대라면 1초 만에 제압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철컥─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을 때는 사정이 달랐다.

“움직이지 마세요.”

어느새 이세훈의 앞을 가로막은 제이크가 풍인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고, 그 주변으로 바람이 넘실거리며 모여들었다.

쿠구궁─

지금 자리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더 움직이는 순간. 주변에 휘몰아치는 이 불길한 바람이 곧장 폭풍이 되어 전신을 찢어발길 것이다.

그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기술자들이 그대로 멈췄고, 그 모습을 본 제이크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도 그만해. 다들 다치니까.”

제이크의 날선 목소리에 기술자들이 의아해하며 시선을 돌렸고, 자신들의 앞에 펼쳐진 광경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바로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춘 가시들. 제이크가 끼어든 것처럼 에리카 역시 봉신우의로 이세훈에게 덤벼들었던 기술자들을 제압하려 한 것이다.

‘저 청년이 조금만 늦게 끼어들었다면…….’

‘진짜 간발의 차로 살았군.’

이게 바로 옆까지 다가왔는데 말이 나오기 전까지 알아차리지도 못했다니.

기술자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완전히 얼어붙었고, 그 모습을 본 에리카가 담담히 이야기했다.

“물러서면.”

조금이라도 다가선다면 그 즉시 꿰뚫어 버릴 것이다.

기술자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적의를 드러내는 에리카의 모습에 제이크가 눈매를 찌푸리던 찰나.

“……과연.”

이세훈을 보고 있던 카말이 미소를 지었다.

“신탁의 카드가 보여준 ‘각성’이 이걸 뜻한 거였군.”

카말의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모두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돌연 주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쿠구궁─

공방 전체를 뒤흔드는 강력한 진동.

그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제이크와 에리카가 반사적으로 이세훈의 옆에 붙었다.

만약에라도 건물이 무너지면 어딘가 상태가 이상해진 이세훈을 데리고 대피하기 위해서였다.

“……흠. 5초 조금 넘겼네.”

하지만 그전에 이세훈이 정신을 차렸고, 그 모습을 본 제이크와 에리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괜찮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제이크와 에리카. 체감상 거의 두 달 만에 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이세훈이 슬쩍 웃었다.

“괜찮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쿠구궁!

주변의 진동이 더욱 거세졌고, 수도원의 스피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현재 파라데이 중앙에 위치한 신목에서 이상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수도원 인근에 위치한 방문객분들은 지금 당장 근처의 대피소로…….]

“이게 무슨…….”

점점 소란스러워져 가는 주변 상황에 제이크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기술자들도 이런 상황은 처음인지 당황했지만.

“너무 거창한 것 아닙니까?”

“경사스러운 일인데 힘 좀 써야죠. 그리고 이 정도는 해야 다들 주목하지 않겠어요?”

“흠. 그건 그렇군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다는 듯 대화를 나누는 카말과 이세훈.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에리카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나가보면 알아. 슬슬 준비도 끝났을 테니 가자.”

이세훈이 곧장 밖으로 걸어 나갔고, 그 뒷모습에 제이크와 에리카가 의아해하면서도 뒤따라갔다.

공방을 나와 수도원의 중앙광장에 들어서자 그곳에 자리 잡은 거대한 나무. 신목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그 모습을 올려다본 두 사람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건…….”

모든 것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는 신목.

그 엄청난 신성력에 제이크와 에리카가 놀라고 있을 때. 이세훈이 두 사람의 어깨를 토닥였다.

“위쪽. 잘 보고 있어.”

이세훈이 순례의 기도를 사용한 순간. 주변의 풍경이 눈 깜짝할 사이에 신목의 위쪽으로 변했다.

발아래에 펼쳐진 파라데이의 풍경. 그리고 이곳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이세훈이 목을 가다듬었다.

[아아. 안녕하십니까. 성도 여러분들.]

그리고 신목을 송신탑 삼아 전 세계에 있는 순례교의 교인들을 향해 자신 있게 소개했다.

[순례교의 신임 총대주교로 임명받은 이세훈이라고 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