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90화
나무는커녕 풀 한 포기도 보이지 않는 산.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황량한 땅이 보기 드문 것은 아니었지만 황산, 지금은 ‘성화산聖火山’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조금 달랐다.
화르륵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불꽃.
초목을 대신해서 산 전체를 뒤덮은 채 침입을 불허하는 그 거센 불길에 반사적으로 옷을 살폈다.
“흐음…… 이번에는 안 타겠네.”
지난번에는 아무 생각 없이 왔다가 소매를 태워먹었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준비를 갖췄다.
화속성마력을 끌어올리며 성화산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중턱에 다다랐을 때 마을의 모습이 하나씩 보였다.
사방이 불꽃에 둘러싸인 장소에서 아무렇지 않게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들.
저 모습만 보면 주변의 불이 환영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각인은 잘 작동되나 보네…….”
저 마을에 생활하고 있는 이들은 성화산의 주인인 그 영감탱이에게 각인을 받아 입주를 허락받은 이들.
그 덕분에 산을 뒤덮은 불꽃에 보호받으면서 이곳에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 봐야 잠깐인데 말이야.’
만마전과의 전쟁은 날이 갈수록 격해지고 있고, 마신의 힘은 기존의 마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지금 당장이야 이곳에 접근하지 않으니 평화롭게 느껴지겠지만 언젠가는 이 성화산의 불꽃마저 뚫고 침공해 오리라.
멀지 않은 미래를 생각하며 계속해서 산길을 따라 올라갔고, 정상 인근에 도달하자 새로운 터전이 보였다.
카앙! 카앙!
절벽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수십 개의 공방과 그 안쪽에서 쉴 새 없이 들려오는 쇳소리.
성화공에게 가르침을 받은 장인들이 모여 사는 거리를 바라보며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냈다.
“오랜만에 덥네…….”
산의 초입과는 확연히 다른 온도.
처음으로 용암에 다이빙했을 때가 떠오르는 감각에 방심하지 않고 체내의 화속성마력을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이제부터는 조금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화상은 물론이고 전신이 불타서 사라질 수도 있다. 그 위험성을 상기하며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갈!”
옆쪽에서 호통소리와 함께 한 여인이 나타났다.
한 줄기로 깔끔하게 묵은 머리카락과 붉은 도복을 입은 여인. 겉만 20대인 늙은이들과 달리 진짜 20대의 젊은이였다.
“넌 그게 그렇게 재밌냐?”
어이없어하며 물어보자 여인, 리 페이가 진지한 표정을 풀면서 배시시 웃었다.
“엄청 재밌죠. 할아버지한테 데인 적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놀라는데요.”
“누가 영감탱이 손녀 아니랄까봐…… 그래서 왜 나왔어?”
“아. 할아버지가 배웅하러 가라고 해서요.”
“그렇…… 잠깐, 배웅?”
맞이하는 쪽이면 배웅이 아니라 마중이 아닌가.
썩 좋지 않은 느낌에 눈매를 찌푸리자 리 페이가 멋쩍어하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할아버지가 헛걸음하지 말고 그냥 돌아가시라네요.”
“진짜 그렇게 말했어?”
“실제로는 귀찮으니까 꺼지라고 하셨죠. 삼촌도 다 아시면서…….”
“…….”
리 페이를 통해 전해진 영감탱이의 축객령에 다시금 공방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카앙! 카앙!
자신이 여기까지 오는 걸 모를 리가 없는데도 얼굴을 보이기는커녕 망치만 계속해서 두드리고 있다.
도대체 뭘 만들고 무엇을 연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세계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저곳에서 나오지 않을지도 모르리라.
“쯧…… 오래오래 사실 거라고 전해드려라.”
“예? 아아. 그거 욕 엄청 먹는다는 소리죠? 저도 이제 그거 알아요.”
뭐가 그리 뿌듯한지 으쓱거리며 이야기하는 리 페이. 그 활기찬 모습을 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부탁받은 말을 꺼냈다.
“너…….”
“괜찮아요.”
하지만 리 페이는 그 말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예전에는 뭣 모르고 있었지만, 지금은 제 의지로 남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버지한테는 걱정 말라고 전해주세요.”
“……그래. 몸 조심히 지내라.”
저렇게 대답하면 이쪽에서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대로 몸을 돌려서 걸어 내려가자 뒤쪽에서 리 페이의 활기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삼촌도 몸조심하세요. 아! 이번 기일에도 내려간다고 전해주시고요!”
리 페이의 배웅을 받으며 산 아래로 내려가다 돌연 걸음을 멈추며 뒤돌아보았다.
화르륵!
성화공의 불꽃으로 뒤덮인 산.
과연 만마전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곳이 계속해서 불타오를 수 있을까.
이미 답을 알 것 같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기에 다시 몸을 돌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 * *
눈 깜짝할 사이에 스쳐 지나간 과거의 기억.
보통 같으면 그 내용에 대해서 좀 더 곱씹어 봤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
학원장실의 소파에 앉아 있는 붉은 도복의 노인. 그리고 옆에서 이쪽을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는 어린 소녀.
최소 한 달은 지나야 오리라고 생각했던 성화공과 그 손녀가 바벨에 곧바로 쳐들어온 것이다.
‘이게 도대체 뭔…….’
주변에서 말리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인가.
이세훈이 도저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 옆에 앉아 있던 루트비히가 대신해서 그 의문을 물어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온 건가? 주변에서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을 텐데…….”
의아해하는 루트비히의 물음에 무표정하게 앉아 있던 성화공, 리 켄세가 입을 열었다.
“별 시답잖은 소리를 다 듣겠군. 그깟 놈들이 가만히 안 있어 봐야 뭔가 할 수 있는 줄 아나?”
“흐음. 생각해 보니 그렇군.”
다른 고위영웅들이야 정부가 작정하고 막아선다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 어느 정도 물러서지만 완등자에게 그런 것이 통할 리가 없다.
뒤늦게 수긍하는 루트비히의 모습에 리 켄세가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학원장 놀이에 많이 심취했나 보군. 그런 물러터진 소리나 하고 말이야.”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이지. 그리고 자네도 산 속에 틀어박힌 장인 놀이를 하고 있지 않은가.”
루트비히의 부드러운 대답에 리 켄세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고, 이내 학원장실에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완등자 두 사람이 벌이는 신경전. 따로 마력을 끌어올리지도 않았는 데도 엄청난 압력감이 학원장실을 내리 누른다.
마치 세계가 반으로 갈라져서 대립하는 듯한 중압감. 이세훈은 그것을 요령 좋게 받아내면서 리 켄세의 옆에 앉은 손녀, 리 페이를 바라보았다.
“오…….”
신기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리 페이.
루트비히와 리 켄세가 영향을 받지 않게 신경 써주고는 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저 나이대의 아이가 견딜 수 있을 환경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흥미진진하게 살펴본다.
그 모습을 본 이세훈은 새삼스레 리 페이의 잠재력이 어느 정도인지 다시금 확인했다.
‘이때부터 자질은 충분했구나.’
리 켄세가 어째서 아들에게서 손녀를 빼앗아온 것인지 이세훈이 새삼스레 느끼고 있을 때. 돌연 주변의 중압감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쯧. 됐다. 네놈이랑 쓸데없는 말싸움이나 하려고 온 것도 아니니.”
“잘 생각했네.”
“그래서…….”
이세훈을 향해 시선을 돌린 리 켄세가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지하의 불꽃을 만들어낸 게 네놈이냐.”
말이 질문이지 확신을 담아서 물어보는 리 켄세의 모습에 이세훈이 옆에 앉은 루트비히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번 대화에는 끼어들 생각이 없는지 리 페이를 흥미롭게 살펴보고 있는 루트비히.
‘나한테 맡기겠다 이거구만.’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당혹스럽긴 하지만, 어차피 문제가 될 건 없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이세훈이 리 켄세와 마주보며 대답했다.
“예. 제가 만들었습니다.”
“형편없군.”
“…….”
“저걸 내 권능이라고 만들어놓은 거라면 모루 위에 머리만 얹어 놔라. 내 직접 고쳐줄 테니.”
그런 헛소리를 하면 망치로 머리통을 후려쳐 주겠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리 켄세의 모습에 이세훈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이 양반은 양심이 없나…….’
완등자가 되기 전에 남긴 불꽃을 이용해서 저만큼 만들어냈으면 대단한 거지 뭐 저렇게 엄격하단 말인가.
퇴물이라는 소리가 어지간히도 기분이 나빴는지 노골적으로 갈구는 리 켄세의 모습에 이세훈이 애써 미소를 지었다.
“하하핫. 그럴 리가요.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조금만 손봤을 뿐입니다. 성화공님의 불꽃에는 한참 못 미치죠.”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다고 네 녀석의 형편없는 실력이 변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
시도 때도 없이 비아냥거리며 시비를 거는 리 켄세.
그 뒤끝 넘치는 모습에 이세훈은 새삼스레 자신의 앞에 있는 노인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다시금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회귀 전에도 이랬었네.’
회귀 전에 철의 진리를 깨뜨렸을 때. 리 켄세는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이 새로 만든 무구를 이세훈에게 보냈었다.
다른 사람들은 과거의 자신을 뛰어넘은 젊은 장인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 의도는 달랐다.
‘다른 부분은 자기가 더 잘 만드니까 기어오르지 마라, 라는 뜻이었지.’
그때는 완등자라는 양반이 어찌 저리 속이 좁은가 싶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완등자는 그저 완등에 성공한 사람일 뿐. 힘과 인성은 별개의 이야기였고, 리 켄세는 보이는 그대로의 인물이었다.
‘화로 앞에만 앉아 있는 속 좁은 고집불통 영감탱이.’
인류가 벼랑 끝으로 향해가던 상황에서도 본인의 공방에 틀어박혀 있었던 사람이니 이런 까칠한 반응을 보여도 그리 당혹스럽진 않았다.
“뭘 잘했다고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냐? 실력도 형편없는 놈이.”
“…….”
그렇다고 화가 안 나는 건 아니었지만.
“겨우 그만한 실력으로 날 넘어선다느니 시건방진 소리를 하다니…… 같잖아서 말도 안 나오는군.”
루트비히가 왜 자랑했는지는 알 것 같지만, 아무리 봐도 자신의 기술을 넘어설 만한 녀석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탐탁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는 리 켄세의 모습에 이세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도 지금은 성화공 님을 뛰어넘는다는 주제 넘는 말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세훈의 이야기에 리 켄세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지금은?’
그 말은 언젠가는 넘어설 수 있다는 뜻인가. 그 건방진 행동에 리 켄세가 분노를 드러내려던 그때.
“다만 한 가지는 정정해야겠군요.”
이세훈이 리 켄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과거에 남기셨던 기술이라면 넘어서는 게 아니라 이미 넘어선 지 오래입니다. 성화공 님.”
학원장실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고 이내 리 켄세가 입 꼬리가 천천히 말려 올라간다.
“허허…… 그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뜨린 리 켄세가 이세훈을 자신의 눈 안에 담았다.
“네놈은 땔감으로도 못 써먹겠어.”
콰아아앙─!
이세훈이 앉아 있던 소파에 솟구치는 거대한 불기둥.
아무런 전조도 없이, 본래 그곳에서 타오르고 있었던 것처럼 불꽃이 솟구쳐 올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불사른다.
고위영웅이라도 방심하고 있었다면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즉사할 만큼 치명적이었으나.
“이런. 주변이 타겠군.”
루트비히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학원장실만 보호했다.
‘무슨…….’
그 모습을 본 리 켄세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그렇게 아끼던 생도가 불타죽을 상황인데 뭐 저렇게 여유롭단 말인가.
혹시 무언가 술수를 쓴 것인가 싶지만 불기둥 안에서 느껴지는 것은 오직 자신의 불꽃뿐이었다.
‘……잠깐.’
불기둥의 안쪽을 바라보던 리 켄세의 눈이 가늘어졌고, 곧장 권능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방금까지 거세게 타오르던 불기둥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대신 불꽃으로 변한 이세훈이 모습을 드러냈다.
“…….”
그 모습을 본 리 켄세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육체를 불꽃으로 만드는 기술이야 질리도록 봐왔고, 그걸로 으스대던 놈들은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불태워 죽였다.
아무리 불꽃으로 변해도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에 따라서 충분히 상하관계가 나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견디다니…….’
전력이 아니었다고는 해도 자신의 권능. 조금이라도 모자라는 구석이 있었다면 온몸이 불타올랐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불꽃으로 변한 이세훈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온했고, 그것이 말해주는 것은 하나였다.
“할아버지.”
옆에 있던 리 페이가 소매를 잡아당기며 불렀고, 그에 리 켄세가 뒤늦게 정신 차리며 대답했다.
“무슨 일이냐.”
“할아버지가 왜 둘이에요?”
“……뭐?”
당황하는 리 켄세의 물음에 리 페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불꽃으로 변한 이세훈을 가리켰다.
“저기도 할아버지 불이 있잖아요.”
“…….”
리 페이의 물음에 리 켄세가 다시금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체내에 성화를 품어 자신의 공격을 흘려보낸 이세훈. 자신의 손녀까지 이야기했기에 리 켄세도 눈앞의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권능을 쓴 거냐.”
리 켄세의 물음에 이세훈이 불꽃으로 변한 몸, 지난번에 새로 습득했던 스킬인 성화의 파수꾼을 해제하며 대답했다.
“조금 비슷한 기술일 뿐입니다.”
이세훈의 예의바른 대답에 리 켄세가 눈매를 찌푸렸다.
“내 권능을 정면에서 막아놓고 그런 소릴 하는 거냐?”
“학원장님이 막으실 수 있게 손대중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진심으로 하셨더라면 지금처럼은 안 됐을 겁니다.”
성화의 파수꾼이 성화공의 권능에서 비롯된 스킬이라고는 해도 엄밀히 따지자면 하위호환.
제대로 권능을 배운 것도 아니었기에 저항력이 뚫릴 가능성도 있었지만 리 켄세가 손대중을 해서 공격한 덕분에 깔끔하게 넘긴 것이다.
‘그래도 조금 화끈거리지만…….’
역시 진짜와는 차이가 어느 정도 있었던 것일까.
피부는 물론이고 몸 안쪽까지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지만 이세훈은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여기서 아파하면 모양새가 안 나기도 하고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
그런 이세훈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리 켄세가 고개를 돌려 루트비히를 바라보았다.
이런 결과를 예상한 듯 여유롭게 미소를 짓는 루트비히의 모습에 리 켄세가 눈매를 찌푸렸다가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숙소로 안내해라. 일단 짐부터 풀어야겠으니.”
보잘 것 없었다면 그대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이 정도라면 좀 더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나쁘지 않은 반응에 이세훈과 루트비히가 서로 눈을 마주친 다음 미소를 지었다.
“알겠네. 근처에 빈 공방이 있는 곳으로 구해주지.”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넌 꼴도 보기 싫으니 그냥 가라.”
“…….”
본인의 권능을 멋대로 배운 게 그리도 싫은지 더욱 퉁명스러워진 리 켄세.
그 모습에 또 욱하고 올라올 뻔했지만 이세훈은 금방 화를 다스렸다.
‘어찌 됐든 이번에는 내가 이겼지.’
콧대를 눌러주려고 권능까지 써서 위협했는데 아무렇지 않게 막혀 버렸으니 겉으로 티는 안내도 속이 꽤 쓰릴 것이다.
여기서 또 찔렀다간 리 켄세의 성격상 제대로 삐질 수도 있으니 지금은 적당히 받아주는 것이 좋으리라.
‘내가 완등자를 상대하는 건지 애를 상대하는 건지…….’
이세훈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던 그때. 리 켄세를 따라 일어나던 리 페이가 소매를 잡아당겼다.
“할아버지.”
“뭐냐.”
리 켄세의 퉁명스러운 반응에 리 페이는 잠시 눈치를 살피다가 물었다.
“주변 구경하고 싶어요.”
리 페이의 부탁에 리 켄세가 안 된다고 하려다가 멈칫했다.
오랜만의 외출이라 그런지 간절해 보이는 눈. 썩 내키지는 않지만 너무 억눌러도 좋을 건 없었다.
한숨을 내쉰 리 켄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숙소에 가기 전에 할아비랑 같이……”
“할아버지 말고요.”
“……뭐?”
당황한 리 켄세의 물음에 리 페이가 이세훈을 가리켰다.
“가짜 할아버지랑 구경하고 싶어.”
“……뭐?”
예상치 못한 지명에 이세훈이 리 켄세와 똑같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권능을 따라 쓴 게 그렇게 신기했나?’
가짜 할아버지라고 하는 걸 보니 동일인이 아닌 건 알았지만 그게 오히려 호기심을 부추긴 모양이다.
두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쳐다보는 리 페이의 모습에 이세훈이 떨떠름해하고 있을 때. 문득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
그러자 보이는 것은 진심으로 자신을 불태울 것처럼 매섭게 노려보는 리 켄세.
그 모습에 루트비히가 방금과 다르게 공간마법으로 주변을 꼼꼼히 둘러싸며 대비했고, 이세훈은 자연스레 깨달았다.
‘망했군.’
자신이 리 켄세에게 아주 단단히 찍혔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