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88화
개학식 다음 날.
모든 학부의 수업이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2학기 동안 들을 부전공 수업의 선택기간이 찾아왔다.
보통은 1학기 때 멋모르고 부전공을 골랐던 1학년들만 많이 교체하고 그 이외에 학년들은 거의 변동이 없었는데 올해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너 이번 부전공 뭐 할 거냐. 하던 거 그대로?”
“아니. 일단 게헨나 쪽에 한 번 가보려고. 들어보니까 별별 기술이 다 있다더라.”
특별지구 ‘게헨나’에 신설된 수백 개의 부전공 수업.
과거 이름을 널리 알렸던 영웅들부터 시작해서 실력에 비해 유명세가 없었던 무명 영웅들까지 모두 언데드로 되살아나 위르겐의 명령에 따라 수업을 연 것이다.
“야야. 너 그거 들었냐? 게헨나에서 실전된 기술이 다시 나타났대.”
“나도 알아. 우리 교수님이 그거 들으시겠다고 먼저 달려가셨거든.”
그 종류가 워낙에 다양하다보니 생도들은 물론 교수들까지 방문했고, 벌써 소문이 퍼졌는지 외부에서도 수업을 듣고 싶다는 요청이 들어왔다.
바벨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게헨나. 첫날부터 엄청난 기세였지만 그게 마냥 긍정적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덟 명이나 수업을 취소했다고?”
“예, 예. 이쪽에서 가장 잘나가셨던 분이 게헨나에 리치로 나타나셔서 그쪽으로 가본다고…….”
“그게 무슨 개소리야!!”
게헨나에 나타난 새로운 강의 때문에 기존 강의에 생도들이 대폭 줄어들었고, 생도와 예산을 모두 잃게 된 교수들이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아무리 생도들의 선택이 우선이라지만 하루아침에 이렇게 되는 것은 너무한 게 아닌가.
몇몇 교수들은 분함을 참지 못하고 학과장에게 찾아가 항의를 하기도 했지만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네놈들이 잘 가르쳤으면 안 나갔겠지.”
“그러면 바벨에서 나가시면 되지 않을까요……?”
“그렇군요. 이번 학기 예산안에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벨은 생도들뿐만 아니라 교수들까지 무한히 경쟁해야 하는 교육기관이자 연구기관.
성과가 떨어졌다고 하소연해 봐야 본인의 부족함을 광고하는 꼴이었고, 학과장을 찾아갔던 교수들은 그제야 자신들의 현실을 깨달았다.
‘이대로 있으면 교수 자리도 위험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버텨야 해!’
이번 일로 바벨의 명성이 퍼진다면 교수를 지원하는 영웅들의 수도 점점 늘어나게 될 터.
예산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아예 바벨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사실에 교수들도 발 바쁘게 움직였고, 자연스럽게 바벨은 이전보다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난리구만…….”
제련학부로 오는 길에 그 과정을 어느 정도 보게 된 이세훈이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특별지구가 바벨에 큰 변화를 가져올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첫날부터 이 난리가 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죽은 영웅들을 활용한 수업이라…….’
개학식 때 들은 훈련장, 발할라만 해도 파격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수업까지 만들 줄이야.
외부에서 이런저런 잡음이 나오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었지만 이세훈은 금방 문제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웅들은 모두 계약한 사이였었지 참.’
마인이나 몬스터들은 그냥 죽인 다음 강제로 사역한 것이지만 영웅 출신의 언데드들은 달랐다.
죽기 전이나 죽은 뒤에 자신들의 의지로 위르겐의 언데드가 되겠다고 맹세하고 저렇게 사역된 것이다.
‘저래 보여도 임금이나 그런 건 다 챙겨주니까 말이야.’
위르겐이 부패한 기업가 출신으로 이래저래 사건사고가 많기는 했지만 망자들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나름대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어찌 보면 그 덕분에 사령술이라는 불길한 기술이 지금처럼 인류 내부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게헨나라…….’
이세훈이 무언가 고민하면서도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고, 잠시 후 헬레나의 연구실 앞에 도착했다.
똑똑
“들어와라.”
안쪽에서 들린 대답에 이세훈이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섰고, 서류를 보고 있던 헬레나가 서류철을 가볍게 던졌다.
탁!
“곧 끝나니까 소파에 앉아서 보고 있어라.”
“알겠습니다.”
소파에 앉은 이세훈은 헬레나가 던져준 서류철을 열어 내용을 살펴보았다.
안쪽에 적힌 것은 이번에 새롭게 진행되는 프로젝트의 개요와 책임자로 제련학부의 지도교수인 헬레나, 그리고 이세훈으로 선정한다는 것.
예전 같았으면 제련학부가 발칵 뒤집혔을 만한 사안이었지만 지금은 불만을 드러내는 이들은 물론 불만을 가지는 이들도 존재하지 않았다.
‘프로젝트의 준비를 위해 전공 수업은 자율 참석으로 변경하고 성적도 프로젝트의 성과로 대체한다…… 깔끔하구만.’
이로서 이번 학기 동안은 전공 수업에 참석할 필요가 없다.
그 내용에 이세훈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굳이 이런 것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지만 바벨을 다니는 동안은 서류상으로 깔끔하게 지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래야 공식적인 행사가 되니까 말이지.’
루트비히와 함께 준비한 프로젝트의 내용을 살피며 이세훈이 슬쩍 웃고 있을 때. 서류 검토를 끝낸 헬레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실 건?”
“괜찮습니다.”
“잘됐군. 준비하기 귀찮았는데.”
담담하게 이야기한 헬레나가 맞은편에 앉으면서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다 읽어봤나?”
“예. 이렇게 바로 진행하면 될 것 같네요.”
이세훈에게 서류철을 건네받은 헬레나가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정말로 이걸 할 생각이냐?”
“지금으로서는 그렇죠.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그런 건 아니다만…….”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세훈의 모습에 헬레나가 서류철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지금은 루트비히와 류은하, 그리고 자신만이 알고 있는 프로젝트.
내용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지만 그 ‘성화공’이 연루된 시점에서 절대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어떻게 될지 짐작도 안 가는군…….’
이세훈의 실력과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있지만 상대는 완등자인 성화공.
대장장이로서 수많은 전설을 이룩하고 지금도 그것을 쌓아가고 있는 인물이었기에 상대가 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학원장이 먼저 승인했다면 뭔가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겠지.’
자신이 할 일은 지도교수로서 이세훈이 본인의 능력과 재능을 완전히 발휘할 수 있게끔 지원하는 것뿐.
다른 부분은 생각지 않기로 하며 헬레나가 이세훈을 다시 보았다.
“네가 그렇게 자신 있게 추진할 정도면 뭔가 있는 거겠지. 필요한 일이 생기면 뭐든 이야기해라.”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먼저…….”
이야기를 끝낸 이세훈이 자리에 막 일어나려던 찰나.
“……잠깐.”
잠시 고민하던 헬레나가 입을 열었다.
“가기 전에 하나만 물어보자.”
“말씀하시죠.”
“바르무트 가문 쪽은 뭔가 진행된 게 있나?”
과거 바르무트 가문에게 아들을 살해당했다던 헬레나.
지금 지도교수를 맡은 것도 바르무트에게 복수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는 조건으로 받아들인 것만큼 그쪽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쪽이라면…… 잠깐만요.”
헬레나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이세훈은 곧장 아미르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형님.
연결음이 몇 번 들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는 아미르. 그 빠릿빠릿한 태도에 이세훈이 흡족해하며 이야기했다.
“바르무트 쪽 자료가 필요한데 정리해 둔 것 좀 보내줄래?”
-알겠습니다. 언제까지 보내드릴까요?
“1분 안에.”
-……예?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멍한 되물음에 이세훈은 대답 대신 천천히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아니, 이게 갑자기 무슨…….
“셋…… 넷…….”
-큭……!
다급한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지고, 이세훈은 휴대폰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숫자를 셌다.
그리고 약 40초가 지났을 때쯤.
우웅─
[지금 보냈ㅅ브니다]
[보냈습니다.] - 아미르 싱.
연달아 도착하는 메시지.
그 내용에 이세훈이 ‘수고^^’ 라고 답장을 보내놓은 다음 아미르가 보낸 자료 파일을 휴대폰으로 살펴보았다.
‘암호화까지 되어 있는 걸 보니 잘 정리해 뒀나 보네.’
다른 사람이 알아볼 수 없도록 완전히 암호화된 자료.
워낙에 복잡하기에 해석법을 알고 있어도 까다로웠지만 이세훈은 회귀 전에 빙견과 지내면서 익숙해져 있었기에 간단히 읽어냈다.
“환락가와 연루되었다는 정황이 있어서 조사에 나섰는데 이미 꼬리를 다 잘라놔서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고 하네요. 대신 다른 불법거래의 정황을 발견해서 조사 중이에요.”
“흐음. 뿌리를 뽑기에는 모자라다는 거군.”
“예. 죄송…….”
“됐다. 그렇게 쉬운 일이었으면 내가 여태까지 가만히 있지도 않았겠지.”
이세훈의 사과를 막은 헬레나가 담담히 이야기했다.
“계속 기회를 보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앞으로는 따로 재촉 안 하마.”
“감사합니다.”
헬레나가 가보라는 듯 손을 내저었고, 이세훈이 밖으로 나오면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아들이 살해당했다고 했었던가.’
바르무트 가문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지도교수를 맡으면서 자신을 돕고 있는 헬레나.
몇 달 만에 근황을 물어본 것을 보면 크게 집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세훈이 보기에는 조금 달랐다.
‘늦어도 상관없으니 확실하게 하겠다는 거겠지.’
회귀 전의 이세훈도 그런 생각으로 복수를 준비했었던 만큼 어떤 느낌으로 기다리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바르무트…… 그쪽도 슬슬 정리하긴 해야 하는데 말이야.’
사실 지금도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뒤집어버릴 수 있었지만, 그 경우는 불법의 영역에 발을 들이 밀어야한다.
회귀 전처럼 만마전과 전쟁 중이었다면 그렇게 처리하겠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사회에 맞춰가는 것이 좋았다.
‘이건 나중에 시간 나면 살펴보자.’
지금은 루트비히와 함께 계획한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것이 우선이다.
건물 밖으로 나온 이세훈이 본격적인 준비를 위해 다음 장소로 가려던 찰나. 휴대폰에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야 이거 진짜야?] - 루이제 발렌트
한 뉴스기사의 링크와 함께 메시지를 보낸 루이제.
링크를 눌러 방금 막 올라온 뉴스의 내용을 읽어본 이세훈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사인하자마자 바로 공개라니…… 많이 기대되나 보네.’
루트비히에 의해서 전 세계를 향해 뿌려진 떡밥. 이제 남은 것은 성화공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달리잔다.
조금 전의 헬레나의 반응을 보면 조금 부정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회귀 전에 그와 직접 만났던 이세훈은 확신할 수 있었다.
‘무조건 문다.’
그 영감탱이가 이 ‘도발’을 피할 리가 없다고.
* * *
중국의 안후이성에 위치한 ‘황산黃山’.
과거에는 중국의 명산으로 이름을 알려 전 세계의 관광객이 방문하던 장소였지만 지금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관광객은커녕 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야산.
마치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은 야산과도 같았는데 딱 하나 예외인 장소가 있었다.
카앙! 카앙!
황산의 정상 인근에 위치한 절벽.
그 아래쪽에 암석을 깎아 만든 공방이 있었는데 위쪽의 환풍구로는 쉴 새 없이 연기가 나오며 안쪽에서는 우렁찬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이 없어진 야산에서 홀로 인기척을 드러내는 건물. 그 입구에서 다섯 살쯤 되는 소녀가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흐으음…….”
밖으로 나온 소녀가 양손으로 쥐고 있던 휴대폰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고, 곧장 입구 근처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먹통이었던 휴대폰에 데이터가 잡힌 순간. 소녀가 두 눈을 반짝이며 작은 손으로 휴대폰을 이리저리 두드리기 시작했다.
“오…….”
장난감처럼 휴대폰을 이리저리 사용하는 소녀.
휴대폰을 쓸 줄은 알지만 게임을 한다거나 영상을 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인터넷에 자신이 알고 있는 단어를 검색하면서 떠오르는 것들을 읽어보았다.
그렇게 한창 휴대폰에 빠져들려던 찰나. 문득 이상한 글귀가 소녀의 눈에 들어왔다.
“음……?”
그 이상한 내용에 소녀가 잠시 빤히 바라보다가 곧장 공방을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후웅!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엄청난 열기.
어지간한 고위영웅들도 질색할 만큼 뜨거운 상태였지만 소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계속해서 달려갔다.
카앙! 카앙!
안으로 들어갈수록 쇳소리가 점점 커져가더니 이내 귀가 저릿해질 정도로 변한다.
그에 소녀는 검은 솜뭉치 두 개를 양 귀에 꽂아 넣은 다음 계속해서 공방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황산의 안쪽 깊숙이에 세워진 화로 앞에 도착했을 때.
“─무슨 일이냐.”
쇠를 두드리던 이가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머리와 눈썹,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
얼굴만 보면 신선처럼 보였지만 핏빛처럼 붉은 도복에 190cm를 넘기는 키가 더해지면서 어딘가 흉흉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다가가기는커녕 말조차 쉽게 걸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 하지만 소녀는 전혀 겁먹지 않고 이야기했다.
“이상한 글이 있어요.”
“이상한 글?”
“여기요.”
소녀, 자신의 손녀가 내민 휴대폰을 건네받은 노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뭘 봤기에 쉬는 시간인데도 달려와서 보여주려는 것일까. 그에 노인의 시선이 휴대폰으로 향했다.
[바벨, 3주 뒤 특별지구 게헨나에서 생도들 간의 토너먼트 개최. 상품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철의 무구’]
[이세훈 “성화공이 남긴 기술은 이미 퇴물. 자신의 기술이 새로운 진리가 될 것.”]
“…….”
휴대폰에 뜬 뉴스를 본 노인, 성화공 리 켄세가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었다.
‘……미친 건가?’
최근에 유명세를 제법 얻었다고 듣긴 했지만 제자도 아니고 감히 자신을 걸고넘어지다니.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순간적으로 끓어올랐지만 리 켄세는 금방 동요를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내용을 살펴보았다.
‘바벨이라면…… 보나마나 루트비히 그놈 짓이겠군.’
그딴 연구에 관심 없다고 연락을 끊었더니 이런 유치한 방법으로 도발하다니.
여기서 반응해 주는 것이야말로 상대가 노리는 것이었기에 리 켄세가 무시하려던 찰나.
“할아버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어린 손녀, 리 페이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퇴물이야?”
단어의 뜻도 제대로 모른 채 뉴스에 적힌 내용을 고스란히 물어보는 리 페이.
그 악의 없는 순수한 물음에 리 켄세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가서 짐 싸거라.”
황산에 틀어박혀 있던 거인이 주제도 모르는 애송이를 박살 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