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85화
바벨의 전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까마득한 상공.
이전에도 와본 적 있는 곳이었기에 이세훈은 당황하지 않고 자신을 불러낸 루트비히를 바라보았다.
“준비하시느라 고생 많으셨겠네요.”
“고생이랄 게 있겠나. 내가 한 일이라고 해봐야 장소를 제공한 것뿐인데.”
태연하게 대답하는 루트비히의 모습에 이세훈이 확장된 바벨을 힐끔 보았다.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저만한 크기의 아공간을 한 달 넘게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한 번 만에 현실로 꺼내서 기존의 공간과 결합시켰다.
겉보기에는 간단해 보여도 공간 충돌의 방지, 결합 중에 붕괴나 직후에 일어나는 물리적인 현상 등등 감안해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만약 다른 건설사였다면 건물을 하나씩하나씩 이동시켜서 몇 달 동안 꼬박 작업을 이어나갔으리라.
‘뭐, 어떻게 보면 틀린 말은 아니네.’
자신들 기준에서야 어려운 일이지 완등자의 기준에서는 그냥 적당히 힘을 사용한 수준일지도 모른다.
새삼스레 시선의 차이를 깨달으며 이세훈이 저 멀리 보이는 게헨나와 파라데이를 바라보았다.
“시설은 바벨이랑 협력해서 지은 겁니까?”
“그런 곳들도 있지만 중요한 시설은 양측에서 직접 만들었네. 동맹관계라고 해도 기밀까지 공유할 수는 없으니.”
“어느 정도 거리가 있네요.”
“장소만 빌려줬다고 생각하게나.”
루트비히가 UD그룹과 순례교에게 제공한 것은 어디까지나 바벨의 인근에 인접해 있는 땅일 뿐.
그 위에 어떤 시설을 짓고 무엇을 연구할지는 각 세력에게 자율적으로 맡긴 것이다.
“그래도 다들 적극적으로 나섰네요. 저는 조금 조심스럽게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첫 기획 단계 때는 그랬었지. 하지만 도중부터 마음이 바뀌었는지 아낌없이 투자하더군.”
무엇이 두 완등자의 마음을 바꾼 것일까. 잠시 생각해 보던 이세훈은 바로 떠오른 것을 물어보았다.
“저때문인가요?”
“없다고는 못 하겠군.”
본래 위르겐이나 칼이나 만마전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형식적인 동맹만 갖출 생각이었다.
거기에 루트비히가 따로 제안을 하고 이세훈이 두 사람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다.
“다만 자네만 있었다면 그냥 따로 영입해 가려고 했었겠지. 그리되면 곤란하기에 나름대로 조건을 내걸었다네.”
루트비히가 두 완등자에게 내건 조건. 그 이야기에 이세훈이 두 눈을 빛냈다.
‘저게 김인철과 관련된 건가.’
도대체 뭐길래 두 완등자의 생각을 바꾼 것일까.
고유스킬과 관련된 부분이기에 어떤 식으로 물어봐야 할지 이세훈이 고민하던 그때. 루트비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전에 여기서 자네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는가?”
“음……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고 하셨죠.”
바벨을 루트비히가 꿈꿔온 이상적인 장소로 만들기 위한 연구.
그 결과를 앞두고 있었기에 몽환마의 토벌에 도움을 줄 수 없어 이세훈에게 양해를 구했었다.
‘영웅의 반지를 준 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그 뭔지 모를 연구의 결과가 드디어 나온 것일까. 이세훈의 시선에 루트비히가 담담히 이야기했다.
“아직 완벽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윤곽을 잡아내는 데 성공했다네. 그래서 가장 먼저 자네에게 보여주고 싶네만…… 어떤가?”
루트비히가 오랫동안 비밀리에 진행해 온 연구.
다른 사람 같았으면 냉큼 수락했겠지만 이세훈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봐도 되나?’
설마 루트비히가 이상한 연구를 했을까 싶지만 세상일은 또 모르는 법이다.
별생각 없이 갔다가 수상한 점을 알아차리고 ‘이래서 눈치 빠른 생도는 싫다니까.’ 같은 소리를 들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근데 그런 쪽이면 거절해도 마찬가지네.’
어느 쪽이든 들은 시점에서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이세훈은 생각을 정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겠습니다.”
위르겐과 칼을 설득시킨 것이 저 연구라면 그렇게까지 이상하거나 위험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세훈의 대답에 루트비히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바로 가도록 하지.”
주변의 공간이 벗겨진 순간. 새하얀 공간을 스쳐지나갔다가 곧장 다른 장소로 바뀌었다.
대형 화물트럭 두 대가 오가도 여유가 있어 보이는 넓은 통로와 굳게 닫혀 있는 거대한 문.
딱 봐도 심상치 않은 시설에 이세훈이 주변을 살폈다.
‘여긴…… 지하인가?’
지상에 있는 장소로 보기에는 규모가 커 보였고 무엇보다도 주변에서 엄청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것을 보건데 마력을 공급하는 파이프라인.
규모를 보면 지하 깊숙이에 있는 메인파이프가 분명했다.
‘지하시설이라…… 그러고 보니 예전에 주작이 숨겨져 있던 장소도 지하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혹시 여기가 그 장소인 걸까.
이세훈이 여러 생각을 떠올리는 동안 루트비히가 앞으로 손을 뻗었다.
쿠구궁─
거대한 문이 양옆으로 천천히 열렸고, 안쪽의 풍경이 그 틈새로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벽과 천장을 가득 채운 거대한 파이프들. 중심에는 동력원으로 보이는 거대한 붉은 구체가 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이세훈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불꽃?’
태양을 연상케 하는 붉은 구체.
바깥으로 새어나오는 열기는 없었지만 안쪽에는 쉽게 가늠이 안 될 정도로 막대한 힘이 마구 끓어오르고 있었다.
저 불꽃의 힘이 파이프를 타고 바벨 전역에 공급되고 있는 걸까. 이세훈이 신기한 눈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그때.
스륵
구체의 안쪽에서 여섯 개의 새하얀 눈동자가 나타났다.
촤아악!
완벽한 구체였던 불꽃이 단숨에 거대한 새의 형상으로 변했고, 날개를 활짝 펼쳐낸 주작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드디어 이날이 왔는가!!]
쿠구궁!
단순히 몸을 펼쳤을 뿐인데 연결된 파이프들이 붉게 달아오르며 시설 전체가 뒤흔들린다.
감정의 동요만으로 과부하를 일으키려는 주작의 힘에 이세훈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저놈 저거 엄청 세졌네.’
습격 사건 때와는 비교하는 게 무의미하며 토벌당하기 전, S급 마수 시절과 비교하더라도 부족함이 없어보였다.
힘을 회복한 것이 그리도 좋은지 사방으로 위압감을 흩뿌려대는 주작의 모습에 이세훈이 눈매를 찌푸렸다.
[오늘따라 조용하군 그래. 내 힘을 보고 겁먹은 건가?]
“…….”
[그래. 그럴 수밖에 없겠지. 네놈이 부려먹었던 분신은 지금과 비교한다면 깃털 하나 수준. 아무리 괴물 같은 네놈이라도…….]
“그거.”
주작이 의기양양하게 이야기하던 그때. 이세훈이 손가락으로 몸을 가리켰다.
“그 불꽃 어디서 난 거냐? 네 거 아니잖아.”
본래 주작의 육체를 이루던 불꽃보다 색도 옅었고 무엇보다 그 성질이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세훈을 신경 쓰이게 만드는 것은 그 불꽃에서 기시감이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
자신이 기억하던 것보다는 못하지만, 분명히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이세훈이 회귀 전의 기억까지 들춰보는 사이 주작의 눈동자들이 파르르 떨렸다.
[이…… 건방진…….]
전성기를 넘어선 자신을 보고도 저리 건방지게 군단 말인가. 주작이 분노를 드러내며 이세훈에게 달려들려던 그 순간.
“많이 흥분했군.”
후웅!
루트비히의 오른손 위에 나타난 붉은색의 정육면체.
본래 그런 형태라기보다는 공간마법에 의해 압축된 느낌이었는데 루트비히가 그것을 움켜쥐자 주작의 몸이 멈칫했다.
[크윽……!]
심장을 쥐어 짜이는 감각.
아무리 전성기를 넘어섰다고 해도 근본적인 약점은 극복할 방법이 없었다.
‘아니. 어느 정도는 가능하겠지지만…….’
그래 봐야 저 괴물에게 가로막혀 제대로 복수도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자신의 계획과 어긋났기에 주작이 빠르게 화를 억눌렀다.
‘지금부턴 현명하게 움직여야 한다.’
자신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저 건방진 녀석과 맺어진 계약을 파기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저 애송이가 자신을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을 직접 보여줘야만 한다.
‘위협은 힘들어 보이니 손등에 있는 문양을 매개체로 사용해서 폭주를…….’
주작이 자신의 지식을 총동원해서 방법을 떠올리던 그때. 루트비히의 곁으로 다가간 이세훈이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그거 잠깐만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알겠네.”
루트비히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작의 심장을 이세훈에게 건넸고, 그 모습을 본 주작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잠깐…….]
푸욱!
주작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이세훈이 심장에 왼손을 찔러 넣었고, 화속성마력인 작염륜을 끌어올려 안쪽의 불꽃을 마구 휘젓기 시작했다.
[끼에에엑!]
몬스터로 태어나 난생 처음 겪는 고통.
상상을 초월한 감각에 주작이 온몸을 비틀며 괴성을 내질렀고, 그 반응을 본 이세훈이 혀를 찼다.
“심장 좀 후벼 판 거 가지고 호들갑은…….”
[무슨…… 미친…… 소리를…… 끼에에엑!]
이세훈을 위협하기는커녕 장난감처럼 농락당하는 주작.
그사이 이세훈은 계속해서 심장을 주물럭거리며 육체를 이루는 불꽃을 살폈고, 이내 그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학원장님. 이 불꽃은 도대체 뭡니까?”
알고는 있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알아봐서는 안 된다. 이세훈의 물음에 루트비히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건 성화공의 불꽃일세.”
인류 최고의 대장장이라 불리는 성화공 리 켄세.
그의 불꽃이 바벨의 지하시설에서, 그것도 주작의 육체가 되어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에 이세훈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성화공은 바벨과 협력은커녕 적대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완등자.
그런데 도대체 무슨 수로 그의 불꽃을 얻은 것일까. 그런 이세훈의 의문을 알아차린 듯 루트비히가 설명을 이어갔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완등자가 되기 직전의 불꽃이라고 해야겠군.”
“직전이요?”
“과거에 그 친구와 거래를 한 적이 있네. 내가 가진 재료 중 하나를 넘기는 대신 완등자가 되기 전까지 사용했던 화로를 받아냈었지. 그리고…….”
계속되는 루트비히의 설명에 이세훈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건 좀 놀라운데.’
성화공의 불꽃을 오랫동안 머금어왔던 화로에 주작을 불어 넣어 얼마 안 되는 불씨를 부활시키다니.
방법도 참신하지만 무엇보다도 대단한 것은 그렇게 해서 불씨를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제련에 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해볼 만…….’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던 이세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까지 품고 있던 모든 의문이 자연스럽게 맞물렸고, 이내 한 가지 결론을 만들어낸다.
주작의 몸을 이루고 있는 성화공의 불꽃을 바라보던 이세훈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물었다.
“김인철 교수님이 도와주신 겁니까?”
이세훈의 물음에 루트비히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보았다.
“그것도 알 수 있는가?”
“조금이지만 그분의 흔적이 보여서요.”
실제로는 오늘 막 공급을 시작한 듯한 시설, 그리고 김인철의 인연레벨이 오른 것을 토대로 결론을 낸 것이었지만 마냥 없는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알고 보니까 보이네.’
주작의 불꽃에서 느껴졌던 희미한 기시감.
그 안에는 김인철이 오랫동안 연구해온 화천태도의 불꽃도 조금이지만 섞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어디 계시나요?”
“으음…….”
루트비히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그 반응에 이세훈이 살짝 긴장했다.
설마 진짜로 ‘알아버렸네’ 같은 대답이 돌아오는 것인가. 무슨 일이 일어나도 대응할 수 있게 이세훈이 준비하던 찰나.
“자네의 재능을 너무 얕봤군. 이런 경우도 생각해 뒀어야 했는데…….”
한숨을 내쉰 루트비히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게. 이전의 습격 사건 이후…….”
루트비히는 김인철의 고민과 선택에 대해서 말해주었고, 그 내용을 들은 이세훈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몸을 영원히 불태워 주작에게 지식을 전수하고 화천태도에 갇혀 있던 영혼들을 해방시켰다니…….’
어느 정도 고된 길을 고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김인철이 겪었을 고통에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이세훈은 금방 생각을 떨쳐냈다.
‘이건 내가 뭐라고 할 게 아니지.’
김인철이 자신의 죄와 마주하기 위해 선택했고, 그 이후로 속죄를 이어나가며 나름의 결실을 얻었다.
거기에 자신이 이런저런 말을 보태봐야 그 선택을 더럽히는 것밖에 되지 않으리라.
“그럼 교수님은 어떤 상태입니까?”
“화로와 함께 주작의 불꽃 속에 섞여 있는 상태라네. 자아가 희미해져 육체의 형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됐지.”
쉽게 비유하자면 크기만 같고 그림은 다른 카드뭉치 두 개를 무분별하게 섞어놓은 상태.
주작과의 계약 때문에 죽지는 않겠지만 자아가 저 정도로 희미해졌다면 계속해서 안쪽을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요.”
“……환멸했나?”
루트비히의 물음에 이세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교수님이 직접 선택하신 거니까요. 학원장님에게 뭐라고 할 이유는 없죠.”
방법이 과격하긴 했지만, 그 덕분에 김인철이 바라던 일을 해낼 수 있었으니 장단점이 있다고 보는 것이 편했다.
“이해해 줘서 고맙네.”
“아닙니다. 그런데 성화공님의 불꽃을 되살리는 게 학원장님의 목적이셨습니까?”
이세훈이 화제를 돌리면서 묻자 루트비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과제 중 하나지. 전부는 아닐세.”
“그럼…….”
“완등자들의 권능을 모두 재현해 내는 것.”
이쪽의 눈치를 살피는 주작을 바라보던 루트비히가 담담히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힘을 모든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기술’로써 승화시키는 것이 나의 목적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