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83화
새로운 월요일의 아침.
평소처럼 점검을 마치고 침대에서 일어난 이세훈은 몸을 씻은 다음 옷을 갈아입었다.
‘이것도 오랜만이네.’
거울에 비친 생도복을 바라보며 피식 웃은 이세훈이 거실 밖으로 나갔고, 창가로 향해 바벨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건물을 빠져나와 길 위를 걷고 있는 수많은 생도와 사람들. 짧으면서도 길었던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날이 오긴 오는구나.’
보통은 여름방학이 끝났다고 하면 다시 강의를 나갈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겠지만 이세훈은 오히려 편안함을 느꼈다.
그동안 완등자에 십악, 주시자 등 세계를 주름잡는 거물들과 어울렸다보니 바벨에서 공부하는 게 휴가 같았던 것이다.
‘뭐, 그렇다고 예전처럼 여유롭게 지내진 못하겠지만.’
1학기 때는 힘을 키워가는 상황이었기에 안에서 얌전하게 지냈지만,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난 만큼 바벨 밖으로도 능동적인 활동이 필요한 것이다.
‘이건 차차 생각해 볼까.’
연구할 기술이나 만들어낼 물건들도 많기 때문에 바벨에서 지낸다고 해서 마냥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아니다.
당분간은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며 이세훈이 기숙실 밖으로 나와 현관으로 내려왔다.
“거봐. 내가 온다고 했지?”
“크윽…….”
현관을 바라보며 수군거리는 몇몇 생도들. 그 모습에 이세훈이 시선을 옮기자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이젠 다들 익숙하구만.’
피식 웃은 이세훈이 현관 밖으로 나갔고, 앞쪽에 기다리던 에리카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서 마주보았다.
“안녕.”
짧고 간략한 인사와 단정한 옷차림.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는 에리카의 모습에 이세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은 아침.”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이 함께 역으로 향했고 주변 생도들로부터 자연스레 시선들이 쏟아졌다.
겉보기에는 1학기와 큰 차이가 없는 광경. 하지만 그 안쪽에 있는 이세훈은 어느 정도 변화를 느꼈다.
‘이젠 나한테 더 관심이 많은 건가.’
1학기 때까지만 해도 에리카와 반반씩 시선을 나눠가졌다면 지금은 자신에게 압도적으로 모여 있다.
시선 속에 담겨 있는 선망과 꺼림칙함을 보건대 아마 몽환마의 죽음과 환락가의 붕괴에 관여했다는 뉴스를 보고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 분명하리라.
‘위르겐이 했다고 둘러대길 잘했네.’
지금이야 그냥 관계자라고 알려져서 이 정도지 만약 몽환마 토벌전의 주모자라고 알려졌다면 쳐다보기는커녕 주변에서 싹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만마전에게 선전포고를 날린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인데 누가 가깝게 지내고 싶겠는가.
‘뭐. 그건 그것대로 장점이…… 음?’
이세훈이 주변의 시선을 살피며 걷고 있을 때. 문득 옆에서 묘한 움직임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
아무런 말없이 나란히 걷고 있는 에리카.
그 모습 자체는 이전과 크게 다를 게 없었지만, 거리가 이상할 정도로 가까워진 것이다.
어깨가 닿은 것처럼 보일 만큼 아슬아슬하게 붙어서 걷는 에리카. 그 모습에 이세훈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인연관계 때문인가?’
갈망이라는 다소 집착적인 관계가 형성됐으니 이전보다 더 달라붙어도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다.
이 행동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이세훈은 일단은 이대로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어디까지 할지 미리 봐두는 게 좋겠지.’
그래야 향후 에리카와의 인연관계를 바꾸고 이노우에 가문과 엮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이세훈이 에리카와 함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역에 도착했을 때.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이크가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좋은 아…… 침……?”
옆에 딱 붙어 있는 에리카의 모습에 제이크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번갈아보더니 이내 긴장하며 물었다.
“혹시 둘이…….”
“아니야.”
“그렇지? 휴우…….”
누이에게 전화를 해야 하나 싶었던 제이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에리카는 말없이 이세훈을 올려다보았다.
“…….”
마치 그렇게까지 단호하게 대답했어야 했냐는 듯이 항의하는 눈빛. 시선이 조금 따갑긴 했지만 회귀 전에도 종종 겪었던 일이기에 이세훈은 능숙하게 흘려 넘겼다.
“빨리 가자. 수석들은 일찍 오랬잖아.”
“아아. 그래야지.”
“응.”
세 사람이 함께 트램에 올라탔고, 잠시 후 바벨의 중앙광장 역에 내렸다.
곧 있을 개학식을 준비하기 위해 북적거리는 중앙광장.
생도들은 정해진 자리에 착석해서 대기했고 행사를 담당하는 직원들이나 조교, 교수는 모두가 바쁘게 움직였다.
‘입학식 때보다도 규모가 더 크네.’
사방에 설치된 방송사의 카메라 수도 엄청났고 준비된 좌석의 수도 어림잡아 두 배는 더 많아졌다.
이번 학기에 편입해 오는 생도들의 수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니 아마 외부에서 찾아온 방문객들의 비중이 높으리라.
‘그렇게까지 자신감이 넘치는 건가.’
세 명이서 도대체 뭘 준비했기에 이렇게까지 자신감이 넘치는 것일까.
이세훈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뭔가 보이는 게 없는지 주변을 살피고 있을 때.
“음?”
어디선가 느껴지는 묘한 시선. 그에 고개를 돌리자 행사장의 설비 뒤로 숨는 익숙한 갈색머리칼이 보였다.
‘저건 또 뭔…….’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이세훈이 옆에 딱 붙어 있는 에리카에게 이야기했다.
“에리카. 저기 뒤쪽에 숨어 있는 녀석 좀 데리고 와봐.”
“응.”
고개를 끄덕인 에리카가 손을 뻗어 생도복에 스며들어있던 날개옷, 봉신우의를 앞쪽으로 날려 보냈다.
“그엑?!”
설비 뒤에 숨은 상대를 낚아챈 봉신우의가 잽싸게 바깥으로 끌고 나왔고, 이세훈이 팔짱을 낀 채 상대를 바라보았다.
“아…… 그…… 안녕?”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채 어색한 미소를 짓는 레아.
숨어서 지켜보던 것도 수상쩍은데 앞으로 불려나오니 눈도 제대로 못 맞추고 무슨 일이 있을까봐 초조해한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 완전히 딴판인 그 모습에 이세훈이 눈을 가늘게 뜨며 바라보았다.
“왜 숨었어?”
“그, 그야 우리 후배 얼굴을 보려니까 쑥스…….”
“연구하던 거 날려먹었냐?”
“…….”
갑작스러운 기습에 애써 미소를 짓던 레아의 얼굴이 경직되었고, 이내 식은땀을 삐질 거리며 이야기했다.
“그렇게 큰 실수까진 아니고 약간의 사고가…….”
“아!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보르시파 쪽 상점가 일대가 마비됐었다던데 혹시 그거예요?”
“…….”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이크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고 설명하려던 레아의 표정이 다시 한번 경직되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아주 거하게 사고를 친 것 같은 레아의 모습에 이세훈이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알겠지?”
“네, 넵…….”
레아와 이야기를 간단히 끝냈을 때. 이번에는 또 다른 쪽에서 익숙한 기척들이 느껴졌다.
“안에 안 들어가고 여기서 뭐 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다가오는 루이제.
날이 더워서 그런지 검은 색 티셔츠에 반팔 와이셔츠만 걸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이세훈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루이제의 뒤쪽에 염성하와 아미르가 나란히 서 있었기 때문이다.
“……니들 그렇게 친했냐?”
이전에 아미르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걸 보고 어느 정도 연락을 하고 지낸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같이 모여서 다닐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세훈이 의외인 표정으로 바라보자 세 사람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이 새끼들이랑 왜 같이 다녀?”
“헛소리하지 마라.”
“우연히 마주친 겁니다. 이상한 소리하지 마십쇼. 형님.”
서로 질색하면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곧장 거리를 벌리는 세 사람.
사이가 안 좋으면서도 합은 척척 맞는 그 모습에 이세훈이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이놈들. 진짜 영향을 많이 받았네.’
회귀 전의 삼견을 보는 듯한 느낌에 이세훈이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고 있을 때. 그 뒤에 있던 세 사람이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뭔가 엄청 편안해하는 느낌인걸.’
‘저 셋이구나.’
‘허. 후배가 저렇게 웃을 줄도 아네.’
제이크와 에리카, 레아가 상대를 물끄러미 보고 있을 때. 맞은편의 세 사람들 역시 마주 보았다.
‘아직도 쟤랑 같이 다니나.’
‘제이크였던가…… 꽤 강해졌군.’
‘인형사의 딸이라…… 위험해 보이는데.’
에리카를 살피는 루이제와 제이크를 훑어보는 염성하. 그리고 레아를 경계하는 아미르.
이세훈을 가운데에 두고 여섯 명이 서로를 탐색하는 사이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힐끔거리며 살펴보았다.
‘저게 이세훈 라인인가?’
‘부럽네…….’
1학기 때는 이세훈이 어느 세력이 붙을지 궁금해 하면서 바라봤다면 이제는 누가 이세훈에게 선택받을지 궁금해한다.
한번 다가가볼까 싶으면서도 주변에 포진한 여섯 명 때문에 모두가 눈치만 보고 있을 때.
“이세훈 생도.”
류은하가 그 사이를 간단히 비집고 들어왔다.
“학원장님께서 학년 수석은 따로 모이라고 하셨습니다.”
“아, 그래요? 나 먼저 들어간다.”
이세훈이 손을 흔들며 류은하를 따라나섰고, 그 뒷모습을 본 여섯 명이 살짝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들어갈지 은근히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빼앗기다니. 그렇게 모두가 허탈해하고 있을 때.
스윽
걸어가던 류은하가 슬쩍 고개를 돌렸고, 한 사람씩 눈을 마주친 다음 다시 고개를 돌렸다.
“…….”
뭐라고 따로 말을 하진 않았지만 그 시선에 무슨 의미가 담겨져 있는지는 눈을 마주친 모두가 이해했다.
방금까지 서로를 경계하고 있던 여섯 명이 자연스럽게 시선을 교환했고.
‘저쪽부터 해결할까.’
암묵적으로 동맹을 맺었다.
* * *
“왜 그러셨어요?”
무대 쪽으로 걸어가던 이세훈이 류은하를 바라보며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류은하도 자신에게 나름의 애착이 있는 것은 알지만 방금 고개를 돌리면서 보냈던 도발은 본래 성격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통의 적이 있으면 뭉치기 쉬운 법이니까요.”
그 물음에 류은하가 담담히 대답했고, 이세훈이 의외라는 듯이 바라보았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고 그러신 거라고요?”
“학과장으로서 그 편이 좋다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류은하의 대답에 이세훈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하긴. 서로 싸우는 것보다는 낫겠네.’
고만고만한 녀석들끼리 치고 박고 싸워봐야 얼마나 자극이 되겠는가.
그보다는 류은하처럼 사회적으로나 무력으로나 훨씬 강한 상대를 보고 자극을 얻는 쪽이 좋기는 하리라.
“생각보다 신경을 많이 쓰시네요.”
“제가 맡은 역할이니까요. 그리고…….”
이세훈을 힐끔 본 류은하가 무표정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연기로만 그랬던 건 아닙니다.”
견제하는 ‘척’했던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여섯 명에게 함부로 넘보지 말라고 견제했다.
자신의 무구를 독점하고 싶어 생도들한테까지 견제하는 류은하의 모습에 이세훈이 쓴웃음을 지었다.
‘적당히 조절은 하니까 그래도 괜찮나.’
류은하와 함께 안쪽으로 걸어가던 이세훈은 문득 한 가지를 떠올리며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소송 쪽은 어떻게 되고 있어요?”
세라핌 길드와 스폰서 계약 해지를 두고 벌이고 있는 소송.
그 진행에 관해 물어보자 류은하가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지금으로서는 반반이군요. 파고들 빈틈이 있긴 하지만 그쪽도 쉽지 않은 터라…….”
소송이 쉽지 않은지 난처해 보이는 류은하. 그 반응에 이세훈이 담담히 대답했다.
“그럼 제가 도와드릴게요.”
“예? 그러실 필요는…….”
“다음에 학과장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 그 일 때문에 발목을 잡히면 짜증나잖아요. 제가 좋을려고 하는 거니까 사양하지 마세요.”
이세훈의 이야기에 류은하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만간 자료를 정리해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편하실 때 가져다주세요.”
이세훈이 류은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관계자 중 한 사람이 급히 다가왔다.
“류 학과장님. 저쪽으로 잠시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고개를 꾸벅인 류은하가 관계자와 함께 어디론가 향했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세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다른 건 몰라도 주시자랑 연관됐으면 빨리 해치워야지.’
그동안은 세라핌 길드가 별거 없는 곳이라고 판단해 놔뒀지만, 그 배후에 『계승』이 연관되어 있다면 또 다르다.
류은하에게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만큼 가급적 빠르게 계약을 파기하고 저쪽과의 인연을 끊어두는 것이 안전하리라.
‘그리고 몸 상태도 한 번 자세히 살펴보고.’
이세훈이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앞쪽에서 익숙한 사람이 손을 흔들었다.
“여기야. 여기.”
무대의 바로 앞좌석에서 손짓하는 아리아.
왼쪽에 앉아있는 렌과 마누엘을 본 이세훈은 그곳이 학년수석 자리임을 깨닫고 걸어갔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오늘은 중요한 자리니까. 다른 때라면 몰라도 이번에는 빼먹을 순 없지.”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아리아가 비어 있는 오른쪽 자리를 두드렸다.
“여기 앉을래?”
“학년 순서대로 앉는 게…….”
“괜찮아. 앉아도 돼.”
저번에 생긴 인연관계 때문인지 이전보다도 집요하게 나오는 아리아. 그 모습에 이세훈이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그때.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모범이 되어야할 학년 수석들이 무질서한 모습을 보여서야 되겠습니까.”
아리아의 옆에 앉아있던 렌이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크흠. 그렇죠.”
이유야 어찌 됐든 아리아 옆에 앉아서 좋을 건 없다.
뭐라고 또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이세훈이 잽싸게 마누엘의 옆에 앉았고, 옆쪽에서 흉흉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저 둘은 전보다 사이가 더 안 좋아졌네.’
렌도 인연관계가 생겼던 걸 생각해보면 자신의 중요도가 커진 만큼 더 노골적으로 싸우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래저래 1학기와 비교하면 많이 변했다고 이세훈이 생각하던 찰나 옆에 앉은 마누엘이 손등을 툭툭 두드리며 속삭였다.
“이제 방학 끝났으니까 돌려줘.”
“아. 맞다 참.”
아공간 포켓에서 마누엘에게 빌렸던 연금무구, 노란색 무늬가 새겨진 원통형 막대기를 꺼낸 이세훈이 곧장 돌려줬다.
“잘 썼어. 부서진 곳은 없으니까 걱정 말고.”
“흐음. 그런 거 같네.”
연금무구를 챙겨 넣은 마누엘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뭔가 건진 건 있었어?”
“뭐를?”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해서 가져갔었잖아.”
“아아. 그거라면…….”
마누엘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연금무구는 몽환마와의 싸움에서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챙겼던 것뿐. 그 이상의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대답할지 잠시 고민하던 이세훈은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뭐. 그냥 평범하던데? 생각보다 대단하진 않더라.”
“그래? 흐음…….”
이세훈의 평가에 눈매를 찌푸리며 생각에 잠긴 마누엘.
뭔가 고민하는 듯한 모습에 이세훈이 이유를 물어보려던 찰나. 광장의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20분 뒤 2학기 개학식을 진행하겠습니다. 모두 제 자리에 착석해 주시고…….]
개학식이 다가오면서 주변이 더욱더 분주해졌고, 비어있던 자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꽉 차기 시작했다.
어느새 중앙광장을 가득 채운 수만 명의 인파.
대기 중이던 카메라의 불이 들어오고 주변을 비추며 현황을 내보낸다.
‘흐음. 나중에 물어보자.’
우선은 개학식에 집중하기로 하며 이세훈은 무대 위에 놓인 낡은 단상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뭘 준비했기에 그리 자신만만한 걸까…….’
얼마 전부터 개학식에 있을 중대발표에 대해서 떡밥을 뿌려대던 바벨.
안 그래도 완등자들의 동맹이라고 주목받던 상황에 그런 이야기까지 더해지면 당연히 사람의 기대는 끝없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
과연 루트비히는 그것을 충족할 수 있을 것인가. 이세훈이 궁금해 하던 그때.
저벅저벅
돌연 무대 위로 올라와 단상을 향해가는 루트비히.
그 갑작스러운 등장에 조금 어수선하던 중앙광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모두의 시선이 바벨의 주인에게 향했다.
그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루트비히가 단상에 서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바벨은 수많은 시련을 넘어 드디어 새로운 시대로 한 발자국 내디뎠습니다.”
중앙광장에 울려 퍼지는 루트비히의 목소리.
담담한 이야기인데도 무언가가 끓어 넘치는 듯했고, 모두가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것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뿐. 앞으로 여러분들이 넘어서야 할 새로운 시대를 지금 보여드리겠습니다.”
루트비히가 양손을 펼칠 순간. 중앙광장 전체가 떨리기 시작했다.
쿠구궁─!
지하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거대한 진동.
그 떨림이 눈 깜짝할 사이에 바벨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동시에 루트비히의 머리 위로 거대한 화면이 떠올랐다.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바벨 전역의 모습.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가 싶어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던 그때. 화면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콰아앙!!
바벨의 서쪽 바다와 남쪽바다. 아무것도 없던 텅 빈 장소에 거대한 ‘땅’이 솟구쳐 올랐고, 이내 자연스럽게 기존의 바벨과 맞물린다.
검은 마력과 언데드로 가득 차 있는 도시와 거목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도시.
UD그룹과 순례교가 직접 관리하는 특별지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저…… 저게…….”
“무슨…….”
저만한 규모의 도시들이 한 번에 나타나다니.
승천제 루트비히가 선보인 그 엄청난 공간능력에 모두가 경악하며 화면을 바라보았고.
[대상 ‘김인철’의 인연레벨이 Lv.3로 상승합니다]
[인연레벨이 상승함에 따라 관계가 심화됩니다.]
“……어?”
뜬금없는 알림창에 이세훈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