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80화
학술회가 열리기 전날.
맨해튼으로부터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숲속에 도착한 이세훈은 루이제를 바라보았다.
“내일 여기서 좌완을 죽일 거야.”
“……여기서?”
이세훈의 이야기에 루이제가 묘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이는 거라고는 온통 나무 밖에 없는 광활한 숲.
인근에 민가가 없어 날뛰기에는 좋아 보였지만, 그 이외에는 별다른 장점이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너무 멀지 않나?’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으슥한 숲속까지 유인하면 아무리 그래도 도중에 뭔가 수상함을 알아차리지 않을까.
그런 루이제의 의문을 읽어낸 이세훈이 먼저 이야기했다.
“당연히 직접 데려오는 건 아니고 공간능력으로 맨해튼에서 여기까지 한 방에 날려 보낼 거야.”
“……그게 돼?”
“안 될 건 없지. 잘 봐.”
오른손에 끼워둔 영웅의 반지를 보여준 이세훈이 곧장 우화하는 꿈을 사용했다.
우웅!
반지로부터 흘러나오는 은은한 황금빛.
그 빛을 바라보며 루이제가 뭔가 익숙하다고 느낀 순간. 왼손으로부터 기묘한 떨림이 느껴졌다.
“이건…….”
영웅의 반지와 공명을 일으키는 승천제의 반지.
그 모습에 루이제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이세훈이 빛을 거두며 이야기했다.
“방금처럼 두 반지를 인공적으로 공명시킬 수 있거든. 이걸 이용해서 양쪽에서 동시에 공간능력을 발동하는 거지.”
“그건…… 될 수도 있겠네.”
만약 혼자서 하라고 했다면 자신 없었겠지만 이세훈이 반대편에서 보조해 준다면 못할 것도 없다.
‘애초에 이동하는 게 힘들지, 만드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마냥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루이제는 이세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근데 그놈을 죽여도 되는 거야?”
“죽이기 싫어?”
“그건 아닌데…… 시기적으로 위험하지 않나 싶어서.”
루이제의 입장에서 『여명』의 간부를 죽이는 거야 언제든지 박수갈채를 보내며 환영할 일이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주시자의 각 대표와 만마전의 사절까지 모이는 학술회.
그 위험천만한 날에 그런 일을 벌여도 되는 걸까.
루이제의 물음에 이세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하긴 하지. 하지만 남은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번이 제격이야.”
“문제?”
“내 입지와 관련된 거야.”
주변에 무른 땅을 발로 툭툭 건드리며 이세훈이 담담히 설명했다.
“『여명』에서는 나름대로 대우를 해주고 있지만 외부에서 보기에는 그래봐야 간부 중 하나. 어쩌면 아예 특이한 실험체로 여길 수도 있어.”
당장 『여명』에 합류한 기간도 짧은 데다 대외적으로 처리하는 일도 거의 없다.
한마디로 그럴싸한 직함만 가지고 있는 명예직이 지금 이세훈의 위치였다.
“거기에 좌완이 주변에다가 납치를 하네 마네를 떠들어대기까지 하는데 다른 녀석들이 날 뭐라고 생각할까?”
“으음…… 호구?”
“그러니까 이번에 바로잡아야 한다는 거야.”
앞으로 주시자 내에서 『여명』을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실권을 확실하게 잡아둘 필요가 있다.
그것을 위한 첫 단추가 바로 납치, 반란을 계획한 좌완을 학술회 이후에 본보기로 죽이는 것이다.
“음. 이해했어. 그럼 어떻게 죽일 건데?”
“여기에 함정을 파두고, 내가 그 위로 이동시킨다. 그 뒤는 현장에 있는 네가 알아서 하면 돼.”
“그렇…… 잠깐. 너는 뭐 하고?”
설마 저번처럼 뭔가 실험을 하려는 것인가. 루이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바라보자 이세훈이 담담히 대답했다.
“나도 당연히 합류해서 싸워야지. 다만 경우에 따라서는 늦어질 수도 있어. 그날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만약 좌완이 납치를 실행하고 거기에 협력자가 있다면 당연히 그들을 상대하느라 늦어질 수밖에 없다.
그 이야기에 루이제가 눈매를 찌푸렸다.
‘혼자서 싸우는 건가…….’
이세훈이라면 모를까 자신이 『여명』의 간부를 혼자서 상대할 수 있을까.
그 의문이 루이제의 마음속에서 피어나려던 순간.
“괜찮아.”
이세훈이 담담히 이야기했다.
“무조건 네가 이길 테니까.”
미래를 내다보고 온 것처럼 확신하는 이세훈.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그 모습에 루이제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시겠지.”
* * *
쿠구궁!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른 불꽃의 기둥.
본래 사방으로 무분별하게 퍼졌을 불꽃이 언령의 구조에 따라 일점에 집약되어 솟구쳐 올랐고, 막대한 열풍이 주변을 후려갈겼다.
이세훈과 함께 하루 동안 준비한 함정.
저만한 폭발에 마력을 억제당한 상태에서 당한 만큼 즉사했다고 봐도 무방했지만.
‘준비해 놓은 걸 아낄 필요는 없지……!’
루이제는 망설임 없이 두 번째 언령마법을 발동했다.
【Prominence】키이잉─
언령이 스며든 불꽃의 기둥이 주홍빛으로 빛난 순간. 일대의 마력이 단숨에 빨려 들이며 방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열기를 내뿜었다.
화르륵!
인근의 나무들이 타오르고 땅이 메마른다.
마법진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는데도 그 열기가 느껴질 만큼 무시무시한 화력.
자신이 만들어낸 그 거대한 홍염을 바라보던 루이제는 기뻐하는 대신 눈을 가늘게 떴다.
스륵─
홍염의 안쪽, 주홍빛 불꽃에 그림자가 일렁거리더니 천천히 바깥쪽을 향해 걸어 나온다.
숯으로 만들어진 조각상 같은 몸과 화상 자국 하나 없는 새하얀 왼팔.
그 이질적인 모습에 루이제가 눈매를 찌푸렸다.
“징글징글하네.”
일격에 죽일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도 안 하긴 했지만 설마 저런 몰골로 버틸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루이제가 노골적으로 혐오스럽게 바라보고 있을 때. 입가로 보이는 곳이 천천히 갈라졌다.
“이유…… 가…… 뭐지……?”
온몸이 숯덩이가 됐는 데도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글렌. 그 모습에 루이제가 이세훈과 함께 미리 정해둔 답을 이야기했다.
“그분의 뜻을 곡해하는 무지한 녀석은 필요 없어.”
루이제의 대답에 글렌의 몸이 멈칫했고, 이내 전신이 크게 들썩거렸다.
“하…… 하하…… 하……!”
억지로 토해내는 듯한 기괴한 웃음소리.
한 번 웃을 때마다 새카맣게 타오른 몸이 바스라졌지만 그런데도 글렌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웃었다.
마치 지금의 상처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는 모습. 그 압도적인 광경에 루이제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고.
콰아앙!!!
하늘에서 떨어진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글렌의 몸을 산산조각 냈다.
“싸우는 중에 허세는…….”
바위 아래에 깔린 글렌을 한심스럽게 바라본 루이제는 준비해 둔 언령마법을 순차적으로 발동했다.
후우웅!
신체능력과 감각이 단숨에 증폭되고 돌풍이 전신을 휘감으며 모든 움직임을 보조한다.
거기에 두꺼운 백과사전, 아카샤까지 공중에 띄워둔 루이제는 준비를 끝낸 뒤 바위를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누워 있을래?”
콰앙!
루이제가 물어본 순간. 바닥에 꽂혀있던 바위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던져졌다.
하지만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던 루이제는 가볍게 옆으로 피하면서 아래에 깔려 있었던 적을 살폈다.
우드득!
방금 산산조각 났던 몸은 거의 완벽하게 수복되었고, 이마에는 기존에 없던 두 개의 뿔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탐구자의 신체를 이식받은 리전이 아카식에 접속했을 때 나타나는 모습. 즉, 전력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후우…… 잔꾀는 안 통하는 쪽이었군.”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 글렌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카식에 접속하면 재생은 빨라도 뇌에 부하가 걸리기에 최대한 피하려고 했지만, 상대도 그 점을 아는지 틈을 주지 않은 것이다.
‘첫 기습에 입은 피해도 크고…… 이대로라면 10분 정도군.’
그조차도 영구적으로 뇌에 손상이 갈 수 있으니 5분 안에 상황을 정리해야만 한다.
상대가 미리 준비해 둔 장소에서 시간제한을 두고 싸워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내가 무지하다고 했었던가?”
“정확히는 멍청한데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고 했었지.”
“틀린 말은 아니로군. 오늘까지 사람을 잘못보고 있었으니.”
루이제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글렌이 두 눈을 빛냈다.
“그래도 여기서 너를 제압해서 돌아간다면…… 해명할 기회 정도는 얻을 수 있겠지.”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그의 자질을 의심했던 자신의 잘못. 그러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자신의 쓰임새를 증명해 보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착각하는 글렌을 바라보며 루이제가 피식 웃었다.
“진짜 부끄러운 줄도 모르네.”
그 말을 기점으로 두 사람이 동시에 바닥을 박차며 마력을 끌어올렸고, 각자의 마법이 서로를 향해 쏘아졌다.
콰르르릉!
허공에 부딪치며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번개.
그 섬광이 주변을 가린 동안 글렌이 재빠르게 아카식으로부터 힘을 이끌어냈다.
아카식Akashic
정법正法 만상표상萬狀表象
주홍빛으로 이뤄진 네 개의 팔.
신화 속의 아수라와 같이 여섯 개의 팔을 가지게 된 글렌은 그 상태로 제각기 다른 수인을 맺었다.
키이잉─
아카식에 저장된 무한에 가까운 마법들이 글렌의 몸에 깃들었고, 이어서 사방으로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온다.
주변의 땅이 갈라지며 용암이 파도처럼 휘몰아치고 하늘에서는 벼락과 얼음창이 떨어져 내리며 일대를 초토화시킨다.
카가가각!
나무를 간단히 갈라 버리는 바람의 칼날과 갑작스레 나타나 주변을 빨아들이며 짓뭉개는 중력 구체.
고위 마법사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준비했어야 할 마법들이 하나도 아니고 수십 개가 모든 과정을 생략한 채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흐읍……!”
말이 제압이지 자신을 죽일 기세로 쏟아지는 마법들에 루이제는 어설프게 받아치는 대신 계속해서 숲을 내달렸다.
나무를 박차거나 아예 공중에 발판을 만들어 변칙적으로 몸을 비트는 등, 마투학부에서 배운 움직임으로 공격을 완벽히 피해낸다.
콰아앙!
물론 상대도 아무 생각 없이 마법만 쏘아내고 있는 게 아니었기에 완전히 포위될 때도 있었지만, 거기에 틈을 만들어내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Distortion】꿀렁─
쏘아진 언령이 사방에서 날아온 얼음창의 궤도를 조금씩 비틀어 서로 부딪치게 만들어냈다.
파카앙!
수백 개의 얼음창이 허공에서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고, 그 조각들을 바라보던 루이제가 이어서 언령마법을 펼쳤다.
【Diamond Dust】파앙!
사방에 흩뿌려졌던 결정들이 산탄총처럼 쏘아지며 주변의 마법을 모조리 파훼했고, 그 사이로 루이제가 다시금 유유히 포위망을 빠져나간다.
계속해서 잡힐 듯 말 듯 거리를 유지하는 루이제의 모습에 글렌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대로 시간을 끌려는 건가?’
상대에게 시간제한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 굳이 힘겹게 싸워줄 필요는 없다.
수시로 이쪽을 돌아보며 상태를 살피는 루이제의 모습에 글렌이 눈매를 찌푸렸다.
‘계속 쫓아봐야 시간낭비겠지. 그렇다면…….’
루이제의 뒤를 쫓던 글렌이 그대로 멈춰 섰고, 곧장 여섯 개의 손으로 자신의 명치를 움켜잡았다.
우드득!
가슴을 억지로 열어젖힌 글렌은 안쪽에 손을 집어넣어 자신의 심장을 잡아 뽑아 들었다.
본래라면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 하지만 글렌은 아무렇지 않게 다른 손들을 집어넣어 계속해서 자신의 심장을 꺼냈다.
“뭔…….”
그 모습에 루이제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고, 글렌이 여섯 개의 심장을 움켜쥐며 입가를 비틀었다.
아카식에 저장된 육체의 정보를 활용한 심장의 복사. 그렇게 모든 ‘재료’를 만들어낸 글렌이 곧장 심장들을 터뜨렸다.
푸화아악!
사방으로 피가 튀어 오르고, 금술의 조건을 충족하며 그동안 발동하지 못했던 마법들이 체내에 깃든다.
전신에 검붉은 핏줄이 문양처럼 솟구친 글렌이 곧장 새로운 마법을 펼쳐냈다.
아카식Akashic
정법正法 만상축조萬狀築造
쿠구궁!
글렌의 마력이 숲 전체를 훑고 지나간 순간. 저 멀리서부터 거대한 탑들이 하나둘씩 솟구쳐 오르며 검붉은 반구형의 장막을 만들어냈다.
금술을 통해 만들어진 결계.
루이제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퇴로를 막아버린 글렌이 가슴의 상처를 회복시키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이 안에서는 아까처럼 힘 조절을 장담할 수 없다. 그래도 계속할 건가?”
기존에도 정면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는데 지리적인 이점마저 빼앗긴 상태에서 자신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여유롭게 항복을 권유하는 글렌의 모습에 루이제가 허공에 떠 있는 아카샤, 그 테두리에 슬쩍 삐져나온 글귀를 살폈다.
[95%]
‘앞으로 5%인가.’
그 정도라면 충분히 버틸 만하다.
검은 마스크, 하티 너머로 입술을 적신은 루이제가 글렌을 바라보았다.
“쫄았냐?”
“……그렇군.”
어느 한쪽이 죽거나 제압당하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는다. 그 사실을 깨달은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고.
툭
글렌의 피가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마법을 쏘아냈다.
콰가가강!
방금까지의 추격전과 달리 제자리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펼쳐지는 순수한 화력전.
공격을 피하는데 쓸 집중력마저 모조리 마법을 펼쳐내는 데 사용했고, 두 사람 사이로 쉴 새 없이 폭발이 일어나며 주홍빛과 푸른빛의 마력이 번뜩였다.
‘진짜로 받아친다고……?’
자신이 펼쳐내는 마법을 정면에서 받아치고 있는 루이제의 모습에 글렌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카식을 통해 마법의 모든 발동과정을 생략하고, 주변에 펼쳐진 결계로 인해 대기 중의 마력까지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졌다.
그런데도 상대는 자신과 거의 비슷한 속도로 마법을 펼쳐냈고 위력 역시 그렇게 뒤쳐지지 않았다.
‘본래 저렇게까지 강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것도 그자가 만들어낸 건가.’
지금도 저만큼 강하다면 창고에 봉인되어 있는 ‘목소리’를 이식받는다면 얼마나 더 강해질까.
『여명』의 앞날이 밝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한 글렌이 기뻐하며 힘을 이끌어냈다.
우웅!
검붉은 결계가 불길하게 빛났고, 그 안쪽에 있는 마력들이 모조리 글렌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지기는커녕 점점 강해지는 마법들.
그에 반해 루이제는 공방이 계속 될수록 힘이 부쳐오는 것을 느꼈다.
언령의 형성, 마력의 장악, 공격의 분석. 머리가 한계까지 혹사당했고 조금씩 그 한계치를 향해 다가갔다.
주르륵
코에 흐르는 피와 마스크 안쪽을 가득 채우는 피비린내.
주변의 시야마저 흐릿하게 변했지만, 루이제는 흔들림 없이 계속해서 언령을 토해냈다.
[99%]
10초만 더 버틴다면, 아니, 5초만 더 버텨도 이길 수 있다.
자신이 이기리라 확신하던 이세훈의 모습을 떠올리며 루이제가 한계까지 버티던 그때.
틱─
일순간 암전된 시야.
자신이 의식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은 루이제가 경악했다.
‘안 돼……!’
현실에서의 시간 흐름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아주 잠깐이라도 마법을 멈추는 순간 자신의 패배다.
물론 이번에 진다고 해서 죽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루이제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여명』에게 진다는 것도, 이세훈의 확신을 깨뜨리는 것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빨리…….’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어나야만 한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루이제가 방법을 떠올리던 그때.
“쯧. 약해 빠져가지고.”
등 뒤에서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빨 꽉 깨물어라.”
빠악!
무언가 자신을 걷어찼다는 생각이 든 순간. 어두컴컴하던 주변의 시야가 곧장 돌아왔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불과 1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쌓여 버린 수백 개의 마법.
이미 받아치기 늦었다는 생각이 떠오르던 찰나. 루이제의 시야가 다시 한번 변화했다.
우우웅
눈앞을 가득 채운 마법과 대기 중의 마력.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세계가 선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느껴지는 것은 그 모든 게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아무런 근거 없는 확신.
‘윽……?!’
자기 자신마저 받아들일 수 없는 그 오만하기 그지없는 심상에 루이제는 머리가 터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자신이 이 힘을 사용할 수 있을까.
그 의심이 머리를 가득 채웠지만, 이내 루이제는 그것을 무시했다.
‘아무래도 좋아……!’
눈앞의 난관을 넘어설 수 있다면 뭐든지 써먹는다.
머리가 조각난 것 같은 통증을 무시하며 루이제가 무의식에 남아 있는 조언을 떠올렸고.
빠드득!
이빨이 으스러지도록 꽉 깨물며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자신과 동화시켰다.
끼긱─
무언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주변을 둘러싼 세계가 완전히 멈췄다.
사방을 뒤덮은 결계도, 코앞까지 날아왔던 마법들도, 그리고 대기 중의 마력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뭐…….”
모든 것이 자신의 제어에서 벗어나버린 상황에 글렌이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별다른 마법을 사용한 것 같지도 않은데 어떻게 저런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글렌이 경악하는 사이 루이제가 자신의 앞에 펼쳐진 광경을 올려다보았다.
“하아…… 하아…….”
본래라면 지금의 자신에게는 절대로 불가능했을 광경.
수십 년 뒤의 미래를 불러낸 것만 같은 그 모습에 루이제가 멍하니 바라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Release】파앙!
주변을 둘러싼 마법은 물론이고 금술로 펼쳐냈던 결계까지 모조리 해제되었고, 대기 중의 마력들은 자연스레 루이제를 향해 모여들었다.
마치 세계 그 자체가 자신의 적이 된 것만 같은 광경.
방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은 그 시선에 글렌이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아니…… 아직 괜찮다. 아카식의 저장능력을 사용한다면…….’
글렌이 자신에게 남아 있는 수를 필사적으로 계산하던 그때. 루이제의 옆에 떠 있던 아카샤가 돌연 활짝 펼쳐졌다.
촤르르륵
수많은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갔고, 그 안쪽으로부터 글귀가 흘러나와 허공에 하나의 문장을 형성한다.
[아카식에 저장된 지미 글렌의 육체 정보를 모두 삭제하였습니다.]
“……뭐?”
그 터무니없는 내용에 글렌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을 때. 루이제가 담담히 언령을 내뱉었다.
【Set─】채앵!
다시 한번 전신에 채워지는 붉은 마법진들.
처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압력에 글렌은 체내의 마력은 물론이고 왼팔에도 힘을 보낼 수 없었다.
‘그럴…… 그럴 리가…….’
아카식에, 그분이 자신을 잊을 리가 없지 않은가.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분의 지식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해 왔던 글렌이 처음으로 두려움으로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아, 안 돼…….”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그분에게 버림받는 죽음.
그에 글렌이 경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뒤져.”
두 눈을 차갑게 빛낸 루이제가 마지막 언령을 내뱉었다.
【Revenge Bite】촤자자작!
전신을 물어뜯는 무형의 이빨.
복수심으로 증폭된 그 힘이 눈 깜짝할 사이에 글렌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냈고.
투둑
다시 재생되는 일 없이, 『여명』의 간부 중 한 명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