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69화
쿠구구궁!
천장에서 울려 퍼지는 거대한 진동.
거인이 몸부림치는 것 같은 그 엄청난 떨림에 이세훈이 천장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아주 신나게 써먹는 구만.’
요르문간드의 제어권을 건네받아 날뛰고 있는 렌.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는 이쪽에서 보이지 않았지만 요르문간드를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전투의 흐름이 느껴졌다.
‘제어하기도 벅찰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잘 다루네.’
위르겐에게 오랫동안 사역됐다고는 해도 그 근원은 행성포식자 중 하나인 S급 마수.
처음 불러낼 때부터 반항하려는 낌새가 보여서 괜찮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잘 싸우고 있는 것이다.
‘원래 식신을 다루는 걸로 유명하기도 했고……. 그쪽으로 특화된 능력이 있는 건가.’
회귀 전에도 이야기로만 들었지 제대로 만나본 적이 없다 보니 렌의 능력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상당히 많았다.
기회가 보이면 자세히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한 이세훈은 다시금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타악!
말없이 어두컴컴한 복도를 달리는 에리카.
언뜻 보기에는 긴장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아예 무관심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평소보다도 속내를 알 수 없는 그 모습에 이세훈이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것저것 쏘아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조용하네.”
“지맥이 불안정해져서 그래. 아마 봉인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벅찰 거야.”
“흐음…….”
에리카의 설명에 이세훈이 달리면서 주변을 살폈다.
지상에 있던 본가와 비슷한 분위기의 지하시설. 처음에는 단순히 디자인을 통일한 건가 싶었지만 어느 정도 달리다 보니 조금씩 이유가 보이기 시작했다.
‘본가랑 구조가 똑같아.’
방과 복도, 그리고 기둥까지 똑같은 위치에 세워져 있다.
여기까지는 단순히 뼈대를 같이 사용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시설의 ‘형태’이었다.
투웅─
이세훈이 달리면서 발을 통해 사방으로 마력을 퍼뜨렸고, 그 움직임을 따라 머릿속으로 대략적인 형상이 그려진다.
땅을 경계로 지상의 본가와 좌우대칭을 하듯이 만들어진 지하시설. 마치 본체와 그림자와 같은 그 모습에 이세훈의 눈이 가늘어졌다.
‘별 필요도 없는 지붕까지 만들어둔 걸 보면……. 무조건 주술적인 의미가 있는 배치겠지.’
무슨 이유로 건물을 이렇게 배치한 걸까.
이세훈이 고민하는 사이 복도의 끝에 커다란 문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최심부까지 이어진 엘리베이터야. 부숴.”
에리카의 이야기에 이세훈은 곧장 손에 들린 연금무구를 활로 바꾼 다음 문을 향해 화살을 쏘아냈다.
콰아앙!
샛노란 번개의 화살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폭발하며 강제로 열렸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통로가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두 사람은 속도를 줄이는 대신 더욱 빠르게 내달리면서 곧장 통로의 안쪽으로 몸을 내던졌다.
후우우웅!
비상등만 희미하게 빛나는 어두컴컴한 엘리베이터 통로.
에리카와 함께 아래로 떨어져 내리던 이세훈은 끝날 기미가 안 보이는 추락에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디까지 내려가는 거야?’
어림잡아 수백 미터는 내려온 것 같은데 아직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그 예상치 못한 깊이에 이세훈이 조금 놀라고 있을 때.
우우웅─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
그 소리를 쫓아서 시야를 집중하자 아래쪽에서 위를 향해 올라오는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저건…….”
지하에 이노우에 가문의 관계자가 남아 있었던 것인가. 이세훈이 에리카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막 물어보려던 찰나.
“까악!”
에리카의 그림자 속에서 까마귀가 매섭게 뛰쳐나왔다.
검은 외골격, 영골장갑을 입은 까마귀의 전신에 은빛 마력을 휘감기더니 날개 쪽이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봉우鋒雨.”
투두두두!
마력으로 만들어진 은색 깃털들이 날갯짓에 빗줄기처럼 쏟아졌고, 위쪽으로 올라오던 엘리베이터가 눈 깜짝할 사이에 넝마가 되어 추락했다.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사지가 멀쩡할 것 같지 않은 날카로운 공격. 하지만 에리카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이세훈에게 이야기했다.
“다시 올라올 거야. 아래쪽으로 쏴.”
무엇이 어떻게 올라온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럴 때는 관계자의 말을 귀담아듣는 것이 옳다.
마력을 끌어올린 이세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아래쪽을 겨누며 번개로 만들어진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콰르릉!
쏘아진 화살이 벼락처럼 통로의 아래로 내리꽂혔고, 사방이 번쩍이며 잘 보이지 않던 맨 아래쪽을 환하게 밝혔다.
꿀렁─
아래로 추락한 엘리베이터를 휘감고 있는 검은 늪.
방금 쏘아낸 번개의 화살로 어느 정도 증발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양이 뻥 뚫려 있는 입구를 통해 계속해서 흘러들어와 채운다.
“늦었…….”
그 모습을 본 에리카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뭐라고 말하려던 그때.
“계속 간다!”
이세훈이 활시위를 당기며 경계의 권능을 사용했다.
우우웅!
검은 구멍을 통해 명계의 마력이 단숨에 밀려 나왔고, 이세훈은 그것을 고스란히 연금무구에 담아 쉴 새 없이 쏘아냈다.
콰르르릉!
푸른색으로 물든 벼락들이 발아래로 무자비하게 쏟아졌고 검은 늪이 차오르는 것보다도 빠르게 증발시킨다.
그 무시무시한 공세에 검은 늪이 저항하듯이 엘리베이터의 파편을 방패처럼 사용하거나 던져보기도 했지만 갈수록 많아지는 벼락에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슈르륵.
그제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검은 늪이 입구에서 나오지 않았고, 그 모습을 본 에리카가 손을 뻗어 사격을 멈추게 한 다음 까마귀를 보냈다.
후웅!
먼저 내려간 까마귀가 입구에 착지하여 주변을 둘러보았고, 그대로 두 사람을 올려다보며 날개를 휘둘렀다.
“까악!”
“괜찮은 것 같아. 이대로 착지할게.”
입구 바로 앞에 까마귀의 은색깃털로 얇은 막이 펼쳐졌고 두 사람이 곧장 그 위로 떨어졌다.
파앙─!
낙하의 충격을 흡수한 결계가 풍선처럼 터졌고, 두 사람은 그 반동으로 살짝 튀어 오르며 아래쪽의 입구에 착지했다.
“후우…….”
수천 미터를 단숨에 내려온 이세훈은 통로의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엘리베이터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사람은…… 없었나 보네.’
그 이외에도 몬스터나 마인, 식신의 흔적도 없다.
덩그러니 놓여 있는 엘리베이터를 살피던 이세훈은 고개를 돌려 검은 늪이 흘러나왔던 입구 안쪽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네.”
시설의 상층부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전통주택의 복도.
방금 본 엘리베이터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흔적도 없이 평화로워 보였는데 이세훈은 그것이 더욱 기괴하게 느껴졌다.
‘이상한 늪 같은 게 그만큼이나 쏟아져 나왔는데도 아무런 흔적이 없는 건가.’
텅 빈 복도를 바라보던 이세훈은 잠깐 상대했던 검은 늪의 모습을 떠올렸다.
마력이라기엔 이질적이고, 마기라기에는 깔끔하다. 거기에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지만 생명체로 보기에는 어려웠는데 뭐라고 구분 짓기 어려운 기묘한 물체였다.
‘근데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단 말이지…….’
회귀 전에 저것과 비슷한 물질을 어디서 본 걸까.
묘한 기시감에 이노우에 가문과 관련된 기억을 되짚어가던 이세훈은 회귀 전에 봤었던 한 마인을 떠올렸다.
‘……탐망?’
저주가 응축되어 있는 검은 진흙을 흩뿌리며 대지를 오염시켰던 십악의 마인.
회귀 전 에리카의 말로였던 탐망이 방금 보인 검은 늪과 비슷한 육체를 지녔던 것이다.
‘다른 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거의 똑같아.’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검은 늪과 달리 탐망의 육체인 검은 진흙은 악독한 저주와 마기로 이뤄져 있었다.
하지만 그 차이는 말하자면 가공되지 않은 원재료와 완성품 정도. 겉보기에는 달라 보여도 이세훈의 눈에는 그 본질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회귀 전의 에리카를 탐망으로 만든 건…….’
이세훈이 머릿속으로 흩어진 정보들을 하나씩 맞추고 있을 때. 복도 안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에리카가 입을 열었다.
“……일이 틀어졌어.”
“틀어졌다니?”
“원래라면 방금 그게 봉인에서 빠져나온 시점에서 자폭장치가 가동됐어야 해. 그런데 아무런 반응도 안 보여.”
에리카의 설명에 이세훈이 눈매를 찌푸렸다.
“그럼 장치가 망가진 거야?”
“그런 것 같지는 않아. 방금 보인 반응을 보면…….”
잠시 말을 멈춘 에리카가 천천히 이야기를 이었다.
“자신을 인간으로 인식시켜서 시설을 속인 것 같아.”
“……인간이라고?”
“아마도. 확신은 못 해.”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이세훈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정체 모를 검은 늪이 인간으로 인식된다니? 말이 되는가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기묘한 분위기가 있긴 했었지.’
복도 안쪽을 힐끗 본 이세훈은 다시금 에리카에게 물었다.
“저게 밖으로 나오면 어떻게 되는데?”
이세훈의 물음에 에리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말할 수 없어.”
“대략적인 것도?”
“응.”
단호한 에리카의 대답에 이세훈이 뭐라고 말하려다가 한숨을 내쉬며 질문을 고쳤다.
“좋아. 그럼 어떻게 움직이는 게 좋은데? 뭐든 짐작 가는 게 있으면 말해봐.”
“나도 몰라.”
“…….”
일말의 고민도 없이 돌아온 대답에 이세훈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에리카가 무심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자폭장치가 가동됐어야 하지만 가동되지 않았어.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달라졌지. 그러니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어.”
“……그래서?”
“당주님이나 오라버니에게 직접 지시를 받거나.”
한 차례 말을 끊은 에리카가 이세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네가 선택해야 해.”
“…….”
자신을 바라보는 에리카의 모습에 이세훈이 기묘한 표정으로 마주 보았다.
가문이 적에게 습격당하고 시설이 폭주를 일으켜 큰일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이곳에 없는 윗사람을 찾으며 대책을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까지는 경험 부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이세훈은 자신에게도 판단을 떠넘기는 모습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이 녀석은……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거지?’
바벨에 있을 때는 나름대로 자주적으로 움직였는데 어째서 이곳에서는 모든 선택을 타인에게 떠넘기는 것인가.
다른 곳에서는 제대로 느낄 수 없었던 에리카의 비틀림에 이세훈이 의아하게 보고 있을 때.
투웅─
복도의 안쪽에서 터져 나온 한 줄기의 파동.
별다른 마력이 담겨있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깜짝 놀라며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기묘한 적막이 감도는가 싶더니 복도를 비롯한 시설 전체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쿠구궁─
땅 아래에 있는 지맥의 마력이 용암처럼 끓어오르더니 순식간에 심층부를 향해 솟구쳐 오른다.
아무리 봐도 심상치 않은 징조에 이세훈이 당황하고 있을 때. 에리카가 안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사정을 알아차린 듯한 모습에 이세훈이 다급히 물었고, 그에 에리카가 잠시 멈칫하다가 대답했다.
“말할 수 없어.”
“너…….”
상황이 이렇게까지 번졌는데도 가문의 비밀을 지킨다.
융통성이 없는 것을 넘어 아무런 생각도 느껴지지 않는 그 도구와 같은 모습에 이세훈의 눈매가 왈칵 일그러졌고.
‘……도구?’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주 찰나의 순간,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 온 것처럼 떠오른 하나의 생각. 너무 비약한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 주장을 뒷받침하려는 듯 렌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네가 과대평가를 하고 있다, 일까.’
자신이 과대평가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누구를,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의문 속에서 이세훈이 눈앞의 에리카를 바라보았고, 이내 자신의 추측을 확인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좋아. 네가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다면, 내 판단대로 알아서 해결할게”
“…….”
“대신 지금부터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움직여. 가문의 규칙이고 뭐고 그딴 것도 다 집어치우고.”
“그건 안…….”
탁!
이세훈의 두 손이 에리카의 어깨를 붙잡았고, 흑무사와 함께 하나의 술식이 체내에 스며들었다.
그동안 간접적으로 배워왔던 이노우에 가문의 주술. 그 안에 공통적으로 존재했던 심상 그 자체가 에리카의 몸 안으로 새겨진다.
제대로 된 주술이 아닌 만큼 본래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어야 했지만.
“내 지시에 따라. 에리카.”
중요한 것은 ‘자격’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
이세훈의 이야기에 에리카의 두 눈이 천천히 커졌고, 이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처럼 떨리는 복도 위에서 에리카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방금 나타났던 검은 늪은 우리 가문이 연구하고 있는 신화등급의 무구 ‘천정天井’이야.”
“그게 신화등급의 무구라고?”
이노우에 가문이 신화등급의 무구를 가지고 있다는 건 회귀 전에도 대대적으로 알려졌기에 알고 있었지만, 그때 이야기로 들은 것과 생긴 것이 너무 달랐다.
이세훈이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에리카가 이 순간을 기다려 온 것처럼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기존 형태로는 직접 사용하기가 힘들어 지맥을 이용한 대규모 주술로 새롭게 조정하고 있었어. 지금은 쉽게 말하자면 녹은 쇳물 같은 상태.”
“그럼 지금 일어나는 진동은?”
“방금 일로 위협을 느껴서 자폭장치를 응용해 지맥과 직접 결합하고 있을 가능성이…….”
“당장 안내해!”
에리카의 설명을 다 듣기도 전에 이세훈은 재빠르게 복도의 안쪽으로 달려갔다.
‘이런 상황인데 이것저것 재보다니……. 완전히 미쳤구만!’
신화등급의 무구에 이만한 지맥이 결합될 경우 재수 없으면 주변이 초토화되는 것을 넘어서 열도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재앙이나 다름없는 상황. 점점 심해져 가는 진동에 이세훈이 흥분을 가라앉히며 생각을 정리했다.
‘위르겐한테 부탁하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일단은 직접 보고 결정한다.’
주변을 살피는 사이 복도 저편에 거대한 문이 나타났고, 에리카의 손짓에 까마귀가 매섭게 날아갔다.
콰아앙!
거대한 문이 완전히 박살 나며 방 안이 드러나고 검은 늪, 천정의 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꿀렁꿀렁─
거대한 구멍 밖으로 넘쳐 흘려 사방을 뒤덮은 검은 늪.
안쪽에는 검붉은 용암 같은 것이 혈관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는데 지맥 그 자체를 빨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아직 얼마 먹지는 못했어!’
안전권이라는 것을 확인한 이세훈이 제압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을 때. 적의를 인지한 천정이 먼저 움직였다.
푸화아악!
문 근처에 있던 천정의 일부가 에리카의 까마귀를 향해 덤벼들었고, 피할 새도 없이 그대로 삼켜 버렸다.
부글부글!
그러자 구멍의 안쪽의 검은 늪이 끓어오르며 솟구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방금 잡아먹은 까마귀의 모습을 흉내 냈다.
까아악─
심층부를 통째로 뒤흔드는 무지막지한 떨림.
어설프게나마 육체를 갖추자 지맥이 더욱 빠르게 흡수되었고, 심장이 맥동치는 것처럼 사방으로 힘을 흩뿌린다.
순식간에 사태가 방금보다 악화되었지만 이세훈은 그 모습을 보며 오히려 두 눈을 반짝였다.
‘찾았다!’
진짜를 흉내 내는 가짜. 천정이 가진 무구로서의 특성을 파악해 낸 이세훈은 그것을 제압할 방법을 단숨에 떠올렸다.
‘하지만 이건…….’
이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정말로 옳은가.
난생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이세훈이 복도에 멈춰 섰고, 에리카가 몇 걸음 더 앞으로 가다가 뒤늦게 멈췄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다시금 이세훈은 바라보았다.
“…….”
뒤쪽에서 날뛰고 있는 천정에는 안중에도 없이, 오직 자신의 지시만을 바라보는 에리카.
두려움이나 망설임도 없이 오로지 자신을 ‘평가’하려는 듯한 그 모습에 이세훈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저 녀석이랑 동화할 수 있지?”
“응.”
고개를 끄덕이는 에리카의 모습에 이세훈이 두 눈을 마주 보며 이야기했다.
“그럼 해. 나머지는 내가 처리할 테니까.”
이세훈의 지시에 에리카가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고, 방 안쪽에서 날뛰는 천정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스르륵.
좌우로 넓게 퍼지는 에리카의 그림자.
그 표면에 희미한 파동이 일렁이더니 수십 개의 새장이 걸려 있는 말라비틀어진 검은 나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까악─까악─까악─
새장 속에서 동시에 울부짖는 수많은 까마귀들.
그 불길한 울음소리가 하나처럼 뒤섞이며 주변을 가득 채웠고, 방 안쪽에 있던 거대한 까마귀, 천정에게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까악─
새장 속 까마귀들과 합을 맞추듯이 동시에 울부짖는 천정. 그 모습을 본 에리카가 앞으로 뻗은 손을 콱 움켜쥐었고.
“사청오선창死聽烏先唱.”
우드득
새장 속 까마귀들의 목이 일제히 꺾였다.
피비린내와 함께 까마귀들의 합창이 끊어졌고, 홀로 남은 천정만이 계속해서 울부짖으며 몸을 삐걱거렸다.
까…… 아악…….
앞서 죽은 까마귀들을 뒤따르듯 천정의 목이 조금씩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 강제적인 움직임에 천정이 지맥의 힘으로 저항하려 했지만 시간만 늘어날 뿐. 계속해서 목이 돌아가더니 피부가 찢어지듯이 곳곳이 갈라졌다.
푸화아악!
그러자 갈라진 틈새로 피가 터져 나오며 천정의 몸이 비틀거렸고 순식간에 주변이 피비린내로 가득 찬다.
그 기괴하기 그지없는 풍경에 이세훈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대상을 동화시켜 강제로 죽음을 부여하는 건가.’
까마귀의 형상을 취했다고는 해도 본래 신화등급의 무구.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닌 만큼 피가 나올 수 없었지만 에리카의 주술을 그 법칙을 무시한 채 죽음을 강제했다.
그리고 과다출혈로 인한 무기력함이 천정의 저항을 갉아먹으며 마침내 전신에 퍼졌고.
우드득!
절반만 돌아갔던 천정의 목이 단숨에 꺾였다.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처럼 날뛰던 지맥이 잠잠해졌고 천정의 몸이 휘청거리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철퍽!
앞서 죽은 까마귀들의 시체처럼 힘없이 늘어진 천정.
에리카 혼자만으로 완벽하게 제압하는 데 성공했지만, 아직 끝났다고 보기에는 일렀다.
부글부글
목의 상처에서 피어오르는 기포.
죽음을 강제로 부여하기는 했지만 주술로 인한 일시적인 것이기에 그것이 풀리는 순간 원래대로 회복된다.
두 사람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재빨리 방안으로 들어섰고, 에리카가 쓰러진 천정을 향해 은빛 실을 흩뿌렸다.
촤라락!
두텁게 뭉친 실들이 거대한 밧줄처럼 천정의 몸을 휘감으며 전신을 단단히 옥죄었다.
에리카와 천정을 하나로 동화시키는 주술. 이것으로 천정을 제어하여 방 중앙에 있는 거대한 구멍, 봉인의 안쪽에 집어넣어 잠재운다.
가장 정석적인 방법이었지만 효과는 신통치 않았다.
우우웅!
에리카와 천정을 연결한 주술식은 쌍방통행.
그렇기에 보다 강한 존재감을 지닌 이가 영향을 끼치며, 신화등급의 무구인 천정이 에리카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꿀렁─
발밑의 그림자가 터져 나올 것처럼 요동치고 몸 곳곳에 얇은 자상이 생기며 핏물이 흘러나온다.
주르륵
몸이 조각조각 나뉠 것처럼 더욱 길어지는 자상. 당장에라도 전신이 무너질 것처럼 삐걱거렸고 에리카의 눈빛이 흐릿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 몸이 발밑의 그림자로 끌려가려던 찰나.
[인연각인 ‘사접석’이 발동됩니다.]
에리카의 인연석을 사용한 이세훈이 심장을 꿰뚫었다.
등으로부터 파고들어 간 손. 본래라면 즉사했을 일격이었지만 겉에 둘린 몽환의 마력이 그것을 무시한 채 파고들었다.
손안에서 느껴지는 에리카의 심장. 당장에라도 멈출 것 같은 그 근원을 움켜쥔 이세훈이 사접석의 힘을 끌어올렸다.
촤라락!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은색 실이 에리카의 전신으로 퍼졌고, 붕괴하던 ‘술식’이 다시 맞춰졌다.
길게 베인 자상이 다시 본래대로 돌아오고 무너질 것 같던 몸이 다시 단단히 조여지며 두 눈에 빛이 돌아온다.
두근─
손안에서 느껴지는 정상적인 심장의 박동.
기존의 대치상태로 되돌렸지만, 이세훈은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했다.
‘역시 이대로는 힘들어.’
천정을 완벽히 제어하기엔 에리카라는 그릇이 너무 작다.
본래라면 다른 사람을 찾거나 자신이 대신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이세훈은 기존과 완전히 다른 선택지를 골랐다.
우우웅!
그릇, 에리카의 육체를 천정에 맞춰 새롭게 개편한다.
육체는 물론이고 마력회로까지 뜯어고치는 엄청난 행동이었고, 평범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버틸 수 없는 방식이었다.
스르륵
하지만 에리카의 몸은 그 과정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롭게 고쳐진다.
“아…….”
자신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변화에 에리카의 두 눈이 보랏빛으로 선명히 빛났고, 앞서 펼쳐진 주술에도 그 변화가 적용되기 시작했다.
꾸드득!
방금까지만 해도 천정을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던 밧줄이 깊숙이 파고들었고, 사방으로 흘러나와 있던 육체가 다시금 구멍 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봉인 안쪽에서 발버둥 치는 천정의 모습에 이세훈이 빠르게 다음 술식을 준비했다.
‘단순히 밀어 넣기만 해서는 바로 풀려 버린다.’
중요한 것은 이 불완전한 신화등급의 무구를 조금이나마 제어하는 것.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수없이 많았지만, 이세훈은 그중에서 가장 적합한 방법을 펼쳐냈다.
우우웅!
과거 에리카가 가르쳐 줬던 정체불명의 술식.
그동안은 그 안에 담긴 심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곳으로 내려오면서 이세훈은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스스스.
수십 겹으로 중첩되었던 술식의 일부분이 자연스럽게 풀려나며 하나의 심상을 만들어냈고, 그것이 고스란히 에리카의 체내에 새롭게 새겨졌다.
그렇게 새로운 그릇이 완성된 순간.
파앙─
강렬한 파동과 함께 모든 떨림이 사라졌다.
미친 듯이 날뛰던 지맥도 얌전히 가라앉았고, 발버둥 치던 천정도 구멍 안쪽에 잔잔히 가라앉았다.
“후우…… 후우…….”
심장을 붙잡고 있던 손을 빼낸 이세훈은 뒤로 살짝 물러서면서 눈앞을 바라보았다.
“…….”
모든 일이 끝났는데도 아무런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에리카.
상대를 천정을 제어하기 위한 도구로 만들어 버린 셈이니 본래라면 선 채로 죽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
하지만 에리카는 아무렇지 않게 무언가를 속삭였고 잠시 후 천정의 표면이 출렁이더니 안쪽에서 무언가 빠져나왔다.
스르륵
팔과 어깨를 두르는 반투명한 천.
마치 날개옷과 같은 그 익숙한 형태에 이세훈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을 때. 에리카가 위쪽으로 손을 휘둘렀다.
후웅!
그 순간 지맥의 힘이 순식간에 지하시설의 위쪽으로 솟구쳤고, 요르문간드를 통해서 희미하게 느껴지던 전투의 감각이 단번에 끊어졌다.
아마 방금 걸로 결계가 재가동되면서 적들이 바로 후퇴해 버린 것이 분명하리라.
‘끝난 건가.’
적의 습격도, 천정의 폭주도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새로운 문제를 알게 되었기에 이세훈이 눈앞에 서 있는 에리카를 바라보았다.
스륵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몸을 돌린 에리카.
날개옷을 자연스럽게 두른 에리카는 그대로 천천히 걸어와 바로 앞에 섰다.
“…….”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눈동자.
입학식을 떠올리게 하는 그 모습에 이세훈이 복잡하게 보고 있을 때. 에리카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꾸욱
이세훈의 손을 꽉 붙잡는 두 손.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그 기묘한 감각에 에리카는 입학 초기, 이세훈과 처음으로 악수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조금 특이한 것을 제외하면 아직 보잘것없었던 동급생. 하지만 에리카는 그 모습에서 알 수 없는 직감을 느꼈었다.
‘가능해.’
눈앞의 남자라면, 이 장인이라면 천정과 자신을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만들어낼 수 있다.
몇 번이고 의구심이 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빠르게 성장했고, 방금 전 그 가능성을 보다 확실하게 보여줬다.
그 결과에 에리카는 오늘 낮에 조정했던 이세훈의 평가를 다시금 조정했다.
‘너밖에 없어’
자신을 완성시킬 유일한 장인으로.
[대상 ‘이노우에 에리카’의 인연레벨이 Lv.4로 상승합니다.]
[인연레벨이 상승함에 따라 관계가 새롭게 정립됩니다. 대상 ‘이노우에 에리카’와의 관계는 ‘갈망’입니다.]
“…….”
눈앞에 떠오른 알림창과 자신을 향하는 비틀린 시선.
그리고 살아 있을 수 없는데도 살아 있는 에리카의 모습을 보며 이세훈은 그제야 확신했다.
‘인공생명체…….’
눈앞의 소녀가 천정을 제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였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