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66화
박물관에서의 시험이 끝난 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다시 차를 타고 이동했다.
“…….”
“…….”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는 차 안. 에리카는 말없이 창밖만 내다보았고, 분위기를 살피던 이세훈이 조심히 입을 열었다.
“그…… 이제 너희 집으로 가는 거지?”
“맞아.”
“흠흠. 한 번쯤 가보고 싶었는데 기대되네.”
“그래.”
“…….”
“…….”
에리카의 차가운 대답으로 대화가 다시 끊어졌고, 그 어색한 분위기에 이세훈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살다 보면 사람이 웃을 수도 있지…… 거참.’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비한 분위기로 다 해먹던 사람이 얼빠진 표정에다 머리카락까지 사방으로 부스스하게 뻗어 있는데 그걸 보고 어떻게 참는단 말인가.
누가 보더라도 빵 터질 만한 상황이었지만, 그 이후로 에리카는 눈도 안 마주치고 저렇게 토라져 있었다.
‘폭견이었으면 그냥 한 대 후려갈기고 끝났을 텐데.’
거기서 자신이 반격으로 후려치면 그대로 난투극으로 번졌겠지만, 어쨌든 뒤끝이 없다는 점에서 아주 편했었다.
‘근데 저 나이 때 감수성 생각하면 너무하긴 했나…….’
모처럼 준비한 시험도 한 방에 박살 나고 비웃음까지 당했는데 이래저래 기분이 상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에리카를 어떻게 달랠지 고민하던 이세훈은 적절한 방법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파훼했는지 안 궁금해?”
“…….”
이세훈의 이야기에 에리카의 몸이 멈칫했고, 고개가 살짝 움직이더니 차를 타고 처음으로 시선이 향했다.
자신이 선택지를 제대로 골랐음을 느낀 이세훈이 박물관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박물관에 펼친 결계. 전에 나한테 줬던 술식을 토대로 만들어낸 거지?”
“맞아.”
“일단 효과 자체는 괜찮았어. 정답을 모르면 그것을 찾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한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모순이나 다름없는 상태지.”
결계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올바른 길을 찾아야 하고, 올바른 길을 찾기 위해서는 그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어야 한다.
사실상 영원히 헤맬 수밖에 없는 구조였고 그것은 아직까지 술식을 이해하지 못한 이세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약점이 있어.”
“약점?”
도대체 무슨 약점이기에 그리 허무하게 돌파당한 것인가. 의문이 담긴 에리카의 시선에 이세훈이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건 바로 네가 해답을 알고 있다는 점이야.”
자신은 결계의 해답을 모르지만, 술자인 에리카는 당연하게도 그 해답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세훈은 흑무사를 곳곳에 퍼뜨려 에리카의 시선을 감지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수많은 정보를 쌓아 올렸다.
그리고 모든 준비가 끝난 다음 포착의 권능을 발동시킨 것이다
‘이번에는 에리카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기회였지.’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술식의 형태. 그리고 에리카의 시선을 통해 조금이나마 파악한 결계의 해답.
그 두 가지 요소가 포착의 권능을 통해 적절히 합쳐졌고, 결계를 파훼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졌다.
그게 바로 이세훈이 결계를 파훼한 방법이었다.
“…….”
이세훈의 설명에 에리카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고, 이내 어느 정도 정리가 됐는지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결계의 해답을 몰랐어야 하는 거야?”
“그랬다면 방금처럼 쉽게 나올 수는 없었을 거야. 하지만…….”
“불가능한 방법이구나.”
결계를 직접 만들어낸 사람이 해답을 모르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제대로 된 형태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해결법에 에리카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세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나 보네.’
포착의 권능이 제대로 발동하긴 했었지만 그 결과가 무조건 자신에게 긍정적이리란 보장은 없었다.
에리카가 기대한 것은 술식을 제대로 이해하고 파훼하는 것이겠지만, 자신은 포착의 권능으로 간단히 해결해버렸다.
그렇기에 설명을 듣고 실망했을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별다른 반응이 없다는 건…… 어찌 됐든 파훼만 했으면 된다는 건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에리카를 살피던 이세훈은 결계의 핵심, 이전에 건네받았던 술식의 형태를 떠올렸다.
‘이전에는 영 감이 안 잡혔는데……. 슬슬 감이 온단 말이야.’
특정한 주술이라기보다는 심상 자체를 표현한 술식. 그렇기에 해석하려고 해도 사람의 마음처럼 계속해서 답이 변하면서 헤매게 된다.
‘결국은 심상의 근원을 찾아내야 한다는 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구만.’
다른 사람의 심상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도 쉽지 않고, 그 뜻에 따라서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
여러모로 쉽지 않은 과제에 이세훈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후웅─
무언가 투명한 것이 전신을 가볍게 훑고 지나갔고,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결계?”
“응. 여기서부터 가문의 사유지라고 알리는 거야.”
에리카의 설명에 이세훈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온통 나무로 둘러싸인 우거진 숲. 이노우에 가문의 본가가 자리 잡은 ‘아오키가하라 수해’에 드디어 진입한 것이다.
‘흐음…… 이렇게 보니 느낌이 다르네.’
회귀 전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풀 한 포기 자라나지 않은 황무지였지만 지금은 어딜 보든 숲과 산뿐이다.
그 모습에 이세훈이 신기해하는 사이 차가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차들이 줄지어 세워진 주차장과 입구가 보였다.
“사람이 많네.”
“주술은 여기저기 쓰이니까.”
몸을 지키기 위해서 찾아온 이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를 해하기 위해서 찾아온 이도 있을 것이다.
이 중에 후자는 범죄와 연결될 수도 있지만 그 대상이 마인이나 범죄자라면 어느 정도는 용인되기 때문에 이쪽 업계에서는 흔히 볼 수 있었다.
부웅
직접 산길을 올라야 하는 방문객들과 달리 두 사람이 탄 차량은 입구를 지나치며 위로 올라갔고, 세 개의 입구를 추가로 지난 다음에야 멈춰 섰다.
“도착했어.”
에리카와 함께 리무진에서 내린 이세훈은 눈앞에 있는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백두산 천지에 있던 하백문만큼이나 가파르고 긴 계단.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세훈이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 인공산이랬지?”
“맞아.”
“흠. 그런 거치곤 꽤 자연스럽네.”
본래 있었던 산처럼 주변 환경도 자연스럽고 무엇보다도 마력 역시 인공적인 느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세훈이 흥미롭게 살펴보는 사이 에리카가 먼저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가자.”
“그래그래.”
두 사람이 계단을 천천히 타고 올랐고 그와 동시에 주변에 느껴지는 마력의 양이 더욱더 짙어진다.
백두산이 자연적으로 형성된 영산이라면 이곳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영산이었고 그 기운이 상당히 독특했다.
‘결계를 유지하는 근원이기도 하지만…… 뭔가 있는 것 같단 말이지.’
계단의 끝에 다다르기 직전. 이세훈은 고개를 슬쩍 돌려 아래쪽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인공산의 아래쪽에 위치한 수많은 건물들. 각지에서 찾아온 문하생들이 머무르는 곳으로 보였는데 그 모습을 본 이세훈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위치면…… 탐망이 봉인된 곳은 이쪽이구만.’
S급 영웅에서 십악의 탐망이 되어버린 에리카. 그리고 그런 에리카를 봉인하기 위해 수만 명의 식솔들을 희생시킨 이노우에 가문.
회귀 전에는 직접 확인하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어쩌면 이번에는 무언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리라.
그리 생각하며 이세훈이 다시 고개를 돌리고 계단의 끝에 올라섰다.
“저기가 우리 집이야.”
에리카의 이야기에 이세훈은 계단으로부터 이어진 길 끝에 있는 이노우에 가문의 본가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담장과 그 너머로 보이는 목조주택. 건축양식이 상당히 오래된 형태였지만 산 위에 지어져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그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던 이세훈은 가장 먼저 떠오른 감상을 이야기했다.
“엄청 흉흉하네.”
경보나 방호설비를 제외하면 별다른 게 없었던 마이어스 가문의 저택과 달리 이쪽은 밖으로 보이는 것만 해도 경계까지 삼엄했다.
만약 A급 영웅이 뭣도 모르고 담장을 넘어섰다간 외부에 설치된 저주와 주술에 넝마가 되어 비명횡사하리라.
“이래저래 사건이 많았었거든. 하나씩 추가하다 보니 저렇게 된 거야.”
“그래? 흐음. 하긴 너희 집안도 처음부터 유명하던 건 아니었을 테니까.”
지금이야 일본에서 가장 막강한 권세를 지닌 가문이지만 자리를 잡기 전에는 온갖 추악한 사건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 이세훈의 이야기에 에리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어머님이 돌아가신 사건이 가장 컸을 거야.”
“…….”
예고도 없이 훅 들어온 이야기에 이세훈이 살짝 멈칫했고, 이내 담담하게 대답했다.
“크흠. 많이 힘들었겠네.”
“난 잘 몰라. 나를 낳다가 기습당해서 돌아가신 거라.”
“…….”
피할 새도 없이 쏟아진 이야기에 이세훈은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가 그대로 꾹 다물었다.
여기서 또 어중간하게 이야기를 꺼냈다간 더 무서운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냥 구경이나 하자.’
대문을 넘어선 두 사람은 곧장 현관을 통해 건물로 들어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뜰이 보이는 복도로 빠져나왔다.
깔끔하게 꾸며져 있는 정원과 그 주변에 살벌하게 펼쳐진 결계. 이쪽은 특정 지역으로 상대를 유인시켰는데 아마 거기에 온갖 살벌한 함정들이 도사리고 있으리라.
‘주변에 호위들도 많이 숨어 있고……. 철통같구만.’
숨어드는 것보다는 차라리 류은하처럼 이 일대를 아예 통째로 증발시키는 것이 싸게 먹히지 않을까.
하지만 그쪽 역시 대비하고 있을 테니 완등자를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 쉽게 무너뜨릴 순 없으리라.
집안 곳곳을 살피며 이세훈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너무 무서운 눈으로 보는 거 아냐?”
복도 안쪽의 문에서 한 청년이 걸어 나왔다.
새카만 흑발에 무테안경을 쓴 차가운 얼굴. 이전과 달리 검은색 바탕의 전통복, 유카타를 입고 있었고 한 손에는 검은 부채가 쥐어져 있다.
여전히 모범생 같으면서도 끈적거리는 불쾌감을 안겨주는 청년, 이노우에 렌의 모습에 이세훈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무섭게 보진 않았습니다만.”
“그래? 내가 보기엔 어떻게 하면 여기를 날려 버릴 수 있을지 고민하던 것 같던데…….”
방 안에서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맞추는 렌의 모습에 이세훈이 담담히 대답했다.
“그 정도야 남들도 다하죠. 저 사람이랑 싸우면 어떨까 그런 느낌으로.”
“좀 더 살벌한 느낌이긴 했는데…….뭐, 실제로 하지만 않으면 문제없겠지. 상상 가지고 뭐라 하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니까.”
“이야기를 꺼낸 시점에서 이미 우스운 것 같은데요.”
이세훈의 삐딱한 대답에 렌이 조금 의외라는 듯이 바라보았고, 이내 슬쩍 웃었다.
“전보다 더 까칠해졌네.”
“듬직한 후원자들이 꽤 생겼거든요. 이제 재수 없는 사람들까지 비위 맞춰주긴 좀 그러네요.”
“흐음…….”
이세훈의 거리낌 없는 이야기에 렌이 부채 끝으로 턱을 받치며 쳐다보고 있을 때. 앞에 서 있던 에리카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안내를 끝낸 다음에 나누는 게 좋지 않을까요. 오라버니.”
“아아. 그래. 확실히 그게 맞겠네.”
에리카의 이야기에 그제야 떠올렸다는 듯 렌이 쓴웃음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요즘 훈련 때문에 힘들어서 그런지 실수가 많네. 미안해.”
“훈련이라면…….”
이세훈이 무언가 떠올리려던 찰나.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감과 동시에 렌이 한 손에 들린 검은 부채를 휘둘렀다.
카앙!
부채에 맞은 무언가가 위쪽으로 튕겼고 렌이 곧장 손을 뻗어 그것을 낚아챘다.
“……화살?”
끝에 종이가 묶여 있는 푸른색 화살.
마력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그 익숙한 형태에 이세훈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있을 때. 렌이 끝에 묶여 있는 종이를 풀었다.
스스슥
그러자 화살이 역할을 다한 듯 그대로 마력으로 변해 흩어졌고 렌이 그 내용을 살피다가 슬쩍 웃었다.
“이건 너한테 보낸 거네.”
“……?”
“자. 읽어봐.”
렌이 내민 종이를 건네받은 이세훈은 곧장 거기에 적혀 있는 내용을 읽어보았다.
[거긴 왜 놀러 간 거냐?]
짧은 내용.
누가 보냈는지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방금 날아온 화살을 보고 이세훈은 금방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하백연?’
화살의 형태가 똑같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이곳에다가 거리낌 없이 화살을 쏘아댈 수 있는 것은 완등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 하백연한테 수업 듣기로 했었지.’
학년 수석들에게만 주어졌던 혜택. 그 일을 떠올린 이세훈은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대강 이해가 갔지만, 편지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그냥 전화로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왜 편지를…….’
자신이 모르는 어떤 사정이 있는 것인가. 의아한 표정으로 편지를 바라보던 이세훈은 반사적으로 천충검을 휘둘렀다.
카앙!
손끝에서 뻗어 나온 백광이 날아온 화살을 깔끔하게 쳐냈고, 이세훈이 곧장 그것을 낚아채며 새로운 편지를 풀어서 읽었다.
[앞에 녀석이랑 직접 말 섞기 싫어서 이렇게 수업하고 있었다. 너도 그냥 놀러 간 것 같지는 않고, 주시자의 흔적이라도 찾으러 간 거냐?]
“…….”
하백연의 질문에 이세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쪽으로 무언가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세훈이 놀란 눈으로 보는 사이 새로운 화살이 도착했다.
카앙! 탁!
렌은 다시 한번 부채를 휘둘러 화살을 쳐냈고, 이세훈은 편지를 찢으면서 지나가는 화살을 그대로 낚아챘다.
하나씩 화살을 움켜쥔 두 사람.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새롭게 도착한 편지를 풀어서 읽어보았다.
[건물의 안쪽에 나한테도 보이지 않는 장소가 있다. 흔적을 찾고 싶으면 그쪽을 찾아봐라. 기회는 내가 만들어주마.]
화르륵!
이번에 날아온 편지는 다 읽자마자 불타서 흩어졌고, 렌 역시 읽고 있던 편지가 그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백연한테도 보이지 않는 장소라…….’
그리 드문 것은 아니지만, 그런 곳들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이 숨겨져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가볍게 넘길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편지에 적힌 기회가 무엇일지 이세훈이 기다리고 있을 때. 맞은편의 렌이 부채로 이마를 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방법도 많을 텐데 굳이 대련이라니. 은근히 짓궂으시단 말이야.”
“…….”
“나로서는 기권해 주는 편이 좋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난처하다는 듯이 이야기하면서 은근히 흥미를 보이는 렌. 그리고 옆에서 대놓고 흥미진진하게 쳐다보는 에리카.
‘과연. 이런 기회구만.’
자신을 시험하고 싶어 안달이 난 두 남매, 이노우에 가문의 모습에 이세훈이 피식 웃었다.
“이번 기회에 박살 내드리겠습니다.”
* * *
한 치 눈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방 안.
안쪽에 앉아 있던 중년의 사내가 손끝에서 느껴지는 양초를 더듬으며 올라가 심지 쪽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화르륵
주변을 밝히는 촛불.
어두컴컴한 방 안에 조금이나마 빛이 생겨났지만, 보이는 것이라고 해봐야 바로 앞에 있는 자신의 모습뿐이었다.
“윽…….”
자신만 얼굴을 내보이는 상황에 사내가 부담스러워하고 있을 때. 반대쪽에 불꽃이 피어오르며 다른 중년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
“…….”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를 향하고, 이내 표정이 굳어졌다.
이노우에 가문과 함께 삼 대 가문이라 불리는 히무라 가문과 아마네 가문. 그 당주들이 한 장소에 모인 것이다.
“우스운 꼴이 되어버렸군.”
“……그러게 말이에요.”
어쩌다가 자신들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두 당주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교차하고 있을 때. 다른 목소리가 담담히 울려 퍼졌다.
“정말로 우스운 꼴이 될지는 너희들에게 달렸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 자신들과 다르게 촛불을 밝히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어렴풋이 상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소용돌이. 아무런 얼굴도 없는 그 ‘무면無面’이야말로 상대, 십악의 도플갱어를 드러내는 모습이었다.
“…….”
“…….”
십악과 마주하고 있다는 상황에 두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바짝 긴장했다.
자신의 목숨도, 가문의 명예도 상대의 뜻에 따라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다. 목이 바짝 말라오는 것을 느낀 두 당주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게 뭡니까?”
사내, 히무라 당주의 물음에 도플갱어가 어둠 속에서 대답했다.
“이노우에 가문의 본가에 이세훈이 있다. 놈을 죽이고 시체를 챙겨 와라. 그러면 너희들이 우리와 거래한 흔적은 말끔하게 지워주지.”
도플갱어의 이야기에 공기가 얼어붙었고 여인, 아마네 당주가 입술을 꽉 깨물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정말 가능할 거라고 말하는 건가요?”
삼 대 가문으로 같이 불리고 있지만 실상은 자신들이 힘을 합쳐야 이노우에 가문과 겨우 견줄 수 있는 수준.
그리고 영산의 위에 자리 잡은 이노우에 가문의 본가는 S급은 물론이고 십악조차 가볍게 넘볼 수 없는 장소였다.
그런데 거길 자신들만으로 그곳을 습격하라니? 두 당주의 물음에 도플갱어가 담담히 대답했다.
“료마 당주는 지금 자리를 비웠다. 자식들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 정도로는 기존의 절반밖에 안 된다.”
“으음…….”
“그리고.”
툭
어둠 속에서 무언가 던져졌고, 양초 아래에서 형형색색의 결정이 불길하게 빛났다.
“그걸 인근의 지맥에 심으면 영산이 폭주해서 남은 기능도 먹통이 될 거다. 그걸로도 부족하다면 내가 여기서 깔끔하게 죽여주마.”
담담한 도플갱어의 이야기에 두 사람이 식은땀을 흘렸고, 이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정말…… 이번 일만 성공하면 모두 끝나는 겁니까?”
“그래. 만마전과 내통한 것은 이노우에 가문이 되고, 이세훈은 녀석들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너희들은 모든 증거를 없애고 빠져나갈 수 있겠지.”
두 사람을 바라본 도플갱어가 무심히 이야기했다.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이니 죽을 각오로 덤비는 게 네놈들에게 좋을 거다.”
그 말을 끝으로 도플갱어가 방에서 사라졌고,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결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 일을 받아들이는 순간 더 큰 죄를 저지르는 것이지만, 이곳에 찾아온 순간부터 이미 남은 방법은 없었다.
‘이번 한 번만…….’
‘이번만 넘긴다면…….’
두 사람의 머릿속에 비슷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시선이 맞닿는다.
그리고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심지에 붙은 촛불을 껐고.
스륵
테이블 위에 놓인 결정이 어둠 속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