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56화
숲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황무지.
하늘은 마기가 뒤섞여 불길하게 뒤틀렸고,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에서는 일렬로 이어지는 증기가 보였다.
두두두두──
머릿수를 세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수의 몬스터.
외형은 짐승형이었지만 전신이 검붉은색 액체, 마기로 오염된 용암으로 이뤄져 있었다.
“…….”
오염된 지맥에서 끝없이 달려 나오는 무한에 가까운 군단.
이미 세상이 멸망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압도적인 광경에 멍하니 보고 있을 때.
툭
뒤에서 다가온 누군가가 어깨동무를 했다.
“호오. 꽤나 절경이군 그래.”
나른한 목소리와 코끝을 간질이는 익숙한 담배 냄새.
상대가 누군지 뒤돌아볼 필요도 없었기에 퉁명스레 대답했다.
“세계가 망해가고 있는데 그런 말이 나오십니까?”
“완전히 망한 건 아니지. 그거면 된 것 아니냐.”
진지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대답에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사부가 그러니까 대장장이들이 욕먹는 겁니다.”
안 그래도 후방에서 안전하게 무기나 만드는 놈들이 뭐가 그리 힘드냐고 욕먹는 상황인데 자신들의 대표격인 사람이 저리 말하면 또 무슨 소리를 듣겠는가.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태도를 고칠 만한 상황이겠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상대가 좋지 않다.
“그러게 날 대표 같은 걸로 내세우지 말았어야지. 누누이 말하지만 그런 쓸데없는 것에 휩쓸리지 마라. 그러니까 네 무기가 형편없는 거야.”
“아이 씨. 왜 또 이야기가…….”
쿠구구궁─
잡담을 끊어내는 거대한 진동.
지축이 틀어지는 것처럼 땅이 미친 듯이 흔들렸고, 이어서 증기의 너머로 거대한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땅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용암의 거인.
원근감을 무시하는 듯한 그 어마어마한 크기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만들기 귀찮으니까 지맥을 아예 통째로 써버린 건가…… 미친놈들 같으니.”
질린 듯한 사부의 중얼거림.
저게 얼마나 강한지는 알 수 없지만, 이곳에 있는 게 위험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사부 당장…….”
“아. 아. 돌아보면 안 돼.”
도망치자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볼을 쭉 밀어내는 손가락. 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다시 말하려던 찰나.
“흔히 볼 수 없는 거니까 제대로 봐두라고.”
“……예?”
“위쪽.”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의아해하면서도 위로 시선을 올렸고, 방금까지 보이지 않던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저건…….”
우중충한 검은 하늘에 떠 있는 금빛의 별.
아래에 펼쳐진 대군에 비하면 작디작은 빛이었지만 마기도, 증기도 그 찬란한 황금빛을 가리지 못한다.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듯한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멍하니 보고 있을 때.
스각
별에서 뻗어 나온 빛이 모든 적을 베어냈다.
──콰아아앙!!
한참 뒤에 도착하는 거대한 굉음과 폭풍.
무섭게 진격해 오던 몬스터들은 이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고, 녀석들을 지워 버린 황금빛의 검기는 거대한 오로라처럼 허공에 박제되었다.
마치 세계 그 자체에 상처를 낸 것 같은 광경.
그 압도적인 위용에 멍하니 보고 있을 때.
“저 녀석이 새로운 손님이야.”
사부가 즐겁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 * *
눈 깜짝할 사이에 스쳐 지나간 과거의 기억.
회귀 전에 처음으로 아리아를 봤던 순간을 곱씹은 이세훈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녀석이랑 결혼이란 말이지.’
마신들과의 전쟁에서 단 한 번도 물러서지 않았던 인류의 희망.
그리고 사부와 류은하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을 죽인 마신.
성검사라 불리던 시절에는 인성이야 어찌 됐든 전적이 뛰어났기에 어느 정도 존경했었지만, 인류를 배반하고 멸광의 마신이 되어 남은 희망을 짓밟은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물론 이제는 다 없었던 일이지만…….’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회귀 전의 일.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아리아를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는 것도 그렇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딱딱 분리되지는 않았다.
이전부터 생각해 온 그 이야기에 이세훈이 이래저래 생각이 깊어지던 그때.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말씀을 드린 것 같군요.”
제안을 꺼냈던 아론이 무언가 눈치 챈 듯 고개를 숙였다.
“예? 아뇨. 죄송할 것까지는…….”
“아닙니다. 딸아이와 교류가 잦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아무래도 좋은 관계는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민망할 정도로 정중하게 사과하는 아론의 모습에 이세훈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엄청 티났나 보네.’
아무래도 옛 기억을 곱씹는 사이 표정관리가 안 됐던 모양이다.
본의 아니게 아버지 앞에서 딸에 대한 경멸을 드러내 버린 상황에 이세훈이 헛기침했다.
“흠흠. 그렇게까지 사이가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냥 갑자기 결혼 이야기를 하시니까 저도 모르게 당황해서…….”
“그 부분도 사과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이는 아론.
어느 정도 대화가 정리된 것을 느낀 이세훈은 앞서 아론의 이야기에 대해서 대답했다.
“일단…… 세라핌 길드 건에 대해서는 잘 이해했습니다. 생산 공장은 제가 리스트를 작성한 다음에 보내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혹시 그 이외에 또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이 이상은 없습니다.”
이세훈의 이야기에 아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쉬실 수 있게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 밖으로 향했고, 벽에 기대고 있던 마일즈가 등을 떼어내며 물었다.
“끝났나 보구만. 방으로 데려가?”
“그래. 예의를 갖춰서 모셔라.”
“잔소리는…… 가자고.”
마일즈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아론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머무르시는 동안 불편하신 점이나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찾아와 주십시오.”
마지막까지 공손하게 대응하는 그 모습에 이세훈이 막 대답하려던 그때.
“약혼식 날까지 편히 쉬시다가 돌아가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개를 든 아론이 눈을 마주보며 담담히 이야기했다.
겉으로는 귀빈을 향한 예의 바른 말이었지만, 눈에 담긴 감정으로 이세훈은 금방 그 말뜻을 이해했다.
‘관계없는 일이니 얌전히 있다가 가라는 거구만.’
처음부터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는 아론의 모습에 이세훈이 잠시 마주보다 고개를 꾸벅였다.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그 이상 할 말이 없었기에 그대로 고개를 돌려 마일즈를 쫓아 걸음을 옮겼고, 아론의 시선이 잠시 느껴지다가 사라졌다.
서로간의 탐색전이 끝났다는 것을 느낀 이세훈은 살짝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건 예나 지금이나 귀찮단 말이지…….’
회귀 전의 빙견은 정보를 취합해서 상대를 압박하고 계약으로 묶어서 부려먹는 게 즐겁다고 했지만. 이세훈의 입장에서는 그냥 시간낭비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망치로 때리는 게 효율이 좋은데.’
물론 그쪽은 삐끗하면 지명수배를 당한다는 문제가 있지만, 저런 걸로 골머리 썩는 것보다는 더 나았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한다…….’
아무런 명분 없는 약혼식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이세훈이 고민하던 그때.
앞서 가던 마일즈가 물었다.
“형님이 뭐라고 하시든?”
“음…… 이상한 짓 하려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약혼식까지 편히 놀다가 가시라네요.”
이세훈의 대답에 마일즈가 무언가 생각하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약혼은 무조건 진행하겠단 거구만…….”
상당히 내키지 않아 하는 목소리에 이세훈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모두가 약혼식을 찬성하는 건 아닌가 보네요.”
“뭐…… 그럴 수밖에 없지. 전통이니 뭐니 하지만 결국은 정략결혼이니까.”
머리를 긁적인 마일즈가 설명을 이어갔다.
“밖에서는 검술명가니 뭐니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이런 전통 때문에 잡음이 많아. 이혼하거나 아예 별거하는 쪽도 많고…… 이래저래 지저분한 이야기지.”
가문의 치부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마일즈. 불만이 많아 보이는 그 모습에 이세훈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보다 찬성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건가.’
마이어스 가문이라는 명문가를 유지하고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은 고위 영웅을 지속적으로 배출해 내는 혈통.
물론 그것을 폐지한다고 해서 당장 가문이 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알고 있는 만큼 그만둘 생각은 없으리라.
‘흐음. 생각할수록 그 판별식이라는 게 궁금해지네.’
도대체 무슨 방법을 쓰길래 고위 영웅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고스란히 계승할 수 있는 걸까.
‘아리아랑 결혼한다고 했으면 나도 받았을 텐데…… 좀 더 생각을 해봤어야 했나.’
지나간 기회에 이세훈이 아쉬워하던 그때. 계단 앞에 도착한 마일즈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아래층으로 가면 손님방이고, 위로 올라가면 제이크가 있는 곳이 있어. 어디부터 갈래?”
“음…… 제이크부터 만나고 싶습니다.”
챙겨온 짐도 별로 없고 무엇보다 그쪽의 사정도 들어봐야 한다.
이세훈의 대답에 마일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올라가자.”
두 사람이 계단을 타고 저택의 맨 위층까지 올라갔고 복도의 왼쪽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허…….”
안에 보물이라도 있는 것처럼 복도를 지키는 사람들.
마이어스 가문의 정예들인지 대부분이 A급 수준이었는데 풍기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마일즈 님.”
“제이크 친구가 와서. 가주님도 허락하셨어.”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마일즈의 이야기에 복도를 지키던 호위가 무전기로 사실관계를 확인했고, 잠시 후 답변을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호위들이 양옆으로 물러섰고 두 사람이 그 사이를 지나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의 삼엄한 경계와 다르게 평범한 내부.
저택의 외관처럼 침대나 다른 가구들이 고급스럽게 놓여 있었고.
“…….”
그 주인, 제이크가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멀쩡히 있는 침대와 소파를 두고 바닥에 누워버린 제이크. 그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 이세훈이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금방 의도를 깨달았다.
‘반항하는 건가.’
격식을 따지는 아론의 성격상 저런 모습을 보면 매우 불편해할 터. 방에 갇혀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저런 식으로라도 항의하는 것이 분명하리라.
‘그럴 거면 차라리 방을 다 때려 부수면 될걸…… 그건 또 너무 혼날 거 같아서 못 하나.’
이래저래 소극적인 반항에 이세훈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보고 있을 때. 마일즈 역시 눈치를 챘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자식아. 그러고 있는다고 작은 형님이 눈 하나 깜빡일 것 같아?”
“……몰라요.”
“답답한 놈 같으니…… 손님 왔으니 일어나.”
“손님이요?”
마일즈의 이야기에 제이크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고, 자신을 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이세훈의 모습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윽?!”
바닥에서 튀어 오르다시피 일어난 제이크가 흐트러진 옷을 정리했고, 이내 헛기침을 하며 애써 웃어보였다.
“어, 어서와. 잘 지냈어?”
“나야 뭐 잘 지냈는데…….”
제이크의 상태를 살핀 이세훈이 쓴웃음을 지었다.
“넌 이래저래 고생이 많은 모양이네.”
손목과 발목에 채워져 있는 팔찌형태의 마력 억제기. 이전에 전화를 생각해 보면 도망치려다가 잡히면서 채워진 것이 분명하리라.
“……그러게 말이야. 이런 모습으로 만나고 싶진 않았는데.”
제이크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고, 그 모습에 마일즈가 눈매를 살짝 찌푸렸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편하게 이야기해. 잠시 나갔다 오마.”
마일즈가 대답도 듣지 않고 곧장 밖으로 나가 버렸고, 그 모습을 본 제이크가 멋쩍게 웃었다.
“아마 아버지한테 가셨을 거야. 약혼 발표 이후로 계속 싸우고 계시거든.”
“포기하신 건가 했는데 그건 아닌가 보네.”
“포기는 안 하셨지. 다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씁쓸하게 중얼거리던 제이크가 이세훈이 서 있는 것을 보고 화제를 돌렸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자. 뭐 마실 거라도 마실래?”
“난 괜찮아.”
“필요하면 말해. 밖에서 바로 가져다주니까.”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며 앉았고 제이크가 먼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번에 위르겐 님이랑 같이 몽환마랑 싸웠다면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뭐. 그리 대단한 건 아닌데…….”
이세훈은 몽환마 토벌전에 대해서 사실대로 말해주는 대신 대외적으로 알려진 내용에 약간의 살만 덧붙여서 설명했다.
제이크를 믿을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마이어스 가문이 조금 찝찝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식한테 마력 억제기까지 채워서 가둬두는 부모가 정상이라고 보긴 힘들지.’
가문의 전통을 위해서라면 약간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는 인물.
그러니 필요하다면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 역시 어떻게든 들으려고 할지도 모르리라.
“그런 일을 겪고도 다친 곳 하나 없다는 게 대단하네.”
“다 대비를 잘해둔 덕분이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철저하게 하는 편이 좋아.”
“철저하게라…….”
손목에 채워져 있는 마력 억제기를 본 제이크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나도 진작 그랬어야 하나…….”
방금까지 흥미진진해하던 모습은 어디가고 순식간에 울적하게 변한 제이크. 보는 사람마저 기운이 쭉 빠지는 그 모습에 이세훈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약혼식을 파토 내고 싶은 이유는 또 뭐고.”
억지로 하는 정략결혼을 누가 좋아하겠냐 싶지만, 제이크의 물렁한 성격을 생각하면 조금 이상한 일이다.
집안 가구도 못 때려 부수는 이 순해빠진 녀석이 아예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던가.
‘아론이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
이세훈의 물음에 제이크가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그냥 아버지의 말에 따를 생각이었어. 가문의 전통이기도 하고…… 내가 얻은 수혜가 모두 거기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흐음.”
“그런데…… 알고 보니 조건이 더 있더라고.”
“조건?”
이세훈의 물음에 제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잠재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매일 정기적으로 내 마력을 불어넣어야 해.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고.”
“흐음…… 기간은 언제까진데?”
“임신한 순간부터 2년. 그리고 최소 세 명을 낳을 때까지 외부활동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하셨어.”
제이크의 설명에 이세훈은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했다.
“그러면 최소 4년, 길면 거의 10년 가까이 가문 안에서 지내야 한다는 거네.”
“그런 거지.”
처음으로 자신에게 맞는 검을 얻어서 수년간의 한을 풀며 열심히 성장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후계를 만든다는 이유로 집안에 처박히게 된다니.
제이크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가문의 전통이라고 할지라도 싫을 수밖에 없으리라.
“졸업한 뒤라면 얼마든지 따르겠다고 하니까 지금 같은 시기에 내가 살아 있으리란 보장이 없다고 하시더라고. 이게 무슨 뜻으로 들려?”
“…….”
“집안 어른들은 걱정돼서 그런 거라고 했지만…… 나한테는 형편없는 재능으로 무리하지 말고 돌아오라는 것 같더라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살아남을 만큼의 재능도, 실력도 없으니 차라리 집안으로 불러들여 대를 잇게 만든다.
제이크가 선보인 재능을 생각하면 평가가 너무 박한 게 아닌가 싶지만 문제는 그 비교대상이 아리아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저 성격도 문제지.’
만약 제이크가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하는 녀석이었다면 가문에서도 두고 봤을 수도 있지만, 과거 검은 연꽃 수해에서 목숨을 걸고 신목과 맞서 싸운 전적이 있다.
한마디로 혼란한 시대, 어중간한 재능과 실력, 살아남기 힘든 성격 등등 여러 요소들을 고려해서 제이크를 강제로 집에 불러들인 것이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나비효과네.’
휘광검이 없었다면 재능이 어중간하다고 판단해서 대상으로 지목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신목과의 전투로 가문의 어른에게 위기감을 심어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세계 정세가 지금처럼 혼란스러워지지도 않았을 테니 졸업 전까지는 별 탈 없이 지냈으리라.
‘대신 졸업하고 젊은 나이에 죽었겠지만.’
회귀 전에 제이크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가문의 추측대로 오래 살아남지 못한 것은 확실했다.
‘그래서 결국 이걸 어떻게 한다…….’
이득만 놓고 보면 당연하게도 제이크의 약혼식을 파토 내는 것이 좋았다.
가문엔 남게 되면 인연석을 얻을 기회도 사라지고, 무엇보다도 제이크라는 잠재력 높은 동료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어중간했으면 몰라도 충분히 키워볼 만하단 말이지.’
완전히 파토 내는 것은 아무래도 힘들겠지만 시간을 버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세훈이 머릿속으로 여러 계획을 검토하는 사이 제이크가 계속해서 하소연했다.
“할 수 있다고 말해도 본 적도 없는 큰아버지 이야기를 하면서 안 된다고 하질 않나, 증명을 하자니 누님을 이기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질 않나. 진짜 몇 주 동안 답답해서 미칠 것 같더라고.”
“으음…….”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가…….”
똑똑
노크 소리가 제이크의 말을 잘라냈고, 이어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이크 님. 들어가도 될까요?”
“어. 그…… 잠깐…….”
처음 들어보는 여자의 목소리와 당황하는 제이크. 그 모습에 이세훈은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약혼자야?”
“맞아. 근데 왜 갑자기…….”
예정에 없는 방문에 제이크가 당황하던 그때. 닫혀 있던 문이 갑자기 열리면서 한 여인이 들어섰다.
보석처럼 붉은 머리카락에 당차보이는 얼굴. 2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미인이었지만, 이세훈은 그 모습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뭐지?’
무언가 근본적으로 어긋나 있는 듯한 감각.
그에 이세훈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있을 때. 상대방이 그 시선을 알아차린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세훈 님.”
흠잡을 곳 없는 정중한 인사. 그 모습을 본 순간, 이세훈은 자신이 느껴진 이질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시선과 말투, 그리고 사소한 움직임에서 아주 희미하게 묻어나오는 세월들.
자신의 감각으로는 50세 이상의 인물이었지만, 서류상으로 상대의 나이는 고작 23살이었다.
‘……과연. 그놈들인가.’
그 익숙한 상황에 이세훈이 상대방을 다시 보았고.
“래피얼 오펜하이머라고 합니다.”
제이크의 약혼녀, 주시자인 『계승』의 일원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