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54화
바벨의 학원장실.
책상에 앉아서 평소처럼 결재 서류를 검토하던 루트비히가 돌연 허공을 바라보았다.
“흐음……?”
의아한 표정을 지은 루트비히가 왼손으로 허공을 가볍게 내리그었고, 잠시 후 황금색 열쇠구멍이 나타났다.
그리고 90도로 회전함과 동시에 위아래로 잠금이 풀렸고 안쪽에 있는 하얀 구멍에서 목소리가 퍼져 나왔다.
[저대로 놔둬도 되는 거냐?]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사이비놈 말이다.]
사이비, 순례자를 이야기하는 목소리에 루트비히가 다시 서류를 살피며 담담히 대답했다.
“그 친구라면 걱정할 것 없소. 신앙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신경도 안 쓰는 친구니.”
[그게 어떻게 해석될지는 알 수 없지. 연구도 이제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으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흐음.”
노골적으로 순례자를 경계하는 목소리에 루트비히가 고개를 들더니 새하얀 구멍을 바라보았다.
“혹시 이세훈 그 아이가 순례교 넘어갈까 싶어 걱정하는 것이오?”
[……그런 게 아니다. 위협이 더 커질지도 모른다는 뜻이지.]
약간의 침묵 뒤에 돌아온 대답에 루트비히가 슬쩍 웃었다.
“그렇군. 확실히 그런 위협도 있지. 이해했소.”
[지금 날 놀리는 거냐?]
“그럴 리가 있겠소. 조금 신기해서 그러는 것이지.”
얼마 전만 해도 가까이 두기는 위험하다고 경계하다 한순간에 태도가 뒤바뀌다니.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어찌 보면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십악뿐만 아니라 파편까지 같이 없애 버릴 줄은 몰랐던 거겠지’
최소 몇 년은 걸리지 않을까 생각했던 일은 한 달도 안 돼서 해결하고 나타난 셈이니 놀랄 수밖에 없으리라.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는 제거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맞소?”
[……그래. 네놈이 그 반지를 줘버린 탓에 그렇게 되어버렸지. 이 망할 놈아.]
목소리의 비난에도 루트비히는 불쾌해하기는커녕 오히려 기쁘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키운 보람이 있구려.”
자신이 키워냈다고 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긴 하지만, 정원 내에서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났으니 어느 정도는 자신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가슴 속에서 느껴지는 뿌듯함에 루트비히가 만족하던 그때.
<아아. 학원장님?>
하얀 구멍에서 울려 퍼지는 다른 목소리. 그에 루트비히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건…….”
<들리십니까. 여긴 알다가도 모르겠네…… 학원장님?!>
목소리에서 연신 울려 퍼지는 이세훈의 외침. 그에 잠시 머뭇거리더니 목소리가 물었다.
[저쪽 이야기를 안 듣고 있었나?]
“별로 신경은 안 썼는데…… 아무래도 그 친구가 손을 써둔 모양이군.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면 나중에 이야기하는 게 좋겠구려.”
[알아서 해라.]
목소리가 사라지고 루트비히가 펜을 내려놓으며 바벨에 퍼져 있는 감각에 다시 집중했다.
다른 공간들과 다르게 신성력으로 가득 차 있는 장소.
외부의 간섭을 차단하는 그 형태에 루트비히가 가볍게 툭툭 건드렸다.
우웅
그러자 신성력이 한 발자국 물러나듯이 흩어졌고, 루트비히가 그대로 공간을 조정하여 대답했다.
[무슨 일인가?]
“아. 이제 됐네.”
귓가에 들려오는 루트비히의 대답에 이세훈이 입에 가져다댄 여백의 휘장을 내려놓았다.
평소랑 다르게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혹시나 싶어서 여백의 안쪽에다가 소리쳐 봤는데 소리가 전달된 것이다.
“다른 게 아니고 이전에 학원장님께 맡겨뒀던 신목의 씨앗을 사용하고 싶어서요.”
[흐음…… 잠깐만 기다리게나.]
대답과 동시에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이질감이 느껴지더니 루트비히의 모습이 나타났다.
학원장실로 부르는 대신 직접 찾아온 그 모습에 이세훈이 조금 의외인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직접 오실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씨앗을 심기로 한 거라면 직접 보고 싶어서 말일세. 그리고…….”
이세훈의 뒤편에 있는 칼에게 시선을 돌린 루트비히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얼굴도 보고 말일세. 잘 지냈는가?”
“저야 늘 변함이 없지요. 루트비히 님은 이전보다 기운이 넘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 요즘 일이 잘 풀리다보니 표정에서 드러나는 걸지도 모르겠군.”
“무슨 일인지 몰라도 잘 풀리셨다니 다행입니다.”
서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 대화의 내용도 상당히 화기애애했지만 이세훈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칼이 했던 이야기 때문인가…… 뭔가 건성으로 주고받는 느낌이구만.’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듯한 느낌은 없다.
그 기묘한 풍경 속에 이세훈이 묘하게 보고 있을 때. 어느 정도 이야기를 주고받은 루트비히가 고개를 돌렸다.
“남은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고…… 그래서 씨앗은 어떻게 키우기로 한 건가?”
“일단 신성력에 특화된 나무로 키우면 어떨까 싶습니다. 신성력 변환 장치에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신성력 변환 장치라면…… 마력을 신성력으로 바꾸는?”
루트비히의 물음에 이세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떻게 만들지 구체적으로 정해진 건 없지만 대략적인 갈피가 잡혀서요. 일단 재료부터 확보한 다음에 본격적으로 연구해 볼까 싶습니다.”
“흐음. 신성력이라…….”
이세훈의 설명에 루트비히가 무언가 고민하더니 칼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얼마만큼 지원할 생각인가?”
“순례교가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해드릴 생각입니다.”
“그 정도라면 자네도 가능성이 있다고 본 모양이군.”
고개를 끄덕인 루트비히가 고개를 돌려 바벨의 풍경을 바라보더니 한 곳에서 멈췄다.
“저기가 괜찮을 것 같군. 이동하겠네.”
후웅!
눈 깜짝할 사이에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바다가 나타났다.
‘여기는…… 바벨의 남쪽 바다인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바벨의 풍경에 이세훈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루트비히가 아래쪽을 가리켰다.
“여기에 심게나.”
“……여기예요?”
루트비히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바벨 어딘가에 심을 줄 알았는데 바다 한가운데에 심으라니? 이세훈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지만, 칼은 무언가 알아차린 듯 감탄했다.
“과연…… 그렇게 하실 생각이군요.”
“괜찮지 않겠나?”
“예. 아주 훌륭한 것 같습니다.”
서로 좋다고 대화를 나누는 완등자들의 모습에 이세훈이 조금 삐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죄송하지만 저한테도 좀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게…….”
“안 되네.”
칼의 말을 가로막은 루트비히가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미안하네만 이건 비밀리에 진행 중인 프로젝트라서 말일세. 조만간 알 수 있을 테니 그때까지는 참아주게.”
“…….”
루트비히의 이야기에 이세훈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도대체 무슨 프로젝트길래 몽환마에 마신까지 쓰러뜨리고 온 자신에게까지 비밀로 한단 말인가.
물론 그 둘을 쓰러뜨렸다고 바벨의 운영권을 가지는 건 아니지만, 어찌됐든 생도가 열심히 해서 성과를 냈으니 학원장이면 뭐라도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여간 속 좁은 영감탱이가 같으니라고…….’
만약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장소가 나타나면 바로 옮겨 버리겠다고 이세훈이 다짐하고 있을 때. 칼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죄송하지만 일단 씨앗부터 심으면 안 되겠습니까. 슬슬 순례길로 돌아가 봐야 하는지라…….”
“……알겠습니다.”
마음에 안 들지만 루트비히가 저렇게 말해주지 않겠다고 나오는 이상 자신에게도 방법은 없다.
“일단 신목의 씨앗부터 주시죠.”
“여기 있네.”
미리 꺼내뒀는지 루트비히가 곧장 신목의 씨앗을 넘겨주었고 이세훈이 곧장 상태를 확인했다.
[신목의 씨앗]
[등급 : 영웅] [품질 : 최하]
숲 전역을 집어삼키려 했던 거목의 씨앗.
완전히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급하게 만들어낸 씨앗이기에 모든 힘이 불완전하게 뒤섞여 있다.
손에 쥐고 있을 경우 공간능력에 대한 저항력을 가질 수 있으며 흡수한 양분에 따라 성질이 변화된다.
*공간능력에 대한 저항력을 부여합니다.
*흡수한 양분에 따라 성질이 변환됩니다.
주먹만 한 크기의 검붉은색 열매.
겉에는 묘한 아지랑이가 흘렀는데 이전에 봤을 때와 큰 차이는 없어 보였다.
‘일단 씨앗은 문제없어 보이고…… 중요한 건 방향성인가.’
양분으로 삼을 만한 신성력과 함께 넣어두면 거기에 특화된 나무로 자라나겠지만, 그쪽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성과 약간 달랐다.
‘한쪽으로 쏠려 버리면 가공하기 귀찮단 말이지.’
신성력과 마력.
이 둘 사이에서 절묘하게 자라나야 향후 신성력 변환 장치를 만들 때도 그렇고 쓰임새가 많아진다.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방법을 떠올리던 이세훈은 금방 적절한 방법을 떠올렸다.
“잠깐 가공 좀 하겠습니다.”
스스스
이세훈이 끌어올린 경계의 권능이 신목의 씨앗에 스며들었고, 각각 위 아래로 나누는 선으로 변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지만 두 개로 분리된 씨앗. 거기에 이세훈은 엄지 끝에 상처를 낸 다음 선을 따라서 자신의 피를 불어 넣었다.
‘이거라면 경계의 권능도 오래 유지시키고 혹시 모를 방해도 차단할 수 있겠지.’
조율자나 만마전의 다른 세력이 위르겐의 육체를 이용해 간섭할 가능성이 있으니 앞으로 경계의 권능을 사용할 때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신목의 씨앗에 피를 불어 넣으면서 어느 정도 대비를 해둔 이세훈은 그대로 손을 떼어냈다.
우우웅!
처음보다 더욱 깊게 새겨진 경계의 선.
어느 정도 생각한 대로 가공된 것을 확인한 이세훈은 칼에게 신목의 씨앗을 내밀었다.
“여기 윗부분에 신성마법을 걸어주실 수 있을까요? 앞으로 신성력을 잘 흡수할 수 있게요.”
“그런 효과라면…….”
칼이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적절한 것을 떠올렸는지 양손을 앞으로 모았다.
성역의 세례Sanctuary Baptism
두 손 안에서 황금빛이 찬찬히 차올랐고 이내 손 바깥으로 조금씩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사르륵
바깥으로 흘러내리자 알알이 흩어져 내리는 빛.
그 신비로운 모습에 이세훈이 신기하게 보고 있을 때. 칼이 손을 앞으로 기울여서 씨앗의 위쪽에 황금빛을 부었다.
우웅!
황금빛이 씨앗에 닿자 곧바로 진동이 울려 퍼졌고 검붉은색이던 표면이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빛을 쏟아낸 뒤. 칼이 손을 거두면서 달라진 신목의 씨앗이 드러났다.
‘하얀색…… 아니, 약간 황금색인가?’
황금빛이 희미하게 감도는 하얀색으로 변한 씨앗.
경계선으로 나뉜 아래쪽은 여전히 검붉은색이었는데 서로 색차이가 극명하다 보니 상당히 신기한 물건처럼 보였다.
“스티그마를 만들 때 사용하는 신성마법입니다. 외부에서 신성력이 주어진다면 잘 흡수할 수 있을 겁니다.”
“딱 좋네요.”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을 확인한 이세훈은 그대로 루트비히에게 신목의 씨앗을 내밀었다.
“마기에 영향을 안 받도록 심어주실 수 있을까요?”
“알겠네.”
루트비히가 씨앗을 가져마자 곧장 사라졌고, 잠시 후 아래쪽에서 공간이 움직이는 감각이 느껴졌다.
일정 구역을 단단히 둘러싼 공간마법. 아마 씨앗에 접근하는 불순물을 걸러내는 것이 분명하리라.
‘바벨 근처니까 쉽게 당하지는 않겠지.’
성공적으로 씨앗이 심어진 것을 확인한 이세훈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준비는 이 정도면 됐고 앞으로 시간 날 때마다 순례자님이 신성력만 불어 넣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으음…… 정기적으로 해야 하는 겁니까?”
“따로 정해진 건 없지만 자주 오실수록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거예요.”
순례길을 살피느라 여유가 없겠지만, 그래도 저 신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앞으로 신목의 성장이 중요하다.
칼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맞춰보겠습니다. 그 이외에는 없습니까?”
“그것 말고는 딱히…… 아, 그러고 보니 이건 어떻게 할까요?”
아공간 포켓에서 스티그마를 꺼낸 이세훈이 칼에게 내밀었다.
성법기, 그것도 대주교들에게만 주어지는 ‘스티그마타’를 제작하는 데 쓰이는 재료.
이래저래 요긴하게 쓸 수 있긴 하지만 만약에라도 이단이라고 몰리면 곤란하기 때문에 조심하는 편이 좋았다.
“아, 스티그마라면 그냥 편하게 쓰시면 됩니다. 신성력 변환 장치를 만들어내려면 이런저런 연구가 필요하실 테니까요.”
“정말요?”
“물론이지요. 그 이외에 또 필요한 재료가 있으면 제인 대주교를 통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바로 준비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가능성을 느껴서 그런지 아낌없이 지원해 주는 칼.
십악에 마신까지 잡아왔는데도 사람을 따돌리는 속 좁은 누군가와 차원이 다른 배포였다.
“잘 사용하겠습니다.”
“마음과 같아서는 더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만…… 시간이 없는 게 참으로 애석하군요.”
“걱정하지 마세요. 조금 있으면 얼마든지 시간이 생길 테니까요.”
반드시 신성력 변환 장치를 만들겠다고, 그렇게 확신을 담아서 이야기하는 이세훈의 모습에 칼이 미소를 지었다.
“꼭 그렇게 되기를 신께 기도 드리겠습니다.”
고개를 꾸벅인 칼이 황금빛과 함께 사라졌고 그가 향했을 순례길을 바라본 이세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만났지만…… 어느 정도는 들은 그대로네.’
인류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며 도움을 준 이에게 아낌없이 되돌려주는 호인.
물론 그 모든 행동이 ‘신의 뜻’에 반하지 않았을 때만 이뤄지겠지만 결과적으로 인류를 위하고 있으니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다만 너무 방심하면은 안 되겠지.’
이세훈이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곁에 있던 루트비히가 물었다.
“또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는가?”
루트비히의 물음에 이세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이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렇군. 그러면 이전에 있었던 일에 관해서 이야기나…….”
“급한 게 아니라면 다음에 할 수 있을까요? 순례자님께 받은 재료를 살펴보고 싶어서요.”
단호하게 거절하는 이세훈의 모습에 루트비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그럼 어쩔 수 없지.”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얼른 보내달라는 듯 고개를 꾸벅이는 이세훈의 모습에 루트비히가 하는 수 없이 공간이동으로 돌려보냈다.
후웅!
허공에서 이세훈의 모습이 사라졌고, 바다 위에 홀로 남게 된 루트비히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기왕 만난 김에 이야기나 들을까 했더니…….’
그만큼 새로운 재료를 살피고 싶었던 것일까. 루트비히가 아쉬움을 털어내며 학원장실로 이동하려다가 멈칫했다.
“…….”
재료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묘하게 쌀쌀맞은 태도. 방금 있었던 대화를 곱씹은 루트비히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비밀 하나 때문에 토라진 건 아니겠지?’
진지하게 그 가능성을 고민하던 루트비히는 이내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그동안 오간 정이 있는데 설마 이 정도로 토라지겠는가.
오히려 이런 상상을 했다는 게 들키면 더 토라질 것이다. 그리 생각한 루트비히가 개운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 * *
‘빌어먹을 영감탱이 같으니.’
기숙실로 돌아온 이세훈은 소파에 걸터앉으면서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본인 비밀은 말 안 해주면서 이쪽 이야기는 다 들으려고 하고…… 이래서 단골이고 뭐고 믿으면 안 된다니까.’
자신도 숨긴 것이 산더미처럼 많기는 하지만, 적어도 비밀인데 말 안 해줄 거라고 약 올리는 짓은 안하지 않았는가.
‘별거 아니기만 해봐라. 확 위르겐을 학원장으로…… 아니, 그 양반은 안 되지. 차라리 칼이 낫겠다.’
머릿속으로 루트비히를 쳐내고 바벨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 이세훈이 생각하던 그때.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제이크 마이어스]
“음?”
예상치 못한 이름에 이세훈이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바빠서 연락하기 힘들다더니…… 벌써 다 끝났나?’
무슨 일이 있었길래 연락도 힘들었는지 궁금해진 이세훈이 곧장 전화를 받았다.
“여보…….”
-세훈아. 지금 바빠?
무언가 다급한 제이크의 목소리.
싸움이라도 있었는지 살짝 거칠어진 숨에 이세훈이 곧장 자세를 바로잡고 물었다.
“무슨 일이야. 핵심만 설명해.”
-핵심이면…… 그…… 아! 혹시 약혼식 소식은 들었어?
“약혼식?”
제이크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잠시 의아해하다가 방학식에 있었던 아리아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약혼식이 있다고 했었지.’
아리아가 조만간 연락한다고 했던 것도 그렇고 슬슬 시기가 가까워진 것일지도 모르리라.
“네 누나한테 약혼식 있다고 들었어.”
-그럼 더 설명할 필요 없겠네. 그 약혼식을 파토 내고 싶어. 혹시 도와줄 수 있을까?
“…….”
제이크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놈…… 아리아를 그렇게 좋아했었나?’
평상시에 행동만 보면 마지못해 따르는 것처럼 보였는데 약혼식을 파토 내고 싶다니.
혹시 아리아와 결혼할 예비매형이 불쌍해서 몸소 나서는 건가 싶어 이세훈이 막 물어보려던 그때.
-여기 숨어 있었네?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아리아의 목소리.
-누, 누님!
빠악!
이어서 제이크의 경악 섞인 외침이 울려 퍼지더니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당했구만.’
제이크가 아리아에게 제압당한 것을 직감하고 있을 때.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미안해. 동생이 바보 같은 짓을 하는 바람에…….
“아닙니다. 그보다 무슨 일이…….”
-별거 아니야. 약혼식 날짜가 정해지니까 갑자기 싫다고 난리를 피워서. 별일 없을 거야.
“그렇군요.”
당사자가 이렇게 태연한 걸 보니 역시 예비매형이 불쌍해서 그런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이세훈이 확신하는 사이 아리아가 이야기를 이었다.
-막 발표했으니까 곧 기사도 나갈 거야. 초대장도 보내두긴 했는데 미리 놀러 와도 돼.
“일단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럼 이만.
전화가 끊어지고, 이세훈이 묘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아리아가 약혼이라…….’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 덤빈 것인가 싶지만, 명문가에 흔히 있는 그런 전략적인 약혼일 수도 있으리라.
‘일단 누군지나 볼까.’
호기심이 생긴 이세훈이 곧장 휴대폰을 열어 상대를 살펴보았고.
[제이크 마이어스와 래피얼 오펜하이머 약혼식 전격 발표.]
“……아?”
예상과 다른 내용에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