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52화
“조만간 연락할게.”
아리아를 대성당에 데려다준 뒤. 칼은 다시 한번 신성마법을 사용하여 순례길로 이동했다.
“여기는…….”
“바벨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순례길입니다. 여기서부터는 루트비히 님께 부탁드려서 이동하려고 합니다.”
칼의 대답에 이세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바벨의 안쪽으로는 공간이동이 안 되나?’
여태까지 이동한 장소들이 순례길이나 대성당처럼 신성력이 충만한 곳들뿐이었으니 뭔가 제약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이세훈의 의문을 알아차린 듯 칼이 설명을 이었다.
“공간을 이동하는데 제약이 있는 것도 있지만, 제가 갑자기 찾아가면 루트비히 님께서 불쾌하게 여기실 수도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학원장님이 그런 거에도 신경 쓰십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요. 타인이니까요.”
칼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친구는커녕 동료도 안 되는 건가.’
과거의 전쟁에서도 함께 싸웠고 이번에도 공동의 적을 두고 협력체계를 갖췄지만 타인이라고 딱 잘라 말할 만큼의 거리감이 존재한다.
그 모습에 이세훈은 회귀 전의 완등자들이 왜 각개격파를 당했었는지 어렴풋이 이해했다.
‘마신들과의 상성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제대로 협력할 생각이 없네.’
십악처럼 서로 충돌하는 경우는 없지만, 그 이상으로 서로에게 무관심하며 호의든 적의든 존재하지 않는다.
그 극단적인 모습에 이세훈이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그리고 저와 함께 다니는 모습이 외부에 알려지면 배교자의 표적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덧붙이는 칼. 그 내용에 이세훈이 조금 의외인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민감한 문제다 보니 언급을 피할 줄 알았는데 먼저 말을 꺼내온 것이다.
“음…… 예전에 순례자님의 후계자였다고 들었습니다만…….”
이세훈의 물음에 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죽게 된다면 그에게 교주직을 맡겨두라고 유언장을 작성해 뒀었죠. 참으로 신실한 이였는데……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
칼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묘한 표정으로 보고 있을 때. 돌연 주변의 공간이 희미하게 떨렸다.
‘루트비히인가.’
주변의 공간이 껍질처럼 벗겨지고, 이내 새하얀 여백의 공간을 들어섰다가 새로운 풍경이 나타난다.
아스쿠스 병동의 1인실.
명패에 염진현의 이름이 적힌 것을 본 칼이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염성하 님은 밖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칼의 이야기에 염성하가 눈매를 살짝 찌푸렸다가 이세훈을 보았다.
“그럼 저 녀석은 왜 들어가는 겁니까?”
“이세훈 님은 치료 과정에 간섭할 가능성이 적기 때문입니다.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고요.”
“……알겠습니다.”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인 염성하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본래의 염성하를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광경. 그 모습에 칼이 담담히 대답했다.
“모든 건 염진현 님과 신께서 결정하실 겁니다.”
칼이 병실의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갔고, 그 뒤를 따라 들어가려던 이세훈이 염성하에게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정 안 되면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염성하를 뒤로한 채 이세훈은 병실의 안쪽으로 들어섰다.
삑─삑─
규칙적인 기계음과 방 안을 가득 채운 약품 냄새.
한쪽에는 다섯 개의 링거가 줄줄이 걸려 있었는데 그것만 봐도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이쪽으로.”
먼저 침대로 다가가 있는 칼의 모습에 이세훈은 그 곁으로 다가가서 누워있는 염진현을 내려다보았다.
창백한 얼굴에 곳곳에 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해진 몸. 숨만 겨우 붙어 있는 듯한 그 모습에 이세훈이 눈매를 찌푸렸다.
‘이래서 들어오지 말라고 한 건가.’
염성하가 이 모습을 직접 봤다면 신의 뜻이고 나발이고 당장 치료하라고 날뛰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는 염진현의 모습에 이세훈이 고민하던 그때.
“상태가 좋군요.”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칼이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저게 상태가 좋은 겁니까?”
“몸이 아니라 마음을 말한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심상을 온전히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데…… 참 용맹하신 분입니다.”
칼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다시금 염진현의 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안 보이는데…….’
마력이라도 온전했다면 모를까 그마저도 불안정한 상황.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을지 고민하던 이세훈은 문득 칼과 자신의 차이를 떠올렸다.
‘아. 신성력을 사용하는 건가?’
회귀 전에 따로 들은 적은 없지만 신성력을 사용하는 안법 같은 것이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
이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체내에 신성력이 있었기에 충분히 시도할 수 있었지만, 이세훈은 뒤로 미루기로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안법은 위험하지.’
정 궁금하면 일이 끝난 다음에 칼에게 가르쳐달라고 하면 될 것이다.
이세훈이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칼이 염진현을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제 깨우도록 하죠.”
칼이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고, 그 손에 언제 생겨났는지 모를 작은 종 하나가 생겨났다.
황금색 바탕에 흰색 무늬가 새겨진 고급스러운 종. 신성력으로 만들어낸 종을 움켜쥔 칼이 손목을 가볍게 흔들었다.
치링─
병실에 울려 퍼지는 청아한 종소리.
그와 동시에 죽은 것처럼 잠들어 있던 염진현의 눈동자가 천천히 벌어졌다.
“당신은…….”
“전쟁터에서 뵌 이후로 처음이군요. 염진현 님.”
과거에 본 적이 있었던 걸까. 칼의 인사에 염진현이 놀란 눈으로 보다가 이내 뒤쪽의 이세훈을 발견했다.
“……성하가 쓸데없는 부탁을 했나보군.”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염진현은 다시 칼을 바라보며 진중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필요 없으니 그만두게.”
뭐라고 대화를 나눌 틈도 없이 거절하는 염진현. 그에 칼도 별 다른 의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염진현의 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신성마법이 풀리려던 그 순간. 그보다 먼저 이세훈의 두 손이 움직였다.
촤라락!
염진현의 전신을 단단히 묶어내는 황금색의 사슬. 그와 동시에 흐릿해지던 의식도 다시 또렷해졌고, 그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다.
“지금 뭐하는 겐가?”
“그건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꽈악!
급히 발동한 신성마법으로 염진현의 정신과 몸을 단단히 결합시킨 이세훈이 두 눈을 빛냈다.
“온갖 개고생을 하면서 겨우 모셔온 건데 이렇게 단칼에 거절하시는 건 조금 너무하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한 모습에 염진현이 황당한 눈으로 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고생하게 만든 것은 미안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짓일세.”
“그건 해봐야…….”
“해봤었네.”
이세훈을 바라본 염진현이 담담히 이야기했다.
“몇 년 전에 몸이 망가지기 시작한 것을 느꼈을 때. 가장 먼저 순례교를 찾아갔었지. 하지만 받아주지 않더군.”
본인이 치료를 해달라고 부탁했는데도 거절했다면, 그 경우에는 한 가지밖에 없다.
“신께서 허락하지 않았다고 말이야.”
염진현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칼을 바라보았다.
부정도 긍정도 없이 가만히 서 있는 칼. 그 무관심한 모습에 이세훈은 골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진짜 이 사이비를 확 그냥…….’
그런 일이 있었으면 미리 말을 했어야 할 것 아닌가. 이세훈이 눈매를 찌푸리고 있자 염진현이 쓰게 웃었다.
“그런 표정하지 말게나. 그때는 원망도 했었지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네. 당연한 것에 의문을 표할 수는 없지.”
“이전보다 강해지셨군요.”
염진현의 대답에 순수하게 감탄하는 칼.
상황만 놓고 보면 능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두 사람 모두 그에 대해서 의문을 표하지는 않는다.
‘안 좋은데.’
이대로 가다가는 칼이 염진현의 목숨을 직접 끊어버릴지도 모른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이세훈은 이내 한 가지 답을 떠올렸다.
“그럼 이만…….”
“허락하시면 어떻게 할 겁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가?”
염진현의 물음에 이세훈이 진중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때는 허락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또 모르는 일이죠.”
“…….”
“그리고 어차피 포기할 거라면 그 빌어먹을 신이 뭐라고 하든 무슨 상관입니까. 그냥 확인한 다음에 그래도 싫다고 거절하시면 되죠.”
이세훈의 과격한 이야기에 염진현의 눈이 살짝 커졌고, 이내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까지 날 치료하려는 건가?”
“경험입니다.”
“경험……?”
“예. 순례자님이 신성마법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기 위해서입니다. 염성하 그 녀석 때문에 온갖 고생을 다했으니 그 정도는 봐야 수지타산에 맞을 것 같습니다.”
염진현의 생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보기 위해서다. 삼견이나 할 법한 싸가지 없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이게 정답이었다.
‘정에 호소해서 될 거였으면 처음부터 받아들였겠지.’
염진현은 이미 삶에 대한 미련을 모두 버린 상황. 그러니 지금은 그가 유일하게 신경 쓰는 상대, 염성하를 가지고 끌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만약 못 본다면 염성하에게 이 빚을 전부 가져다 씌워서 부려먹을 겁니다. 진심으로요.”
이세훈의 협박에 염진현이 멍한 눈으로 보았고,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쓴웃음을 지었다.
“알겠네. 그 정도라면 못 할 것도 없지.”
이미 마음을 굳혔으니 아무래도 좋다는 염진현. 그 모습에 이세훈이 냉큼 칼을 바라보았다.
“이제 시작하시죠.”
“…….”
“……순례자님?”
칼이 말없이 무언가를 고민하더니 이내 결정을 내린 듯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이세훈 님이 직접 해보시는 게 좋겠군요.”
“……예?”
“발동은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자 이쪽으로…….”
이세훈이 뭐라고 할 틈도 없이 곧장 자리가 교체되었고, 이어서 칼의 손바닥이 등에 얹어졌다.
“시작하겠습니다.”
“잠…….”
우우웅!
체내에 잠재되어 있던 신성력이 칼의 인도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고, 곧장 허공에 황금색의 고리가 형성되었다.
스스스
이어서 고리의 12시 방향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카드.
새하얀 입자가 모여들며 시계방향으로 하나씩 늘어나더니 최종적으로 아홉 장의 카드가 만들어졌다.
‘아홉 장이면…… 대주교 중에서도 최고기록이잖아.’
지원 덕분인지는 몰라도 일곱 장에서 단숨에 두 장이나 늘어난 상황에 이세훈이 신기해하고 있을 때. 그 모습을 같이 바라보던 칼이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신의 뜻은 충분히 반영할 수 있겠군요. 확인해 보시죠.”
“……알겠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이세훈은 제일 왼쪽의 카드부터 순서대로 뒤집기 시작했다.
[과거] [정상] [오만] [추락]
새하얀 테두리 안에 그려진 그림과 하단의 황금색 글자.
이전처럼 카드의 내용이 이야기처럼 하나로 이어졌는데 맨 처음에 ‘과거’가 거울을 보는 사나이, 그 다음은 산의 정상을 향하다가 굴러 떨어지는 것으로 이어졌다.
“…….”
염진현은 카드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고, 이어서 이세훈이 다음 카드들을 열었다.
[절망] [희망] [체념] [각오]
사내는 어둠 속에서 헤매다가 한 아이를 발견하고, 이어서 산의 정상에서 등을 돌려 아래로 내려온다.
그리고 아이의 몸이 얼어붙는 것을 본 순간.
[죽음]
자신의 몸을 불태워 아이의 몸을 녹이기 시작했다.
신탁의 카드가 만들어낸 하나의 이야기. 모두 은유적이었지만 무엇을 말하는지는 명확했다.
“……치료 과정을 보여주지 못해서 미안하네.”
자신의 죽음을 말하는 카드를 보았는데도 오히려 이세훈에게 사과하는 염진현.
어떤 의미에서는 조금 후련해 보이는 그 모습에 이세훈은 자연스레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지긋지긋한 인연이었구나.’
혼자서만 모든 미련을 버리고, 그렇게 사라진 사부.
회귀 전의 기억을 다시 떠올린 이세훈은 자신도 모르게 눈매를 찌푸렸다.
‘사부라는 작자들은 왜 다 이러는 거지?’
본인들은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남겨진 제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는 수밖에 없다.
어째서 그런 미련을, 후회를 멋대로 새겨 버리고 떠나 버리는가.
밀려오는 짜증에 이세훈이 허공에 떠있는 아홉 장의 카드를 바라보았다.
‘납득 못 해.’
신이라는 놈이 도대체 뭐 하는 녀석인지는 몰라도, 후회가 남는 이 쓰레기 같은 결말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두 눈을 번뜩인 이세훈은 줄곧 칼에게 조종당하고 있던 신성력을 움직이며 허공에 떠 있는 고리를 움켜쥐었다.
‘분명히 살아날 가능성은 있다.’
단지 저 신이라는 모자란 놈이 그것을 보여주지 못할 뿐.
손안에서 맥동치는 신성력의 감각에 이세훈은 우화하는 꿈으로 올바른 된 미래를 발현시켰다.
우우웅!
그 힘에 황금색 고리가 거부하듯이 뒤흔들렸고, 뒤에서 지켜보던 칼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신의 뜻을 거스른다고?’
자신의 원하는 해답을 위해 신을 거스르는 이세훈.
흔히 말하는 ‘이단’ 그 자체의 모습이었지만, 칼은 개입하지 않고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윽…….”
손바닥을 찢을 기세로 맥동치는 신성력. 우화하는 꿈도 카드를 만들어낼 기미가 없었는데 이세훈은 거기서 방법을 바꿨다.
‘카드가 안 된다면 재료를……!’
카드가 만들어질 때 쓰이던 새하얀 입자.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두 번 정도 봤으니 어떻게든 흉내는 낼 수 있을 것이다.
스스스
이세훈의 뜻에 따라 새하얀 입자가 손안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것이 조금씩 카드의 형상으로 맞춰졌다.
그리고 머릿속을 새하얗게 물들이는 빛.
기억과 사고를 지우며 카드를 만들어내는 것을 방해했지만, 이세훈은 그에 대한 대책을 금방 만들어냈다.
두근─!
생각이 둔해져도 심장이, 몸에 흐르는 혈류가 방금까지의 작업을 본능적으로 이어나간다.
피에 녹아 있는 이세훈의 영혼.
수십 년의 세월동안 갈고닦아진 영혼이 본래라면 불가능했을 작업을 속행했고.
키잉!
영웅의 반지가 그 뜻에 호응하듯 선명하게 빛냈다.
파앙!
이세훈의 몸에서 황금빛 기운이 아른거린 순간. 새하얀 입자가 단숨에 압축되며 한 장의 카드를 새롭게 만들어냈다.
그것을 본 이세훈은 깊이 생각할 여유도 없었기에 곧바로 고리의 안쪽에다가 카드를 펼쳤다.
[부활]
불 속에서 다시 되살아난 사내.
그와 동시에 ‘죽음’의 카드가 부활의 옆쪽으로 이동하더니 황금빛으로 번쩍이며 변했다.
[계승]
타오르는 몸으로 아이를 안은 채 다시 정상을 향해 달려가는 사내. 그 모습에 염진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믿기지 않는 광경.
그에 염진현이 카드를 뚫어져라 보고 있자 칼이 물었다.
“신께서 이리 말씀하시는군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칼의 물음에 염진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다시 정상을 향해 달려가는 불타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보지 못한 것처럼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입을 열려던 그때.
콰앙!
돌연 열린 병실의 문.
그 소리에 염진현이 다시 눈을 뜨며 고개를 돌렸고,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는 염성하가 보였다.
치료가 끝난 줄 알고 들어온 것일까.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길을 가겠다고 말해놓고 전혀 지키지 못하는 그 나약하고 미숙한 제자의 모습에 염진현이 한숨을 내쉬었고.
“아직 떠나기에는 이른 듯하군.”
쓴웃음을 지으며 칼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치료해 주겠나?”
그런 염진현의 물음에 칼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신의 뜻대로.”
우우웅─
칼의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한줄기의 신성력.
그것들이 올올이 풀려나며 황금색의 잔으로 변했고, 안쪽에 새하얀 빛이 찰랑거리며 물처럼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잔을 천천히 앞으로 기울인 순간.
풍요의 잔Richness Grail
흘러내리는 빛이 병동 전체를 휩쓸었다.
파도처럼 밀려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린 빛.
그 어마어마한 광경에 병동 곳곳에 있던 환자들이 깜짝 놀랐지만, 진짜는 그다음이었다.
“……나 왜 일어나 있지?”
“팔이…… 움직여?”
“보, 보인다……!”
아스쿠스 병동에 입원해 있던 수천 명의 환자들. 그들이 모두 완치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