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50화
회귀 전. 신성력을 습득하기 위해 순례교와 협력했었던 이세훈은 자연스럽게 순례자에 관한 일화를 많이 들었다.
불구가 된 영웅들을 다시 일으켰고, 수만 명이 싸운 전쟁터에서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남기지 않았으며, 마기에 오염되어 폭발하려했던 화산을 정하기도 했다.
완등자 중에서는 하백연처럼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편이었기에 이야깃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막상 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일화는 그의 ‘일상’이었다.
“교주님께서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일같이 순례길을 오가면서 세계를 보살피셨죠. 저희들도 그 헌신을 본받아…….”
1년에 300일 이상을 망망대해 위에 펼쳐진 순례길을 오가면서 만마의 늪으로부터 세계를 지키는 순례자.
막대한 부와 권력을 가질 수 있는데도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그 모습에 완등자는 물론 모든 영웅을 통틀어서 존경받는 이가 바로 순례자 칼 안데르센이었다.
이세훈도 조금 별나다고는 생각했지만 세계를 위해서 움직인 것은 맞았기에 그를 긍정적으로 봤었지만.
“망할 사이비 교주같으니…….”
오늘로 그에 대한 이미지가 완전히 박살 났다.
쏴아아─
수평선을 뒤덮은 광활한 바다와 그 너머로 이어지는 새하얀 방벽.
세 시간째 그 위에서 쉴 새 없이 걷고 있던 이세훈이 눈매를 찌푸렸다.
‘뭐라도 있을 줄 알았더니…… 진짜 걷기만 하네.’
바다 이외에 보이는 것도 없고, 방벽 위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똑같은 장소를 계속해서 헤매는 듯한 느낌. 만약 공간에 대한 인지력이 부족했다면 진지하게 환술을 의심했으리라.
‘그냥 고생 좀 해보라고 이러진 않을 테고…… 설마 자기 대신 보수공사 할 만한 놈을 찾는 건가?’
회귀 전에야 죽기 전까지 별 다른 불평 없이 했지만 속으로는 이것도 못 해먹겠다고 생각했을지 누가 알겠는가.
갑자기 떠오른 가능성에 이세훈의 표정이 굳어졌다.
거의 1년 내내 이런 곳만 돌아다니다 보면 나사가 몇 개 빠지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맛이 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치료 조건으로 내걸면…… 으음…….’
너무 앞서나가는 것이 아닌가 싶지만 고위영웅을 상대할 때는 이렇게 최악을 가정해 두는 것이 좋았다.
평소에는 정상 같아도 뭔가 하나 걸린다 싶으면 숨겨진 광기를 드러내는 것이 고위영웅이란 작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뭐. 무슨 목적이든 만나봐야 알겠다만…… 이래서야 언제 볼지도 모르겠구만.’
걸어도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순례길.
체력이 남아돌면 틈틈이 달리기도 했었지만 그래봐야 몇 십 킬로미터 정도였기에 순례길의 길이를 생각하면 새 발의 피.
거기에 만약에라도 순례자가 지금도 걸어서 이동 중이라면 실시간으로 거리가 멀어지고 있을 테니 언제쯤 따라잡을지 알 수 없었다.
본의 아니게 결승점도 모르는 마라톤을 해야 하는 상황에 이세훈이 눈매를 찌푸리고 있을 때.
후웅!
뒤쪽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
그에 고개를 돌리자 염성하가 걸음을 옮기면서 두 자루의 단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냥 걷기만 하는 건 시간이 아깝다고 틈틈이 수련을 병행하고 있는 것이었는데, 이세훈이 보기에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잡생각을 떨쳐내려는 것으로 보였다.
‘저런 건 광견이랑 비슷하네.’
고민이 생기면 수련을 하고, 그렇게 머리가 텅 비었다 싶으면 번뜩이며 떠오른 생각을 곧장 실행한다.
그 결과 온갖 사건사고를 일으키면서 미친개라고 불리게 되었지만, 당사자는 그 덕분에 마음고생을 한 적이 없었기에 마지막까지 애용하던 방식이었다.
‘생각을 비우는 건 좋지만…… 그대로 움직이게 하는 건 아무래도 막아야겠지.’
만약에라도 광견의 심상에 영향을 받았으면 무슨 미친 짓을 벌일지 모르니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되리라.
화르륵!
이세훈이 생각에 잠긴 사이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고, 창의 궤적을 따라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조금만 움직임이 꼬여도 자신이 만들어낸 불꽃에 부딪칠 것 같은 모습.
하지만 염성하는 창을 휘두르면서 움직일 틈을 만들어 적절하게 빠져나왔다.
후웅!
첫 시작 지점에서부터 끊어지지 않고 쭉 이어지는 불꽃의 궤적.
마치 불꽃으로 이뤄진 용을 보는 듯한 그 모습에 이세훈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염룡을 배운 건가.’
광견이 새롭게 만들어냈었던 염륜잔화창의 기술.
본판과 비교하면 조금 어설펐지만, 며칠 동안 익힌 것이라 생각하면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었다.
‘기어 다니던 애가 갑자기 걸음마를 시작하면 이런 느낌인가…….’
자신이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광견의 기술을 배워서 저렇게 수련을 하고 있다니.
조금 예상치 못한 광경에 이세훈이 신기하게 보던 그때.
파앙─
방금까지 거세게 타오르던 불꽃 틈새에 어둠이 피어오르며 단숨에 끊어졌고, 염성하가 창을 멈추며 바라보았다.
“쳐다보지 마라. 불쾌하다.”
“아니, 내가 뭘 했다고.”
“막 걸음마를 뗀 아기처럼 보지 않았나.”
“…….”
염성하의 정확한 대답에 이세훈이 눈매를 찌푸렸다. 광견의 심상 때문인지 몰라도 이전보다 눈치가 조금 빨라진 것이다.
‘쓸데없는 것까지 배워서는…….’
이세훈이 속으로 광견의 욕을 하고 있을 때. 염성하가 단창을 집어넣으면서 차분히 이야기했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원하는 기준까지 반드시 강해질 거다. 그게 거래의 조건이었으니까.”
“……음?”
“설령 못 미친다고 해도 그때는 어떻게든 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
갑작스러운 염성하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잠시 그 내용을 곱씹고는 의외인 표정을 지었다.
‘광견보다 약한 게 신경 쓰이는 건가?’
둘 사이의 시간 차이만 31년.
물론 광견이 여러 사건들로 인해 정체된 적이 있긴 하지만, 전쟁 중에 쌓인 경험도 그렇고 그 격차가 쉽게 좁혀질 게 아니었다.
그래서 이세훈도 그런 쪽으로는 재촉할 생각이 없었는데 염성하 본인이 그것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건 신경 안 쓸 줄 알았는데. 좀 의외네?”
이세훈의 물음에 염성하가 말없이 걷더니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에 육대마경을 탐사하는 게 목적이라고 했으니 언젠가 십악 같은 괴물들과 싸울 거라고 예상했었지만…… 생각한 것보다 너무 빨랐다.”
최소 5년 뒤라고 생각했었지만 이세훈은 불과 반년 만에 십악을 상대로 싸웠고, 심지어 그보다 강한 마신과도 싸워서 결국 모두 죽이는 데 성공했다.
자신도 그 과정에 힘을 보태기는 했었지만 이세훈과 적의 힘을 이용해서 일시적으로 강해졌기에 가능했던 편법.
“결과적으로 내 힘으로 해낸 것도 아니고, 다음에 그런 방법이 또 가능할지 모르지. 한 마디로 내 이용가치가 떨어지고 있는 뜻이다.”
여태까지 이세훈과 ‘대등한’ 거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의 힘이 어느 정도 엇비슷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염성하는 더 이상 자신과 이세훈의 위치가 대등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녀석은 완등자든 S급 영웅이든 누구에게라도 힘을 빌릴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원룡의 견제를 막아주며 자신이 문주가 되는 것을 도와줄 사람도, 죽어가는 사부님을 치료해 줄 사람도, 자신에게 딱 맞는 무구를 만들어줄 사람도 오직 이세훈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거래가 이뤄진다는 것은 이미 ‘자비’나 다름없는 것 아닌가.
‘자비는 사람을 허수아비로 만든다. 타인에 의해서 일어나고, 다시 타인에 의해서 고꾸라질 뿐이지.’
어린 시절 사부님에게 들었던 이야기.
염성하는 그것이 너무 과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우습게도 염진현이 몸소 그것이 사실임을 보여주었다.
염화문의 지원 덕분에 오늘날까지 살아남았으며, 그 지원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사부님.
피를 토하며 쓰러지던 그 모습을 떠올린 염성하가 담담히 말했다.
“내가 빠르게 성장한다면 어떻게든 빚을 갚아갈 수 있겠지. 물론 그 전까지는 대금이 밀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걸 받아들일 수 없다면 내치더라도 수긍…….”
“하아…….”
바닷가 위에서 울리는 깊은 한숨 소리.
꽉 막힌 소리를 해대는 염성하의 모습에 이세훈이 자신도 모르게 눈매를 매만졌다.
‘진짜 이 새끼를 어떻게 하지?’
회귀 전보다는 조금 착하게 변했다 싶었는데 이제 보니 위로 삐뚤어졌던 게 그냥 아래로 방향이 바뀐 것이었다.
이걸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이세훈은 이내 간단하게 정리했다.
“그러니까 내가 굳이 너랑 거래관계를 유지하는 게 동정심 때문인 것 같다 뭐 이런 소리인 거지?”
“그래.”
“그런 헛소리를 하는 이유는 네 자신의 가치가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 거고.”
“……맞다.”
염성하의 상태를 간단히 정리한 이세훈은 이어서 질문했다.
“너 1학기 시험 성적 어땠지?”
“그건 왜…….”
“그냥 대답이나 해. 이것도 대금으로 칠 테니까.”
이해 못 할 질문에 염성하가 의아해하면서도 대금으로 쳐준다는 이야기에 대답했다.
“학과수석이었다.”
“나는 학년수석이야. 내가 더 높지.”
염성하가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는 눈으로 바라보자 이세훈이 계속해서 질문을 이었다.
“주변에 있는 인맥은?”
“……없다.”
“난 완등자 세 명이랑 알고 지내는 사이야. 오늘로 아마 네 명 될 거고. 이것도 내가 더 높지?”
“…….”
“그리고 다음은…….”
보유한 물건의 값어치, 통장잔고, 토벌한 마인이나 몬스터의 수준 등 이세훈은 온갖 것들을 염성하와 비교했다.
그 결과 나오는 것은 당연하게도 이세훈의 우세.
학년의 차이를 떠나서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이미 압도적인 격차가 생겨난 것이다.
“자, 정리하면 내가 너보다 훨씬 강하고 똑똑한데다 돈도 많고 인격적으로도 훌륭하네. 그렇지?”
“…….”
“빨리 대답해 임마.”
이세훈의 물음에 염성하가 입술을 달싹이더니 이내 씹어 내뱉듯이 대답했다.
“지금으로서는…… 그렇다.”
이미 인정하고 있던 사실인데도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억울함.
있는 힘껏 얼굴을 찌푸리는 염성하의 모습에 이세훈이 피식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그럼 너한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내 판단이 맞는 거 아냐?”
이세훈의 물음에 염성하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졌고, 이내 오묘하게 변했다.
“그건…….”
“동정심이니 뭐니 딴소리 말고. 애초에 내가 너한테 그런 걸 해줄 사람으로 보여?”
“…….”
거듭되는 물음에 염성하가 뭐라고 대답하려고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한쪽은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다른 한쪽은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결과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으니 지금으로서는 발언자의 수준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아니, 하지만…….’
뭔가 머리가 대차게 꼬인 기분에 염성하가 눈매를 일그러뜨린 채 끙끙거렸고, 그 모습을 본 이세훈이 혀를 찼다.
“쯧쯧. 이런 간단한 사실도 못 알아차리고…… 그러니까 네가 나한테 안 되는 거야.”
“큭…….”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제일 잘 아는 사람이야 당연히 본인이겠지만, 살다 보면 뭔가 놓치고 있을 때도 있어. 아마 완등자도 크게 다르진 않겠지.”
“…….”
“그러니까 그때는 남의 조언에 귀담아 들을 줄 알아야 해. 물론 나보다 약한 사람이어도.”
이번에는 힘의 차이로 설득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거기에만 매몰되면 광견처럼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모조리 무시하는 독불장군이 되어버릴 수 있다.
그렇기에 이세훈은 그 부분에 유의하며 조언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염성하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마음으로는 이해하지만 머리가 안 받아주나 보구만.’
오랫동안 누적된 문제인 만큼 단번에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은 계기를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이세훈이 손뼉을 치며 시선을 모았다.
“자자. 이건 일단 나중에 생각해 보고, 우선은 이 거지 같은 곳부터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자.”
“……뭘 어떻게 하자는 거냐.”
“그러니까 그걸 의논하자고. 바보야?”
“…….”
자신을 노려보는 염성하의 시선을 무시한 이세훈은 끝없이 펼쳐진 순례길을 다시 살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무식하게 걸어서 오라는 건 아닌 거 같고…… 역시 신성마법을 써야 하는 건가.’
처음 순례길을 올라섰을 때도 그쪽이 아닐까 싶었지만 이세훈은 일부로 그것을 마지막까지 미루고 있었다.
신성마법을 능숙히 썼다가 진짜 일꾼으로 강제 채용될 가능성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순례자에게 수상하게 보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신성력을 보유한 거랑 신성마법에 능숙한 건 다르니까.’
미래의 기술을 쓰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긴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녹아나올 수도 있는 법.
그리고 순례자와 깊이 엮이면 엮일수록 배교자라는 귀찮은 놈이 달라붙기 때문에 적절한 거리감이 필요했다.
‘일단 순례자의 향로를 써볼까. 스티그마를 연료로 쓰면 권능도 소모가 안 될 테고…… 적당히 권능을 이용해서 펼친 거라고 둘러대면…….’
이세훈이 머릿속으로 차곡차곡 생각을 정리하던 그때.
“……좋은 생각이 났다.”
혼자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염성하가 단창을 다시 꺼내 들며 입을 열었다.
“뭔데?”
“순례길도 순례자의 권능의 일부일 테니 문제가 생긴다면 저쪽에서도 바로 알아차리겠지.”
“……그래서?”
카각!
염성하가 대답대신 두 단창의 날을 순례길의 바닥에 가져다대더니 그대로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우우웅!
창끝에서 울려 퍼지는 불길한 진동. 그에 이세훈이 설마 싶은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부수면 고치러 올 거다.”
염성하가 전력을 다해서 두 마력을 터뜨렸다.
콰아앙!!
창날의 끝에서 터져 나오는 검붉은 불꽃.
냅다 순례길을 박살 내려는 염성하의 미친 짓거리에 이세훈이 깜짝 놀랐지만, 이내 금방 진정했다.
자신이 만들긴 했지만 어쨌든 완등자의 권능으로 이뤄진 길. 광견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염성하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화르륵!
실제로 창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꽃에도 순례길은 부서지기는커녕 그을림조차 생기지 않는 상황.
그 모습에 이세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그때. 문득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내가 왜 안도하고 있는 거지?’
자신이 바보도 아니고 당연히 불가능한 일을 보고 놀랄 리가 없지 않은가. 거기에 생각이 닿은 이세훈이 다시금 염성하를 보았다.
아까랑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 완전히 맛이 간 느낌. 그 익숙한 분위기에 이세훈이 묘한 불길함을 느꼈고.
“내가 너보다 강하다……!”
광견의 억울함이 염성하를 통해서 발현되었다.
키이잉!
무작정 타오르기만 하던 검붉은 불꽃이 찰나의 순간에 완벽히 공명을 일으켰고, 거기서 터져 나온 힘이 이세훈에 의해 조금 허술하게 만들어졌던 순례길의 사이를 파고든다.
그리고 새하얀 성벽 사이사이로 검붉은 불꽃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파고든 순간.
콰아앙!!
이세훈이 만든 순례길이 단숨에 반으로 박살났다.
“야이 미친 새끼야!”
“하하하!!”
광견의 심상 때문인지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좋다고 웃음을 터뜨려대는 염성하.
그 모습에 이세훈이 점점 붕괴되고 있는 순례길을 내려다보았다.
‘이걸 어떻게 하지?’
이 순례길은 엄밀히 따지자면 진짜로 향하는 다리일 뿐.
여기서 부서진다고 해서 만마의 늪이 파도처럼 밀려온다거나 그런 불상사는 없다.
문제라면 이대로 아무것도 없는 바다에 냅다 빠진다는 것이고, 순례자가 이 모습을 보고 안 도와주겠다고 화내는 것.
머릿속으로 여러 가능성을 검토한 이세훈은 곧바로 몽상수납에서 순례자의 향로를 꺼내 스티그마와 함께 움켜쥐었다.
‘그래. 이제 와서 힘을 숨기기는 무슨……!’
할 수 있는 걸 다 보여줘서 순례자가 자신에게 매달리게 만들어야 회귀한 밥값은 하지 않겠는가.
처음에 얼떨결에 순례길을 만들어내고, 걸어오면서 살폈던 구조를 떠올린 이세훈이 곧장 순례자의 향로에 스티그마의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우우웅!
급한 걸 아는지 단숨에 사방을 뒤덮는 향로의 연기.
그리고 그 안에서부터 이세훈이 떠올린 신성마법이 발동되었고.
파아앙!
찬란한 황금빛과 함께 파괴되었던 순례길이 시간을 거스르듯 완벽히 복원되었다.
“하하…… 음?”
웃음을 터뜨리던 염성하가 주변을 다시 보았고, 이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히 자신이 부쉈을 텐데 어째서 이렇게 멀쩡하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지?’
자신이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 행동에 염성하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금방 해답을 떠올렸다.
“환각이었나.”
“뭔 환각이야 멍청아!”
빠악!
순례길을 복원한 이세훈이 뒤통수를 후려갈겼고, 그 예상치 못한 일격에 염성하가 두 눈이 일그러졌다.
“너…….”
“뭐. 눈 안 깔아? 저기 바다 밑으로 던져줘? 어?!”
“…….”
이세훈의 험악한 표정에 염성하가 눈매를 찌푸리면서 멈칫했다.
환각이라기엔 기억도 생생한 데다 무엇보다도 몸에 마력이 완전히 바닥 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자신이 뭔가 제대로 실수했음을 깨달은 염성하가 눈동자를 굴리고 있을 때.
후웅!
하늘에서 순례길 위로 떨어지는 황금색 기둥.
그와 동시에 안쪽에서 새하얀 신부복을 입은 사내, 칼 안데르센이 다급히 걸어 나오더니 주변을 보고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가 안 가는 상황.
그에 자연스럽게 칼이 설명을 바라듯 두 사람을 바라보았고, 이세훈과 염성하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잠시 무언의 대화가 오간 뒤. 이세훈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말씀하신 자격을 증명해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