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47화
늦은 밤.
책상에 앉은 이세훈은 손 안에 쥐어진 새하얀 꽃, 오늘 추출해 낸 아미르의 인연석을 내려다보았다.
[인연 - 백염화白染華]
[등급 : 영웅] [품질 : 중]
꽃의 형태를 띤 새하얀 얼음결정.
마력을 흡수하여 새로운 결정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사용된 마력의 성질에 따라서 효과가 변합니다.
*흡수한 마력에 대응하는 얼음결정을 생성합니다.
*마력 없이 결정을 만들어낼 경우 내구도가 영구적으로 소모됩니다.
“흐음…….”
회귀 후 처음으로 얻은 영웅 등급의 인연석.
그동안 사용해 온 다른 인연석들보다 크기도 크고 형태도 선명했는데 가장 큰 차이점은 안쪽에서 느껴지는 ‘심상’이었다.
우우웅─
새하얀 꽃. 백염화의 안쪽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심상.
평범한 영웅 등급 재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인연석 특유의 힘에 이세훈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이제야 좀 재료다운 인연석이 생겼구만.’
여태까지 얻은 인연석들이 조금 독특한 보조 재료 정도가 한계였다면 지금부터는 그 쓰임새가 무궁무진하게 변한다.
무구의 핵심 재료로 쓰이는 것은 물론이고 사용하기에 따라서 다른 희귀한 재료를 만들거나 특수한 환경을 조성해서 제련을 도울 수도 있는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무구를 만들었겠지만…… 지금은 최대한 장기적으로 쓰는 게 좋겠지.’
인연레벨이 4까지 오른 게 아미르 밖에 없기도 하고 당장 무구가 급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이득을 보는 쪽이 좋다.
백염화를 어떻게 쓸 수 있을지 고민해보던 이세훈은 이내 한 가지 사용법이 떠올랐다.
‘농사나 한번 지어볼까?’
아미르의 빙결연금과 동천안의 특성을 동시에 지닌 백염화.
이 효과를 잘만 이용한다면 특수한 성질을 지닌 빙속성 재료 ‘빙정氷晶’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해 보인다.
‘회귀 전보다 능력도 범용성 좋게 잘 나왔고…… 장소만 갖춰지면 충분히 가능하겠는데.’
빙정으로 무구를 만들어도 좋고, 돈으로 구하기 힘든 재료와 물물교환도 시도할 수 있을 테니 지금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장소는 루트비히한테 부탁하면 어떻게 될 것 같고…… 필요한 물건은 아미르한테 사오라고 하면 되겠지. 그리고 추후 관리는…….’
이세훈의 머릿속으로 백염화를 이용한 농사의 준비 과정이 차곡차곡 정리되던 그때.
우웅
책상을 두드리는 휴대폰의 진동. 그에 고개를 돌린 이세훈은 화면에 떠있는 메시지를 봤다.
[자니?] - 레아 클로델
야심한 시간에 날아온 문자.
두 글자지만 구구절절 할 말이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그 내용에 이세훈이 답장 대신 전화를 걸었다.
“안 자는데 왜?”
-아, 그, 그냥 할머니한테 너 퇴원했다는 이야기 들어서 좀 어떤가 싶어가지고…….
“괜찮아. 순례자 그 양반한테 말끔하게 치료받았거든.”
-그래? 그럼 다행이네. 하하…….
“…….”
-…….
갑자기 찾아온 침묵.
휴대폰 너머로도 느껴지는 어색함에 이세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애는 또 왜 이래?’
이번에 일도 잘 풀렸으니 잔뜩 신났을 줄 알았는데 그와 반대로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다.
뭔가 일이라도 있나 싶어 이세훈이 재차 물어보려던 찰나.
-크흠. 혹시 지금 공방으로 와줄 수 있어? 후배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
“흐음…… 좋아. 나도 마침 줄 것도 있었고.”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
전화가 끊어지고 이세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직접 만나보면 알겠지.’
외투를 걸친 이세훈은 곧장 기숙실을 나와 레아의 공방이 있는 보르시파의 상점가로 향했다.
늦은 밤이라서 그런지 조용한 주변.
몽환마의 토벌 이후 혼란스러워진 바깥과 다르게 바벨의 내부는 이전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마치 다른 세계 같구만.’
북태평양에 자리 잡은 인공 섬이라는 환경과 루트비히라는 억지력이 합쳐지면서 만들어진 평화.
물론 외부의 영향을 아예 안 받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슨 일이든지 루트비히의 주도하에 순식간에 해결되어버리니 관계자가 아니면 알 방도가 없었다.
‘지금도 이런데 앞으로는 어떻게 변할지…….’
UD그룹과 순례교의 협력. 그리고 루트비히가 비밀리에 연구하고 있는 모종의 실험까지.
2학기의 바벨이 어떻게 변할지 생각하는 사이 공방의 앞에 도착했고, 이세훈이 곧장 초인종을 눌렀다.
“어서와.”
사복을 입은 레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어주었고 이세훈이 공방 안으로 들어가면서 주변을 살폈다.
‘그새 열심히 치웠구만.’
겉보기에는 쓰레기 하나 없이 깔끔해 보이지만 사이사이에 뭔가 쌓여있던 흔적들이 조금씩 보인다.
아마 발 디딜 틈 없이 어질러져 있던 걸 자신이 온다고 하니 급하게 치운 것이 분명하리라.
“뭐 마실래?”
“괜찮아.”
“그러면 저쪽으로…….”
탁자에 서로 마주보고 앉은 두 사람.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어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는데 그 사이에 이세훈이 레아의 반응을 살폈다.
‘확실히 이상하구만.’
이쪽을 힐끗거리다가 눈을 마주치면 슬쩍 피하기를 반복한다.
찔리는 건 없지만 약간 거리감이 느껴지는 그 반응에 이세훈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충 알겠네.”
“응?”
“십악의 힘이 상상 이상이라서 기죽은 거지? 지금 상태로는 도움도 못 될 것 같아서 의기소침해졌고.”
“…….”
정곡을 찔린 레아가 슬쩍 시선을 내렸고, 그 모습에 이세훈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언제는 나보고 십악이랑 싸우는 거니까 만만하게 생각하지 말라더니…….”
“그, 그때는 마음으로만 각오했던 때니까 그렇지. 이야기로 들었을 때랑 직접 봤을 때랑 느낌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싱글넘버 하나, S급의 전투 규모는 어느 정도 예상한 정도였지만 그 수가 늘어나니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레아를 놀랍게 만든 것은 그것도 인형사의 ‘전력’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정말로 전력을 다한다면 싱글넘버가 여섯…… 아니, 어쩌면 일곱일지도 모르지.’
단순하게 계산해도 S급이 일곱. 거기에 인형사의 기술이 더해지면 어떤 상승 작용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레아는 그 기존의 상식을 부정하는 규모에 놀랐고, 그 사이에 아무렇지 않게 끼어드는 이세훈의 담력에 또 놀랐다.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이번에는 안전한 곳에서 하라는 대로 한 게 전부였지만 언젠가는 자신이 직접 판단을 내리며 움직일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그때 과연 눈앞의 괴물 같은 후배처럼 할 수 있을까. 그 고민이 레아를 주눅 들게 만든 것이다.
“흐음…….”
인형사에게 겁을 먹었다기 보다는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진 레아. 그 모습에 이세훈이 잠시 고민하다가 챙겨왔던 아공간 포켓을 내밀었다.
“자. 열어봐.”
“그게 뭔데?”
“보면 아니까 빨리 열어봐.”
이세훈의 재촉에 레아가 의아해하면서도 아공간 포켓을 건네받았고, 그대로 안에 들어있는 물건들을 탁자 위에 꺼냈다.
촤르르륵
안에 정리됐던 그대로 탁자 위에 놓이는 부품들.
원형을 알아볼 수 없는 그 다양한 부품들에 레아가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무언가 알아보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거…….”
“이번에 봤었던 싱글넘버들의 부품이야.”
이세훈의 설명에 레아가 탁자에 놓인 싱글넘버의 부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겉보기에는 고철덩어리로 밖에 보이지 않는 부품들. 하지만 숙련된 장인에게는 그 ‘흔적’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어지는 것들이 꽤 있네.”
“그렇지. 아마 기술 몇 개는 건져낼 수 있을 거야.”
싱글넘버를 제작하는 데 쓰인 인챈트의 흔적.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지만 잘 맞추기만 하면 인형사의 기술에 대해서 알아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냥 녹여서 재활용해도 되지만 그전에 일단 최대한 뽑아내면 좋을 것 같은데 어때. 할 수 있겠어?”
“으음…….”
이세훈의 물음에 레아가 눈매를 찌푸렸다.
‘훼손된 부품이 많아서 까다롭긴 하지만…… 할머니한테 받은 자료들을 참고한다면…….’
인형사, 레이나 클로델이 본가에 남겨둔 생명인챈트의 연구 자료.
지금과 비교하면 수준이 많이 떨어지겠지만 기본 뼈대만 알아내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어느 정도는 될 것 같아.”
“좋아. 그럼 남은 방학 동안은 이쪽 연구에만 집중해. 필요한 연구비 있으면 내가 다 지원해 줄게.”
“진짜로?”
“그래. 대신 여기에만 집중해. 시간이 그렇게 여유롭지는 않을 테니까.”
사실 따로 급한 일은 없지만 이렇게 기한을 빡빡하게 잡으면 일하느라 바빠서 딴 생각도 안하게 될 터.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보면 이전에 슬럼프를 해결했을 때처럼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문제는 이것도 임시방편이라는 건데…….’
어떻게 해야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할까. 이세훈이 잠시 고민하던 그때.
“으음…… 그럼 잠깐만.”
무언가 고민하던 레아가 큼지막한 설계도 한 장을 꺼내 이세훈에게 내밀었다.
“음? 이건 뭔데.”
“아까 보여주고 싶다고 했던 거야. 일단 그것부터 봐줄래?”
레아의 이야기에 이세훈은 곧장 설계도를 살펴보았다.
기본적인 뼈대는 레아의 아버지, 데인 클로델이 만들어낸 스피어지만 추가되거나 보안되는 기능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딱 봐도 하루 이틀 구상한 게 아닌 설계도의 내용에 이세훈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조금 엉성하긴 하지만…… 구성은 나쁘지 않은데.’
스피어와 레아의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구성.
전투뿐만 아니라 다방면으로도 사용이 가능했고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것은 모든 능력이 인형사를 제압하는데 최적화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마냥 기죽은 건 아니었나.’
설계도를 꼼꼼히 살펴본 이세훈은 긴장하고 있는 레아를 바라보았다.
“앞에는 자신 없다는 듯이 말하더니…… 들고 온 물건은 의욕이 가득하네?”
“……실력 차이가 심하다는 건 이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조금, 아니 많이 놀라긴 했어도 새삼스레란 느낌이지.”
물론 자신도 사람이기에 약간 질리긴 했지만, 그 정도로 포기할 정도면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 제어권을 강탈하면서 그 녀석이 무적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으니까. 그 약점을 철저하게 파고들어볼 생각이야.”
레아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다시금 설계도를 바라보다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이 기능이 전부 구현되려면 사용자 기량도 중요할 텐데. 지금 상태로 쓰면 뇌가 곤죽이 되어버릴걸?”
“그것도 보완할 수 있게 노력할 거야. 물론 더럽게 힘들겠지만…….”
힘들어서 푸념은 할지언정 포기하지는 않는다. 이전보다 성장한 레아의 모습에 이세훈이 슬쩍 웃었다.
‘여태까지 굴린 보람이 있구만.’
자신이 레아를 너무 얕보고 있었음을 깨달은 이세훈이 설계도를 다시 돌려주었다.
“일단 구상 자체는 나쁘지 않아. 대신 이번에 인형사의 기술을 연구하고 나면 개선할 부분들이 많이 생길 테니까 그 다음에 본격적으로 만들어보자.”
“으음…… 확실히 그게 좋겠네.”
“그리고 앞으로 재료 말고도 영약이나 무구 중에 필요한 거 있으면 신경 쓰지 말고 사도 돼.”
이세훈의 이야기에 레아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재료는 그렇다 쳐도 영약이나 무구 같은 개인적인 물품까지 사도 된다니?
“그…… 진짜로?”
“진짜라니까.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그건 아닌데…….”
좀처럼 믿지 못하는 레아의 모습에 이세훈이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우린 같은 배를 탄 동료잖아. 나한테는 돈보다 네가 더 중요해.”
물론 투자 개념이기에 언젠가 쓴 만큼 다시 뽑아낼 생각이지만, 굳이 그걸 말해서 분위기를 깰 필요는 없다.
“…….”
이세훈의 이야기에 레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이내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뭐 해? 우냐?”
“아니…….”
눈매를 매만지던 레아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후배한테 반할 것 같아서. 감정 조절 중.”
“……참나.”
태연하게 개소리를 하는 레아의 모습에 이세훈이 어이없이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어찌 됐든 저렇게 개소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영약 먹거나 연구 중에 막히는 거 있으면 말해. 나도 도와줄 테니까.”
“흐음. 괜찮겠어? 후배면 꽤 바쁠 것 같은데.”
“나도 당분간은 널널해.”
마이어스 가문의 초대와 에리카와의 약속이 남아 있긴 하지만 양쪽 다 연락이 없으니 그때까지는 쉬면서 기다리는 편이 좋았다.
‘지금은 섣불리 움직여 봐야 된통 당하기 쉬우니까.’
회귀 전과 상황이 많이 달라진 만큼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얌전히 있다가 조심히 움직이는 것이 좋으리라.
“흐음…….”
그런 이세훈의 대답에 레아가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또 왜?”
“아니. 후배는 뭔가 일이 알아서 생길 것 같아서.”
“생겨도 어지간하면 무시할 거야. 나도 좀 쉬어야지.”
이제 남은 방학이라고 해봐야 3주 정도. 그동안 환락가의 토벌을 준비하느라 고생했으니 이 정도는 쉬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이세훈이 생각하던 찰나.
우우웅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 그에 이세훈이 화면을 보자 익숙한 이름이 떠 있었다.
[염성하]
‘이놈이 왜…….’
특별한 일도 없이 전화할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이세훈이 곧장 전화를 받았고.
-……사부님이 쓰러지셨다.
염성하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