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44화
‘……화났다?’
류은하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회귀 전과 다르게 감정표현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도 보통은 말보단 행동이었지.’
본의 아니게 납품을 세 달이나 미뤘더니 모루를 공 모양으로 구겨 버린 적도 있었고, 완성된 무구를 누가 훔쳐갔다는 사실에 아지트를 아예 증발시킨 적도 있었다.
이렇듯 행동에서 분노가 엿보이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화났다고 표현하는 것은 또 처음인 것이다.
‘류은하도 뭔가 바뀌고…….’
“이세훈 생도.”
류은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세훈의 생각을 끊었고, 다시금 눈을 마주본 채 이야기했다.
“지금 매우 화가 났다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못 들었나 싶어서 재차 이야기하는 류은하.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아 보이는 그 모습에 이세훈은 순식간에 최적의 행동을 떠올렸다.
“예? 갑자기 무슨…… 그보다 제가 왜 여기에 있는 거죠?”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이세훈. 그 모습에 류은하가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나시는 겁니까?”
“으음…… 그런 것 같아요. 뭔가 흐릿하다고 해야 하나…….”
이세훈이 눈매를 매만지며 얼굴을 찌푸렸고, 그 모습에 류은하가 말없이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사소한 것을 까먹었을 때는 변명이라고 의심받지만 이번처럼 큰일을 벌인 직후에는 100% 통할 수밖에 없다.
‘삼견이었으면 때려서 고친다고 했겠지만…… 류은하는 그렇게까지는 안 하겠지.’
완벽한 계획이라고 확신한 이세훈이 계속해서 표정을 관리했고 그 모습에 류은하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제가 알기론 인형사에게 협박받은 레아 클로델 생도를 돕기 위해 같이 환락가에 들어갔다가 몽환마에게 붙잡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일이…….”
“그리고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위르겐 님에게 도움을 요청하셨고, 그 결과 환락가가 파괴되고 몽환마가 토벌된 상태입니다.”
류은하의 설명에 이세훈이 겉으로 놀라는 척하면서 속으로 만족스럽게 웃었다.
‘사업하는 양반이다 보니 눈치는 있네.’
아무리 위르겐의 도움이 있었다지만 일개 생도가 십악, 그리고 마신이라는 초월적인 존재를 쓰러뜨린 것은 상식을 뛰어넘는 일.
만약에라도 이게 외부에 알려졌다가는 온갖 귀찮은 일들이 발생할 수 있었는데 위르겐이 눈치껏 자신이 한 일로 모두 처리해서 영향을 줄인 것이다.
‘공로는 처음부터 다 넘겨주는 조건이었으니 상관없고…… 전리품이나 뜯어가야겠구만.’
도중까지는 그렇다 쳐도 조율자와 싸울 때는 아무것도 못 했으니 양심이 있으면 전리품을 전부 양보할 것이다.
나중에 제대로 뜯어내겠다고 이세훈이 다짐하던 그때. 류은하가 담담히 물었다.
“기억나십니까?”
“으음…… 조금씩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혹시 뉴스도 좀 봐도 될까요?”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류은하가 탁상에 놓인 휴대폰을 건네주었고 그것을 받은 이세훈이 세계 각지에 일어난 일들을 살폈다.
[불명자 위르겐, 십악의 몽환마 토벌!]
[만마전의 최대 거점이었던 환락가의 붕괴. 마인범죄를 뿌리 뽑는 변곡점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영웅협회의 허점을 UD그룹이 직접 채우겠다.” 위르겐 회장, 언데드를 활용한 민간군사산업 발표.]
‘완전 신났구만.’
이때다 싶어 영웅협회를 공격하며 온갖 사업계획을 발표하는 위르겐. 조금 과격하긴 했지만 대중의 반응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늘어나는 마인 범죄와 각종 사고들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영웅협회.
환락가와 몽환마를 한 번에 없애 버린 완등자 위르겐.
지금 당장 사람들의 지지가 어느 쪽으로 향할지는 그야말로 뻔한 일이었다.
[환락가의 붕괴와 함께 생겨난 실종자들. 만마전과 결탁한 변절자들로 추정 중.]
[영웅협회 지부장. 실종자 중 협회와 관련된 이들에 관한 정보 은폐 시도.]
[영웅협회장 “영웅협회는 오직 인류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조직. 진상조사 후 관련자들을 모두 처리하겠다.”]
‘여긴 아주 난리가 났고.’
환락가의 붕괴에 휩쓸렸던 이들.
대부분 마인이나 범죄자들로 이뤄지긴 했지만 대외적인 신분을 가진 채 숨어서 활동하던 자들도 적잖게 존재했다.
그리고 그들이 이번 사건 때문에 무더기로 적발되면서 사회 전체에 엄청난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수로 따지면 길드나 기업 쪽 사람이 더 많은데 협회 쪽이 더 두드려 맞고 있네.’
실종자들에 관한 수사를 하고 있는 중인데도 일단 무능력하다고 두드려 맞고 있는 영웅협회. 조금 안쓰럽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힘이 없으니까 별 수 없지.’
영웅협회의 규모가 아무리 크다고 한들 완등자의 도움 없이는 십악과 만마전에 대항할 수 없었고, 그들을 강제로 동원할 수 있는 수단 역시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전 세계의 위험 지역을 관리하며 영웅들을 통솔하겠다고 하니 대놓고는 아니어도 ‘네가 무슨 자격으로?’ 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완등자가 한 명이라도 속해 있었으면 좀 달라졌을 것 같기도 한데…… 그 양반들이 이런 걸 하는 건 상상이 안 가는구만.’
회귀 전에도 그렇고 영웅협회가 이리저리 치이는 것은 숙명이 아닐까. 이세훈이 혀를 차면서 다른 뉴스들도 살펴보려던 그때.
“어떠십니까?”
이세훈을 바라보던 류은하가 다시금 물었다.
매우 화났다고 말한 게 거짓말인 것처럼 차분한 표정. 그 모습에 이세훈이 잠시 눈매를 찌푸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음…… 보다 보니까 조금씩 기억나는 것 같네요.”
“어디까지 기억나십니까?”
“몽환마에게 제압당하던 순간…….”
적당히 대답하려던 이세훈은 돌연 이상함을 느꼈다.
본래 류은하의 성격상 기억이 사라졌다고 하면 알겠다며 다음 용건으로 넘어가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계속해서 기억이 나냐고 물어보며, 심지어 어떤 기억인지 되물어보는가.
마치 ‘대조’하는 것 같은 그 물음에 이세훈이 류은하를 다시 바라보았다.
“…….”
입술을 꾹 다문 채 석상처럼 가만히 바라보는 류은하.
두 눈이 이글거리던 때보다 더 무서운 반응에 이세훈이 상황을 파악하고 물었다.
“누구한테 들으셨어요?”
“순례자님께 들었습니다. 이세훈 생도가 위르겐 님과 손을 잡고 몽환마 토벌 작전을 계획했다고 하시더군요.”
류은하의 대답에 이세훈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양반은 그걸 또 어디서 들어가지고…….’
루트비히는 굳이 그런 걸 이야기할 사람이 아니니 위르겐 아니면 하백연에게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상황이 아주 제대로 꼬였음을 느낀 이세훈은 류은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화나셨어요?”
“매우매우 화났습니다.”
괜히 거짓말로 둘러댔다가 분노만 한 단계 높아진 상황.
어떤 무구 풀코스를 대접해야 류은하의 화가 조금이라도 누그러들지 이세훈이 고민하던 그때.
“……이세훈 생도.”
류은하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제가 민폐를 끼치고 있는 겁니까?”
“……예?”
예상치 못한 질문에 이세훈이 놀란 표정으로 되묻자 류은하가 시선을 살짝 내린 채 이야기했다.
“그동안 제 나름대로 이세훈 생도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많이 생각했었습니다.”
세라핌 길드와의 스폰서 계약을 해지해 곁에 있는 시간을 늘리려고 했고,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거처를 알아보기도 했었다.
그 이외에도 자신이 할 수 있을 대책들을 셀 수 없을 정도로 생각해봤었지만 거기에는 매번 똑같은 문제점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 방법에 이세훈 생도의 의사는 없더군요.”
위험하니까 하지마라.
자신의 허락을 맡아라.
처음에는 학과장이자 영웅으로서 어린 유망주를 보호하는 것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했었지만, 당사자의 의견을 묵살해 버리면 감금과 다를 게 무엇인가.
“마음대로 안 된다고 무작정 화내기만 하고……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이세훈 생도의 입장에서는 숨기는 것이 당연했던 것 같습니다.”
“…….”
“뭘 말하든 자신의 기준으로 생각하며 무작정 가로막고 보는 사람에게 상담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자책하는 류은하.
목소리만 들으면 그냥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지만, 눈을 못 마주치거나 살짝 가라앉은 분위기가 상당히 의기소침해졌다는 것을 보여줬다.
‘많이 달라지긴 했네.’
회귀 전과 다르게 정말 풍부하게 느껴지는 류은하의 감정에 이세훈이 물끄러미 바라보다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니에요.”
“…….”
“학과장님도 충분히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냥 제가 겁이 많았던 겁니다.”
회귀 전처럼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다.
그것이 이세훈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었고, 어쩔 수 없이 그와 관련된 기억들이 마음속에 가시처럼 남아 있었다.
‘당신의 무구를 먹은 게 후회되는 군요…….’
회귀 전 류은하가 죽어가면서 자신에게 남겼던 말.
그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세훈은 그것이 자신을 책망하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제대로 된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멸광의 마신과 맞붙었고, 그 결과 류은하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희생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온 말이니 그 이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생각해 보니 나도 내 생각 밖에 안한 건가.’
류은하의 죽음이 두려워서 당사자가 느낄 감정은 생각하지도 않고 무작정 배제했었다니.
서로가 서로의 죽음을 두려워했다는 상황에 이세훈이 쓴웃음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학과장님.”
“……말씀하십시오.”
“저는 만마전과 만마의 늪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없앨 생각입니다. 그걸 위해서라면 이번보다 더 위험한 일도 할 거고요.”
류은하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고 그 모습에 이세훈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었다.
“제가 안전하길 바라는 학과장님의 뜻과는 정반대죠. 하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는 타협은 없습니다. 그게 통할 만한 상대들이 아니니까요.”
“…….”
“이러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사실상 답을 강제하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그런데도 이세훈은 숨김없이 자신의 목적을 이야기해 주었다.
아무리 류은하를 위해서라고 해도 지금처럼 독선적으로 행동한다면 언젠가 다른 이유로 후회하게 만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밀어내는 게 아니라 같이 끌고 가야지.’
회귀 전의 삼견과도 그랬듯이 류은하 역시 마찬가지다.
이세훈의 이야기에 류은하가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고,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세훈 생도가 위험해지는 것도, 그 뜻을 꺾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 고민에 류은하는 아주 간단하고 원만한 해결책을 찾아냈다.
“그러니 그전에 다 없애 버리겠습니다.”
이세훈이 위험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이 만마전과 만마의 늪 때문이라면, 그것들을 이 세상에 지워서 해결한다.
그 간단명료하면서도 류은하다운 대답에 이세훈이 슬쩍 웃었다.
“힘드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감수하겠습니다.”
만마전과 만마의 늪을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리는 게 감수한다고 될 일인가 싶겠지만, 이세훈은 굳이 말을 보태지 않았다.
‘거기서부턴 내가 할 일이지.’
회귀도 했는데 이 정도는 당연히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 생각하며 이세훈이 류은하에게 손을 뻗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서로 손을 맞잡고 악수를 나누는 두 사람.
인연레벨이 오르거나 인연석이 생겼다는 알림창은 없었지만, 이전보다 좀 더 사이가 깊어진 느낌이 들었다.
‘이 정도면 그래도 잘 넘겼네.’
앞으로는 류은하에게 편하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테니 그동안 골머리 앓고 있던 문제는 거의 다 풀렸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그렇게 이세훈이 안심하던 그때.
“개인적인 용무는 이걸로 끝난 것 같군요.”
손을 떼어낸 류은하가 담담히 이야기했다.
“그럼 지금부터는 순수하게 바벨의 학과장으로서 훈계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류은하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서로 잘 이야기해서 풀었던 게 아닌가.
뒤끝으로 밖에 안 보이는 류은하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그 감정을 살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적인 감정을 완전히 배제한, 오직 학과장으로서 무모한 행동을 한 생도를 바라보는 눈빛.
그 모습에 이세훈은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지금은 조금만 화났습니다.”
생도 신분이라는 게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 * *
성인 남성의 상체 정도 되는 작은 인형 무대.
그 위로 손가락 크기만 한 인형 7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고, 그중 조율자와 비슷하게 생긴 인형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성에서 이야기하다 인형놀이라니. 꼴이 말이 아니구만.”
“불만이면 네가 할래?”
무대 앞에 앉아서 인형들을 조정 중이던 인형사가 쏘아붙였고, 그 말에 조율자가 양손을 들었다.
“농담이야 농담. 뭐, 어쨌든 올 수 있는 녀석들은 다 모였으니까 상황정리부터 해보자고.”
조율자는 몸을 움직여 새하얀 신부복에 면사로 얼굴을 가린 인형, 배교자를 바라보았다.
“순례자와 싸우면서 특이사항은?”
“없어.”
무성의한 대답이었지만 조율자는 그러려니 하며 다음 인형을 바라보았다.
“그쪽은 어때. S급이랑 A급에 발목을 잡혔다며.”
몸 곳곳에 새하얀 가시와 꿰맨 자국이 있는 인형, 괴검이 조율자의 물음에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붉은 머리. 금발 머리. 둘 다 완등자에 가깝다.”
괴검의 무뚝뚝한 대답에 다른 이들이 흥미를 드러냈다.
순례자와 협력하여 괴검의 발목을 붙잡은 류은하와 아리아 마이어스.
평범하지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완등자에 가까울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웨폰 이터야 그렇다 쳐도 마이어스 가문의 장녀는 조금 의외인데…… 그럼 S급으로 봐야하나?”
“신체능력은 미달. 하지만 검은 위험하다.”
“좋아. 그럼 다음은…….”
천안은 원견사와 저격전을 펼친 것이 전부였고, 수왕 역시 바벨 앞에 머무르며 경계만 섰기에 별 다른 특이점은 없었다.
그렇게 두 차례가 지난 뒤. 얼굴이 검은 소용돌이로 이뤄진 인형, 도플갱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육체를 조정하느라 끼어들지 못했다. 그러니 이제 너희들이 말할 차례다.”
조율자와 인형사를 바라본 도플갱어가 담담히 물었다.
“몽환마와 마신은 어떻게 죽은 거지?”
사실상 이번 긴급소집의 원인. 다른 십악 역시 둘을 바라보았고, 인형사는 그 시선을 받으며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나는 몽환마한테 공격당해서 아는 게 없어.”
“……없다고?”
“그래. 정신 차리고 보니 다 끝나있었지.”
인형사의 대답에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조율자를 향했고, 그 시선에 기다렸다는 듯이 인형이 대답했다.
“몽환마가 조금 욕심을 부리긴 했어. 이세훈이라는 녀석을 독차지하려고 인형사를 공격했었거든.”
“그 녀석에게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겁니까?”
천안의 물음에 조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야 모르지. 그 뒤부터는 몽환성 내부에서 일이 벌어졌으니까. 다만 멸각의 마신이 각성한 걸 보면 그 녀석의 심상을 이용한 게 아닌가 싶네.”
“마신이 된 자가 다시 인간이 될 수 있어?”
“내가 어떻게 알아. 마신을 연구해 본 것도 아닌데.”
“……쓸모없기는.”
배교자의 까칠한 대답에 조율자가 한 귀로 흘려듣던 그때.
[남은 건 다섯.]
별 다른 이목구비 없이 검은색으로 물든 인형, 최초의 마인이자 십악의 수장인 ‘노야老爺’가 미동도 없이 자신의 의지를 퍼뜨렸다.
[사라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머리가 아니라 심장에서 솟구쳐 오르는 듯한 목소리.
인형을 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선명한 존재감에 모두가 눈매를 찌푸렸고, 노야가 이야기를 마저 이었다.
[그대들의 뜻대로 움직여라.]
툭
그 말을 끝으로 노야의 인형이 쓰러졌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남은 십악이 서로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결국 평소대로라는 뜻이군.”
“쯧. 시간낭비만 했네.”
“간다.”
도플갱어와 배교자, 괴검이 차례대로 사라졌고 다른 십악 역시 별 다른 말없이 떠났다.
무대 위에 널브러진 7개의 인형을 내려다보던 인형사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오합지졸이네.”
이런 상황에서 조차 따로 움직이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처음부터 그래왔었기 때문인지 그리 놀랍진 않았다.
‘심상이 완성된 자들이 모이면 이러는 수밖에 없지.’
다른 이들과 뜻을 함께하기보다는 오직 자신 밖에 생각하지 않는 존재들. 본래라면 완등자들도 이와 비슷했기에 별 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아마 이세훈 그 녀석 때문이겠지.’
십악과 완등자를 도구로 사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뤄낸 맹랑한 놈. 그냥 우연히 겹친 게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눈앞의 광경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우우웅─
천구 위에서 선명하게 빛나는 푸른 유성우.
환락가의 인형에게 간섭하지 못하도록 천체마법을 뒤틀어버린 그 술식에 인형사의 눈이 가라앉았다.
‘몰래 숨어들어온 것도 모자라 이런 걸 남겨두다니…….’
이걸 보고도 그걸 우연으로 여긴다면 그냥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 생각한 인형사가 계속해서 유성우를 바라보던 그때.
“이야…….”
어느새 나타난 조율자가 인형사의 뒤편에서 천체를 올려다보았다.
“꽤 재밌는 술식이네. 이거에 당한 거야?”
“그냥 용건만 말해. 그 이상은 들어주기 싫으니까.”
인형사의 까칠한 대답에 조율자가 피식 웃었다.
“평소라면 공격부터 했을 텐데. 편들어준 보람이 있는걸.”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너도 일부러 숨긴 거잖아.”
“뭐. 그렇지.”
시원스레 인정한 조율자가 마스크의 고글너머로 두 눈을 빛냈다.
“그런 재료는 다른 녀석들이랑 공유하기 아까우니까.”
재료, 이세훈에 대한 이야기에 인형사가 고개를 돌려 조율자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뭘 하고 싶은 건데?”
“원래 혼자서 준비할 생각이었는데 몸이랑 재료가 둘 다 이번 일로 박살이 나버려서 조금 빠듯해졌거든.”
조율자가 로브의 안쪽에 손을 집어넣었고, 잠시 후 한 물건을 꺼냈다. 얼어붙어 있는 보라색 조각.
그것이 몽환마의 심장 조각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인형사가 흥미를 드러내자 조율자가 의기양양하게 물었다.
“같이 합작해 보는 건 어때? 완등자도 죽이고, 이세훈 그 녀석도 나눠가지는 거지.”
“…….”
조율자의 제안에 인형사가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다.
‘저쪽이 힘을 합쳤다면…… 이쪽도 그러는 수밖에 없지.’
완등자도, 십악도 이세훈이라는 존재에 의해 힙을 합친다.
단 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변화에 인형사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