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39화
‘뭐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
전투가 시작되고 나서부터 단 한 번도 해소되지 않은 그 거대한 의문에 멸각이 자신에게 덤벼드는 두 명을 바라보았다.
“흐읍……!”
막 휘두른 팔을 가볍게 피해내고, 그 위를 내달리면서 망설임 없이 가슴을 향해 뛰어든다.
크기는 물론 내구도 역시 자신이 압도적인 상황.
하지만 사내는 창을 휘둘러 사방으로 불꽃을 흩뿌렸고, 마지막에 그것을 일점에 압축시켜 내질렀다.
콰아앙!!!
자신보다 몇 배는 거대한 거인에게 걷어차인 것처럼 몸이 뒤로 밀려나갔고, 가슴에서 시작된 상처가 전신으로 퍼져 나가며 육체를 붕괴시킨다.
창끝에서 발생한 두 속성의 공명. 그 절묘한 힘의 파동이 멸각의 마력을 폭주시키며 온몸을 파괴하는 것이다.
───!!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퍼져 나간 상처. 재생해 봐야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멸각은 이번 전투를 바탕으로 새로운 육체를 만들어내려 했다.
“또 도망치십니까.”
콰과강!
하지만 그보다 먼저 빙견이 만들어낸 거대한 얼음동상이 수십 개의 팔로 멸각의 몸을 꿰뚫었고, 그 끝에서 퍼져 나온 한기가 순식간에 전신을 뒤덮었다.
육체의 재생을 막는 것을 넘어서 정신 그 자체를 동결시키는 얼음. 서서히 느려지는 사고 속에서 멸각은 더더욱 의문을 느꼈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녀석들이…….’
분명히 자신의 심상 속에서 비롯된 존재인데 아무리 살펴봐도 짐작 가는 것들이 없었다.
그나마 의심되는 것은 이세훈과 함께 들어왔던 세 사람. 하지만 A급에 간신히 걸치던 셋과 저들을 비교하기에는 그 격차가 너무나도 심했다.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내야 한다.’
이 의문을 해소하지 않으면 녀석들을, 이세훈이라는 악성을 자신의 안에서 제거할 수 없다.
선택의 기로 앞에서 멸각은 잠시 동안 저항을 포기하고 해답을 찾기 위해 새로운 꿈을 반복했다.
촤라락─
수많은 꿈이 일순간에 반복되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나’가 현실로 우화하지 못한 채 죽어나간다.
그리고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 속에서 해답을 찾아낸 멸각이 그 꿈을 현실로 끄집어냈다.
파카앙!
얼어붙었던 육체가 산산조각 나며 무너져 내렸고, 그 가운데에서 본래의 몸으로 나타난 멸각이 오른손에 쥐어진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검붉은색을 띤 작은 결정.
자신의 몸 안에 숨겨져 있던 이세훈의 ‘피’를 본 멸각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런 걸로 내 힘을 훔쳐 썼을 줄이야…….”
본래라면 이세훈이 몽환마의 눈을 사용하더라도 이 공간에서 삼견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무리 이세훈의 기억이 완벽할지라도 이 공간의 주인, 멸각이 그에 대해서 모른다면 불완전해지기 때문이다.
‘그걸 이 피를 사용해서 잠시나마 인식을 비틀어낸 거군.’
잠에서 깨어나면 기억나지 않는 꿈의 잔재처럼 자신의 안에 숨겨둔 피로 알고 있는 것처럼 힘을 속인다.
이 모든 것이 한줌의 피로 이뤄졌다는 사실에 멸각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저 녀석은 도대체 뭐지?’
다른 이들은 통째로 잡아먹혀도 자신의 본질을 유지하지 못하는데 이 피는 어떻게 된 것이기에 여태 변질되지 않고 유지되었단 말인가.
‘소량의 피로도 이 정도인데 녀석을 통째로 흡수한다면…….’
그때는 지금처럼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재현해내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심상 그 자체를 무너뜨리지 않을까.
자신에게 이세훈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멸각이 다시금 깨닫고 있을 때. 문득 공격이 멈춘 것을 깨닫고 앞을 바라보았다.
“네가 앞에서 버텨주고 저놈이 뒤에서 받쳐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할 수 있겠어?”
이세훈의 설명에 얼음동상 위에 올라탄 광견이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무구가 없어서 불편하군. 뭐 없나?”
“어…… 음…… 없는데?”
챙겨온 거야 많지만 이중에 광견의 힘을 버틸 만한 물건은 없다.
그 대답에 광견이 삐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쓸모없군.”
“쓸모없지.”
“쓸모없네요.”
“…….”
기다렸다는 듯이 같이 욕하는 폭견과 빙견. 그 모습에 이세훈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보던 그때.
“하하핫…….”
그 모습을 지켜보던 멸각이 메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영역이나 다름없는 이 안에서 저렇게 한가하게 대화를 나누다니. 아무런 위협도 느끼지 못하는 그 모습에 멸각이 텅 빈 눈으로 바라보았다.
“네놈들은 나를 정말 우습게 만드는구나.”
설마 이 힘을 가지고도 이런 취급을 받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자신에게 새로운 경험을 안겨주는 적을 바라보며 멸각이 미소를 지었다.
“원래는 너희들을 없애려고 했지만─”
푸욱!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광견이 던진 검붉은 창이 가슴에 꽂혔고 안쪽에서 흑염륜이 공명을 일으키며 폭발했다.
콰아아앙!
산산조각 나며 흩뿌려지는 육체. 하지만 이번에는 곧장 재생하는 대신 피바다 밑으로 스며들며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건 너무 아까운 것 같군.”
콰르르륵!
지평선까지 뻗어 있던 피바다, 멸각이 흡수한 영혼들이 한 점에 압축되었고 잠시 후 기존과 다른 육체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이세훈의 피, 결정의 구조를 참고해서 만들어낸 매끈한 몸.
수많은 영혼을 하나로 결합하는 데 성공한 멸각이 두 눈을 빛내며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을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내 안에서 영원토록 남겨주마.”
멸각이 가볍게 위쪽으로 손짓을 한 순간, 수면의 아래에서 거대한 빌딩이 솟구쳐 올라왔다.
콰가가강!
마치 거대한 나무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빌딩. 방금과는 비교도 안 될 규모로 펼쳐지는 현실개변 능력에 이세훈이 곧장 외쳤다.
“필요하면 백업할 테니 눈치껏 움직여!”
이세훈이 소리친 순간. 광견이 가장 먼저 빌딩의 외벽을 박차며 멸각을 향해 달려들었다.
사방에서 잔가지처럼 뻗어 나오는 빌딩들을 모조리 분쇄하며 달려오는 광견. 그 무시무시한 모습에 멸각이 앞으로 손을 뻗었다.
“우선 내 힘부터 돌려받겠다.”
파앙!
이세훈의 술수로 삼견에게 자연스레 공급되던 멸각의 힘이 끊어졌고, 그와 동시에 광견의 기세가 약해졌다.
여태까지 최상의 상태로 고정되어있던 체력과 마력이 평범한 이들처럼 소모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상태로도 빠져나올 수 있을지 궁금하군.”
멸각의 손이 자연스레 여덟 개로 분리되며 각기 다른 인을 맺었고, 그와 동시에 빌딩 곳곳에서 거대한 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키이잉!
광견의 고유스킬 ‘진원공명’을 방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주술. 앞선 전투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기둥들이 가장 위협적이던 기술을 차단했다.
쿵! 쿵!
이어서 사방으로 격벽이 둘러지고 수십 개의 봉인마법이 겹겹이 둘러싸여지며 광견이라는 괴물을 가둔다.
그 모습에 빙견이 재빠르게 기둥을 파괴하며 보조하려 했지만 그쪽 역시 이미 대처는 끝나있었다.
쿠구궁!
일대를 짓누르는 중력이 그동안 보이지 않던 얼음칼날들을 모조리 파괴했고, 빌딩 곳곳에 나타난 영웅과 마인들이 스스로 자신의 목을 잘라냈다.
생명을 바치는 대가로 펼쳐내는 금술.
이만한 강자들을 희생시키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인 방식이었지만, 그들을 끝없이 꿈속에서 현실로 강림시킬 수 있는 멸각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푸화아악
저주의 안개가 주변을 뒤덮고, 그 안쪽에서 한기를 내뿜는 마인들이 빙견을 향해 달려들어 발목을 붙잡는다.
방금까지의 일방적이던 공방이 거짓말처럼 단숨에 제압당하는 두 사람. 그 모습을 본 멸각은 압도적인 전능감을 느꼈다.
‘이건가…….’
그동안은 자신의 힘으로 흡수한 영혼들을 하나하나 학습시켜 사용했었지만, 지금은 그들 모두가 ‘나’가 되어 보다 긴밀한 연계를 펼친다.
자예드라는 빈약한 뼈대에 더해지는 수많은 영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롭게 피어나는 꿈들에 멸각이 저 멀리 있는 이세훈을 다시 보았다.
“너를 이용한다면…… 더욱 강한 존재를 만들어낼 수 있겠어.”
자신처럼 이세훈의 몸 안에 강제로 영혼들을 집어넣어 일체화시킨다.
그 한계치가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몽환마, 지금의 자신보다 강력한 존재가 되는 것은 확실하리라.
이세훈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멸각이 두 눈을 빛내며 곁에 남은 폭견을 처리하기 위해 손을 뻗었고.
진원공명盡源共鳴 파륜破輪
파아앙!!
광견을 가둔 봉인이 일격에 박살 났다.
“?!”
예상치 못한 상황에 멸각이 경악하던 그때. 전신이 피투성이인 광견이 단숨에 거리를 좁혀 너덜너덜해진 손을 꽉 움켜쥐며 휘둘렀다.
콰아아앙!!
현실개변으로 충격을 흘려냈음에도 불구하고 시야가 뒤흔들리는 일격. 그에 멸각이 재빠르게 자세를 다잡고 광견에게 반격했다.
멸각우화滅殼羽化 몽환망라夢幻網羅
꿈속에서 창조되었던 수많은 무술이 지금 이 순간 단 하나로 압축되어 재현된다.
존재하는 모든 변수에 대응할 수 있는 궁극의 무술. 그 기술이 멸각의 몸을 통해 펼쳐졌지만.
“얄팍하군.”
광견의 창이 그 흐름을 단숨에 끊어냈다.
콰가가강!
팔을 여섯 개로 늘려도, 세 개의 꼬리를 만들어내도, 육체를 세 배로 부풀려도 눈앞의 사내가 펼쳐내는 연격에 모조리 파훼당한다.
단 두 자루의 단창을 뚫지 못하는 자신의 무술.
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멸각이 경악했다.
‘아직도 부족하다는 건가……!’
믿을 수 없지만, 지금은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콰아앙!
멸각이 지면을 후려갈기자 공간 자체가 왜곡되고, 이어서 무섭게 달려들던 광견을 향해 수십 개의 빌딩이 사방에서 쏟아진다.
체력의 한계가 생긴 이상 그것을 공략한다면 충분히 싸울 수 있다. 그렇게 판단한 멸각이 더 많은 현실개변을 펼쳐내려던 그때.
빙결연금氷結鍊金 백호경白湖鏡
눈앞의 모든 것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수면 위로 솟구쳤던 빌딩부터 시작해 멸각이 현실로 강림시켰던 수많은 꿈들이 완전히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의 몸도 완전히 저 냉기에 휩쓸려 얼어버렸음을 깨달은 멸각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후우…….”
지면에 두 손을 짚은 채 새하얀 입김을 내뱉는 빙견. 그 모습을 본 멸각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히 완벽히 파악했을 텐데…….’
어째서 자신의 몸이 얼어붙는다 말인가.
그런 멸각의 의문 어린 시선을 알아차린 빙견이 바닥에서 손을 떼어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정도로 얼어붙다니. 정말 어설프시네요.”
자신이 타인에게 분석당할 수도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는 걸까. 빙견의 비아냥거림에 멸각이 분노하며 주변의 얼음을 모조리 없애려 했다.
쩌적!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더욱 깊이 파고드는 냉기. 자신의 저항을 간단히 꿰뚫는 빙견의 힘에 멸각이 무언가 깨닫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심상 그 자체를 얼린다고?’
육체나 정신을 넘어서 상대의 심상 그 자체를 지금 상태로 동결시켜 제어할 수 없게 만든다.
그 능력을 파악한 순간. 멸각은 영혼의 일부가 뜯겨져나가는 것을 각오하고 현실개변으로 펼쳤다.
파카앙!
허물을 벗어내듯 멸각의 몸이 하늘로 튕겨져 나왔고, 그대로 멈추지 않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저건 위험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저 공격만큼은 당해서는 안 된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멸각이 거리를 내주지 않기 위해 끝없이 위로 이동했다.
【Dimension Distortion】
그 순간 울려 퍼지는 탁한 목소리.
공간 전체에 뻗어나가는 그 강력한 의지에 무언가 바뀌었고, 멸각의 몸이 얼어붙은 빌딩으로 추락했다.
콰아앙!
꼴사납게 빌딩에 떨어져 내린 멸각은 방금 일어난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자신의 꿈이 저 여인의 언령에 저항하지 못하고 공간을 왜곡시킨단 말인가. 그 의문에 답을 알아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두 사냥개는 그럴 여유를 주지 않았다.
콰가가강!
광견의 창이 멸각의 육체를 깎아내고 빙견의 빙결연금이 그 파편을 얼려 일체화되었던 영혼을 분리시킨다.
그 혼란 속에서도 멸각은 끝없이 자신이 승리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기 위해 학습을 반복하고 새로운 전략을 꺼내들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어떤 무술을 펼쳐도 광견의 창술에 파훼당하고, 현실개변은 빙견의 빙결연금 앞에 얼어붙었으며, 그 이외의 모든 방법은 폭견의 언령에 차단당한다.
‘무언가…… 방법을…….’
자신의 성장을 압도하는 공세에 모든 방법이 빈틈없이 차단당했고, 끝없이 변화하던 멸각이 처음으로 정체되었다.
지금의 자신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 그것을 아무리 경험해 봐야 그 무엇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는 거지?’
힘 자체만 놓고 보면 분명히 자신이 압도적일 텐데, 어째서 그와 반대되는 양상이 펼쳐진단 말인가.
멸각은 수없이 패배를 겪으면서도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오랫동안 삼견과 함께 해온 이세훈은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냥 강한 거지.’
완등자처럼 무한에 가까운 힘을 지닌 것도, 마신처럼 절대적인 상성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파앙─!
누더기처럼 기워져 있는 기술을 공명으로 무너뜨리고.
쩌적!
심상의 구조를 파악하여 기술 자체를 동결시키며.
콰아앙!
대상의 힘을 동화시켜 압도적인 장악력으로 휘어잡는다.
범용성 높은 힘으로 상대의 빈틈을 적절하게 찌른다.
삼견은 그저 그런 당연하지만 어려운 것들을 마신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을 만큼 더럽게 강할 뿐이었다.
“크아아악!!!”
계속되는 공격에 멸각이 발작적으로 힘을 터뜨리며 두 사람을 밀어냈고, 깎여져 나간 힘을 보충하기 위해 영혼들을 다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폭견이 준비해둔 언령마법을 단숨에 펼쳤다.
【Disorder】
파앙─!
폭견의 언령이 빙견이 얼린 조각들을 후려쳤고, 얼음이 부서짐과 동시에 피바다로 녹아들어 멸각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윽…… 크윽……?!”
폭발적으로 부풀어 오르던 멸각의 몸이 불완전하게 뒤틀렸고, 그 변화를 뒤따르듯 사방에 피바다가 요동쳤다.
본래라면 자예드의 자아를 중심으로 일체화되었어야 할 영혼들이 폭견의 언령에 의해 서로 공격하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평상시라면 자신에게 현실개변을 펼쳐 어떻게든 억누를 수 있었을 문제.
콰아앙!
하지만 삼견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멸각을 압박했고, 영혼의 폭주가 들불처럼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비켜 쓰레기들아!!!
이번에야말로 내가!!!
내가 올라갈 거야!!
멸각의 몸에 수많은 균열이 생겨나고 그 안쪽에서 수많은 ‘나’가 기어올라 전신을 붙들고 늘어진다.
방금까지의 일체감과 전능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꿈들이 조각조각 분열되며 멸각의 힘이 약해졌다.
“이…… 머저리 새끼들이……!”
자신이 무너지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다는 것을 어째서 모른단 말인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는 육체에 멸각이 필사적으로 수복하려 했지만, 한 번 무너져 버린 심상은 되돌릴 수 없었다.
“아아아악!”
푸화악!
전신을 찢어발기며 솟구쳐 나온 ‘나’에 의해 멸각의 힘이 무너졌고 이어서 주변의 공간이 통째로 붕괴되기 시작했다.
현실에서 다시 꿈으로 흩어져가는 공간.
그 모습에 삼견이 빠져나갈 준비를 하던 그때.
“이대로…… 갈 수는 없지…….”
수면 아래에서 짙은 악의가 솟구쳐 올랐다.
멸각우화滅殼羽化 역천혈해逆天血海
쿠구궁!
지평선까지 뻗어 있던 피, 멸각이 흡수한 영혼들이 일제히 하늘 높이 솟구쳐 주변을 뒤덮는 거대한 감옥을 만들어냈다.
수십만 명의 영혼으로 깔아뭉개 함께 꿈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멸각의 마지막 발악에 광견이 곧장 기술을 펼치려다가 눈매를 찌푸렸다.
“안 되겠군.”
방금까지는 어중이떠중이에 불과했지만, 이것만큼은 마신이라고 자칭해도 부족함이 없는 힘이었다.
하늘을 뒤덮으며 점점 밀려오는 핏빛 해일. 그 모습에 광견이 비어 있는 손을 보고 있을 때.
후웅!
뒤통수를 노리며 날아온 무언가를 반사적으로 낚아챘다.
“이건…….”
자신이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두 자루의 창. 그것을 본 광견이 뒤쪽에 지친 표정으로 앉아있는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한 번밖에 못 버티니까…… 제대로 써……!”
매개체 없이 오직 자신의 기억과 피로만 만들어낸 무구.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만들고 있던 무구가 삼견에게 쥐어졌고, 세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솔직한 감상을 이야기했다.
“형편없군.”
“영 별로네.”
“제가 만든 것보다 조금 낫네요.”
신랄하기 그지없는 평가에 이세훈이 사납게 바라보자 삼견이 피식 웃었다.
“일단 줬으니까 마무리는 할까. 누가 할래?”
“저는 따로 하고 싶은 게 있으니 보조로 빠지겠습니다.”
“그럼 내가 하지.”
앞으로 나선 광견이 두 자루의 창에 자신의 전력을 끌어 모았고, 불꽃과 어둠이 창끝에 압축되기 시작했다.
우우웅!
아직 준비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공간을 뒤흔드는 힘. 거기에 반응하듯 핏빛바다가 다급히 몰아치던 그때.
앞으로 나온 빙견이 두 자루의 단검을 지면에 떨어뜨리며 두 눈을 은빛으로 빛냈다.
빙결연금氷結鍊金 영구동천永久冬天
세계를 뒤덮은 새하얀 겨울 하늘.
두 단검에서 뻗어 나오는 냉기가 세계 전체를 얼리는 데 성공했지만, 안쪽에서부터 무언가 끓어오르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무너져 내리는 영혼을 갈아넣으며 만들어내는 기술. 그 힘을 견디지 못해 핏빛바다 다시 쏟아지려던 찰나.
콰앙!
폭견이 얇은 스태프를 얼어붙은 지면에 박아넣어 고정시켰고, 마이크처럼 그 끝부분을 움켜잡았다.
【Set─】
스태프를 통해 증폭된 언령이 얼어붙은 세계 전체로 뻗어나가고 이내 저항할 수 없는 강제력을 형성시킨다.
그 압도적인 전능감 속에서 폭견이 두 눈을 빛내며 빙견의 기술을 보조하기 위한 언령을 만들어냈고.
【Freeze time】
눈앞의 모든 것이 멈춰 섰다.
요동치던 영혼, 무너져가는 심상,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폭견의 뜻에 따라 완전히 정지한다.
약 1초간 유지된 고요함.
그 직후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얼음이 무너지며 네 사람을 향해 영혼들이 쏟아졌지만.
“간다.”
그때는 이미 늦었다.
후웅!
모든 힘이 압축된 두 자루의 창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휘둘러지며 원을 그려냈다.
바깥에서 회전하는 검은 원과 안에서 회전하는 붉은 원. 극한까지 압축된 두 개의 속성마력이 서로 맞닿으며 온전한 하나의 원이 되었고.
염륜잔화창炎輪殘火槍 일륜염암日輪染暗
검게 물든 태양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수십만 명의 영혼으로 이뤄진 바다가 증발했고 멸각의 힘을 만들어냈던 ‘근원’마저 그 힘을 버티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아아──
모순 속에 쌓아 올려졌던 모든 것이 차례차례 꿈으로 흩어져 사라졌고, 그 끝에 남은 것은 깡마른 사내였다.
수십 년 동안 갇힌 것처럼 피골이 상접한 모습. 그 앞으로 다가간 빙견은 그대로 무릎을 꿇고 천천히 풍화되어가는 사내, 자예드를 내려다보았다.
“…….”
그 시선을 알아차린 자예드가 힘겹게 눈을 뜨며 올려다보았고, 입을 뻐끔거리기 시작했다.
한마디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 모습에 빙견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언젠가…… 다시 마주볼 수 있는 날이 올 거야.”
서걱─
빙견의 단검이 자예드의 가슴 속에서 녹아내린 무언가를 도려냈고, 그와 동시에 전신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온몸을 감싸는 포근함과 전신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탈력감. 그에 자예드가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눈을 감았고.
“잘 자. 형.”
멸각의 마신이 토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