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37화
초고층 빌딩을 방불케 하는 뱀의 뼈가 그림자 위로 솟구치고 어둠을 휘감은 늑대가 찢어진 입을 벌리며 울부짖는다.
주변을 불사르는 푸른 불꽃의 거인과 자신의 몸이 녹아내릴 정도로 지독한 독기를 내뿜는 검은 용.
그 이외에도 온갖 기상천외한 마수들이 그림자 밖으로 걸어 나왔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미르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건…… 설마…….”
존재 자체만으로 별을 좀먹는다고 판단하여 최우선적으로 토벌되었던 S급 마수들.
기록으로만 남아있던 ‘행성포식자’가 되살아나는 광경에 아미르가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나하나가 세계적인 재앙으로 손꼽혔던 괴물들. 그 모습만 해도 엄청난 위압감을 만들어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했다.
“뭐야. 또 살아났잖아.”
“죽어서도 쉬지를 못하는구만…….”
“월급이라도 받는 게 어디야. 저 새끼들은 고문에 강제노역인데.”
익숙하다는 듯이 걸어 나오는 영웅들과 온몸에 검은 말뚝이 박힌 채 울부짖는 마인들.
과거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고 이름조차 잊힌 망자들이 절대자의 부름에 따라서 명계의 밖으로 끝없이 나온다.
순식간에 오염된 대지를 가득 채워가는 그 모습에 염성하가 담담히 중얼거렸다.
“미쳤군…….”
일반적으로 사령술사의 군단은 장기전에 특화되었다는 인식이 강했지만, 위르겐이 불러낸 망자의 군단은 그런 상식을 완전히 부정했다.
지난 수십 년간 축적되어 온 죽음을 고스란히 자신의 힘으로 종속시킨 위르겐. 그 무시무시한 병력에 루이제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저게 사령술사라니…….”
과거 자신이 박살 냈던 게르윈과 비교하는 것이 실례일 정도로 압도적인 힘.
처음으로 보게 된 완등자의 ‘전력’에 세 사람이 완전히 질려 있던 그때.
[베냐민.]
위르겐의 부름에 창백한 인상의 사내, 베냐민이 경계에서 나와 고개를 숙였다.
[저 녀석들을 저기까지 호위해라.]
“알겠습니다.”
[탈 것은…… 이놈들이면 되겠군.]
우웅!
네 명의 근처에 경계가 열리자 해골마 슬레이프니르와 두 마리의 늑대, 스콜과 하티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릉─
각각 붉은 구슬과 하얀 구슬을 물고 있는 스콜과 하티. 몸에서 흘러나오는 열기와 냉기를 살핀 이세훈은 잘됐다는 듯이 염성하와 아미르를 바라보았다.
“너희 둘은 저거 타면 되겠네. 루이제 넌 이리와.”
“어? 어어.”
얼 타는 루이제와 함께 슬레이프니르에 올라탄 이세훈은 늑대 위에 어색하게 올라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뭔가를 정해도 꼬이기만 할 테니까 딱 한 가지만 명심해.”
멸각의 군세 사이사이에 뒤섞여 있는 붉은 나비를 바라본 이세훈이 담담히 이야기했다.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 나비에는 닿지 말 것. 그것만 지키면 나머지는 위르겐 님이 알아서 해주실 거야. 그리고…….”
세 사람을 바라본 이세훈이 짧게 덧붙였다.
“도와줘서 고맙다. 끝나면 밥 사줄게.”
진심이 담긴 이세훈의 감사인사에 세 사람이 의외라는 듯이 바라보다가 짧게 대답했다.
“이걸 밥으로 넘기려고 하네. 나도 무구 내놔 새꺄.”
“밥은 밥이고 보상은 보상이다.”
“제가 좋은 곳으로 예약해두겠습니다.”
괘씸하기 그지없는 대답들.
하지만 그럴 거라고 예상했기에 이세훈이 씩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럼 가자.”
네 사람이 전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멸각의 군세와 망자의 군단이 더욱더 속도를 높이며 서로를 향해 달려든다.
그리고 선두에 선 거대한 괴물들이 서로 격돌한 순간.
콰아앙──!
대륙이 무너질 듯한 굉음과 함께 전쟁이 시작되었다.
콰르르륵!
북대서양을 장악했던 거대한 뱀 ‘요르문간드’가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체를 채찍처럼 휘둘렀고, 정면에 있던 평야가 통째로 갈리며 적들이 쓸려나갔다.
그에 대항하듯 멸각의 군세에 있던 거대한 괴수들이 일제히 달려들었지만 그들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콰가각!
촘촘하게 돋아난 요르문간드의 갈비뼈들이 족쇄처럼 괴수들을 붙잡아 으깨 버렸고, 다른 망자들은 그 거대한 몸을 다리삼아 진형 깊숙이 침투했다.
───!
생전에 S급 영웅 세 명을 먹어치웠던 늑대 ‘펜리르’가 어둠으로 이뤄진 육체를 날카롭게 만들어 지휘관들만 노리자 몸이 단단한 마인들이 동시에 덤벼들었다.
전신이 암석이나 비늘로 뒤덮인 마인들. 그 모습에 펜리르는 자리를 피하는 대신 자신의 입을 힘껏 벌렸다
쩌어억!
복부까지 갈라지는 거대한 입.
생전에 자신의 목숨을 앗아간 상처가 하나의 특성으로 재현되었고, 그대로 달려들던 마인들과 주변의 모든 것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우와…….”
후방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루이제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일랜드를 통째로 불태웠던 거인 ‘수르트’가 불꽃으로 이뤄진 육체를 사방으로 퍼뜨리며 적들을 불살랐고, 전 세계에 역병을 퍼뜨렸던 용 ‘니드호그’가 하늘을 날아올라 녹아내린 살점을 흩뿌리며 독기를 퍼뜨린다.
둘 다 적아를 구분하지 못하는 힘이었기에 본래라면 아군도 피해를 입어야 했지만, 망자들로 이뤄진 위르겐의 군단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었다.
화르륵! 치이익!
불꽃에 타올라도, 독기에 녹아내려도 명계의 어둠에 의해 수복되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움직인다.
본래라면 절대로 맞물릴 수 없는 개성들이 불사라는 압도적인 개성 앞에 강제로 맞춰지며 강력한 군단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강한데 도대체 뭐가 불리하다는 거지?’
멸각의 군세를 종잇장처럼 찢어발기는 망자의 군단.
별 탈 없이 길을 뚫는 것은 물론이고 이대로 몽환마와 멸각이란 괴물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후방지원을 맡으라고 한 것일까.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상황에 루이제가 의아해하던 그때. 이세훈이 담담히 이야기했다.
“역시 안 줄어드네.”
“……뭐?”
“자세히 봐봐.”
이세훈의 이야기에 루이제가 다시금 전장을 바라보았고, 이내 이상한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림잡아도 수십 킬로미터를 달리며 멸각의 군세를 학살했는데 어째서인지 그 수가 전혀 줄어들지 않은 것이다
그 비정상적인 상황에 루이제가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자 금방 그 이유가 눈에 들어왔다.
쩌적!
전장에서 환락가의 주민들이 죽을 때마다 붉은 나비들이 고치로 변했고, 그 껍질이 갈라지며 다시 현실로 강림한다.
끝없이 반복되는 꿈. 거기까지라면 위르겐의 군단과 큰 차이점이 없었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콰아앙!!
거대한 슬라임처럼 변한 괴물들이 요른문간드의 몸에 달라붙어 움직임을 방해했고, 지휘관들은 펜리르의 속도에 대응하거나 피해를 분산시키는 기술을 사용했다.
그 이외에도 수르트의 불꽃에 저항력을 지니거나 니드호그의 독기를 흡수하는 등 조금씩 저항하기 시작한 멸각의 군세에 아미르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학습하고 있는 건가…….”
위르겐의 군단은 이미 완성된 상태에서 불사가 더해진 것이지만, 멸각의 군세는 새로운 정보를 학습하여 실시간으로 발전해 나간다.
처음에는 사소했던 그 차이가 일방적으로 흘러가던 전황을 대등하게 만들어갔고, 진군 속도도 더욱더 느려졌다.
이대로 밀고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베냐민은 빠르게 전략을 수정했다.
“지금부터 돌파하겠습니다.”
베냐민의 지시가 내려진 순간. 후방에서 안전하게 움직이던 세 마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바닥을 박찼다.
콰아앙─!
주변의 적들을 도외시한 채 오로지 목적지, 멸각의 마신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한 이세훈 일행.
무작정 달리기만 한다면 적들에게 둘러싸여 위험해질 수 있었지만 후방에 있던 위르겐이 상황을 파악하고 네 사람을 보조하기 시작했다.
투두두두!!
하늘을 뒤덮은 검은 안개에서 검은 기둥들이 쉴 새 없이 떨어져 내렸고, 붉은 꽃밭을 순식간에 그림자로 물들였다.
두 힘의 상성관계에 의해 결국에는 멸각의 꽃이 명계의 어둠을 집어삼키게 되지만 그것이 곧장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콰아앙!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망자들이 솟구쳐 올라와 강제로 길을 열어젖혔고, 그 틈 사이로 이세훈 일행이 비집고 들어갔다.
“흐읍!”
“하압!”
스콜의 불꽃을 염륜잔화창으로 휘감아서 펼쳐내는 염성하와 하티의 냉기로 빙결연금을 펼쳐 전방에 투척하는 아미르.
조금 어설프긴 하지만 그래도 S급 마수의 힘을 응용한 공격답게 상당한 위력. 거기에 이세훈과 루이제가 재빠르게 힘을 더했다.
화르륵! 쩌적!
이세훈의 언령각인이 염성하와 스콜의 불꽃을 조정하여 위력을 높였고, 루이제의 언령마법은 냉기를 강화해 적들을 산채로 얼렸다.
전장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지만 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동원해서 맞서 싸우는 네 사람.
그 필사적인 모습에 몽환마가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정말 저런 약해빠진 이들로 마신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무시할 수는 없었다.
완등자조차 어찌하지 못한 자신의 환락가와 몽환성을 무너뜨린 인물. 그 뛰어난 영웅을 향해 몽환마가 존중을 담아 손을 뻗었고.
촤라락!
붉은 나비들이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막아라!”
그 모습에 베냐민을 비롯한 망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각자 공격을 퍼부으며 달려드는 나비들을 막아내려 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멸각의 힘 앞에 모든 공격이 녹아내리듯이 무너졌고 나비들이 한 마리씩 망자들에게 달라붙었다.
파스스슥─
먼지가 되어 흩날리는 망자들.
경계의 권능조차 무효화시키는 멸각의 힘에 망자들이 불사를 잃어버리고 영원한 죽음을 맞이한다.
“야! 이거 맞아?!”
“…….”
점점 다가오는 나비들에 루이제가 다급히 소리쳤고, 이세훈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베냐민마저 죽으며 네 사람을 향해 나비들이 쏟아지려던 바로 그 순간.
스르륵─
하늘에서 내려다보던 망자의 눈 하나가 천천히 감겼다.
“……?”
일순간 어둠으로 물든 세계.
실수로 눈을 감았었나 싶었지만, 언제 사라졌었냐는 듯이 부활해 있는 망자들이 무언가 일어났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손바닥 뒤집듯이 변한 전장의 풍경. 그 상황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다시 부활한 망자의 군단이었다.
콰과가각!
하늘에서 쏟아지는 위르겐의 사령마법과 몸을 던져가며 나비들을 막아내는 망자들.
하지만 상대의 공세도 거세졌기에 나비에 몸이 닿을 뻔한 상황들이 늘어났는데 세 사람은 거기에 위축되는 대신 이세훈의 조언을 떠올리며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푸화악!
나비에 닿기 전에 그 부위를 잘라낸다. 그로 인해 전투불능이 될 정도로 상처가 깊어지기도 했었지만, 그 부분은 문제가 없었다.
스르륵─
망자의 눈이 감기며 세계가 암전될 때마다 상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되살아난 망자들이 주변을 둘러싸며 네 사람을 보호했다.
몇 번이고 죽음을 반복하며 길을 열어가는 망자의 군단. 기어코 자신의 지척까지 접근해 온 그 모습에 몽환마가 눈매를 찌푸리며 힘을 끌어 모으던 그때.
“지금!”
루이제의 왼손약지에 끼워진 금색반지, 승천제의 반지가 황금빛으로 번쩍였다.
【Teleportation】
수십 킬로미터의 거리가 승천제의 권능에 의해 한 점으로 압축되었고, 네 사람의 몸이 꽃봉오리 바로 위로 이동되었다.
마지막까지 아끼고 아껴서 만들어낸 회심의 한수.
“무르네요.”
촤라락!
하지만 몽환마는 예상했다는 듯이 멸각의 주변에 펼쳐진 꽃들을 나비로 만들었고, 네 사람을 삼키기 위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기동력을 책임져주던 마수들과도 떨어진 상황. 남은 수가 없어 보이는 그 모습에 몽환마가 미소를 지었고.
“너야말로.”
스륵─
여백의 휘장을 두른 네 사람이 나비들을 통과해 멸각의 안으로 들어섰다.
“?!”
갑자기 들어온 이물질에 살짝 흔들거리는 꽃봉오리.
그 모습을 본 몽환마는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분명히 닿았는데 어째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인가.
그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몽환마가 깜짝 놀라면서도 멸각의 안에 들어간 이세훈 일행을 꺼내려던 그때.
[여유가 넘치는군.]
검은 창이 몽환마의 머리를 꿰뚫었다.
콰르륵!
눈 깜짝할 사이에 전신을 집어삼키는 명계의 어둠.
십악에게도 중상을 입힐 만큼 강력한 일격이었으나, 몽환마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새로운 고치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위르겐을 죽이기 전까지는 멸각 쪽에 손을 쓸 수 없다. 그것을 깨달은 몽환마가 멸각의 힘을 본격적으로 끌어올렸다.
쿠구궁!
붉은 나비들이 현실을 침식하고 형용할 수 없는 악몽들을 현실로 끌어낸다.
자신을 죽일 수 있다고 확신하는 듯한 몽환마의 모습에 위르겐이 피식 웃으며 검은 안개로 만들어진 손을 까딱였다.
[덤벼라.]
* * *
솨아아─
귓가에 들리는 파도 소리.
그 익숙하면서도 지긋지긋한 소리에 이세훈이 눈을 떴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지평선 너머까지 뻗어 있는 붉은 바다. 검붉은 피로 이뤄진 망망대해를 바라보던 이세훈은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검은 하늘과 붉은 피뿐. 그 삭막한 세계에서 이세훈이 계속 누군가를 찾던 그때.
“죽었다.”
뒤쪽에서 무심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리자 방금까지 없었던 멸각이 시체들이 쌓여 만들어진 산 위에 걸터앉아 내려다보았다.
“너와 함께 들어온 직후, 세 사람 모두 나의 심상을 견디지 못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말았지.”
“…….”
“지금쯤 이 밑에 섞여 있을 거다.”
아래에 펼쳐진 피바다.
멸각에게 집어삼켜진 인간들의 영혼을 바라보던 이세훈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나는 왜 안 삼킨 거지?”
자신도 집어삼켜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놔둔 것일까. 이세훈의 물음에 멸각이 말없이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모르겠군.”
“뭐?”
“아무리 꿈을 반복한다 해도 존재하지 않는 질문에 답을 찾아낼 순 없지. 나에게 있어 너는 그런 존재다.”
멸각이 반복해 온 꿈 중에 S급이나 십악의 수준에 도달한 경우는 수없이 많았지만 그중에 완등자나 다른 마신이 된 적은 없었다.
완등자는 힘의 근원이 대척점에 있었기에 이해하더라도 재현할 수 없었고, 마신은 ‘멸각’이라는 결말이 정해지면서 새롭게 깨닫는 것이 불가능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완등자와 마신은 도달할 수 없어도 이유는 알 수 있었지만, 눈앞의 이세훈은 달랐다.
‘아무리 봐도 이해할 수 없어.’
자신과 다른 무언가가 뒤섞여 있는 것처럼, 아무리 비슷하게 재현해 보려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뒤틀리게 된다.
그 수많은 꿈을 떠올린 멸각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무엇보다 도저히 장담할 수가 없겠더군.”
“장담?”
“그래.”
이세훈을 바라본 멸각이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네놈과 뒤섞였을 때 ‘나’를 유지하리라는 장담 말이야.”
재능이 뛰어난 이를 받아들일수록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굳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그렇기에 멸각은 이세훈을 자신의 몸속에 녹여내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처리하기로 했다.
“썩 내키지는 않지만…… 네놈은 이상적인 꿈속에서 영원토록 잠들게 해주마.”
우우웅!
수면 위로 핏물이 솟구치며 이세훈의 몸을 조금씩 둘러싸기 시작했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잠기운이 몰려왔다.
저항하려고 해도 힘이 빠져서 움직일 수 없었고 어느새 핏물이 고치처럼 전신을 둘러쌌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거다. 네가 바라던 세상이 그곳에 있을 테니.”
점점 멀어져가는 멸각의 목소리. 그리고 이세훈의 의식이 꿈속으로 빠져들려던 순간.
푸욱!
고치의 안쪽에서 보랏빛의 칼날이 빠져나왔다.
촤악!
몽환규도에 의해 고치가 반으로 갈라지며 허물어졌고, 아무렇지 않게 꿈속에서 벗어난 이세훈의 모습에 멸각이 두 눈을 찌푸렸다.
“나의 꿈도 믿지 못하는 건가.”
모든 것이 꿈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매일같이 그것이 현실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나열하며 자기 자신을 속인다.
그 강박적인 버릇 때문에 어중간한 꿈으로는 이세훈을 가두는 것이 불가능했고 그것은 현실이나 다름없는 멸각의 꿈 역시 마찬가지였다.
“번거로운 녀석이군.”
“그러게 말이야.”
태연하게 대답하는 이세훈의 모습에 멸각이 다시 한번 힘을 끌어올렸다.
쿠구궁!
잠재우는 것도 불가능하다면, 남은 것은 자아가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죽이는 수밖에 없다.
결정을 내린 멸각이 꿈을 투영해내려던 그 순간.
푸욱!
이세훈이 몽환규도의 칼날을 수면 아래로 찔러 넣었다.
“……뭐하는 거지?”
“너만 불러내는 건 치사하잖아. 그러니까 나도 한번 불러내 보려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이세훈의 모습에 멸각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수십만 명을 흡수하여 셀 수 없을 정도로 꿈을 반복하고 있는 자신에게 꿈으로 대항하겠다니.
‘몽환마의 눈을 응용해서 흉내 낼 생각인가…… 어처구니없는 녀석이군.’
우습지만, 그렇다고 피할 필요는 없었다. 저항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버팀목이 사라져 자아의 붕괴도 앞당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뭘 부를 생각이지? 완등자? 아니면 십악?”
아무리 꿈이라 할지라도 상대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허점투성이인 광대가 나올 뿐이다.
“아니.”
그런 멸각의 비웃음에 이세훈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개놈들.”
콰아아앙!!!
거대한 폭탄이 터진 것처럼 피바다가 폭발을 일으켰고, 잔잔하던 수면에 물기둥이 솟구치며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뒤흔들렸다.
“무슨……?!”
자신의 심상 안에서 빠져나온 정체불명의 적.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대를 보기 위해 멸각이 물보라 너머로 보이는 세 개의 그림자를 바라보았고.
“저승에도 마인이 있었군.”
“하필 와도 이런 새끼들이랑…… 에휴.”
“그러게 형님 먼저 죽이셨어야죠.”
회귀 전 이세훈과 마지막까지 함께 싸웠던 백전노장의 마신살해자, 삼견이 시간을 거슬러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