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36화
“…….”
“…….”
“…….”
명계에 흐르는 무거운 침묵.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무언의 대화를 나눴고, 이내 루이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이해가 안 가는 게 있는데.”
“뭔데?”
“십악보다 강력한 괴물이면 우리가 아니라 완등자가 상대해야 하는 거 아니야?”
S급도 안 되는 자신들이 그런 괴물을 상대로 어떻게 싸운단 말인가.
지극히 정론인 루이제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이라면 그렇지. 하지만 이번에 싸울 상대는 위르겐 님이랑 상성이 안 좋거든.”
“……그래서?”
“그래서 위르겐 님한테는 후방지원을 부탁하고 우리들이 대신 싸우는 거지.”
상성이 불리한 사람을 내세우는 것보다 자신들이 나서는 게 낫지 않겠는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이세훈의 모습에 루이제가 눈매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미친놈…….”
어떻게 저런 나사 빠진 소리를 태연하게 한단 말인가.
하지만 루이제가 진짜 어이없게 느껴지는 것은 저런 이야기를 듣고도 동요하지 않는 자기 자신이었다.
이세훈이 기어코 미쳤다는 생각이 들기보단 저렇게까지 당당하게 말하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부터 드는 것이다.
‘미친 짓을 한두 번 했어야지…….’
저 녀석이 저렇게까지 말하는 거라면 뭔가 확실한 방법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루이제가 떨떠름해하면서도 납득하고 있던 그때.
“계획은 있나?”
상황을 지켜보던 염성하가 입을 열었다.
“있어.”
“그럼 그것부터 설명해라. 듣고 판단하지.”
바로 거절하는 것도 아니고 듣고 판단하겠다.
이 역시 어느 정도 신뢰가 있었기에 나오는 행동이었지만, 이세훈은 거기에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안 돼.”
“……뭐?”
“심상을 응용하는 계획이라 너희들한테 설명하는 것만으로 영향이 생길 수 있어. 그러니까 지금은 믿고 따라와줘.”
이세훈의 대답에 염성하의 눈매가 찌푸려졌고, 다른 두 사람 역시 표정이 굳어졌다.
목숨이 걸려 있는 전장에서 무작정 자신을 믿고 따라와 달라니.
아무리 서로간의 신뢰가 있다고는 해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우우웅─
거기에 상대는 완등자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괴물.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다시 한 번 찾아온 무거운 침묵에 이세훈이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너무 일렀나.’
위르겐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 멸각의 마신과 몽환마를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최선의 수.
그것을 위해서는 미숙하더라도 삼견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아직까지 이런 싸움에 불러들일 만큼의 관계는 쌓지 못했던 모양이다.
‘뭐,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이렇게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긴 하지.’
그동안 이런저런 사건들이 많긴 했지만 결국에는 만난 지 1년도 안 되는 사이 아닌가. 그런데 무턱대고 목숨을 맡겨달라고 하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으리라.
‘회귀 전이랑 똑같이 생각하면 안 되는 데 말이야…….’
비슷하더라도, 결국은 다른 사람이다. 그 사실을 다시금 깨달은 이세훈이 계획을 변경하려던 찰나.
“……하나만 물어보자.”
루이제가 이세훈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빠지면 어떻게 할 거야?”
다른 차선책이 있는가.
루이제의 물음에 이세훈이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뭐, 혼자서 돌진하겠지.”
위르겐의 힘으로는 결착을 내기가 힘들기 때문에 어찌됐든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하아아아…….”
이세훈의 대답에 루이제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고, 이내 체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할게.”
“……진짜로?”
아무리 봐도 내키지 않아 보이는 모습에 이세훈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루이제가 눈매를 찌푸렸다.
“너 혼자 돌격했다가 죽으면 안 도와준 내 잘못 같잖아. 하여간 약아빠져가지고…….”
“아니. 뭐, 그런 걸 신경 쓸 필요는…….”
“됐고, 그래서 너희 둘은 어쩔 건데?”
루이제의 물음에 두 사람이 잠시 고민하더니 아미르가 먼저 대답했다.
“저도 하겠습니다.”
“정말로 할 수 있겠어?”
아미르의 대답에 이세훈이 확인 차 다시 물었다.
멸각의 발목을 붙잡으며 자신들을 도왔던 자예드.
얼핏 보기에는 마신이 되어서도 자아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그런 희망찬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냥 기억을 혼동한 것에 가깝지.’
멸각은 자예드의 꿈으로부터 비롯된 존재.
그렇기에 기억도 온전히 물려받았는데 그게 불완전한 상태에서 부상을 입은 아미르를 보고 잠깐 흔들린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만약 멸각을 자예드와 동일시하고 있다면 전투에 지장이 생기는 것은 물론 큰 상처로 남을 수도 있다.
“……해야죠.”
그런 이세훈의 뜻을 이해한 아미르가 담담히 대답했다.
“그래야 형도 쉴 수 있을 테니까요.”
자예드의 기억을, 꿈을 더 이상 이용당하도록 놔둘 수 없다.
그 각오를 본 이세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싫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거절하는 염성하. 그 단호하기 그지없는 대답에 루이제와 아미르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당연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다음에 승낙할 줄 알았는데 저렇게 단칼에 거절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계획도 모르는 일에 끼어들고 싶진 않군.”
“눈치 없는 새끼…….”
“쯧…….”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앞서 승낙한 두 사람이 불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러든 말든 염성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고, 그 모습에 이세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잘 풀리면 엄청 성장할 수 있는데도? 아마 1년 안에 S급까지 파바박하고 성장할 걸?”
“…….”
“오케이. 알았어. 잘 끝나면 새로운 창 만들어줄게. 한 개는 무조건 전설 등급 이상으로.”
“……흐음.”
팔짱을 낀 채 눈썹만 까딱이는 염성하. 그 모습에 이세훈은 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끼며 심호흡했다.
‘진정하자…… 진정…….’
어쨌든 지금은 자신이 부탁하는 입장이 아닌가.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이세훈은 염성하를 바라보며 최대한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눈썹 다 뽑아버리기 전에 필요한 거 있으면 말로 해라. 계속 지랄하지 말고.”
이세훈의 이야기에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염성하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어쩔 수 없군. 이번에는 그 정도로 양보해 주지.”
“…….”
선심 썼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염성하의 모습에 이세훈이 망치를 꺼낼지 말지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때.
[다 끝났으면 슬슬 가지.]
명계에 나타난 위르겐의 명안이 담담히 이야기했다.
[놈들이 움직인다.]
* * *
콰드득!
오염된 대지 위로 뻗어나가는 붉은 꽃.
마기조차 물들여가는 그 압도적인 힘에 몽환마가 몽롱하게 바라보았다.
“아름다워…….”
꿈을 현실로, 현실을 꿈으로 만들어내는 멸각의 힘이 세계에 뿌리를 내리며 점차 바깥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아직은 그 규모가 대도시 하나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 대륙을 넘어 전 세계를 뒤덮게 되리라.
‘그리고 그때야말로…… 이 지긋지긋한 꿈에서 깨어나겠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순간에 몽환마가 미소를 지으며 아래에 있는 멸각을 바라보았다.
두근─!
거대한 꽃봉오리로 둘러싸인 멸각.
처음에는 불완전한 힘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선택한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세계를 침식하는데 이쪽이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이 상태가 되면 외부의 공격에 취약해지게 되지만, 그 부분은 자신이 대신 해결하면 되니 걱정할 필요는 없으리라.
“아직 30분 정도 남긴 했지만…… 피차 준비는 끝나겠죠.”
그렇지 않다고 해도 굳이 신경써줄 필요는 없다.
짓궂게 웃은 몽환마가 자신들을 둘러싼 경계, 그 너머에 있을 적을 바라보며 힘을 끌어올렸다.
“결착의 시간이에요.”
우웅!
몽환마의 오른쪽 눈이 붉은 빛으로 물든 순간. 주변에 흩날리던 꽃잎이 그녀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붉은 꽃잎들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소용돌이. 오염된 대지가 피워낸 꿈들이 거대한 고치가 되어 몽환마를 휘감는다.
그리고 그 안에 잠든 나비가 꿈에서 깨어난 순간.
멸각우화滅殼羽化 호접몽혼화胡蝶夢魂華
껍질이 갈라지며 ‘멸망’이 흘러나왔다.
촤라락!
흩날리는 꽃잎들이 붉은 나비로 변해 사방으로 날아올랐고, 그 몸이 찢어지며 수많은 꿈이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수백 미터에 아우르는 거대한 괴물부터 시작해 강력한 영웅들까지.
앞서 집어삼켜졌던 환락가의 주민들이 꿈에서 벗어나 현실로 강림하기 시작한 것이다.
쿠웅! 쿵!
천천히 경계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한 군세. 그 모습을 바라본 몽환마가 등 뒤에 돋아난 붉은색 나비날개를 움직였다.
“거추장스러운 것부터 치워야겠네요.”
후웅!
몽환마가 가볍게 손을 휘저었고, 꽃잎들이 다시 나비가 되어 주변을 둘러싼 경계를 향해 날아들었다.
본래 몽환마의 힘으로 절대 무너뜨릴 수 없는 위르겐의 경계. 하지만 붉은 나비들이 닿는 순간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사르륵─
나비에 맞닿은 경계가 흐물흐물 녹아내렸고 잠시 후 통째로 무너지며 완벽히 붕괴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위르겐의 포위망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 멸각의 군세.
그리고 멀리 떨어진 공중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세 사람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거랑 싸운다고……?’
악몽이 현실로 튀어나온 것 같은 끔찍한 광경.
완등자의 힘을 아무렇지 않게 파훼하는 괴물을 본 루이제는 자신의 몸이 떨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정말로 될까?’
이세훈과 함께 가겠다고 마음먹긴 했지만, 저 광경을 보니 정말로 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밀려올라오는 두려움. 저것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현실에 절망감이 정신을 좀먹어간다.
그 모습에 세 사람이 이빨을 꽉 깨물거나 손에 쥔 무구를 꽉 움켜쥐며 정신을 다잡던 그때.
[꿈을 이용한 현실개변이라…… 흉흉한 기술이로군.]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두개골, 위르겐이 푸른 안광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근접한 상태에서 싸웠다면 위험했겠어. 네 판단이 옳았다.]
위르겐의 불사는 어디까지나 경계의 권능에 의해 유지되는 힘.
그런데 만약 저 붉은 나비, 멸각의 힘에 그것이 무너진다면 평범한 사람들처럼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힘의 격차를 무시하는 압도적인 상성.
직접 그 힘을 보게 된 위르겐은 멸각과 그 힘을 다루는 몽환마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다시금 알게 되었다.
“알아주셔서 다행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이 정확히 뭐지?]
위르겐의 물음에 이세훈이 멸각의 군세와 몽환마의 너머, 거대한 꽃봉오리를 가리켰다.
“저기까지 저희들을 데려다주시면 됩니다.”
이세훈의 이야기에 긴장하고 있던 세 사람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 군단과 맞서 싸우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데 자신들을 저기까지 호위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아무리 완등자라고 해도 힘들어 보이는 상황에 세 사람이 혼란스러워하던 그때.
[그것뿐인가.]
위르겐이 안광을 빛냈다.
[어렵지도 않군.]
담담히 이야기한 위르겐이 네 사람보다 더욱 높이 날았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군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경계의 권능을 사용해 명계의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우우웅!
두개골 아래로 흘러내리는 검은 안개.
처음에는 다가오는 군세에 비하면 초라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크기가 점점 배로 커지기 시작했다.
“우욱…….”
“이게…… 무슨…….”
S급, 그런 일반적인 영웅들과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
오염된 대지를 가득 채웠던 마기가 위르겐의 힘을 버티지 못해 밀려나갔고, 검은 안개가 거대한 폭포처럼 아래로 넘쳐흐르기 시작한다.
마치 위르겐을 통해 명계 전체가 이 세계로 넘어오는 듯한 비현실적인 광경.
끝이 보이지 않는 그 무한한 힘에 세 사람이 경악하던 그때.
[잘 봐둬라.]
위르겐이 나지막하게 이야기하며 검은 안개로 만들어진 손으로 수인을 맺었다.
무한윤회無限輪廻 개천명계안蓋天冥界眼
콰르르륵!
두개골의 아래로 쏟아져 나온 검은 안개들이 하늘을 뒤덮고, 이내 세계 전체를 휘감는다.
그리고 그 위에 나타나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망자의 눈.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그 무한한 눈에 멸각의 군세가 잠시 멈춰선 순간.
콰아앙!!!
그림자의 아래에서 망자들의 군단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